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2.2 그는 원래 운이 좋다 (上)

행운의 부재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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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능력이 빈약하다고 했지, 훈련받지 않았다고는 말 안 했다. 타냐는 일주일에 한 번, 사격 지도를 받고 있었다.

탕, 탕탕-

“달 대고 이써?”

“음, 오늘은 영···. 그사이에 감이 떨어졌나 봐요.”

이제 시간도 좀 비는데, 좀 더 자주 올까요?

타냐는 움직이는 표적을 겨누며 미간을 찌푸렸다. 운동을 끝내자마자 집중해서 사격해서인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사사는 수건과 이온 음료를 건네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타냐는 그런 대답에도 해사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사사 역시 그 옆에 앉았다.

“뱅모래 만나따며, 갠차나?”

“음, 엄청 무서웠죠. 머리가 핑핑 돌아서 쓰러질 뻔했잖아요.”

요, 용케 싸엇네···. 힘냈어요.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타냐는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출근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보이는 모습이었다. 사사는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가의 특기로 스푼이 건물이 무너지고 나서 사원들은 임시로 지정된 건물로 출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냐 같은 경우는···.

“지뇨 기로기 다 나라가따며···?”

“그러니까 더더욱 가야죠.”

백업이 있긴 하거든요. 아.

타냐는 숙소 책상에 고이 놓여있을 백업 USB를 떠올렸다. 타냐는 평소에 진료기록과 처방을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병행해서 적어두는 타입이었다. 이유는 그냥 직접 쓸 때 좀 더 집중이 잘되는 기분이라서. 그런데 그 두 개가 이번 사태로 싹 날아간 것이다. 타냐의 개인 책장에 꽂혀 있던 서적도··· 전기 포트도··· 찻잎도···.

물론 오수가 복원해주겠다 약속하긴 했지만, 진료 기록은 돌아오지 않는다. 타냐는 다시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서장실에서 백업 파일 좀 복원하려고요. 차트도 다시 만들고.”

“애 하필 서장실···?”

“두 분 다 일하고 계셔서 조용하거든요.”

독서실 ASMR 같은 느낌. 사사는 납득했다.

“그래서, 할 말은?”

“죄송합니다아···.”

“그런 말 듣자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 상황, 타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전 남친의 스토킹부터 지난 지하철역에서의 사고까지 다 알고 있는 다나가 굳이 캐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가네 팀이 올린 보고서에 무엇으로 협박을 당했는지가 담겨 있는 녹음파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타냐를 기다리던 전 남자친구는 친구와 통화하며 말했다.

 

‘아~ 당연히 아니지. 그냥 돈 좀 뜯어보려는 거야. 애가 겁이 많아서 순순히 다 주던데?’

‘그래서 살살 구슬려 보려고 하는 중. 근데 그 새 애가 좀 까다로워졌더라고.’

‘보통 약점이 아니니까 그러지~ 야, 정 안 되면 너한테 알려줄 테니까 크게 기사 한 번 써라. 특종일걸?’

 

···따위의 대화. 타냐는 이 파일을 아버지에게 보내고 결국 철저하게 사과를 받아냈다. 그에 드물게 지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은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리고 다나는 이 파일에서 나온 ‘약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추궁을 하고 있었지만- 타냐는 말할 수 없었다.

예전에 말했던 대로, 동네 사람들은 타냐의 능력과 타냐의 엄마에게 일어난 일을 연관 짓지 못한다. 알고 보니 아빠가 전 남친에게 타냐의 사정을 다 불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더라.

게다가 살인 미수 건 때문에, 이제 전 남친의 말은 ‘억하심정이 있는 사람의 모함’ 정도로 비칠 테니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좀 더 숨겨도 되지 않을까?

“서장님, 손님 오셨어요.”

