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는 종종 사건에 휘말린다
행운의 부재
전 남자친구 사건이 해결되고 난 후 며칠, 타냐는 해방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부모님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여전히 전 남자친구가 어떻게 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에 잡혀가 벌금까지 냈지만, 그는 타냐에게 그 이상으로 뽑아낼 게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번호까지 바꿨다.
“···쌤, 타냐쌤!”
“아, 세라 씨?”
“무슨 일이에요?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시고··· 이런 일 드문데!”
“에이, 별건 아니고 잠을 잘 못 자서요.”
“헉, 그럼 안되죠! 잠깐 바람 쐬고 오는 건 어때요?”
“으응, 지금은 사람들이 많을 시간대인걸요.”
타냐는 희게 웃었다. 유난히 혈색 없는 피부가 창백해 보였다. 하지만 타냐는 제 모습이 그런 줄도 모르고 세라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세라는 심통 난 얼굴을 하고는, 타냐의 가운을 벗겨 던져버렸다.
“세라 씨?!”
“지금 타냐쌤 상태가 어떤지 알아요? 뒷일은 제가 수습할 테니까 같이 외출이라도 다녀와요!”
“세라 씨~~~!”
···이것이 타냐가 한창 사람이 많을 시간대에, 대로변으로 나가게 된 이유다.
“타냐쌤, 여기까지 나온 게 얼마 만이에요?”
“음, 그동안 스푼이랑 숙소만 왔다 갔다 해서. 이 정도 멀리까지 나온 건 반년쯤 됐을걸요?”
“히익, 안 답답해요?”
“아하하···.”
답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타냐는 웃어넘겼다. 반 자의, 반 타의적으로 제한된 타냐의 행동반경은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반 정도는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결국 타냐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보신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이 상태가 제일 마음이 편한 게 당연했다.
펑-
“헉, 벌써?”
“세라 씨, 얼른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위험하니까 어디 가지 마시고, 여기 역 앞에 꼭 서 있어야 해요!”
“안심하고 다녀와요.”
오래 걸리면 그냥 스푼으로 돌아가요!
예상했던 사건이 일어나고, 타냐는 괜히 손톱 옆의 거스러미를 뜯었다. 아, 피난다. 대충 손가락을 입에 문 타냐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거리낌 없이 뒤섞여 있는 모습에서 묘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보이자, 데인 듯이 시선을 돌렸다.
아, 세라 씨 언제 오실까···.
“피 나면 입에 넣고 보는 건 여전하네.”
“···우디?”
“그래. 날 경찰서에 보내 놓고 잠이 오디? 말했잖아. 언론 쪽에 아는 친구가 있다고.”
“···”
“네가 한 짓이 전국에 알려져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어? 말을 해봐. 응?
타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우디가 어깨를 쿡쿡 밀치는 대로 뒤로 밀렸다. 뒤에서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사람들은 그 두 사람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아, 상관없다고 해야 하는데.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어서 애꿎은 눈물만 차올랐다. 타냐는 언제나 이랬다. 화가 나면 눈물 먼저 치고 나와, 타냐를 형편없이 여린 사람으로만 만들었다.
“사, 상관없어.”
“거짓말을 할 거면 목소리나 떨지 말던가. 그러니까 불안하면 내 말을 잘 듣지 그랬어.”
“증거도 없잖아.”
“없긴 뭐가 없어. 그 촌 동네, 서로 다 아는 사람들인데 당연히 증인은 차고 넘치지. 오히려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야. 다들 알아.”
네가 네 엄마를 자살로 몰아갔다는 거 말이야.
흐읍, 타냐는 숨을 잘못 들이켜고는 사레가 들린 듯이 여러 번 기침했다. 고향 사람들은 타냐가 능력을 발현했다는 사실도 모른다. 안다고 해도 타냐의 특기와 엄마의 자살을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애써 그렇게 외면해왔었다···.
“거짓말 치지 마!”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안 그래?”
“그렇다고 해도, 나를 협박하는 사람은 없어. 너만 이래, 너만.”
