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바다

마주침

G20 초반부

새롭게 태어난 주신의 검에게.

톨비쉬의 말에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그의 어조는 평이했고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 스민 결의와 믿음은 몇백 년을 벼려 온 곧은 검에 비할 수 있었다. 베르다미어는 세 사람에게 둘러싸여 조금 웃었던 것 같다. 오랜만의 웃음소리였다. 스스로 ‘오래되었다’라고 헤아릴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멘 마하의 뒷골목에 선 채로 주신의 기사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밀레시안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지근한 바람이 숨소리의 자취를 따라 가느다란 몸을 비집어 넣었다. 베안 루아의 문지기들이 가게에서 걸어 나와 입간판을 세우고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희미했다. 술집 뒤편이 기사들의 집결지였다니, 아이던이 알았으면 펄쩍 뛰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걸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나? 그는 시들한 웃음을 허공에 놓아주고 벤치에 늘어졌다.

왕성에서 치열하게 다투던 시간이 머나먼 일 같았다. 에레원은 이제 철이 좀 들었으려나. 장난처럼 생각한다. 마음 기댈 곳이 없어 날이 서는 거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태도를 계속 견지한다면 왕으로서의 앞날이 힘겨워질 수 있었다. 내 책임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해 놓고선, 마음 한쪽에 언제 한번 시간을 내어 에레원과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무른 것도 무관심한 것도 천성이었다. 그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그를 찾아온 짧은 휴식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를 가늠해 보았다. 움직이는 이들과 그걸 막으려는 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 평온한 시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적들이 다가오는데 태평히 누워 있는 건 날 잡아 잡수시오, 하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주신의 검’들은 그가 계속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아 넘길만한 성격도 아닌 것 같았다. 톨비쉬야 약간의 융통성을 갖춘 것 같긴 했지만, 아벨린이나 알터의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기사단은 대체로 매우 폐쇄적이고, 작금의 상황에 대해 몹시 기민한 태세를 갖추었다.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도사리는 위협의 형태에 대해 생각한다. 묽은 어둠 속에 풀려 제대로 된 모양을 살필 수 없는, 익숙한 악의의 냄새, 무게 없이 허공을 디뎌 어느새 어깨에 얹히는 환한 적대감과 금을 건너면 구체적인 형태로 사느랗게 뻗어 오는 차가운 손, 전투 후의 들큼한 공기 같은 것. 베르다미어는 이멘 마하의 물 냄새 묻은 바람이 그의 뺨을 어르는 것을 느꼈다. 이웨카의 마나가 베일처럼 덮여 온다. 잠들지는 않겠지만, 해가 뜰 때까지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전투조의 조장들이 밀레시안과 함께 다니며 위험을 처리했다는 소식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봄의 끝자락을 맞이하여 떨어지는 꽃잎을 타고 흘러들어와 게이트를 그대로 뒤집어 놓았다. 견습 기사들의 재잘거림은 당연하게도 멈출 줄을 몰랐고, 정식 기사들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조장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얼굴이었다. 그만큼 이례적이고 이상한 일이다. 존재를 들킨 거야 어쩔 수 없었다고 치지만 함께 사도를 처치하고 신성력을 부여받게 된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에 속했다. 견습 기사들은 햇빛 아래 모인 작은 새들처럼 정식 기사들이 주의를 주면 흩어졌다가 시선이 멀어지면 슬그머니 다시 모여서 떠들었다. 신성 스킬을 얻었대. 어쩌다가? 뭘 얻었을까? 듣기로는 세 가지를 다 쓰게 됐다던데. 그게 가능해? 단장님은 뭐라고 하셨대? 게이트 구석에서 속닥거리던 목소리들은 게이트의 찬 바닥에 울리는 조용한 공음과 함께 한껏 나지막해진다. 여느 때와 같이 느슨하게 걸어들어오던 카즈윈은 일순 고요해지는 사위를 눈치채고 한쪽 눈썹을 실룩거렸다. 소리 내 묻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냐’는 뜻이다. 눈치만 보던 견습 기사들 사이로 헤루인 조 조원이 차분히 다가왔다.

