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낮잠은 불법이 아니잖아?

히프노스 드림

하데스의 궁전은 평화로운 곳이었고,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따분한 곳이었다. 지옥의 왕 하데스는 매일 몰려드는 망자를 옳게 된 계층으로 보내거나 지옥 주민들의 민원을 받아주느라 바쁘고, 타나토스를 수명이 다한 인간을 잡으러 다니느라 궁전에 오래 머물지도 않고, 사고뭉치 왕자님은 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매일 이 저승을 탈출하는 아슬아슬한 활극을 벌이느라 몸이 남아나질 않지만……. 이 모든 일이 매일 반복되다 보면, 결국 지루함과 위험함도 모두 하나로 엉켜 ‘평화’라는 형태로 완성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평온함 속에서도 가장 바쁜 듯 바쁘지 않은 이를 꼽자면, 역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신이 아닐까.

나는 긴 의자에 드러누워 잠든 히프노스를 관찰하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역시 히프노스는 아기가 아닐까?’

 

안대를 쓴 채 평소 두르고 있는 망토를 덮고 잠든 히프노스는 보는 사람이 다 행복해 보일 정도로 달콤한 잠을 자고 있었다. 역시 잠의 신 아니랄까 봐. 숙면 레벨이 장난 아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보면 얄미움에 속이 뒤집힐 것 같을 정도라고 할까.

 

“코베르타, 뭐 하고 있어? 히프노스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이크. 내가 유희 시간을 즐기는 사이에 오늘도 탈출 놀이……, 아니, 지옥 보안 점검을 마친 자그레우스가 온 모양이다. 그나저나 저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자꾸 저러네.

하지만 한낱 인간인 내가 어찌 하데스의 아들이자 지옥의 왕자님인 신을 이기겠나. 사실 묵찌바 대결이라면 이길 자신이 있지만, 어쩌다가 여기 얹혀사는 주제에 쓸데없는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은 나는 불만을 고이 품속에 묻어버렸다.

 

“쉿, 왕자님. 히프노스 깨요.”

“안 깰걸? 저 녀석은 한번 마음먹고 자면 작정하고 깨울 때까지 어지간해선 안 깨니까.”

“정말요?”

“그럼. 누가 뭐라 해도 저 녀석은 잠의 신이니까.”

 

뭔가,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평가하기에도 신학적으로 설명하기에도 미묘한걸. 그런 논리라면 아프로디테는 망한 사랑은 절대 안 해야 하고 헤라는 가정이 평온해야 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결국 반박할 말을 찾아내진 못한 나는 말을 돌리기 위해 히프노스가 옆에 끼고 있는 망자 체크리스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러면 일은 어떻게 해요?”

“오, 너는 정말 일밖에 모르는구나.”

“그런 나라에서 와서요.”

“저런, 미래의 바다 건너 세상은 무서운걸.”

 

그럼. 무섭고말고. 괜히 내 고향이 ‘헬조선’인줄 알아? 오죽하면 내가 21세기에 그리스로 관광 왔다가 이유도 모를 마법으로 기원전 신화시대 저승에 왔는데도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라고 생각했겠어?

물론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 전쟁으로 혼란스럽고 무섭긴 하니, 뭐가 더 힘든지 비교할 생각은 없긴 하지만. 애초에 인간의 역사는 고통스러운 시절이 대부분이지 않던가. 평화의 시대는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법이지. 내가 현자는 아니라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히프노스에겐 아무 볼 일 없는 거야?”

“예. 그냥 귀여워서 보고 있어요.”

“오, 그래…….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지.”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대체 어디가 귀엽다는 거지?’라고 말하는 눈빛이잖냐. 자그레우스.

하지만 그러는 너도 귀여운 걸 우리 왕자님은 모르고 있겠지. 그러니 괜찮다. 애초에 모두에게 귀여워 보이는 것보다는 내게만 귀여워 보이는 게 훨씬 낫기도 하고. 그래야 경쟁이 적을 거 아냐? 나 혼자 히프노스를 독점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

그러니까 나는 귀여운 잠의 신을 좀 더 구경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대화를 끊었는데, 자그레우스는 아직 할 말이 있는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같이 한숨 자는 게 어때? 어차피 넌 딱히 하는 일도 없잖아?”

“예? 그래도 될까요?”

“그럼. 누가 말리겠어? 낮잠은 불법이 아니잖아?”

 

낮잠이야 불법이 아니지. 그런데, 신이 자는 곳에 인간이 염치없이 끼어도 되나? 딱히 수상한 짓을 할 건 아니지만, 불경죄 같은 걸로 저주받는 거 아냐? ‘그리스 신 특기. 마음에 안 들면 저주함. 마음에 들면 별자리로 만들어 버림.’이잖아.

하지만……. 그래. 자그레우스가 권한 거라면 괜찮겠지. 그럼 왕자님만 믿고 갑니다. 자그레우스가 좀 짓궂긴 해도 나쁜 신이 아닌 걸 아는 나는 슬그머니 히프노스 옆에 누워 이불째로 그를 껴안았다.

 

“헤헤.”

 

신은 인간이랑 달라서 그런 걸까. 이렇게 껴안고 있으니 독특한 체취가 느껴진다. 마치 자연 그 자체를 껴안은 거 같은, 풀 내음과 흙내음. 그리고 달빛을 머금은 이슬 같은 희미하고 그윽한 향까지.

 

“……저기, 너무 꽉 껴안는 것 같은데.”

“응?”

 

눈을 감고 후각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머리 위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대체 언제 망토 밖으로 빠져나온 건지 모를 가늘지만 단단한 오른팔. 안대를 슬쩍 들어 올린 오른손과 손이 만들어 낸 그늘 속에 보이는 반쯤 뜬 금빛 눈동자 한 쌍.

마치 명화 속 한 장면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히프노스는 곤란하다는 듯 멋쩍게 웃고 있었다.

 

‘미친.’

 

세상에 맙소사 비상사태 큰일 났다. 웬만하면 안 깬다고 한 왕자님의 말은, 아무래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스틱스 강 걸고 다시 말해보라 할걸.

창피함에 이성이 날아갈 뻔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후,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어라?”

 

방금 잠에서 깼음에도 명랑한 히프노스의 의아함 가득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지만, 나는 도무지 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신도 가끔 수치심 때문에 구름 뒤로 숨곤 하는데, 인간인 내가 어떻게 이 쪽팔림을 견디냐고!

‘하하하.’ 도망치는 날 보며 시원하게 웃어버린 망할 왕자님은, 이제 놀리는 대상을 근처에 있는 히프노스로 재설정했다.

 

“히프노스, 아무리 그래도 쫓아내면 어떻게?”

“아니, 나는 아무 짓도 안 한 거 같은데?”

“아, 불쌍한 코베르타. 그 녀석은 그냥 너랑 같이 자고 싶었을 뿐인데.”

“…….”

 

아아. 히프노스. 제가 나중에 이 모든 일을 메가이라나 하데스 님께 고자질할게요. 그때는 혼나는 자그레우스 저희가 웃어줘요. 지금은 작전상 후퇴합시다.

나는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영웅처럼 다짐하며 석류나무 정원으로 도망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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