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바다

이끌림

베르다미어는 앞서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 네 명은 조장, 다른 한 명은 조원. 듣기로는 조가 세 명으로 구성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다 이렇게 젊단 말이야? 아니면 세대교체가 최근에 된 건가?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전투조에 몽땅 차출된 거면 다음은? 아니면 그 윗선은? 원로회 같은 게 있는 건가? 얘들도 훈련생 같은 게 있나? 궁금한 것 투성이였지만 그들은 그의 궁금증을 좀처럼 해소해주지 않았다. 아벨린은 완고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고, 피네는 곤란하게 웃으면서 알려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톨비쉬에게는... 별로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딱히 그놈이 미운 건 아닌데 이상하게 좀 피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알터는 입이 간지러운 눈치였지만 함부로 뭔가를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베르다미어는 일행과 미묘한 거리를 둔 채 걷고 있는 파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질문을 들은 체는 할까? 제일 처음 떠오른 생각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질문을 몇 개 받고 대답하긴 했지만 반대 상황에서는 어떨지 모르는 일이다. 그는 거즌 노려보듯 등을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뭐,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일행이 이리아로 가는 배를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할 즈음, 그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카즈윈에게 다가갔다.

 

“어이.”

 

청회색 눈동자가 부름의 근원지를 따라 흘긋 움직였다. 따로 대답은 없었다. 그의 반응은 어느 정도 베르다미어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저게 ‘왜 불렀냐’정도겠지. 그는 카즈윈의 곁에 두 발자국 즈음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섰다.

 

“여기서 뭐 해? 다들 저기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논의하고 있던데.”

“... ...”

 

이 자식은 매사에 이런가? 그는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너희들 다 동료 아니야? 보통 이런 상의는 다 같이 하지 않아?”

“... 주간 회의로 충분해...”

“방금 엄청 찌든 목소리였는데.”

 

그는 약간 놀리듯 말했지만 카즈윈은 별달리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피네조차 이런 상황에는 익숙한 듯 그를 따로 부르러 오지 않았다. 베르다미어는 볼수록 특이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운을 떼었다.

 

“그럼 뭐 좀 물어봐도 돼?”

 

역시나 눈에 띄는 행동이나 말은 없었다. 잠깐 기다리던 베르다미어는 반쯤 체념한 상태로 혼자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살다 살다 내가 말이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건 또 처음이네. 그는 품어 두고 있던 궁금증을 하나씩 꺼내두었다.

 

“너희 조직은 뭐하는 데야? 사도나 이계의 신을 막는 단체라는 건 알겠는데, 그게 다야? 에린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심각한 사건들은 너희 소관이 아닌 건가? 그리고 전투조들은 원래 다 이렇게 젊어? 좀 더 나이 먹은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거야? 너희도 명맥이라는 게 있을 거고 세대교체가 일어났을 텐데, 나이들이 어째 다 비슷해 보여서.”

 

카즈윈은 듣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질문을 흘려 버린 것 같지도 않았다. 베르다미어는 물끄러미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 우리가 움직이는 기준은...”

 

그리고 아주 느리게 답변이 이어졌다. 잠깐 멍하니 있던 이가 반짝 정신을 차렸다.

 

“그게 주신의 뜻에 반하는지 반하지 않는지야... 그러니 모든 마찰과 갈등에 반응하지 않는 거고...”

“허어.”

 

주신의 뜻이라. 아리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밀레시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계의 신은 주신의 뜻에 어떻게 반하는데?”

“대부분은 주신의 권세를 몰아내고 그것을 자신이 차지하고 싶어하거든...”

 

결국 고도의 권력다툼 같은 건가? 그는 입 밖으로 내진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정도로는 고삐를 잡을 줄 알았다. 에레원이 ‘베르다미어!’하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선했다. 말을 좀 가려서 하라는 왕의 목소리가 머리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카즈윈은 바닷바람이 그의 이마를 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기사단에서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지. ... 그리고 세대교체 말인데...”

 

그의 눈이 흘긋 다른 조장들에게 향했다가 돌아온다.

 

“우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늘 비슷한 연배의 조장들이 임명되곤 했어... 이것도 관습이라면 관습이겠군.”

“... 그 정도로 꼬박꼬박 교체되는 것도 신기하네. 기사단 규모는 어때?”

“비밀 결사인 만큼 크지는 않아... 기사단 기준에 맞는 사람도 많지 않고...”

 

그거야 그렇겠다만. 베르다미어는 묻는 말에 꽤 잘 대답해주는 그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가장 기대 안 하던 사람이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럼 너희 단장에 대해서 물어봐도 대답해주나?”

“... ...”