 

“별일 아닙니다. 애들이 바깥소식을 들어서 저래요.”

 

첫 마디가 깔끔한 건 조장의 성격에 익숙해진 사람의 습관이었다. 인사치레야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이면 충분하고, 상호 간 묻는 말에 명징하게 답하고, 요구할 게 있으면 망설임 없이 간단하게, 미리 내려 둔 지시에 따르되 함께 있게 되면 그때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헤루인의 규율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런데도 삭막하기보다는 효율적이라는 인상이었다. 카즈윈의 눈썹이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바깥소식이라는 게.”

“아르후안이랑 엘베드 쪽이요. 엘베드는 톨비쉬 조장님만이긴 하지만.”

 

알터가 근신 명령을 받았다더니 그 이후로 또 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즈윈은 슬며시 눈을 굴렸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저들끼리 숙덕대는 어린 기사들 사이로 대강 알아들을 만한 단어들 몇 개가 걸려 나왔다.

 

“... ... 밀레시안?”

“예상하신 거 아니었어요?”

“확인차.”

“네, 뭐, 보고에 따르면 함께 사도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왕성을 습격한 사도 무리를 단신으로 상대했다더군요. 상부의 승인을 받긴 했다지만... 아무래도 톨비쉬 님께서 결단하신 모양입니다.”

“... 타라 쪽이 시끄러운 소식은 받았어...”

 

수리부엉이의 날개는 흘긋 조장을 바라보았다. 미묘한 기류가 얕게 뜨고 있었다. 기분이 안 좋으신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이제까지 밀레시안을 둘러싼 어떤 논란이나 토론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카즈윈은 조원의 의문을 해소해주듯 말을 이었다.

 

“무모하군.”

“하하, 이 얘기의 무모한 점이 너무 많아서 어딜 짚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밀레시안 혼자 보낸 거 말이야...”

 

알터가 밀레시안에게 접근한 일이나 결국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된 일이나 카즈윈에게는 딱히 놀랄 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밀레시안과 기사단이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측하던 인물이었다. 신의 힘이 깃든 손으로 모든 위험으로부터 에린을 수호하기 위해 애쓰는 자와 이계의 위협에 기꺼이 나서는 기사단은 어떤 경로로든 한 번은 맞닿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밀레시안을 전력으로써 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행여나 실패하면, 의 가정이 아예 없다는 듯한 행동이 아닌가. 여왕의 안위가 기사단에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지만 이번 일은 예상 범위를 넘어선다.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게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카즈윈은 느릿하게 꽉 조여진 건틀렛의 매듭을 풀며 물었다. 실상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이다.

 

“결과는?”

“성공적으로 방어했다고 합니다. 세 가지 스킬을 금방 능숙하게 사용했다는 보고도 있어요.”

“... 그래...”

“놀라운 일이긴 하네요. 한 가지를 갈고 닦는 것도 충분히 힘겨운데 그 세 개를 다 쓴다니. 역시 밀레시안이라는 걸까요?”

 

조용히 서 있던 카즈윈은 따로 말을 더 얹지는 않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가봐도 좋다는 뜻이다. 조원은 꾸벅 묵례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견습 기사들은 수백 개의 가설을 세우고 있었고 정식 기사들도 상부의 결정에 놀라워하며 아직 귀환하지 않은 조장들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카즈윈은 뒷목을 만지작거리다 걸음을 옮겨 그의 방으로 향했다. 행동거지는 천천하고 여상스러웠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맨발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세 개의 스킬을 홀로 사용해 사도의 위협을 막아낸 자. 말만 들으면 대단한 성과다. 그자 한 명만 게이트에 서 있어도 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사도가 나타난 곳에 단신으로 내보내도 별걱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져 본다. 한 사람의 어깨에 얹힌 무게가 너무 무겁지 않은가? 혹은, 그가 그 정도의 신뢰 아래에서 부서지지 않을 수 있는가?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가? 그는 답을 내지 못한다. 의문은 꽃이 피어나듯 이어진다. 왜 톨비쉬는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밀레시안을 이용하는가? 그는 잠시 단어의 사용이 알맞은지를 생각했다. 번복하지는 않았다. 반듯하고 완벽하여 의중 모를 기사의 행동은 밀레시안을 아주 자연스럽게 알반 기사단이라는 이름 아래로 끌어들였다. 알터를 만나고 아벨린과 마주한 것 정도는 우연의 이름에 묶을 수 있었지만 그 뒤로 일어난 일들을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사단이 그와 협력을 결정한 때부터 톨비쉬가 신성력을 옮겨 그의 몸에 담은 것까지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들쑤셔 알아낼 마음도 없다.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카즈윈은 그즈음에서 생각의 허리를 끊어냈다.