“뭐야?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그리고 타이밍 좋게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은 포크 엔터테인먼트의 사장, 유다였다. 타냐는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다나와 똑 닮은 생김새에, 성별만 다른 사람이 보이자 휙휙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눈 색이나 머리 길이 정도밖에 다른 점이 없네. 생판 남이 이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나?

“그런데, 저는 왜 여기 있죠?”

“두 분이 머리채 잡고 싸우면 말릴 사람이 필요해서요?”

아. 타냐는 합리적인 말에 조용히 다나의 옆에 앉았다. 서로의 멱살을 잡는 것에 슬쩍 눈치를 보고(예외는 다나 뿐인데, 유다도 그래야 할지 가늠했다) 슬며시 다나의 손을 잡는 것은 덤이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두 사람이 더 싸울까 싶어, 타냐는 조심스럽게 둘을 번갈아 보았다.

“방송으로 봤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다행이네.”

“뭐?”

“타냐 양, 데뷔했으면 폭삭 망했을 상이거든.”

“뭐 임마, 그게 지금 사람 면전에서 할 말이냐?”

“아니, 사실을 말해준 걸 어쩌라고.”

타냐는 말린 보람도 없이 다시 멱살잡이를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머리를 짚었다. 손으로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맞는 말일지도.

어떻게 보면 유다의 예측은 정확했다. 전 남자친구라는 폭탄이 있는 상태에서 데뷔라도 했다면 과거의 일에 발목이 잡혀 언제든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누가 제 엄마를 자살로 몰아간 딸을 가수로 좋아할 수 있겠는가? 타냐는 오싹한 상상에 어깨를 떨었다.

“···쌍둥이 자매?”

“아냐 임마!”

“내가 여자로 보이냐?”

그건 그렇죠.

다행히 타냐가 딴생각을 하는 동안, 나가가 한 쌉소리로 분위기가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타냐는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타냐는 몰래 도망칠 생각을 하며 문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아무튼, 우리 애들 중 하나가 극성 스토커한테 시달리고 있으니 잡아줘.”

“근데 너희 경호원도 많잖아? 굳이 공권력 안 빌려도.”

“많으면 뭐 해. 스토커 잡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안 돼.”

“경호원 중에는 특기자도 제법 있는데 영 손을 못 써요.”

유다 사장의 비서, 은비단의 말을 마지막으로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토커 싫지. 현재 응접실에 있는 인원 중에서 제일 화려한 스토커 전적을 갖고 있다 자부할 수 있는 타냐는 공감할 수 있었다.

“스토킹 당하는 게 누군데?”

“세크룬.”

그런 면에서 스푼에 해당 의뢰를 맡기는 것은 좋은 판단이다. 타냐는 모든 스토커를 스푼에서 해결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가의 능력이라면 엔간한 사람은 다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나! 나나나나! 내가 할래요! 경호!”

“경호까지는 됐고, 스토커만 잡아달라고.”

화들짝, 타냐는 딴생각을 하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귀능의 비명 같은 외침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세크룬. 세크룬이 스토커 피해자인가 보다. 세크룬 귀엽지. 귀여운 펭귄 혼혈인 세크룬은 짜리몽땅한 몸이 매력 포인트로, 타냐가 무대 영상을 찾아보는 몇 안 되는 가수들 중 하나였다. 다른 한 명은 루리. 뱀 혼혈이랬나, 딱히 팬이랄 것까진 없지만···. 아, 생각해보니 둘 다 포크 엔터테인먼트였다. 타냐는 다른 건 몰라도 유다의 안목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는 너희가 듣고 맡아서 해라.”

“네?”

“아, 타냐도.”

“네!?”

···타냐는 그렇게 한참을 딴생각만 하다 순식간에 특기와는 상관도 없는 스토커 수색 임무를 맡게 되었다.

“세크룬! 한동안 네 경호를 맡아줄 히어로들이다.”

“아, 안녕하세요?”

나나나 사진 찍어도 돼? 그리고 싸인! 언니가 사진 찍어줄까? 응!