사람 벗겨 먹을 생각이나 하는 너만!!
-‘그렇다고 해도’? 말해놓고도 너무 비양심적인 말에 스스로 놀란 타냐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래서 난간을 놓쳤고, 뒷걸음질 친 곳은 허공이었다.
“이 년이 그래도···!”
그리고 어깨가 밀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타냐는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펑, 폭발의 여파로 계단바닥이 뒤틀렸다. 타냐는 뭘 할 새도 없이 그대로 잔해 안에 갇혀 떨어져 내렸다. 아,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 손목은 삐었는지 결렸고, 머리는 축축했다. 눈은 가물하게 감겼다.
그런데도 공포심이 치고 올라왔다. 고통보다도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미치도록 무서웠다. 이것이 받아들일 이유도, 이해할 이유도 없는 우연으로 인한 사고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미련이 있어서 그런 걸까. ···생존 욕구보다 죄의식이 강했던 2년 전만 해도 그러지 않았을 텐데-
마음을 붙인 사람이 너무 많았다. 스푼, 의료반 식구들, 상담받으러 오는 사원들, 서장님, 귀능 씨, 오수 씨, 사사 씨, 혜나, 나가 군 등. 한 손으로 다 꼽히지 않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눈물이 흘렀다. 특히···
-'이제 알겠어?'
-'죽음의 공포란 거 말이야.'
그렇게 멀어지는 시야 너머로, 붉은 눈이 비치는 듯했다.
꿈을 꿨다.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빌려 타냐 자신을 바라보는 꿈이었다. 그 기억은 타냐가 처음으로 능력을 발현했을 때의 장면을 비추고 있었다. 스푼에 들어가기 전 19살의 봄. 타냐는 울며 뭔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특기: 감정 조절>
- 상대는 원하는 감정 상태로 만들 수 있다.
- 조건은 불명. 지금은 일단 포옹인 것 같다.
- 본인에게도 적용 가능
타냐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야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이니 당연했다. 그래서 다음에 적힐 말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경험해 본 감정으로만 조절 가능···.”
그래서 그때의 타냐는 행복해질 수 없었다. 만화나 소설, 드라마에나 나오던 눈물 나는 행복함 따위를 느껴보고 싶었던 타냐는 절망하며, 자신은 왜 행복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욱신거림에, 타냐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시점은 타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낄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것은 누구의 시점이란 말인가? 오싹한 소름이 끼쳐왔다. 주변을 둘러볼 수도 없었다. 마치 지금 이 장면에 집중하라는 듯이, 앞말고는 볼 수 없었다.
그때, 피 묻은 손이 19살의 타냐 머리 뒤에서 껴안아 왔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 뒤로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이 매달리고, 또 뱀 같은 목이, 기괴하게 큰 눈을 갖고 있는 아기가···.
-수많은 귀신들이 하나같이 즐겁게 작당하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당연히 타냐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기괴한 각자의 목소리가 겹쳤기 때문이다. 그중에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우 리 가 알 려 줄 게'
그리고 하얗게 빛나는 것이 시야를 덮쳤다.
다나는 사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연락 한 통 없는 나가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아마 혜나가 대신 받아 나가의 휴대폰이 돌무더기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바로 잡아 와서 암바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다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무르다, 유난히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보았다.
“야, 저긴 왜 저렇게 사람이 많냐.”
“네? 살인 미수라는데요.”
가해자는 잡혀가고, 피해자는 저 밑에 폭발에 휘말려서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귀능의 대답을 들었음에도, 다나의 미간은 펴질 줄은 몰랐다. 아주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결국 귀능에게 잠시 자리를 맡기고 그쪽으로 걸어가자, 갈수록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남자 쪽이 밀쳤다며? 양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여자분 어떡해, 안 그래도 너무 울고 있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래요?”
“아가씨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 놈이 와서 시비를 걸었나 봐. 펑펑 울다가 남자 쪽이 밀쳐서 그대로 떨어졌대.”
