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

[레지레이] 해바라기

그러므로 디어는 복잡다단한 이 기체에게 묻는다

* 타 플랫폼에 있던 것을 재이전해옴. 오히려 이게 처음 썼던 레지레이 아닌가…?

* 레지스에게 있어서 '그녀'의 흔적을 지닌 모든 존재는 성역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합니다. 레이츠는 오히려 지나간 과거의 폐허에 서 있는...다른 존재이고.

* 레지레이라지만, 정작 레지스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디어와 레이츠만 나옵니다()


날씨가 좋았다. 실시간으로 조회해본 현황과 예보 모두 맑음에 약간 건조함. 유기체에는 조금 목마른 날씨일지 몰라도, 저희 안드로이드와 기계에는 회로에 습기도 들이차지 않는 최적의 날씨다. 저희 행성에선 볼 수 없는 모양을 한 날은 실내에만 있기엔 아깝다. 원하는 걸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내딛어도 좋다는 것을 아르크 일행에게 배운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언제 어디서나 게릴라 라이브를 할 수 있게 미디어 모듈을 조정하는 정도이긴 했지만, 이건 응당 프로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 아니겠나. 레지스는 수요-공급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자기 손을 거치지 않는 게릴라 라이브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그래놓고 관람은 1열에서 하는 걸 보고, 무대가 끝나고 한 대 때렸다), 친구들과 열었던 게릴라 라이브가 유쾌한 추억으로 남았으니 누군가 저의 노래를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노래를 부를 용의가 있다.

누군가를 만나면 좋겠네. 작은 소망을 가지고, 디어는 산책로를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산책로에는 볕이 잘 들었고, 저의 상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언제나 늘, 이곳에서의 산책은 좋았지만서도. 안드로이드의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이 풍경은 매일매일, 아니 초마다 그 모습을 바꾸었다. 단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은 풍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공간이라는 점은 언제나 경탄을 자아낸다. 어쩌면 그것은 유기체만의 힘이고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디어는 일부러 시각센서에서 도감 색인기능을 껐다. 유기체처럼 지금 이순간의 자연을 즐기고 싶었던 탓이다. 이름 모를 들꽃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의, 소소한 버릇이다. 숙소로 돌아가면 저장된 시각 정보를 토대로 도서관에서 직접 식물도감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노래 가사에서는 흔히들 꽃 하면 봄이라지만, 디어가 직접 보고 겪은 바로는 사계절은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길가 옆에는 온갖 꽃이 가득하지 않은가.

콧노래(안드로이드는 인간과 같은 비강구조가 없으니 일종의 비유법이 되지만)를 부르며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샌가 동산 중턱의 평평한 곳에 도착했다. 혼자가 되고 싶을 때 올라가곤 하는 꼭대기와는 반대편에 있는 곳이다. 여기서 보는 경치는 오로지 자연뿐이라, 산책이라 하면 여기가 목적지이고 반환점이 되곤 했다.

그곳까지 몇 걸음 남겨둔 시점에서 디어는 근래에 낯을 익힌 어느 기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반사적으로 초점을 당겨서 확인해보아도 그 기체가 맞다.

타입 R-8. 어드미니스터가 폐쇄된 이후, 레이츠라는 고유명을 가지게 된 그가 햇살 아래에 멍하니 앉아있다. 토끼 귀처럼 보이는 센서는 주변 데이터를 수집하는 목적을 방기한 채 아래를 향해 늘어져 있지만, 손상된 흔적이 없으니 그저 한가로이 늘어져 있는 것이리라. 모든 인류의 총집합이었던 ‘그녀’의 조각인 만큼 이러한 면은 자연스럽게 유기체에 가까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지금 이 모습은 그가 아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레지스가 있고 없고의 문제다. 그 음흉한 레지스의 어디가 좋은 것인지. 물론 아주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저만큼 목을 맬 이유도 없으니까. 어디 사기라도 당한 거 아냐? 디어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이 또한 아르크에게서 배웠다) 저 애에게로 다가섰다.

일부러 중력 조절 장치의 출력을 줄여 발소리를 쿵쿵댄 디어는 레이츠의 곁에 앉았다.

“안녕, 레이츠.”

“안녕, 디어.”

