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레지레이] 귀찮은 여자

“레지스, 대체 뭘 한 건지 모르겠는데, 레이츠한테 싹싹 빌어.”

* 와후리의, 지인분의 드림컾을 신나게 2차해서 먹는 사람이 나야나222222

* 보통 인칭대명사의 성별구분을 없게 쓰기는 하지만... 뭐랄까, 어드미니스터를 지칭하는 '그녀'는 그자체로 고유명사적인 느낌이 강해서 그렇게 표기했습니다.

* 사족은 아래에 달아둡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아까까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일상이었을 텐데. 레지스는 제 모든 연산회로가 빨간 불을 켜며 정지되는 것을 느꼈다. 제가 유기체였다면 지금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을 것이 뻔하다. 다른 때라면 꽤 유쾌하게 이 사실을 읊었겠지만, 그럴 때가 아니다.

레이츠가 제 앞에서 울고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진짜 수분으로 구성된 눈물은 아니지만,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푸른색 물방울들은 틀림없이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눈물이 맞다. 때마침 아르크 네와 다과를 갖던 중이어서 제게로 꽂히는 시선들이 영 써늘하고 무섭다. 평소라면 그깟 것쯤이야 코웃음 치며 넘어갈 텐데 지금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츠의 여느 때와 같은 응석에다가 제가

“곤란한 공주님이네.”

라고 말하기 무섭게 벌어진 일이어서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일단은 제가 원인 같아, 레지스는 덥석 무릎을 꿇고 도게자부터 했다. 상대와 여기의 갤러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자세이긴 했으나, 메인 시각센서가 안 보이건 말건은 원래 제게 중요하지 않으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정작 레이츠는 더더욱 소리 높여서 울었고, 뒤통수 위로 아르크의 목소리가 떨어진다.

“레지스, 대체 뭘 한 건지 모르겠는데, 레이츠한테 싹싹 빌어.”

남들에게 늘 다정한 갈색 머리의 남자애는 제게만은 유달리 박하곤 했지만, 지금만큼 냉랭한 적은 없었다. 인망 두터운 아르크가 이렇게 나오니 오늘의 다과회 멤버들 역시 몸을 사린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변덕스런 구조선을 기대할 수 없을 성싶다. 그렇다면 옛날, 반란군 시절처럼 혼자서 돌파해야 할진대 덜그럭 멈춰버린 연산회로를 애써 굴려서 나온 것이라곤, 저답지 않게 볼품없는 몇 마디가 다였다.

“내가, 그, 뭘 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안해.”

조각조각 난 말 뒤로, 여전히 울음에 차서 일렁이는(와중에 레지스는 연산회로 한구석으로 이 애의 보이스박스는 엄청난 성능을 가지고 있다고 감탄했다) 목소리가 쏟아졌다.

“나는, 흑, 레지스한테 귀찮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우아아앙!”

비명 같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제일 먼저 든 생각이란 아무래도 도게자는 틀린 답안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은 사과도 틀렸을 테지만. 레지스는 속으로 나오려던 한숨을 삼켰다.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처음의 문장이 진짜라고 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귀찮은 짐 혹은 곤란한 공주님.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고 넌 그렇지 않다고 확고하게 단언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연극조의 어투에 피코그램 단위의 진심이 섞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단언하기엔, 먼지 같은 양심이나마 찔리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왜 답지않게 거짓으로나마 상황을 무마하지 않느냐고. 그건 네 특기지 않느냐고.

답은 간단하다. 레이츠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다고 해야 할까. 무너진 하얀 기체를 앞에 두고 저장장치에 새겨둔 새삼스러운 각오다. 하얀 털로 뒤덮인 누구 씨라면 네가 그런 기특한 맘도 먹느냐고 비아냥거릴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앞에서는 진실을 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건 맞는다. …뭐, 말하지 않는 건 수두룩할 테지만, 최소한 그건 거짓말이 아니지 않은가.

그사이에도 연산과 연산은 끊임없이 거듭하고 충돌했다가 덧씌워지며, 그다음의 답을 도출했다. 그건 지독하게도 진부한 나머지 암약자 렉-레지스터가 낸 답이라기엔 영 세련되지 못할 터이나,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저에게 감히 주어진 두 번째 기회를 우그러뜨릴 수는 없으니까.

레이츠는 그렇게 끊임없이 목 놓아라 울고 있는데도 숨 하나 헐떡이지 않는다. 과연 안드로이드다. 역으로 말하라면 끝없는 서러움은 해결되기 전까진 영원히 전축 위를 뱅글뱅글 맴돌 거란 뜻이었다. 어떤 굴레에 갇히는 건 이제 질색이다. 레지스는 레이츠를 끌어안았다. 어깨 너머로 루디의 디스플레이에 깜짝 놀라는 마크가 뜨는 게 보였다. 그래, 기억 메모리에 꽤 많은 손상이 가해지긴 했지만 이 오랜 친구의 눈에도 제가 이럴 놈으론 안 보였던 거겠지. 그만큼 저답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안다. 그래도 창피하거나 따위의 여타 감정 메모리는 나중에 다루도록 캐시에 미룬다.

“내가 그다지 말한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대는 내게 틀림없이 중요해. 짐 같은 게 될 리가 없지.”

최대한 음량을 줄여서 레이츠에게만 들릴 크기로 중얼거렸다. 정말 볼품없군. 자조할지언정 속은 조금 편해졌다. 이제 이 아가씨가 다른 때처럼, 밝게 웃어줬으면 하는데, 그건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레지스는 이제 레이츠의 판결을 기다릴 뿐이다.


이어지는 사족

1. 레지스의 입버릇 같은 곤란한 아가씨/공주님을 시로가 자기식으로 귀찮은 여자라고 번역해서 말하는 바람에 벌어진 헤프닝이었음

2. 레이츠가 유독 서럽게 울어제낀 건, 역시 레지스의 짐작대로, 사과를 해왔기 때문에 정말 자기를 귀찮은 짐이라고 인식한 거라고 생각했던 것으로다가.

3. 나중에 루디가 나데나데하고 디어가 노래불러줬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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