우와아아, 나가는 무례할까 싶어 차마 앞에서 말하지 못한 감탄사를 길게 늘여봤다. 작고 오밀조밀한 세크룬, 어쨌든 귀여운 꼬마아이인 혜나, 그리고 천사 같은 생김새의 타냐까지 합쳐지니 파괴력이 장난 아니었다. 세크룬의 매니저에게 설명을 듣고 있는 와중에도, 세 사람은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그래도 왠지 여자 같아. 여자면 안티 팬일 확률이 높겠죠?”

“글쎄요···. 그런데 세크룬은 여성의 질투는 거의 안 받는 아이돌이에요. 남자보다 여자 팬이 더 많고요.”

그럼 남자의 질투? 그건 아닌 듯. 나가의 짧은 쌉소리가 빠르게 컷 당했다.

사실 타냐가 유용하다고 생각한 나가의 특기는 도망치는 범죄자를 잡는 정도로밖에 쓰이지 않고, 나가는 스토커의 생태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추리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스토커 수색 임무로 여기에 오긴 했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훌륭한 경호원일 뿐.

“나가 군, 질투라는 것도 생각보다 결이 많아요.”

그때, 뒤에서 혜나와 세크룬을 챙기나 싶었던 타냐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여기 심리학 쪽의 전공자가 있었지···!

“그래도 모르겠지만요.”

“에?”

“그냥 딱 붙어있다가 현행범으로 잡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타냐도 못하는 게 있었다니··· 나가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타냐는 그런 나가와 매니저를 보며 어설프게 웃었다. 드물게 허술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가는 새삼 가운을 입고 있지 않은 타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의 외피 수준으로 입고 돌아다녔는데, 요즘은 상담을 쉬느라 종종 가운을 벗고 다니기도 했다.

타냐는 좀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크룬에게 다가갔다.

“세크룬, 제 능력이 뭔지 알아요?”

“응?”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거.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특기거든요. 제 손을 잡으면 할 수 있는데.”

잡아 볼래요? 어때요? ···좋아. 안겨 있을래요? 응!

와, 공략했다.

나가는 타냐의 무릎 위에 앉아 반쯤 녹아있는 세크룬의 몸 위로 공략 완료! 라는 창이 생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심지어 적당히 떨어져서 지키고 서 있는 혜나와 사사, 나가와는 달리 타냐는 세크룬을 무릎 위에 앉히고 무려 포크 엔터 소속의 다른 아이돌들과 얘기까지 하고 있었다.

“제 팬이라고요? 기뻐라~”

“네, 여기 있는 다른 분들이 데뷔하기 전까지는 루리 씨 정도만 찾아봤으니까요. 굿즈를 사 모으는 본격적인 팬이라기엔 조금 부끄럽지만요.”

“-밖에 수상한 사람은 딱히 안 보이는데요. 일단은,”

“꺅!”

-그리고 그날의 근무는 밖을 순찰하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나가 때문에 루리가 깜짝 놀라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타냐와 혜나는 해맑게 웃는 세크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사사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나가는 먼저 말을 걸었다.

“사사 선배, 무슨 생각 하세요?”

“아, 매니더가 아무대도 죰 수상에서···.”

“매니저가 수상하다고?”

“응.”

“나는 오히려 루리가 더 수상하던데.”

“루리?”

혜나의 손을 잡아주고 있던 타냐가 화들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화할 때, 꽤 전부터 루리의 영상을 찾아봤다고 그랬었지···. 나가는 새삼 타냐를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다는 게 왠지 안 어울린다. 그런 것에 초연할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루리는 초능력자 아이돌로도 유명해. 그래봤자 나가 오빠처럼 거창한 건 아니고, 숟가락 구부리기 정도지만.”

“그러고 보니, 소포에 지문이나 흔적이 없었네. 내용물도 다 숟가락보단 가볍고.”