다나는 그러고 보니 세라가 현장에서 사건을 수습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언뜻 듣기로는 타냐와 함께 나왔었는데, 폭발 사고가 있어서 그대로 두고 왔다고. 생각보다 수습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져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다고 했다. 그때 두고 왔던 장소가, 지하철, 역?
“?!”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다나는 이미 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도착해 있던 스푼의 다른 여사원, 로나는 새하얘진 얼굴로 잔해들을 치우고 있었다.
“서, 서장님. 여기 타냐쌤이···!”
젠장, 다나는 입술을 씹다가 지체할 새 없이 잔해들을 들어 올렸다. 주변 시민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을 신경 쓸 틈은 없었다. 타냐가 이 밑에 있다고 생각하니 입안이 바짝 말랐다. 잔해를 치우면 치울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핏자국이 불안을 심화시켰다. 주변의 소음이 가면 갈수록 멀어졌다.
타냐가 난데없이 그런 시비에 휘말릴 리가 없는데, 아는 사람이었나? 왜 말하지 않았지? 설마 저번의 그 스토커가 앙심을 품고···. 아니, 그 전에 왜 나와 있었던 거지? 물론 딱히 타냐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타냐는 잘 참아오고 있었다. 오히려 걱정될 정도로. 그런데 왜 하필 나오자마자···!
게다가 그 사건 체질 때문에 다친 적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처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에 안일해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폭발 사건, 시민들의 시선, 타냐의 상황과 머릿속의 상황이 얽히고 얽혀 온통 혼란스러웠다.
“헉, 타냐쌤!”
타냐의 모습이 드러난 것은 그 혼란 속에서 다나가 미치겠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부어있는 발목을 제외하고 몸에 크게 다친 부위는 없었으나, 머리는 심각했다. 치우던 잔해들에 묻은 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는 점에서 눈치를 챘었어야 했다. 얼마나 피를 흘린 건지, 두 볼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얼른 힐러에게 데려가! ···아니, 내가 데려간다.”
귀능에게는 10분 내로 돌아온다고 말해둬!
로나는 순식간에 그런 다나를 놓쳤다. 다나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가짜 나이프로 향했다. 의료반은 당장 구조되어 나온 사람들의 응급처치와 인계만으로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심각해 보이는 타냐의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을 만한 힐러는 가짜 나이프의 일호밖에 없었다. 다나는 타냐를 안아 들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다나 씨? 무슨 일···. 타냐 씨?!”
“일호, 일호 있나?”
“네, 잠깐만요. 일호!”
“갑니다~ 엥?”
예상대로, 오수와 일호는 타냐의 상태를 보자 기함했다. 이호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지만, 상관없다. 그 녀석은 피 공포증이 있으니 별로 도움도 안 된다. 다나는 초조하게 시간을 살피고, 바로 다시 달려 나갈 자세를 했다.
“지금 역에 폭발 사건이 일어나서. 타냐를 부탁한다.”
“맡겨주세요~”
“히, 힘내세요, 다나 씨!”
인사를 받아줄 여유도 없어, 대충 고개를 끄덕인 다나는 다시 사건 현장으로 뛰어갔다.
“네?”
“타냐 선배는요? 저 상담할 게 있는데···.”
나가의 허망한 물음에 세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저랑 같이 나왔었는데, 지금쯤이면 스푼에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아, 감사합니다.”
나가는 더 잴 것도 없이 텔레포트로 스푼 건물에 도착했다. 의료반으로 위치를 지정했기 때문에, 바로 상담실 앞으로 올 수 있었다.
똑똑-
“···”
하지만 상담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벌컥, 나가는 무례를 무릅쓰고 문을 열어보았지만, 상담실에는 빈 소파만이 있었다. 온기조차 남지 않은 상담실은 사람 한 명이 사라졌을 뿐인데도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가는 평소에 타냐가 앉는 소파의 반대편에 걸터앉았다. 이 기분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데···.
타냐는 연락도 받지 않았다. 나가는 체념하고 집으로 발을 돌렸다.
다사다난한 일주일과 더 다이나믹한 하루를 겪었다. 난데없이 나비 혼혈, 레이디가 요즘 나가를 사랑한다며 따라다니더니 오늘은 이상한 약을 먹이고, 지하철 폭발 테러를 일으킨 것이다.