글쎄, 그렇다면. 이쪽이 직접 시험해봐도 좋을 것이다. 어떤 자인지, 톨비쉬가 그토록 끌어낼 가치가 정말로 있는지. 그는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과연 그에게 부여된 사명이라고는 하나도 없는지. 그는 어디까지 자유한 것인지.

기록 속에만 존재하던 자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이 다보록하게 일어난다. 아주 오래된 것도, 잊혀 버린 것도, 새로이 태어난 것도 있었다. 카즈윈은 질문의 가지를 천천히 다듬기 시작했다.

가장 묻고 싶었던 것만 묻기 위해서.

 


“그러니까 지금도... 자기가 뭔가 생각할 게 있으니까 이렇게 늦는 거라는 얘기야?”

“아니. 카즈윈은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약속에 늦는다거나 한 적은 없어.”

 

베르다미어는 기사들 사이에 어색하게 서서 예의 바른 미소를 얼굴에 고정했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땐 예의 바른 게 아니라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다.’ 미소였겠지만 아무튼 그건 상관이 없었다. 아벨린의 뾰족한 목소리나 피네의 달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안 궁금해. 베르다미어는 필사적으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그때처럼 정말로 ‘안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괴롭기만 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그놈이 그냥 별 이유 없이 늦는다는 거 아니야? 그는 입을 꼭 다물고 미소를 지으며 어떤 말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튀어 나가지 않도록 애썼다. 피네의 상태가 이상했다는 걸 생각하는 데만도 기력이 쭉쭉 빠져나갔다. 여기서 더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그러고 보니 이번 일 이후 헤루인 조의 조원들에게는 임무 지시가 충분히 내려져 있기는 했어요. 자신이 어떤 상황일 때는 어떻게 하면 된다... 식으로 예외 없이 상세하게 지시를 내려 두었더군요, 카즈윈은.”

“음... 그런 점은 확실히 카즈윈답네요. 완벽하게 처리해 두었으니 나를 내버려 두시오... 라는 느낌?”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이상한 애 아니냐고. 베르다미어는 한사코 입을 닫은 채 생각했다.

 

“그렇게 일 처리를 확실히 해 두는 사람이 대체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아벨린 말이 맞다. 그는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 후로 나눠지는 몇 마디의 말을 듣는 동안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충분한 이유 없이 늦을 사람이 아니라기엔 이미 많이 기다렸다. 이웨카가 떴고, 알터는 괜스레 헛기침하거나 주변을 둘러보는 등의 행동이 잦아졌다. 베르다미어도 슬슬 좀이 쑤셔오고 있었다.

 

“흠, 탈틴이라... 일단 쉴 만큼 쉰 것 같으니 슬슬 카즈윈을 찾으러 가 보면 어떨까요?”

“... 아?”

“우리 쪽에서요? 카즈윈을?”

 

아벨린의 목소리 덕에 멍청한 감탄사는 금세 말소리 사이에 파묻혔다. 찾으러 가자고? 우리가? 왜? 뭐 때문에 그런 수고를 해? 베르다미어는 자기 입술을 꿰매는 심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계속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하지만... 누가 그놈한테 부엉이 열 마리만 보내봐. 그는 끙끙거리며 미간을 문질렀다.

 

“어떠신가요, 베르다미어 씨. 아벨린에게도 말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 그래... 그러든가...”