“손을 안 쓰고 조종해서 증거를 남기지 않고 배달한다던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초능력이 있다는 게 전국에 까발려진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때 초능력을 쓸까?”

나가는 혜나와 함께 추리를 시도했다. 하지만 루리라는 뱀 혼혈 아이돌은 이미 충분히 인기가 있고, 그 결도 세크룬과 달라 경쟁한다는 느낌이 없었다. 아무래도 딱 들어맞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CCTV 혹은 현행범을 잡는 걸로 경로를 틀까? 추리는 우리한테 안 맞는 것 같아.”

“포기하지 마, 나가 오빠!”

“···루리 씨를 의심하긴 싫지만, 능력이 발전했다면?”

“오! 그거야!”

그럴듯한데?

나가는 타냐가 말한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할 법도 한데···. 스푼에서 검사를 해주려나? 근데 다짜고짜 용의자라고 하고 데려가기는 좀···.

네 사람은 그 말을 토대로 좀 더 고민해봤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가 떠오르진 않았다. 결국 타냐가 먼저 상황을 종료했다.

“일단 내일까지 더 생각해볼까요, 우리?”

“네···.”


“이게 뭐야?!”

“기분 나빠.”

다음날, 나가네 팀과 함께 포크 엔터테인먼트로 향한 타냐는 대낮부터 기괴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우편함에 낑겨 넣어져 있는 수 마리의 비둘기들. 이미 죽은 채였는지, 들어가서 죽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맨정신으로 보기에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타냐는 반사적으로 세크룬을 찾아갔다.

“오늘 아침에 저게 와있었던 거예요?”

“응···.”

“무서웠겠어요. 깜짝 놀랐죠? 안아드려도 될까요?”

세크룬은 타냐의 말대로 총총 다가와 폭 안겼다. 최대한 살살, 평소 차를 마실 때의 잔잔한, 그런 마음의 평화를 생각하며 세크룬을 무릎 위로 올린 타냐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유다 사장의 비서, 은비단의 설명이 뒤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CCTV에는 아무것도 안 찍혔어요. 저런 걸 우편함에 쑤셔 넣었으면 뭔들 보였어야 할 텐데.”

“괜찮아. 내일쯤엔 사이코메트러가 와서 진상을 밝혀줄 거야.”

“하지만 오늘 당장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처음부터 사이코메트러가 왔으면 됐던 게 아닐까? 타냐는 잠시 딴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타냐의 기억 속 스푼 직원들 중에 사이코매트리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 다른 곳에 인력을 요청했나? 그럴 수도 있겠다. 당장 생각나는 건 듄이 속한 팀인데···.

사실 만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타냐는 사이코메트러에 대한 생각을 뒤로하고 일단 추론한 내용을 전달했다.

“일단 범인의 특기는, 물건을 순간이동 시키는 능력인 것 같으니 그런 사람을 찾죠. -내일까지 저희가 세크룬을 제대로 보호하기만 하면 자연히 밝혀질 거예요.”

“언니…?”

“그걸 어떻게 아는 거죠?”

그런 타냐의 막힘 없는 말에, 의아한 빛의 몇 쌍의 눈이 타냐를 향했다. 모두가 이를 추론했을 거라 생각한 타냐는 조금 당황했단 듯이 두 손을 들었다. 제 추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밑밥을 깔기 위한 손짓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범인이 두 손으로 이걸 넣었을 리가 없다는 거죠. 딱 봐도 시체가 우편함의 용량을 넘기잖아요? 이건 오히려… 용량에 맞지 않는 물건을 능력으로 억지로 구겨 넣은 결과 같아요.”

“그건… 그러네요.”

“언니 똑똑해!”

“그쪽으로 용의자를 좁힐 수 있겠네요. 감사해요.”

“아뇨, 아닐 수 있으니까요….”

“마즐거야.”