나가는 그것을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어서, 헤이즈가 줬던 악령을 봉인한 부적을 찢었다. ···그리고 레이디는 직후에 이어진 싸움 끝에 지하철 천장이 무너져 사라졌다. 그것이 부적을 찢은 저주의 힘 탓인 것 같아, 나가는 괴로워졌다.
-제 손으로 사람 한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같아서.
“나가, 밥은?”
“머리가 아파서 그냥 잘래요···.”
“그래? 잘 자렴.”
나가는 침대에 누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게 죄책감인지, 아니면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띠리리-
“? ···이호 형?”
그 이상 생각하기를 멈춘 나가는 이후 늦은 밤, 뜬금없이 찾아온 이호의 ‘백모래를 탈출시키는 것을 도와달라’는 공갈협박에 이기지 못해 스푼으로 돌아갔고, 뒤이어 온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연락 늦게 봐서 미안해요. 곧 스푼으로 갈 테니까 올래요?]
“···”
부유하던 몸이 어디엔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타냐는 과거의 자신을 보던 시야가 닫히고, 다시 검은색의 눈꺼풀만이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신이 든 것 같았다. 병원? 아니다, 의료실일 확률이 더 높았다. 그나저나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겨우 손끝을 꼼지락거릴 수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푸른빛이 새어 들어왔다.
“타냐 씨, 정신 드세요?!”
“오수···씨?”
“다행이다···.”
“치료는 했는데, 피가 부족해서 병원으로 왔어요.”
눈부셔. 다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떠본 타냐는 지금 누워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떨어져 내리던 지하철의 잔해도, 무의식에서 봤던 악령들도 보이지 않는 현실. 타냐는 안도감에 조금 울 뻔한 것을 참고 시간을 물어보았다.
“3시간 정도 누워계셨어요.”
“와···. 저 빨리 일어났네요.”
일호 씨 덕분이죠? 감사해요. 그레고르 씨도 계셨네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타냐는 꾸벅꾸벅거리며 몸을 살피고, 침대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레고르가 그런 타냐를 부축하려 했지만 거절했다. 아무래도 보는 것의 거부감과 만지는 것의 거부감은 많이 달랐다···.
그보다, 몸 상태가 생각보다 양호하다. 그렇게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조된 듯했다. 손목도 더 이상 결리지 않고, 머리도 멀쩡했다. 여전히 피가 묻어있긴 하지만.
“다나 씨가 갑자기 잔뜩 다친 타냐 씨를 데려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어떻게 된 거예요?”
“아, 그···. 밀려서 지하철 폭발 사고에 휘말렸어요.”
“누가 타냐 씨를 밀었나요?!”
서장님이 구조해주셨구나, 나중에 감사하다고 해야겠다.
딴생각을 하고 있는 타냐 앞에서 오수는 잔뜩 분개하고 있었다. 민 사람이 누군지 특정한다면 당장 어떻게 할 기세였다. 착각이겠지만. 타냐는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일호는 무슨 볼일이 있는지, 핸드폰을 키며 병실을 나갔다.
“제 전 남자친구요. 하필 지하철역 앞에서 싸우고 있었거든요.”
·0·
오수와 그레고르의 표정이 기묘해지자 타냐는 쿡쿡 웃으며 소지품을 확인했다. 음, 잃어버린 건 없는 모양이었다. 휴대폰도 액정이 조금 깨졌지만 확인하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다. 타냐는 먼저 같이 나왔던 세라에게 괜찮다는 소식을 알렸다. 폭발에 휘말렸다고 말하자 나오자고 조른 제 탓이라며 거의 울어버리려는 것을 겨우 달래야 했다.
“어?”
“왜요?”
“나가 군에게서 연락이 와 있어서요. 무슨 일 있나···?”
“설마 지금 가려는 건 아니죠?”
타냐는 슬쩍 오수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니 눈이 저렇게 있는데 어떻게 피하겠는가?
