모닝 사루비아
“디즈.”
“…아, 알렉, 스?”
숙소에 다다르자 A의 눈빛이 변했다. 그대로 D를 벽에 밀어붙이고,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도톰한 입술이 D의 입을 가볍게 물고, 보드랗게 통통거리는 입술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D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살덩이가 들어왔다.
“음, 흡!?”
“하아, 음….”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결, 제법 여린 살은 아니었다. 키스가 익숙한, 탄력이 느껴지는…. 아니, 이런 것을 떠올리기에는 D에겐 너무 자극이 강했다. 자극, 일까. 당황일까.
‘아, 한 번쯤 헤집어 보고 싶었어….’
A는 D의 표정을 볼 여유도 없었다. 그는 바닷가에 데려온 내내, 이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손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잡고. 그렇지만 A의 손에서는 힘이 느껴졌다. 놓지 않으려고 잡고 있다는 것을, D도 알았을 것이다.
“자, 잠깐…요. 이런, 걸…”
“왜 그래요?”
“키, 키스 처음…”
“정말요? 그거 뭔가 기분 좋네요. 그럼…”
A는 거기서 멈추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D에게는 조금 두려웠다. 온 힘을 다해서 달려드는 사람을 보고 있으니, 잡아먹힌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A가….
“뒤로 돌아요.”
너무 급하게 진도를 빼려고 하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저, 키, 키스도 갑작스럽고…”
“아……”
“그, 그 이상은 도저히 무리…”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흥분해버려서.”
A는 그동안의 연애를 돌아봤다. 당연히 그거 하려고 숙소를 잡는 게 아니었나? 아니, 애초에… 연애란 게 그런 거 아니었나? 되돌아봐도 그간 지나쳐 간 연인들은 대부분 일주일 안에 진도를 빼곤 했었는데. D는 그런 타입의 인간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걸 모를 수는 없었다. 이건 분명히…, A의 실책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미워하게 된 건 아니죠?”
A는 불쌍한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서 꼬리를 내렸다. 시무룩한 낯으로 D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붉어진 얼굴은 화가 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좋았어서 그런 걸까. A는 D의 얼굴을 보며 가늠했다.
“그렇다면 전 정말 슬플 거에요. 이제야 당신과 조금씩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망칠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 시, 싫은 건 아니었어요.”
A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 어쩌지. 웃으면 안 되는데. 가능성이 보이니까 기대하게 되네. 아직은 반성하는 모습 보여야 하는데. 표정 관리가 안 되네. A는 고개를 돌려서 D에게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가렸다. 지금 그에게 이 얼굴을 보여줬다간 분명 실망하게 할 테니까. 반성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었다.
하지만 본심이 꿈틀거렸다.
“아…, 어떡하지. 미움받지 않을까 걱정되면서도, 다시 키스하고 싶어지는 건… 제가 너무 제멋대로인가요?”
D는 고개를 저었다. A는 D의 다정함에 안도했다. 하지만 자신이 급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제법 부끄러웠다. 연애 한 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물론 그간의 연애들은 가볍고 빠르긴 했으나, 느린 연애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방금 그건 A의 진심이 멋대로 튀어 나간 행동이었을 뿐.
“제 생각보다 당신이 좋아서, 제가… 앞서나간 거 같아요.”
“아….”
“저 미워하지 마세요.”
A는 용서를 구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 D의 손을 들어서 제 머리에 얹었다. 가볍게 복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부비면서 애걸복걸 못 하는 모양새로 말했다.
“D, 디즈. 앞으론 앞서나가지 않을게요.”
“이, 일어나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D는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당황의 연속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어쨌거나, 딱딱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은 보고 있을 수 없었으니까. 이 사람,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좋아할까. 기쁘지만, 불안하다. 사랑받는 감각은 충만한 감각이 들었으나 뒤이어 꼬릴 물고 오는 의문이 심장 한 군데를 찔렀다. 네가? 이만한 사랑을 받을 만해?
D는 조금씩 침잠하는 우울에게 정신을 뺏기지 않기 위해 고갤 저었다.
“이, 일단 일어나세요…. 안 미워하니까…”
“정말요?”
A는 서서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 점점 웃는 낯으로 변하는 그가 제법… 재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D였다. …재밌어? 좋다는 건가? 꿈틀, 감정에 무언가 심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오는 것은 창피함이었다. 아니, 부끄러움인가? 혀까지 명백히 침범당한 것은 처음이었고, 사람의 입술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게 된 것 역시 처음이었으니까. 그래. 이거 첫 키스잖아. 나에겐, 특별한… 일 아닐까?