별것 없는 추론에 칭찬이 쏟아져나오자, 타냐는 홧홧해지는 얼굴을 감싸며 세크룬을 안아 들고 저 뒤로 향했다. 유용한 추리를 뱉고 사라지는 타냐를 은비단은 막지 않았고, 결국 비행조는 비둘기 시체를 확인하러 사라졌다. 그렇다면 일단 오늘은 호위 업무만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뭐, 그렇다니 오늘은 세크룬을 옆에서 계속 봐주면 되는 거고··· 타냐는 지금 이 인원도 피해자 보호 및 안정에는 좋은 조합이니 아무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니! 나가 오빠가 우편함을 열었어!”

“보실 수 있는 분만 들어오세요···.”

“으응, 난 세크룬 옆에 있을게.”

“응!”

아니, 근데 혜나도 고작 초등학생인데 저런 걸 봐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나랑은 너무 다른 경운데. 부모님이 양계장을 운영하며 병아리나 닭들의 시체를 종종 볼 일이 있었던 타냐는 그에 익숙했으나 구태여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으으, 딴생각하자. 타냐는 필사적으로 생각의 가지를 돌리며 따라 들어가고 싶어 하는 세크룬을 말렸다.

-새크룬의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나, 어제는 말을 못 했는데. 언니 TV에서 봤어.”

“응? 진짜?”

타냐는 자신이 나갔던 TV 방송을 생각했다. 주로 불량 학생 갱생이라던가, 피해자 대신 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해주는 <그알> 같은 프로그램에 나갔던 것이 기억났다. 타냐는 스푼 직원들 중에서도 나름 매체에 많이 노출된 편에 속했다. 어쩌면 사사와 쌍벽을 이루는 얼굴마담인지도. 헉, 그런가?

-각설하고, 타냐가 그런 매체에 자주 출연한 이유는 하나다. 자신의 특기에 대한 사전고지를 위해서이다. 파견을 갈 때마다 자신의 특기에 대한 설명을 새로 하고 경고한 뒤에 양해를 구하는 것은 수고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매체에 출연해,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특기를 갖고 있고, 어떤 결과가 있을 수 있는지··· 를 설명하는 것이다.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대규모 사건 현장에 차출되면 안정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타냐를 찾고, 그를 신용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타냐를 피해 간다. 아마 세크룬도 TV에서 그런 타냐의 모습을 본 모양이다.

“그때는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엄청 좋아서. 말해주고 싶었어.”

“···그랬어?”

타냐는 조금 눈물이 나올 뻔했다. 이 아이는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채 10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시간 동안 나에게서 어떤 모습을 봤던 걸까?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타냐의 마음속에는 감사함과 함께 불신이 치고 올라왔다. 칭찬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을 조금 원망하며, 타냐는 해맑게 웃어 주었다.

“고마워. 새크룬처럼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해.”

-투둑, 툭,

천장에서 쥐가 잔뜩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둔탁한 것에 머리를 맞은 타냐는 천장을 확인하고 세크룬을 꼭 안은 채 자세를 숙였다. 그 위를 매니저가 재킷으로 막아주고 있었다. 요란한 비명이 귀를 징징 울렸다. ···농장 천장에서나 보던 쥐가 이렇게 나올 줄이야.

천장의 샹들리에에 걸려 있던 전구는 죄 깨져 있었다. 마치 내부에서 수용할 수 없는 용량의 것을 집어넣었다는 듯이. 타냐는 천장을 바라보는 사사, 귀능과 통화하고 있는 혜나와, 피해자 격리에 항의하는 매니저와 씨름을 하는 나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론은, 무지 혼란스럽다. 타냐는 머리를 새로 묶고 세크룬의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루리까지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제 발로 걸어왔다.

“어제 그, 새 경호원들?”

“-루리 씨.”

“큰 소리가 나서 와봤는데···. 매니저가 범인이야?”

“아니에요.”

흐음, 맞는 것 같은데.

