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020

Q의 인용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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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의 군집에 이는 바람이 귓가를 스쳐간다. 손에 든 낡은 책의 페이지가 흩날린다. 정갈하게 인쇄된 페이지 넘버와 획마다 눌러쓴 글씨들이 뒤섞이며 파라락 넘어갔다. 귀퉁이가 다 해지고 헤집어져 찢어지는 표지에 지난 일 년간의 기록이라 휘갈긴 것에서는 구역질 나는 냄새가 났다. 너의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를 보지 못했다. 날짜를 세진 않았지만 해가 넘어가고 날이 수십 번이 새고 마당의 살구나무가 져가는 동안만큼 없었다는 것을 안다. 그간 나는 나의 집에서, 우리의 집에서 먼지를 쓸고 닦으며 계속 써내려 왔다. 정말 오래되었다. 없이 잠드는 밤은 시간이 잠을 재워주었고 사고는 분명 너에게로 떠내려갔던 것을 알아주리라 믿는다. 매일같이 함께했던 사람 중 하나의 부재에는 Q가 너의 존재를 자꾸 물어주었다. 네가 이유를 댈 수 없었기에 나 역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마는. 긴 시간 동안 Q와 나는 건반을 자주 쳤다. 무르는 살과 적히지 않는 음악의 삶이 설어 우리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았고 매주 주말마다 새로운 곡이 적막 속에 연주되었다. 갈겨써 알아보기 힘들었던 너의 기록에서의 광기에 찬 다섯 음을 보듬어 꺼내서 우리는 수비토 피아노로 선율을 이어갔다. 연주가 끝나도 박수를 치는 이는 없었고 우리는 네 악보를 뒤적이다 두어 장을 더 불태운 후 잊으려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모든 것이 가고 있었다. 네 기록이 헌 고동색 협탁 안에 잠겨 있는 것은 뒤로하고.

불행히도 Q는 이해하지 못했다. 너도 Q를 마뜩잖지 못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Q는 아직 모른다. 그것만큼은 내가 입을 다물었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따금 Q가 울부짖는 소리나 삐걱이는 마룻바닥 틈새로 흐느끼는 소음이 울리면 나는 차를 더 내온다. 찻잎을 끓이고 주전자를 닦는다. 아니, 주전자를 먼저 닦고 물을 끓인다. 수 번을 반복하면 굉음이 멎는다. 부글거리도록 끓는 차에 속을 많이 데어도 안정에 좋다는 차를 찬장에 또 채워넣었다.

감상적인 Q가 왜 너를 눈치채지 못했느냐 묻는다면. 사실 이런 질문이 너의 잉크가 번진 어구로 쓰여 있을까 봐 아직 기록을 열지 못했다. 벼랑 끝에 너의 기록을 들고 그제서야 마음이 터져나오듯 그런 생각을 한다. 버리자. 손끝에 땀을 감각한다. 누렇게 번지고 물든 종잇장과 너의 부르트고 검어진 손가락에서 배어나오는 피가 너의 피고 나는 땀이다. Q는 죽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알잖는가.

발아래서 자갈이 흩어지는 소리가 너도 익숙할 것이다. 꼭 너처럼 사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작곡가가 아니라 미스터리 작가여도 좋을 성싶다. 돌 몇 개가 아득한 곳으로 굴러 떨어진다. 내가 잃은 무게중심 대신이다. 나는 팔을 거둔다. 추악하고 미련한 기분이 든다. 사둔 찻잎은 지금 Q가 마당에 묻어두고 있다. 너의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Q가 아니라 나다.

지난 일 년간의 기록. 만년필이 휘어지도록 적은 글씨는 이 년 전은 똑바로 목도하도록 했지만 그 뒤는 사무치도록 보이지 않았다. 지문이 낭자한 표지는 오래도록 버려져 그동안 죽음이 닿아왔던 것 같다. 사실 우리는, 너와 나는 매번 죽음에 닿아왔다. 물어뜯은 손끝은 손톱만큼 짧아져갔고 우리가 간 만큼 죽음이 다가왔다. 차라리.

차라리 그때 너에게 그만두자고 했어야 했지만.

잠근 문이 웃풍 탓인지 끄덕인다. Q가 내려가는 계단에서 어김 없이 끽끽거리는 소리가 난다. 첫 장을 넘긴다.

감히 회고록과 자백문을 읽는다. 너는 아직 제정신이었다.

구석의 공백에 너의 손글씨로 그려진 것은 '엘리제를 위하여' 의 도입부다.

넘기려는 손끝에 두려움이 엄습해 일고여덟 장을 건너뛴다. 무언가 묻어 떼어지지 않는 페이지의 테두리에는 처음 보는 음 세 개가 덧그려져 있다. 마구 뻗은 기호가 나의 뇌리에 박힌다. 곧바로 머릿속에 연주된다. 오 초나 되는가 싶은 시간 후 나는 이백 장을 넘어간다.

눈을 뜨고 보니 나는 양손으로 살구나무를 파헤치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Q는 없었다. 흙이 묻는 손이 부르트고 검어졌다, 끼익. 열세 번째 계단을 밟자 층계가 신음했다. 나는 두려웠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는 더 두려웠다. 흙이 묻은 손가락은 내 짧은 손톱이 보이지 않았고 종잇장은 마찰이 줄어 감촉이 무던했다. 열 장을 넘겼다. Q의 앞에서 열어봤던 페이지다. 오물이 묻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흰 속지다. 알아볼 수 없는 메모가 귀퉁이에 밀려난 대신 또 다른 음 다섯 개가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나도 치고 Q도 치고, 수비토 피아노로 방에 아주 작게 울렸던 멜로디가. 네 장을 더 넘긴다.

Q는 다음 장을 넘겼다. 비밀이라도 지키듯 몇 장 채우지 않은 다이어리는 다음 장이 새하얀 백지였다. 지난 일 년간의 기록. C의 글씨는 평소보다 옆으로 치우쳐있었다. Q는 한 번 더 읽어내려가본다. 여전히 C의 죽음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유품이라고 이것 하나 남긴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냥 하얗기만 한 다이어리를 팔락이며 넘겨보는데, 거의 막장에 빼곡하다. 휘갈겨 그린 악보다. 제목이 들어갈 자리에 하나의 알파벳이 C의 글씨로 쓰여있다. J. 급히 악보지를 들고 와 Q는 옮겨 적어본다. Q를 능가할 정도로 수준급의 악곡이다. Q는 상단에 이리 적는다. C의 유작. 발표해줄 것. 불쌍한 친구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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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ed by 뮤지컬 광염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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