“왜 그래요?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는데….”
“아, 이, 이건…”
“여기 더운가요?”
“그런, 건 아니고, 요…”
A는 D가 왜 그렇게 얼굴을 붉혔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괜한 말을 던지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D의 얼굴을 보고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아주 어린 마음에 드는 작은 장난끼였다. 곤란하네. 이렇게 귀여울 줄 몰랐는데. 이 사람과 있으면 유별나게 재밌는 짓을 하지 않아도 즐거웠다. 구경하는 재미?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보는 재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애정 하는 동물을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감각. A 스스로도 내린 결론이 그게 뭐냐며 자신을 한 번 속으로 힐난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어울리는 동물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는데, 어디 보자…. 그건….
“음. 디즈. 혹시 당신, 토끼 같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토끼…?”
“네. 작고 귀여운 토끼. 조금 소심하지만 보고 있으면 재밌는 토끼 있잖아요.”
“아, 저….”
“네?”
A는 D의 말을 귀 기울였다. 토끼는 아니라고 반박하려나? 그러면 역시 닮았다고 해줘야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D가 꺼낸 말은 조금 의외였다.
“토끼는 별로, 수, 순하지 않아요…”
“…?”
“사나워요.”
아, 그러니까…. 토끼의 이미지가 아니라 토끼의 실상(?)에 대해 설명해주는 건가? A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은 혹시, 본인도 그렇다는 걸까?
“그럼 디즈도 사나운가요?”
“네?”
“토끼는 사납다면서요.”
“저, 저는 토끼가 아닌데요…”
“하하,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역시 토끼랑 닮았다고 생각할래요. 귀여우니까. A는 굳이 말하지 않고 웃어넘겼다. 똑똑, 노크 소리가 지나자 잠시 후에 성인 남성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A, 있니?”
“아. 삼촌 오셨나 봐요. 네, 나가요.”
D는 A의 삼촌을 바라봤다. 특유의 유전이 느껴지는 굵직한 미남이었다. 어디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갈색 머리카락에, 굵고 검은 테의 안경을 썼으나 너드보단 화려함이 느껴지는 것이. 삼촌이라기보단 형제 같기도 했다.
그는 D를 슬쩍 보다가, A의 허리 옆구리를 톡톡 쳤다.
“잘 해봐라.”
“…삼촌, 얼른 가서 손님이나 받으세요.”
“짜식. 삐졌냐?”
“그런 거 아니에요. 친구 기다리니까.”
“그래, 그런 걸로 해.”
멀뚱하게 바라보는 D와 괜히 날카로운 청소년기처럼 구는 A를 두고, 그의 삼촌은 자취를 감추었다.
* * *
“…디즈, 자요?”
“아, 알렉스. …아니요.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아직 잠이 안 와요.”
“그래요? 전 여기가 친척이 하는 숙소라서 곧잘 왔었어서 익숙하네요. 그런데 저도 잠이 안 와요.”
“…왜요?”
“왜일 것 같아요?”
“혼자가 아니라서…?”
“제가 그렇게 섬세한 타입은 아닌 것 같아요. 음, 굳이 생각해 보자면… 당신 옆이라서가 아닐까요.”
D가 그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긴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긴장? 왜? 알렉스는 아무것도 안 할 텐데. 하지만 긴장감은 멈출 수 없었고,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순간 D는 숨을 헉, 하고 들이쉴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가 이렇게 가까웠나? 아니, 그보다…. 알렉스의 숨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려. 날 너무 빤히 쳐다보는 것 같은…….
“디즈.”
“어, 으, 네….”
“왜 그래요?”
“아, 아니에요.”
“긴장했어요?”
“…”
“전 긴장한 것 같아요. 손, 잡아도 돼요?”
A가 D의 손을 잡기 위해 이불 위로 팔을 옮겼다. 스륵, 천이 스치는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가볍게 얹어진 손은 따스했다. 아니, 조금은 뜨거웠다. 망설이던 D의 손을 촉감으로 느끼던 A는 웃으며 깍지를 꼈다. 그리고 모르는 채로 말을 이어갔다.
“방이 이렇게 좁았던가, 싶네요. 항상 혼자 쓰던 방이라 그런가.”