작게 중얼거린 루리는 바로 세크룬에게 달라붙었다. 오늘 일정이 다 끝났으니 함께 놀자는 말을 하며. ···작게 말했다지만 너무 잘 들렸고, 분명한 의도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직전의 말에 타냐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유력 용의자인 세크룬의 매니저와 루리를 세크룬과 격리하여 감시해야 하는데, 둘 다 떨어지지 않겠다며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두야.

“나가 군, 차라리 한 공간에서 세 사람을 다 보고 있죠. 한 명씩 마크하고 있으면 모두 확실히 보호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타냐는 사사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듯 보이자, 은비단이 손을 들었다.

“그럼, 저는 밖에도 좀 둘러보고 올게요.”

“언니~여자 혼자선 위험해!”

“그럼 누가 같이 가줘요. -나가 씨, 괜찮죠?”

타냐는 나가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나서 인원을 배정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각자 의심한다는 사람을 지키는 것이다. 매니저 뒤에 서게 된 사사, 루리 뒤에 서게 된 혜나는 묘한 눈으로 타냐를 바라보았지만 타냐는 어색하게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세크룬 곁에 있을게.

“괜찮아, 세크룬. 다들 옆에서 지켜주고 있을 거야.”

“뭐야~ 무섭게. 경찰 불렀어?”

“흥, 그 전에 나가 오빠가 잡아줄 거야.”

“-혜나야, 그래서 그 사이코메트러가 언제 와준대?”

“움, 아마 내일?”

이 일을 하루나 더 겪어야 한다니. 타냐는 세크룬이 안쓰러워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타냐에게 대답해줬던 혜나는 그사이에 문 너머에서 유다 사장과 무어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밖에 있던 경호원과 연락이 끊긴 모양이었다. 비단 씨와 나가 군, 다치지는 않았겠지?

괜히 오늘따라 유난히 운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사고 이후로는 사건 체질도 조용해서 좀 괜찮아졌나 했는데···. 타냐는 한숨을 내쉬었다.

와장창창-

“꺅,”

그때, 다시 한번 샹들리에가 깨지며 세크룬과 타냐의 머리 위로 정체불명의 액체가 쏟아졌다. 원래는 세크룬을 겨냥했으나, 꼭 붙어 앉아있던 타냐 역시 휘말린 모양이었다. 타냐는 슬쩍 냄새를 맡고 그 액체가 기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사사 씨 이거 기름-!”

쿠당탕탕-

그리고 사사가 성냥을 잡아챘다. 손바닥으로 불을 지져 끈 사사는 괜찮다는 듯이 타냐와 세크룬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빠 멋져! 훌륭해!”

“세크룬, 괜찮아요? 수건으로 좀 닦을까요?”

“그럼 언니도···.”

“세크룬 먼저.”

으응, 타냐는 세크룬의 머리를 푹 적신 기름기를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목표가 아닌 사람까지 헤치고 싶어 할 것 같진 않으니, 지금은 세크룬을 먼저 챙기는 게 좋았다. 이 와중에 불을 붙여 봤자 제일 먼저 다칠 사람은 타냐일 것 아닌가? 범인이 머리가 있다면 지금은 조용히-

탁-

“루리?!”

“큭···.”

“가방 안에 라이터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성냥이 빗나가면 직접 불을 지를 생각이었습니다.”

“그···그럼 루리가 범인?”

“네.”

·0·

갑자기 등장한 갈색 머리의 혼혈 남성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리던 타냐는 그제야 머리를 닦았다. 아니, 범인이 지금 일을 저지를 정도로 머리가 없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을 쳤고, 그 범인이 루리 씨···?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본인이 나름 좋아하던 아이돌이 사회면을 장식할 만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처음이라 어쩔 수 없었다···.