 

자포자기한 목소리가 백기를 들었다. 톨비쉬는 반듯하게 웃어 보인 뒤 탈틴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한숨을 내쉬는 아벨린을 부드럽게 이끄는 피네와 베르다미어의 기분을 살피며 부러 밝게 말을 붙이는 알터가 뒤를 따랐다. 베르다미어는 알터를 눈으로 쓰다듬어주며 그 뒤를 졸졸 쫓아갔다. 어떤 놈인지 찾으면 상판대기나 구경해보자. 그가 속으로 아주 아주 작게 이를 악물었다.

 


초록색 보석이 따뜻하게 빛을 냈다. 빛에 스며 있는 다정함과 별개로 낮부터 저녁까지 걸어 다닌 종아리가 슬슬 아파지는 바람에 베르다미어는 짜증이 뱃속에서부터 치미는 것을 느꼈다. 탈틴의 건조한 바람은 평원을 지나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 갈퀴에 걸었다가 사뿐히 스쳐 지나갔다. 그는 희미하게 땀이 배어나고 있는 콧등을 문지르며 도시와 한참 떨어져 있는 구석으로 걸어갔다. 기억에 있는 곳이었다. 잠깐 누워 잠들기 좋은 곳이지. 이 자식도 누워 있으려나. 농장의 울타리를 넘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언덕을 가볍게 디뎌 올라가면 나무 뒤에서 튀어나온 다리 두 짝이 보였다. 베르다미어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켰다 내쉬며 짜증을 가라앉히고, 풀을 밟아 다가갔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비집어 부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이봐.”

 

나무 뒤를 향해 튀어나온 그의 목소리는 속을 가라앉혔음에도 약간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낮부터 저녁까지 고생하게 만든 위인을 대하는 것 치고는 나름대로 상냥한 처사였다.

 

“그만 자고 일어나. 널 찾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고생을...”

 

베르다미어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태평하게 누워 있던 기사가 돌연 일어난 까닭이었다. 허공에서 창백한 눈동자와 붉은빛이 마주쳤다. 딱히 종이 울린다거나 꽃잎이 날린다거나 하얀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가지 않는, 그저 그런 순간이었다.

 

“자고 있던 게 아냐...”

 

잠기거나 거칠어지지 않은 느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흐트러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카즈윈이 베르다미어를 내려다보았다. 그보다 머리 하나에 못 미칠 만큼 작은 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과 둥그렇게 뜨인 붉은 눈동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위대하게 빛나는 영웅’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 여자는 그냥 거기 엉거주춤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평범하게 숨을 쉬고, 평범하게 놀라면서. 그럼에도 기대를 배신당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당신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 하?”

“그래서 일부러... 피네가 찾기 힘든 곳에서 쉬고 있었지.”

 

이거 뭐 하는 놈이야?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 고스란하다. 카즈윈은 물끄러미 그것을 들여다본다.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불멸의 오만함, 신의 권위, 사명을 진 자의 고결한 결의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단지 타오르는 생명만이 오롯한 두 눈동자는 제 감정을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는 탈틴의 건조한 바람을 폐에 채워 넣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하고 나, 둘만 남는 상황을 만들고 싶었거든.”

“...”

 

이번엔 ‘너 정신 나갔냐?’라는 눈이다. 카즈윈은 약간 재미있다는 기분이 고개를 드는 걸 느끼며 그를 응시했다. 베르다미어는 표정을 수습하고 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또 무슨 물건인가 싶었다.

 

“네가 카즈윈이야?”

“그래. ... 날 찾고 있었던 거라면 맞게 찾아온 거야.”

 

그러더니 어디 ‘네 목적을 읊어 봐라.’라는 표정이 재빠르게 그의 얼굴에 깃든다. 카즈윈은 낯에 웃음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채 느리게 입을 움직였다.

 

“당신과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동안 일어난 일들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

 

그는 잠시 밀레시안의 이름을 되짚는다. 긴 기록을 읽어 오면서 처음으로 기억 속에 밀어 넣은 단어였다.

 

“...... 베르다미어. 아마 지금도 알반 기사단의 임무 수행에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겠지.”

 

밀레시안은 이름이 불리자 한쪽 눈썹이 비죽 올라간다. 알고 있다고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군. 그는 짧게 추측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 무슨 뜻이야?”