“아, 젠장. 알았어. 그렇게 노골적으로 외면하지 좀 말아 봐.”

 

그는 이마를 싸쥐었다. 단장에 관련한 건 누구한테 물어도 다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니, 너희 대장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까지 기밀이야? 하긴 라이미라크교의 우두머리도 누군지 모르긴 하지. 종교 단체는 다 이런가? 베르다미어는 더 물어보기를 포기하고 카즈윈이 보고 있던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바람이 강하지 않았고 파고도 높지 않았다. 배를 띄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이리아라. 루에리의 일 이후로는 그가 단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땅이다. 갈 일이 없었다기보단 갈 일을 만들지 않은 쪽이었다. 굳이 갈 이유도 없었고.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굳게 다물었다. 멀린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그게 큰 위로는 되지 못했다. 내 잘못이 아니어도 누군가가 내 눈앞에서 목숨을 버린 게 없던 일이 되지는 않잖아. 따지고 보면 그들이 이렇게 이리아로 가는 이유도 그때의 사건 때문이긴 했다. 이런 걸 눈덩이라고 하던가. 복잡한 표정으로 바다를 보는 베르다미어의 옆에서 예상하지 못한 물음이 툭 튀어나왔다.

 

“걱정되는 거라도 있나?”

 

밀레시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틀었다. 어느새 그를 향해 있는 무덤덤한 낯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처럼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애꿎은 제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별거 아니야.”

“... 네가 문을 연 것 때문에?”

 

그는 뜻밖의 말에 심부를 찔린 표정을 했다. 정확히는 문을 연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티가 났나 싶었다. 카즈윈은 대충 예상했다는 듯 시선을 도로 돌렸다.

 

“네가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았었어.”

“... 틀린 보고는 아니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몰라.”

 

들어도 별로 좋은 얘긴 아닐걸. 베르다미어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짭짤한 바닷바람이 다시 불어와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는 약간 망설이다 슬며시 물었다.

 

“궁금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너한테 여기서 다 말하면 저기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인내심이 잿가루가 될 거다.”

“당장 다 말해달라는 뜻은 아니야.”

 

카즈윈은 건틀렛의 매듭을 고쳐 매며 말했다. 그는 옛날처럼 저가 모르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거니 싶었다. 권한으로 허락되지 않는 이야기들, 활자로조차 남지 못한 사실들. 베르다미어는 한숨처럼 숨을 깊게 내쉬었다. 딱히 비밀도 아닌데 뭘 숨길까 말까 재고 있나.

 

“나에 대한 기록을 읽어서 알고 있다면, 늘 그랬듯이 시작은 대체로 사소해. 코르 마을에 문제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아서 가볍게 간 거였거든.”

 

카즈윈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경청하는 방식은 침묵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다 소울 스트림이 오염되었다는 걸 알게 됐어. 좀 시끄럽고 제멋대로인 여자애도 만났고. 알지 모르겠지만 소울 스트림은 모든 밀레시안들이 연결되어 있는 곳이거든? 그래서 거기가 오염되기 시작하면 모든 밀레시안이 영향을 받아. 덕분에 악령이 되는 귀중한 경험도 해 봤지.”

“... 악령?”

“거긴 그렇게 부르더라. 내가 느끼기엔 내 영혼이 몬스터 속에 갇힌 느낌에 가깝긴 했지만.”

“답답했겠군...”

“당시엔 잘 몰라. 몬스터에게 동화되어서 내가 아니게 되거든.”

 

베르다미어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감각이 그의 발치를 간지럽혔다. 어지럽고 막막하고 괴로운, 영혼 깊은 곳부터 타오르는 듯한 고통.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게 되는 충동이 그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그러다가... 세 용사 중 두 명을 다시 만났지. 알고 보니 걔들이 꾸민 일이더라고.”

“... 무슨 이유로?”

“낙원의 재정립이었나. 잘 기억 안 나.”

 

사실 말하면서 신에게 간섭받지 않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뉘앙스가 떠오르긴 했지만, 베르다미어는 대충 얼버무렸다. 주신의 기사에게 말하기엔 지나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하가 강림했지.”

 

‘어, 그래서 그때 천둥이 쳤지.’정도의 가벼운 어투였으므로 카즈윈은 하마터면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지나갈 뻔했다. 베르다미어는 정말로 그 정도 무게로 말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신의 강림 정도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사실 그땐 너무 정신 없었어서 기억이 잘 안 나. 뭐가 터지고 부서지고, 사라지고 뒤집히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거든.”

 

뭔가를 되물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카즈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격렬한 사건이었다는 건 더 이상의 묘사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좀 지난 후에 멀린을 만났는데, 아, 멀린이 누구냐면...”