듄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혼혈 인간은 인력을 요청했던 바로 그 사람으로 보였다. 갈색 바지에 베이지색을 배경으로 한 세로줄 무늬 셔츠. 응, 히어로 대선배이신 영정 님의 직속 히어로 유니폼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이코메트러, 분명 혜나의 말로는 내일 온다고 했던 것 같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 전에 새로운 특기가 발현됐군요. 손으로 들고 있는 물체를 원하는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특기입니다.”

“저, 내일 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 이거 죄송합니다. 3분 늦었군요.”

···? 타냐는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했다. 자정을 갓 넘긴 지 3분이었다. 그 내일이 오늘인 건 맞는데, 보통은 낮에 찾아오지 않던가? 스스로의 상식을 잠시 의심할 뻔한 타냐는 대충 납득하기로 했다.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나 봐. 그럴 수 있지···.

팟,

“나가!”

“오빠! 지금 스토커 잡아서 가려고 했는데!”

그때, 나가가 은비단과 경호원으로 보이는 존재, 그리고 처음 보는 갈색의 토끼 혼혈로 보이는 남자를 데리고 텔레포트 해 왔다. 저 사이코메트러와 비슷한 복장을 한 것으로 보아 그도 영정 직속 히어로팀 소속···? 타냐는 점점 수라장이 되어가는 상황에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타냐가 잡고 있는 루리를 언제 놓칠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고. 일단 루리의 손목에 수갑을 차고 잡아두고는 있지만, 사사라도 와서 도와준다면 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퍽-

아니나 다를까, 타냐에게 어깨가 잡혀 있던 루리가 그를 치고 달아났다. 목표는 당연했다. 아직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라이터. 수건으로 대강 닦았다지만 기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세크룬에게 라이터가 직격하면 결과가 어떨지는 자명했다. 타냐는 초점이 돌아오자마자 쫓아가려 했다. 그런데 라이터를 밟고 있는 펭귄 발···?

짝!

시원하게 따귀를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

···그렇게 나가 일행이 루리를 제압하고, 사이코메트러인 마고가 바닥에 있던 라이터를 수습하고 나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뱀 혼혈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며 연예계 생활을 해왔던 루리가 인간들이 좋아하는 동물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세크룬에게 박탈감을 느낀 것이 원인이었다. 혼혈이라는 특징을 죽이기 위해 수술을 3번이나 한 왼쪽 눈은 이제 잘 보이지도 않는다고 했나.

“-근데 왜 나한테 X랄하는 건데?”

“뭐-”

“아니 너 찡찡대는 건 그만 듣고 싶고 나에게 -으아아아- 떤 이유를 말해달라고 –끄으악-.”

“세크룬···?”

“내가 창조주야? 아님 이 사회의 선구자야? 시스템이 불만이면 시스템을 만든 인간에게 따져야지. 너 내가 만만하지? 이 육시-”

저런 이유로 내가 통닭구이가 되고, 타냐 언니까지 말려들 뻔했다니 X발 정말 어이가 없네요. ~세크룬, 이제 그만!

···그리고 루리의 사정을 듣고 속이 상해 조금 눈물을 흘릴 뻔했던 타냐는 세크룬의 거친 입담에 뚝 그치고 말았다. 사과하라며 박박 소리친 세크룬은 2시간을 꽉꽉 채워 쌍욕을 한끝에 결국 루리에게서 사과를 받아냈다.

타냐는 사과를 받아들이며 루리의 손에 명함을 쥐여주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연락처로 연락하겠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정신이 피폐하고 힘들어 보여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나저나 매니저님은 세크룬의 쌍욕을 가린다고 득음할 듯이 소리를 지르시던데, 괜찮으실까···.