옆에 앉아 말을 걸고서야 레이츠가 반응했다. 유기체보다 압도적으로 오감 정보에 민감해야 할 안드로이드의 지나치게 굼뜬 반응에 디어는 이 애가 정말로 괜찮은 게 맞나 다시 한번 의심했다가, 연이어 어느 정보를 떠올리고선 연산을 종료했다. 레이츠는 어드미니스터의 붕괴한 파편에서 태어난 존재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한번은 조각났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여기에서, 한 가닥짜리 빈약한 가설―레이츠는 레지스에게 사기당했다―은 폐기된다. 그의 근본이 어드미니스터의 보좌인 한, 레이츠를 구성하는 모듈의 논리연산은 틀리려야 틀릴 수가 없는 것이다. 감정이라는 불확실요소가 섞이지 않는다면 안드로이드의 사실관계에 의거한 논리연산이 틀릴 가능성은 소수점 아래 스무 자리는 내려가야 한다.

질문의 화살은 곧 디어 본인에게 돌아간다.

나는 왜 레이츠에게 이런 식으로 신경을 쓰는가. 오래된 레코드판을 재생하다가 한 번 튀고 마는 바늘처럼, 불쑥 치밀어 오르는 이 노이즈는 본래 레지스에게서만 확인되었다. 디어는 이를 짜증이라 명명했으나, 레이츠의 등장으로 그 명칭이 틀렸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으로 말하면 직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의 이름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본의는 아니지만 곱게 지켜졌던 나날이 있는 강철의 무희는 그들과 저 사이에 단절된 어떠한 깊은 골짜기를 감지한다. 분명하게 존재하나, 제게는 덮어 쓰여서 접근할 수 없는 메모리다. 과거는 그 자리에 분절되어, 저는 현재를 발판으로 미래로 쏘아졌다. 발사를 위해 그곳에 남은 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지는 영영 감추어진 채.

지나치게 흰 곳은 오히려 어둡다고, 모순인 문장이 불려온다. 축제에 맞는 옷을 새로 지었다면서 으스대던 레지스가 실은 성묘를 위해 하얀 정장을 마련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딛고 있는 현실은 저의 것보다 반 발자국 뒤에 있다.

그러므로 디어는 복잡다단한 이 기체에게 묻는다.

“레지스의 어디가 좋은 거야?”

과히 직구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라고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검증은 질문으로 시작되며, 앎의 시초이므로. 디어는 알고 싶었다. 동일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개체 대 개체로서. 차이는 대화를 통해 나란히 엮일 수 있음을 배웠다. 어드미니스터의 영향을 받은 모든 안드로이드는 이제 각자의 길을 간다. 오히려 그것이 저희가 추구하는 인간됨에 가깝다고 디어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레이츠의 디스플레이에 빨갛게 불이 들어왔다가, 곧 평상시의 색깔로 바뀌었다. 냉각팬의 웅웅거림이 손에 잡힐 듯했다. 지금 그의 연산회로는 가히 엄청난 헤르츠로 진동하고 있을 테다. 과연 저 애의 답은 무엇일까. 차마 짐작하지도 못하는 대답을, 디어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레이츠는 깊은숨을 토해내듯 보이스박스를 진동시켰다.

“어쩌면, 그녀의 연장선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 감정은 내 거야. 내 재시동은 틀림없이 이 감정으로 기인했으니까.”

레이츠가 어드미니스터를 거기까지 의식하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아서, 디어는 잠깐 멈칫했다. 천진하기만 하던 모습만을 생각했던 탓이었을까. 확실히 레이츠는 과거에서 비롯한 산물이 맞았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빨리 연상된 게 있었다.

“그건, 음, 해바라기 같네.”

아르크가 보여준 식물도감의 설명. 병렬적으로 떠오른 정보는 빠르게 지금의 대화와 얽혀 시냅스를 이뤘다. 레이츠는 레지스에게, 레지스는 어드미니스터에게. 오로지 한 방향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벡터. 아니, 이제와서는 한 방향만은 아니겠지. 일방통행이었던 흐름은 레이츠가 전환했다. 레지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원래 개체의 주장과 실제로 벌어진 사건은 별개이지 않은가. 여러 우주를 통틀어도 손에 꼽는 암약자가 당황하는 꼴이 벌써부터 선해서 디어는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인 걸까. 레이츠는 저의 미소에 화답하며 자신의 바디를 가리켰다.

“색깔도 비슷하니까, 괜찮을지도! 그럼 다음에 레지스한테 해바라기를 선물해야겠다!”

해맑은 목소리를 들으며, 디어는 어쩌면 제가 모르는 과거에 있었던, 혹은 있었을지도 모를 미래의 한 장면을 그려보았다. 그림자 없는 태양 아래에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레지스 주제에 괘씸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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