“하지만 이제 안전하잖아요. 스푼 가서 잠시 얘기만 하고 오면 되는 건데.”
끝나면 숙소로 들어가서 쉬구요. 이렇게 신세 지면 제 마음이 불편하단 말이에요. 타냐는 최대한 진심을 담은 눈으로 오수를 설득했다. 사실 타냐 자신도 이렇게까지 일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가운을 벗고 간단히 얘기한 다음에 바로 숙소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사실 개인 병실을 쓰고 있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그럼, 그레고르가 타냐 씨를 스푼까지 데려다주시겠어요···?”
“네, 보스.”
“감사합니다! 병실 값은 나중에 알려주세요!”
“···”
오수는 그저 웃으며 소지품을 챙겨 나가는 타냐에게 웃어주었다. 타냐는 조금 불안한 마음을 겨우 삼키며 가벼이 인사했다.
-그렇게 그레고르와 동행하며 도착한 스푼 앞. 타냐와 그레고르는 입을 떡 벌렸다.
“오와···.”
“무슨 일이···.”
스푼 앞에는 사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 다중 추돌 사고 현장이 있었다. 히어로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어느 정도 수습된 모습이었지만, 타냐는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나마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줄 만한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바쁘고··· 서장님과 귀능 씨는 어디 갔지?
타냐는 그 둘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일단 스푼 건물 내에서 어떻게든 찾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적당한 생각이었다.
“저, 그럼 들어가 볼게요 그레고르씨.”
“네, 네?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죠.”
그레고르는 아무래도 불안한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타냐를 확인했다. 타냐는 그 뒤에서 손을 흔들며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 주었다. 결국 저만치 점으로 보일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타냐는 건물 내로 발을 옮길 수 있었다.
로비는 아수라장이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타냐는 반사적으로 오수에게 사용하던 특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타냐처럼 그것을 막을 수 없는 많은 히어로들이 다쳐서 누워있거나 특기를 이끌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타냐는 그것이 이 연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레인 씨?”
“타냐쌤! 다쳤다며, 어떻게 된 거야? 힉, 피!”
“아니, 숙소로 가는 김에 상담실에서 볼일을 보려고 했는데요···.”
“지금 나이프가 있으니까 바로 숙소로 뛰어!”
“네?!”
그러고 보니 레인 씨의 투명한 머리 안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 슬라임이 아니었다면 바로 죽었을 법한 치명상에 몸이 굳은 타냐는 두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 사이에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았다. 형편없는 무력감이 들었다. 그 상황에 속 편히 누워만 있었다니···.
“무, 무슨 일인데요? 나이프가 왜 갑자기 여기에-”
“헤이즈 씨가 방금 지하철역에서 백모래를 잡았었는데, 탈출시키려고 온 거 아니겠어?”
내가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저를 빼놓고 일이 진행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따라갈 수 없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사고, 전투, 그리고 부상···. 그 모든 것들이 놀랍고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나이프가 재등장 이후부터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해왔으나, 각오는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나 아플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울컥, 하고 올라오는 이름 모를 감정을 낯설게 맞이하며, 타냐는 조금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타냐는 혹시 모를 이런 상황을 위해서 이 두 손으로 나이프를 공격할 각오를 한 상태였다. 어쩌면 지금, 특기가 사라져 거의 모든 히어로가 행동 불능이 된 이 순간. 타냐가 한 사람 몫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들을, 히어로들을 위해.
“어디인가요?”
“뭐? 설마 가려고? 타냐쌤, 위험해!”
“사실 이미 알고 있어요. 이렇게 소리가 요란한데···. 가볼게요!”
“타냐쌤!!”
타냐는 일단 지하로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엔 그리 빠르지도 않더니, 레인이 방심한 사이에 뛰쳐나간 타냐는 태어나서 제일 빠른 속도로 지하로 내려갔다. 타이밍 좋게 쓰러진 로비 자재가 그사이를 가로막았다. 그것에 타냐는 잠시 안도했다. 안 그랬다면 이미 잡혔을 것이다.
“헉!”