“알반 기사단은 외부인을 쉽게 받아들이는 집단이 아니야. 사도와 선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큰 힘이 필요하다는 건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상식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별로 그렇지가 않거든.”

 

긴 침묵이 뒤따랐다. 베르다미어는 가슴 앞으로 홑 팔짱을 낀 채 참을성 있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사 빠진 놈 같긴 하지만 차근히 하는 말을 듣자 하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기사단의 폐쇄성이야 아벨린과 알터와 함께 지내면서 톡톡히 알았다. 그걸 상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낸다는 건 의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경계 중인가? 하기에는 모든 행동이나 태도가 헐겁다.

 

“지난번 알터 때도 그렇고... 이번 시체 조사 건도 그렇고... 당신을 기사단에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언제나 톨비쉬였어.”

 

경청하던 베르다미어의 나머지 눈썹이 제 짝을 따라 올라갔다. 그게 뭐? 미미하게 주름이 잡힌 미간에 쓰인 의문은 슬며시 날카로워진다. 설마 모종의 관계가 있냐 뭐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팔짱 속에 숨은 그의 손이 쥐었다 펴졌다.

 

“... 왜일까. 톨비쉬는 왜 그렇게까지 당신을 원하는 걸까. ... 조금 갑작스러운 얘기겠지만...”

 

다행히 그에게 답을 요구할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굳이 대자면 혼잣말에 가까웠다. 다만 기사의 두른 태가 약간 변화했을 뿐이다. 베르다미어는 그것이 무엇인지 매우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싸우려는 자의 몸가짐이었다. 그가 팔짱을 느슨히 풀었다.

 

“당신하고 한번 싸워보고 싶어.”

 

상대가 의사를 비쳤다면 의당 응답해야 한다고 전사의 혼백이 속닥거렸다. 베르다미어는 눈앞의 사내를 한 번 노려보았다. 그에게 그런 능력이 전혀 없는 것과 별개로 속내를 좀처럼 읽을 수 없었다. 카즈윈은 느리게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베르다미어는, 늘 그랬듯이, 싸움을 피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그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다리고 있을 기사들에게는 약간 미안했지만, 본능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이 자가 이곳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체인 블레이드를 뽑아 바닥으로 늘어뜨렸다.

 

“얼마든지.”

 


 

검날이 서로 부딪힐 때마다 작고 날카로운 소리가 풀숲에 튀었다. 기실 상대는 거의 힘을 주지 않고 있었고, 몰리는 건 자신 뿐이다. 베르다미어는 미간을 구겼다. 이게 날 놀리나?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빠져나갈 틈을 주는 일이 없다. 그뿐이랴, 생뚱맞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셈이 맞았다면 이번이 두 번째 질문이었다.

 

“밀레시안들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는 각자 나름대로 목적이 있을 텐데...”

 

카즈윈의 목소리는 느렸지만 듣기 싫게 늘어지지는 않았다. 베르다미어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칼날을 뿌리치며 그를 바라보았다. 푸르게 빛을 반사하는 검이 횡으로 휘둘러진다. 구르듯 피하고 나면 말이 이어졌다.

 

“베르다미어. 당신은 왜 사는 거지?”

“아까부터 하는 거 말인데, 싸우면서 할 만한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해.”

“...... 세상에 ‘싸우면서 할 만한 질문’이라는 게 있나?”

 

카즈윈은 미묘한 미소를 잠깐 띠었다 금세 지워냈다. 베르다미어는 약간 부아가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내리누르며 긴 체인을 뻗었다. 푸른 머리카락 끝을 스친 체인은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고 주인의 손으로 돌아온다. 만족할 만큼 답을 얻기 전까지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이 땅에 발붙이기 위해서.”

 

그는 떠오르는 대로 짧고 거칠게 뱉는다. 진지하게 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카즈윈은 따로 감상을 입에 얹지 않는다. 다만 성실하게 무기를 다룰 뿐이다. 베고, 피하고, 뻗어 냈다가 거두는 행동 이후에 다음 물음을 내민다. 베르다미어는 실력의 격차가 눈앞에 선득거리는 걸 느끼며 숨을 골랐다.