 

멀린의 ‘이상함’에 대해서 긴 얘기를 늘어놓는 베르다미어를 바라보던 그가 미묘하게 웃었다. 말은 거친데 그 속에서 느껴지는 신뢰가 당연스러웠다. 아무나 덥석 믿는다는 평판은 헛소문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여간 타르라크를 노리는 놈들이 그 애를 납치했어. 걔가 이전의 타르라크가 맞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네. 알아서 좋은 것도 없지만.”

 

그는 자신만 아는 얘기를 쉽게 풀어 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카즈윈은 적당히 가지치기해 가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오래된 정보와 새로 듣게 된 것들을 맞춰 보았다.

 

“그래서 트레저헌터랑 멀린이랑 같이 그 애를 구하러 갔지. 그랬다가... 음.”

 

베르다미어는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와 비밀이라고 약속한 건 아니었지만, 핀카라와 반족에 대한 걸 얘기해도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딱히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어물거렸다.

마침 그때, 구원처럼 톨비쉬의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출항 준비가 다 되었다는군요. 두 사람 다 이리로 오시죠.”

“금방 가.”

 

그는 마지막으로 카즈윈을 돌아보았다. ‘다음은?’하고 묻고 있는 표정을 숨길 기색조차 없는 기사의 얼굴은 어쩐지 그를 웃게 했다. 베르다미어는 어깨를 으쓱하며 키득거렸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그는 일행이 있는 쪽으로 경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카즈윈은 느릿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다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배는 순풍을 받고 순조롭게 나아갔다.

 


캠프의 마지막 말뚝을 박은 베르다미어가 저쪽에 어색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니, 멀린이랑 트레저헌터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안 맞는 사람들이라서 그런 건가? 그는 끙끙거리며 캠프 설치를 마무리했다. 뼈대를 세우는 건 카즈윈이, 마무리는 그가 맡아서 평소보다 품이 덜 들었다. 다 설치하긴 했는데... 캠프에 들어가 저 둘 사이에서 쉬느니 그는 혀를 깨물기를 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일단 제일 쉬어야 하는 한 명을 먼저 들여보내는 게 낫겠지?

 

“아벨린.”

“아, 네.”

“캠프 설치 마쳤어. 들어가 쉬어. 신성력도 고갈되었다며.”

“감사합니다. 그럼...”

 

아벨린은 카즈윈을 쳐다보지도 않고 캠프 안으로 들어갔다. 베르다미어는 침침한 얼굴로 닫힌 캠프의 문을 바라보다가 멀찍이 서 있는 기사에게 다가갔다. ‘친해지길 바래’따위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서성거리고 있자니 어색한 공기를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카즈윈.”

“... 아벨린은 들어갔나?”

“응. 왜, 뭐 할 말 있었어? 다시 불러줄까?”

“할 말은 그쪽이 아니라 너한테 있어...”

“... 나?”

 

왜지? 그는 눈을 끔벅였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긴 했다. 선지자들이 선수를 친 것도 그렇고, 목걸이의 내용이 흘러나간 듯한 정황이나, 선지자들의 다음 행보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런 걸 나랑 상의하려고? 눈치를 보아하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뭔데?”

“... 최근 일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선지자들?”

“그래... 선지자들은 얼마 전에는 아발론 게이트에 침입하더니 이번에는 아르후안의 제단에서 우리와 마주쳤어.”

“... 내가 입 대도 되는 문제야?”

 

카즈윈은 눈썹을 가볍게 실룩였다. 베르다미어는 아직 카즈윈의 표정을 읽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는 짤막한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 넌 어쨌든 우리와 함께 행동하고 있어. 기사단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발언은 자유롭게 해도 괜찮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디 마법적인 도청장치라도 있는 거 아닌가 싶은데.”

“... 돌려 말하지 않아도 돼.”

 

그는 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돌려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건 둘째치고 진짜 솔직하게 말하라고? 외부인이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다. 베르다미어는 그 선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잽싸게 말을 돌렸다.

 

“네 생각부터 말해봐.”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하나의 결론에 이르지. 우리 중 누군가가 선지자와 내통하고 있다.”

 

카즈윈은 음성에 고저를 두지 않으며 말했다. 딱히 멀리 나간 생각도 아니었고,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한 부분이었다. 베르다미어는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도 같은 의견이긴 했다.

 

“그걸 사람들한테 말할 생각은 아니지?”

“아직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기사단 내부에 불신이 싹트게 되면 결국 선지자들만 이득을 볼 뿐이니까. 무엇보다... 신을 따르는 집단인 기사단 내에 내통자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생각해 볼 만한 거라고는 생각하는데, 말하기에 좋은 때는 아닌 것 같다, 네 말대로.”