“-그나저나 두 번째 특기가 발현된 게 더 놀랍습니다. 보통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겨우 자리를 정리하고, 복도에는 스푼에서 파견된 인물 넷과 포크 엔터의 인물 셋, 그리고 영정 직속 히어로 팀에서 파견된 인물 둘이 서 있었다. 그중에서 감탄을 꺼낸 사람은 루리를 잡아내는 데에 크게 공헌한 사이코메트러, 마고였다. 타냐는 그 말에 마고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그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남자에게 시선이 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혼혈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며칠 밤을 새워서인지 새빨간 눈, 축 처져 있는 기다란 갈색 귀. 하지만 그런 신체적 특징보다 타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쉴 새 없이 떨고 있는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그 근성을 세상에, 라기보단 개인에게 화풀이하는 데에 쓴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런 특기는 아마···”

“마고··· 마, 마고···.”

“? 왜 그러세요?”

그리고 귓속말을 하는 두 사람. 가면 갈수록 불안해하는 모습에, 타냐는 뭔가 처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가갔다. 등을 돌리고 한없이 불안해하는 모습에, 조심스럽게 어깨를 툭툭 쳐서 부를 생각이었다. 일단 좀 말을 걸어보고, 능력에 대한 허락을 받아 봐야지.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나타났다.

마고는 당황한 얼굴로 타냐에게 무어라 하려 했지만-

와장창창-

“어?!”

“아욱.”

“혜나야!”

“사사 씨!”

창문이 깨지고 혜나가 책의 모서리에 머리를 박았다. 엄청 아프겠다···! 타냐는 설마 이것이 방금의 귓속말과 연관이 있나,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고가 다른 남자를 '리더'라 부르며 진정시키고 있었다.

“언럭키 님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하면 주변 사람들은 일정 확률로 불행해지고, 특히 신체 접촉이 있으면 그 확률은 높아집니다.”

그 말대로, 나가와 타냐의 주변 상황은 아수라장이었다. 머리카락에 유리 조각이 박혀 있는 은비단, 책의 모서리로 머리를 맞은 혜나, 이마가 쓸린 사사, 손에 유리 조각이 박힌 유다··· 음?

“타냐 선배?”

“나가 군?”

두 사람은 멀쩡했다. 정작 접촉한 사람은 그 두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친 곳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에 도리어 마고와 언럭키가 할 말을 잃었다.

“앗. 500원 잃어버렸다.”

“전 평소에도 사건을 몰고 다니는 체질이라···. 상쇄됐나?”

“-그런 거로 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타냐는 스푼으로 오기 전에 언럭키의 능력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결국 오늘 일어난 일은 언럭키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 때문에 일어난 일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불특정 다수가 피해를 본다고 했다. 그 피해의 정도는 개인에 따라 다른데-

“-적어도 언럭키 씨의 불행만큼의 행운이, 요?”

방금 비죽 나와 있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을 사사가 잡아주는 것으로 겨우 대답을 마친 타냐를 보며, 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이 갖고 있는 행운은, 언럭키 님의 불행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행운이 크면 클수록 불행을 더 많이 막아낼 수 있죠. 그런데 밀접한 접촉한 접촉을 한 상황에서 이 정도로 끝난다는 건-”

같이 돌아오고 있던 혜나와 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스푼에 가자마자 치료를 받을 마음이 가득해 보였다.

“그럼 저, 한 가지 해봐도 될까요?”

“네?”

“언럭키 씨.”

그때, 타냐가 대뜸 언럭키의 앞에 다가가 섰다. 언럭키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완벽히 피하는 기색이었다. 타냐는 그런 언럭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가 아니었다. 그저 그 위로 손을 얹기만 하면 된다는 듯이, 손바닥이 위를 향해 있었다.

“제가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어서요. 도와드려도 될까요?”

아, 물론 원래대로 돌려드릴 수도 있으니 걱정 마시구요. 괜찮으시면 손 이리 주세요.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타냐는 부드럽게 웃으며 엄청난 말을 하고 있었다. 마고는 옆에서 경악해 입을 벌렸고, 나가네 팀은 다급하게 그 팔을 뒤로 끌어낼 듯이 붙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언럭키는 어벙한 얼굴이었다. 자, 어서요.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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