 

“밀레시안은 나이도, 얼굴도, 심지어 성별까지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고 들었어.”

 

날 선 검 끝이 호흡과 가까워진다. 베르다미어는 손을 쳐내듯 거리를 벌린다.

 

“그렇게 모든 게 다 바뀌어버리면... 사람들은 어떻게 당신을 당신이라고 알아볼 수 있지...?”

 

이게 무슨 질문이야? 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질문의 의도는?”

“말 그대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할 뿐이야.”

 

이쯤 되니 질문이 먼저인지 싸움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을 어떻게 그 사람인 줄 알아보느냐고? 밀레시안들 사이에서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겉모습이 바뀌어도,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걸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에린의 주민들에게는 좀 다른 모양이었지만. 그는 땅에 박힌 체인을 우악스럽게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많은 요소가 있지.”

 

에린의 주민들이 그를 잊을 때마다 그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그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 빛나는 별빛처럼.

 

“성격이나 기억 같은 거.”

“...... 어렵군...”

 

노긋하게 중얼거린 카즈윈이 빈틈을 향해 칼끝을 내지른다. 베르다미어는 한 점을 향하는 날카로움을 재빨리 피했다. 옷이 약간 베인 감촉이 느껴졌다. 팔라라가 세상에 붉은빛을 뿌릴 때까지 싸웠는데도 기사의 얼굴엔 힘들거나 지친 기색이 없다. 베르다미어의 실력이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거나, 처음부터 대강 싸운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그는 분해서 으르렁거리는 대신 다음 공격을 흘려보낸다.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땀으로 베르다미어의 등이 흠뻑 젖었을 때, 카즈윈은 검을 나슨하게 내린다.

 

“어떤 사람들은...”

 

베르다미어는 손등으로 턱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그를 바라본다. 작열하는 붉은 눈동자에는 호전성과 의지가 함께 타올랐다. 그때에야, 영웅의 면모 약간을 훔쳐본 기분이 든다. 카즈윈은 서두르지 않고 물음을 끝맺는다.

 

“당신을 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던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

 

묻고 싶었던 것을 최소한으로 가다듬으면 이것들이 남는다. 무엇을 얻고 싶다거나 심중을 파헤치고 싶은 목적은 없었다. 단지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럴 리가 있어?”

 

답은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고 날카롭게 들려온다.

 

“난 신 같은 게 아니야.”

 

인간이라고. 그가 덧붙이지 않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즈윈은 희미하게 만족한다. 잠시 거기 서 있다가 검을 검집에 돌려놓는다.

 

“...... 관두자...”

 

답을 모두 얻었으므로 더 싸울 필요가 없다. 그는 그것을 다른 말로 덮었다.

 

“귀찮아졌어. 이미 결론이 났는데 계속해봤자 의미도 없고...”

“... 시작도 네 맘대로, 끝도 네 맘대로?”

 

베르다미어가 작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체력이 한계에 달해 있었으므로 달가운 선언이었다. 카즈윈은 헐떡이며 체인을 갈무리하는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목소리를 좀 더 명확하게 내었다.

 

“톨비쉬나 다른 조장들과 만나기 전에 이것만은 직접 확인해두고 싶었어. 당신을 믿어도 되는가. 아니면 배척해야 하는가.”

 

베르다미어의 땀에 젖은 눈썹이 삐죽였다. 결과는? 하고 묻는 게 분명했다. 카즈윈은 제 목덜미를 문지르며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방법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얇은 눈썹이 이번에는 ‘조금?’이라고 되물었다. 그는 그것을 슬며시 외면했다.

 

“... 일단은 믿어 보기로 했어.”

“하, 나 참 내, 진짜 어이가...”

 

베르다미어가 뭐라고 더 불평을 터뜨렸지만 크게 마음 쓸 만한 건 아니었다. 먼저 발길을 돌려 서붓서붓 언덕을 나가는 기사의 등을 쳐다보던 그가 탄식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그는 무릎을 짚고 서서 숨을 고르다가 언덕의 바람이 그의 땀을 식혀주는 것을 느꼈다. 그는 거즌 다 저물어가는 해를 쳐다보고, 곧 기사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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