 

베르다미어는 선을 넘지 않으려고 그렇게만 대답했다. 카즈윈은 잠시 침묵했다.

 

“... 당신은 톨비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밀레시안의 얼굴에는 당장 ‘이 자식 걔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카즈윈은 그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남쪽의 바다 같다고 느꼈다. 아주 잠깐. 베르다미어는 단숨에 대답했다.

 

“잘 생겼지.”

“... ...”

“... 아니, 난 농담도 못 하냐. 농담은 아니긴 했지만.”

 

그는 작게 툴툴거렸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한 말에 그렇게까지 식은 눈이 될 건 없잖아. 그는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속을 잘 모르겠어서 쉽게 믿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긴 해.”

“... 저번에 내가 톨비쉬에 관해 의문을 품었던 걸 신경 쓰고 있나?”

“꼭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본능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기묘한 거리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다른 누구와 비교하는 걸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카즈윈의 경우에는 그런 거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믿는다고 했으니 믿고, 밀어내는 기색이라고는 없는 감정의 흐름. 톨비쉬는 다르다. 어디론가 흐르다가도 금세 가로막히는 기분이었다. 카즈윈은 화산 온천의 물큰하고 건조한 공기가 뺨에 달라붙는 걸 느끼며 말했다.

 

“네 나름대로 확신 같은 게 있어서 하는 말이겠지...”

 

밤이 깊은 가운데 이웨카와 라데카가 나란히 하늘 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카즈윈은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톨비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너희는 그래도 꽤 오래 지냈을텐데.”

“글쎄... 시간이 모든 걸 설명해주지는 않으니까...”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해야 할 말을 정돈했다.

 

“기사단 내에서는 모두에게 인정받는 모범적인 기사로 평가되고는 있지만... 모르겠어. 행동 하나하나는 자연스럽지만 몇몇 행동을 모아 놓고 보면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어떤 행동이 좀 이상하다 싶어서 조사해 보면 마치 누가 준비라도 해 둔 것처럼 바로 의문이 풀릴 때도 있고...”

 

마치 너를 기사단에 데려온 것처럼 말이야. 카즈윈은 그 말은 않고 입을 잠시 다물었다. 베르다미어는 납득이 갈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나는 톨비쉬를 의심하고 있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톨비쉬가 내통자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어.”

“동료를 의심한다는 게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지. 그렇다고 의심을 멈출 수도 없을 테고.”

“그래... ... 대충 그런 얘기야.”

 

카즈윈은 가볍게 턱짓하며 무기를 뽑아들었다. 베르다미어는 그제서야 등 뒤에 시체들이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놈의 선지자들은 지치는 법도 없나? 아니, 그새 이걸 또 보냈단 말야? 무기를 뽑는 작은 소음과 이미 죽은 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가 온천의 고요함을 깨부쉈다.

밀레시안은 시체들을 다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데에 집중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각자 전투를 이어가던 그들의 거리가 가까워질 즈음, 그가 무심코 물었다.

 

“넌 그럼 다른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거야?”

“... ?”

“톨비쉬만 네 의심을 받고 있냐는 뜻이야.”

 

베르다미어는 다가오는 시체의 가슴팍을 발로 차 멀리 밀어내며 덧붙였다. 카즈윈은 석궁에 볼트를 장전하며 침묵했다.

 

“... 딱히...”

 

베르다미어는 검을 잠깐 허리춤에 돌려 두고 체인을 뽑아들었다. 사슬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느리고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그는 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주의하며 시체들을 가로막았다.

 

“피네에게선 그런 기색이 전혀 읽히지 않았고... 아벨린은 그럴 사람이 아니지... 알터는... 알터니까...”

 

알터니까? 베르다미어는 잠깐 킥킥거렸다. 시체들이 몰려오는 수가 점차 적어지고 있었다. 그는 여유를 찾고 농담처럼 다시 묻는다.

 

“그럼 나는?”

 

카즈윈은 검을 휘둘러 시체의 팔을 날려 버리면서 생각했다. 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깃들었다.

 

“넌...”

 

체인이 땅에 박혔다 되돌아오면서, 베르다미어는 아무 생각 없이 카즈윈 쪽을 바라보았다. 유사시에는 엄호할 요량이었다. 청회색 눈동자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내가 믿어 보기로 했잖아.”

 

카즈윈의 목소리는 드물게 선명했다. 어쩌면 베르다미어가 그냥 그렇게 들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잠시 입술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렇구나, 라거나 싱거워, 하는 말 없이 그는 마지막 시체를 정리했다.

답은 한참 후에 돌아왔다.

 

“고마워.”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