급하게 가려다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타냐는 겨우 난간을 부여잡아 굴러떨어지는 꼴을 면했다.
···사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전이라면 다른 히어로들을 케어하면서 가만히 있었겠지만,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왤까, 죽다 살아나서? 그 꿈 때문에? 아니면 나이프를 제대로 적으로 대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타냐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정신이 가면 갈수록 맑아졌다.
-나는 분명히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어. 개인의 사감이 상담사로서의 직무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누구를 특별히 미워하거나, 편애하는 일이 없도록. 그게 공평한 거니까.
‘속상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냐아냐 그거 절대 아냐’
‘스토커 새끼가 곧 찾아간다고 난리를 치는데! 당장 방 빼고 사원 숙소로 들어오든가 해!’
하지만, 점점 아픈 손가락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야, 그들의 걱정과 관심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아 왔는걸. 기쁘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그들로 인해 타냐는 급기야,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으니까. 그것에 지레 겁을 먹은 타냐는, 정당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을 아끼게 되어서, 나이프가 싫어졌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래서 아모르에게 가 나이프가 자신을 죽인다는 확답을 받아오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결국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 사람들이 그들 때문에 다쳤다는 생각이 든 순간, 퍼뜩 깨달았다. 쓸데없는 짓이었단 것을. 스푼의 사원들은 어느샌가 타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를 틀고 있었다. 이미 틀렸어. 언제 이렇게까지 가까워진 걸까? 알 수 없었다. 정말이지-
“···으음~ 아닌데. 뭐하면 증명해볼까?”
상담사, 실격이다.
-탕, 챙그랑, 챙,
지하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딱딱이며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낫지만,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있었지만, 두 손으로 똑바로 권총을 쥐고 있는 타냐가 그곳에 서 있었다. 단 몇 초 전에 그가 쏜 총알이 인질인 이호를 찌르려던 백모래의 단검을 튕겨낸 것이다.
“타냐 선배-?”
탕, 탕탕-
그리고 이어서 3발의 총알이 백모래를 쫓아갔다. 이크, 소리를 내며 가볍게 피해낸 백모래는 멀쩡한 얼굴이었다. 그 해맑은 표정으로 타냐를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어서 검이 총알을 튕겨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예상외군요.”
송하가 자신에게 날아온 총알 두 개를 막아낸 것이다. 송하는 별 간지럽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곤 곧 백모래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함께 이동했다.
“···나가 군, 조져버려요!”
“?! 아니, 저···.”
“저거 놓치면 안 돼요! 한 방 먹이고 싶지 않아요?”
그때, 귀능이 나가에게 소리쳤다. 이대로 허무하게 나이프를 놓칠 수 없다는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물론 그 방법이 고작 고등학생인 나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거라는 점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타냐 역시 비슷한 마음이긴 했다.
“저, 저도 그러고 싶지만. 저 사람이 있으면···.”
그런데 나가 군이, 왜 저러는 걸까?
나가는 특기를 쓰길 주저하며 옆의 나비 혼혈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무효화의 특기라도 가진 걸까? 강대한 특기를 갖고 있는 나가치고 이상하도록 불안한 기색이었다.
물론 나이프는 그런 나가를 기다려주지 않고 도망치고 있었지만.
그런 나가가 답답했는지, 결국 다나가 먼저 외쳤다.
“내가 책임진댔지? 네가 무슨 실수를 해도, 놓치는 것보단 나아!”
결국 나가가 망설이기를 멈추고 능력을 쓰자,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타냐는 나가가 망설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나비 혼혈은 타인의 특기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걸 먼저 파악하지 못한 건 스푼의 실수였다. -아주, 아주 어마어마한 실수였다···.
나 무사할 수 있을까? 괜히 왔나 봐···.
그런 생각도 잠시, 다행히 타냐는 어느 순간 다가온 나가에게 보호받을 수 있었다. 타냐의 놀란 눈빛과 나가의 머쓱한 시선이 서로를 마주했다. 타냐는 뭐라 해야 할지를 몰라 하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상담, 못하겠네요.”
“네···.”
-그 이유는 특기와 관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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