“…”
“불편하진 않죠? 이렇게, 가까이 있고 싶어서요.”
“부, 불편하진 않고…”
“않고?”
“수, 숨쉬기 조금 신경 쓰여요…”
“하하.”
이불을 걷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사그락, 폭신한 것이 몸을 덮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걷어지니 웃풍이 들어왔다. 차갑지는 않았다. 여름이라 그런가, 기분 좋게 시원한 바람이 D의 피부를 간질였다. A가 이불을 걷어내고, 조금씩 D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서히 몸을 옮겼다.
“아, 알렉스…?”
“…아, 그냥….”
무심결에 움직이고서 무어라 변명할지 몰라서 A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 어쩌지. 나 뭐한 거지. 뒤늦은 자책을 해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풀어야 했다.
“잠깐만, 제 변명 들어줘요. 지금 손대려고 한 거 절대 아니고….”
“아니, 그, 오해하지 않았어요. 아까…. 더 안 하겠다고 했으니까.”
“네, 그렇긴 하지만. 오해하기 너무 좋은 상황 같아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미안해요. 나도 왜 갑자기 이랬는지, 모르겠고…. 그냥, 더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싶었어요.”
A는 말하면서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를 지켜본 지는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지 않았다. D, 그가 어떤 인물인지. 그가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책일 거라는 것 외에는 자세히 아는 게 없지 않았던가. 뭐 그렇게 깊게 빠질 시간이었다고 이렇게 자꾸만 어긋나는 짓을 해버리는 걸까.
바보 같은 첫사랑을 겪는 청춘물의 소년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어두워서, 얼굴이 잘 안 보여서…. 아쉬웠거든요.”
“…그럼, 저도 알렉스도 잠이 안 오던 참이었으니까…. 산책이라도 나갈까요?”
“아, 그런 거라기보단, 이렇게….”
A는 D를 품에 꼭 안았다. 팔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D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A를 바라봤으나,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조금 숙이고 얌전히 그의 품 안에서 온기를 누렸다.
“…이제, 잘까요.”
“이, 이대로요?”
“네. 안 될까요?”
“아,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네. …잘 자라고 말해줄래요?”
“…잘 자요. 알렉스.”
“네. 잘 자요, 디즈.”
D는 A의 품 안에 안겨있는 것이 내심 신경 쓰였지만, 눈을 감고 조용히 잠을 청하기로 했다. 다시 찾아온 고요함이 어둠을 다정히 품었고, 이내 두 사람은 새 환경에서도 잠들 수 있었다.
_
아침부터 A는 제법 분주했다. 익숙하게 짐을 정리하는 모습에 D는 조금 망설였으나, 다가가서 뭐라도 도울 것이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A는 “여기가 제 친척이 하는 곳이라 제가 하는 게 편할 거에요. 마음 놓고 쉬어도 돼요.”라며 그를 만류했지만, D는 그래도 나서고 싶다며 제 의사를 펼쳤다. 나름 결연한 의지를 눈에 담은 모습이 귀여워서 A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그러면…. 뭐가 좋을까요. 여기는 제게 익숙한 장소지, 당신에게는 처음일 테니까.”
“아… 아침이라도 사올까요?”
“그게 좋겠네요. 이 근처에 브런치를 파는 카페가 있어요. 대부분 조금 천천히 문을 열어서, 아마 거기 외에는 다 닫혀있을 거에요. 이름이….”
“‘모닝 사루비아’였죠?”
“아, 맞아요. 오면서 봤었나요?”
A의 질문에 D는 어제 있었던 일을 하나 떠올렸다. 짐을 풀기 위해 숙소를 가던 길이었는데. 예쁜 카페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아, 저기 분위기 마음에 든다. 조용해 보여서 그런지 앉아서 책을 읽으며 창가 밖을 구경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분명, 꽃을 팔고 있었어.’
A의 마음을 알게 되고서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이런 나라도 좋아해 준다는 것이 기뻤다. 그는 항상 자신을 잘 배려해줬고, 잘 챙겨주었다. 어제처럼 예측 불가한 일을 벌이는 것은 처음이었고, 평소에는 항상 다정한 사람이었다. 받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저에게 가져다준 관심에 보답하고 싶었다. 학교에서는 항상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책 속에 빠져 있었는데.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D에게, A는 현실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디즈?”
“아, 아아…. 네, 오면서 봤었, 어요.”
“그랬군요. 거기 분위기 좋죠. 저도 여기 휴가 때마다 오면 거기서 대충 시간 때우곤 해요. 삼촌이 공짜로 부려 먹으려 하셔서. 내가 카운터에 있으면 손님들이 좋아하신다나, 뭐라나. 하하.”
“…알렉스는 어떤 거 좋아해요?”
“저요? 음, 가리는 편은 아닌데. 굳이 고르자면, 당신이 골라준 것이요.”
“어….”
“농담이에요. 정말 아무거나 괜찮아요.”
다녀와요. 다정하게 웃으며 D를 보내주는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짐을 정리하느라 그를 챙겨주지 못할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곁에 있었으면 했다. 시야가 들어오는 곳에 있는 것과 아예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은 사뭇 느낌이 달랐으니까. A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이렇게 D가 없는 것에 허전함을 느끼게 되었지, 라며 씁쓸히 웃었다.
당신도 저와 같은 감정이었으면 좋겠어. 이 기분이, 나만 아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A는 말을 삼켰다. 가볍게 목울대가 움직였다.
“다녀올게요.”
그런 그를 뒤로하고, D는 자리를 떠났다. 뭐라도 도움이 되어야지, 그리고…. 무언가 드려야지. D는 천천히 해변가를 걸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 * *
“어서 오세요.”
“아, 저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브런치 세트 둘 그리고…”
D가 눈길을 준 곳은 꽃이었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은 한창인 여름이 무색하게도 봄에 어울렸다. 마치 봄날을 위해 단장하고 온듯한 아름다움이 싱그러이 존재했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향긋한 꽃내음도 났다.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띤 D가 입을 다시 열었다.
“이걸로 주세요.”
이번에는 조금 확신에 찬 목소리로.
.
.
.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를 나온 D는 한 손에 브런치 세트를,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아, 어떻게 전해줘야 하지.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까? 이런 거 한두 번 받아본 사람도 아닐 텐데, 너무 소박한 걸로 골랐나? …기뻐할까? 다양한 생각들이 D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떠돌아다녔다.
사박사박 거리는 모래사장의 모래알들이 발자국을 따라 푹푹 빠졌다.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아직 아침인데도 햇님은 이른 시간부터 열심히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물결 위로 반사되는 빛이 일직선으로 반짝거렸다. 바다의 짭조름한 향이나 끼룩거리는 갈매기들이 간혹가다 푸른 하늘 위로 선을 긋듯 날아다녔다.
멈춰 서서 보고 있으면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하나둘 다가왔다.
“마중 나왔어요.”
A가 웃으며 D에게 다가갔다.
“설마 설마 했는데, 꽃을 사올 줄이야. 아침부터 이렇게 낭만적인 선물은 처음 받아봐요.”
“처, 처음이요?”
“네. 뭐 꽃다발이 처음인 건 물론 아니지만, 이렇게… 절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첫 선물이잖아요.”
A는 마중을 나가기 위해 해변가를 걸으며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이가 서서히 느려진 속도로 해변가에 멈춰 선 것을 보며 급하게 뛰어갔다.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디즈인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빠르게 갈수록 손에 들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손에 브런치, 그리고 한 손에…. 아, 빠르게 눈치채서 다행이다. 가까이서 알아챘다면 분명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을 것만 같으니까. A는 D가 꽃을 사러 나갈 줄은 몰랐다. 전혀.
‘실은 저기, 내가 가끔 애인 데려올 때 한 번씩 꽃을 샀던 곳이긴 한데. 내가 받는 쪽이 될 줄은 몰랐네. 아, 아쉽다. 먼저 사둘걸.’
A는 그에게 꽃다발을 받은 것이 기쁜 한편, 먼저 선물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동안은 주면 기뻐한다는 것을 아는 그의 적당한 서프라이즈용 아이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휴가에 여길 올 때마다 그가 생각날 것만 같았다.
“저, 저는 꽃 종류를 잘 몰라서….”
“으음. 그래요? 어디 보자…. 이 꽃은…”
“메리 골드라고 했던 것 같아요.”
“네, 저도 기억에 남는 꽃이네요. 이 꽃의 꽃말을 알아요?”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음, 그렇단 말이지.”
꽃을 추천한 것은 사장이었다. D가 처음 고른 꽃은 장미였는데, 누구나 알 듯 연인에게 선물하기 무난히 좋은 꽃이었다. 사장은 난처하게 말을 이었다. “이걸 어쩌죠. 이 꽃은 아직 덜 자랐어요.” 아…. D는 탄식을 뱉었다.
“물론 이대로도 충분히 예쁘죠. 하지만…. 오늘따라 꽃향기가 정말 좋네요. 그렇죠? 기왕이면 화사하게 피어난 꽃을 선물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 그럼 어떤 꽃으로…”
“이건 어때요? 이 꽃도 예쁘지 않나요?”
노랗게 피어난 아담하고 작은 꽃이었다. 확실히 장미보다는 A에게 잘 어울리는 꽃이었다. 꽃에 대해서는 분명 자신보다 꽃집 사장님이 잘 아실 테니, D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이걸로 주세요.”
“이건 카페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신 꽃이었어요.”
“그랬군요.”
A는 찬찬히 꽃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무슨 의미인지 D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꽃말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A가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나쁜 의미가 있진 않을 것 같았기에. 그러니 괜찮을 것 같았다. A가 꽃을 받아들고 D의 손에 들린 브런치를 들었다.
“아, 제가 들어도 괜찮은데…!”
“여긴 제가 오자고 한 거니까, 제가 들게요. 남자친구니까, 이 정도는 하게 해주세요.”
“저, 저도 남, 자친구…”
“그렇네요. 저희 둘 다 남자친구네요. 서로한테. 그런데 전 남자친구란 말보다는,”
A가 멈춰 서서 D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인이 좋아요.”
* * *
A는 휴가철마다 먹었던 빵을 익숙하게 먹으며 D를 살폈다. 입에 맞을까? 아침이면 그 카페 외에는 열지 않기에 선택지가 없었지만. D가 한 입 먹고서 말했다.
“맛있어요.”
“그래요?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나랑 여기 자주 와야 하니까요. A는 무해한 음모를 꾸몄다. 내년 휴가를 꿈꾸며 생각했다. 이번에 잘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어, 라고.
D는 A의 속내도 모르고 브런치를 즐겼다. 음식은 입에 맞았고, 새로운 환경은 낯설었지만 아름다웠다. 바다란 게 그렇게 반짝이는 곳이었던가? 그다지 가본 적이 없었으니 속으로만 상상하며 풍경을 꿈꿔왔었는데.
어제는 왜 그렇게 바다가 눈에 안 들어왔던 걸까. 긴장했던 탓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바다가 눈에 들어오기에는 A가 너무 눈에 띄는 사람이었으니까.
“여기 오자고 한 건 저지만, 솔직히 별로 안내할 곳이 없네요. 저한테는 멋지다기보다는 익숙한 장소이고…. 그러다 보니 처음 여기 온 사람이 어딜 가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D는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없어요?”
“아, 그러면, 음….”
“어디든 좋아요.”
“배를 타보고 싶어요.”
의외의 발언이었다. A에게도, D에게도. 그다지 야외활동을 좋아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D였으니까. 그리고 D 역시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바깥 활동은 지치기 쉽고 자신은 민첩한 편이긴 하나 체력이 좋은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보고 싶어졌다. A의 꿍꿍이를 모르는 D에게 바다란 자주 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운 부분도 있었다. 수영 못 하는데, 빠지면 어떡하지?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에 A가 있었으니까.
“어쩌죠. 저 사실 여기 자주 와봤지만 배는 안 타봤어요. 수영… 못 해서….”
그랬다. A는 사실 수영을 못 했다. 그의 체형을 생각하면 그가 헤엄칠 줄 모른다는 것이 잘 연상되지 않기도 했고, 그 사실이 제법 어색하게 느껴졌다. D는 급하게 말을 붙였다.
“그, 그럼 역시 안 타는 걸로…”
“아…, 저 꼴사납네요. 아니에요. 타죠.”
“하지만…”
“저희 삼촌이 사실 해양구조대 출신이에요. 여기서 일했었어요. 삼촌이랑 같이 타면 되겠죠, 뭐.”
“그, 무, 물을 무서워한다거나…”
“조금 부끄럽지만, 맞아요. 어릴 적 삼촌이 절 물에 빠트린 적이 있거든요. 그 후로 물이 무서워서 수영은 안 배웠어요.”
그래도 디즈가 하고 싶어하는 건 해주고 싶어요. 라며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삼촌. 혹시 오늘 시간 돼? 한 2시간만 시간 좀 내주면 안 될까? 같이 온 일행이 배를…….
하지만 그날, 몇 시간 후에 그는 자신이 자만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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