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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봄비, 둘

도검난무 아즈키 HL 드림

하늘 아래 만물이 깨어나는 시간. 온통 녹빛으로 물든 혼마루에 하나, 둘씩 떨어지는 봄의 빗방울. 아직은 어린 연두색 잎의 끝자락에 떨어진 물방울은 다시 또르륵, 하고 정자 지붕 위를 휘 놓는다. 그렇게, 하나의 움직임은 수 개의 움직임이 되고, 다시 수십이, 수천이 된다. 떼를 지어 이제는 사납게 몰아치며 대지마저 흠뻑 적신다. 경칩을 맞은 봄비는 꽤나 기쁜 일일 터이다. 다만, 그것이 적당히 내릴 때에 오로지. 녹진히 녹은 눈이 얼음이 되어 미적지근한 땅도 아닌, 이름 모를 초(草)들이 저마다 머리를 내밀고 생존 경쟁을 벌이는 때에 오로지 그러하다.

다만 이질적인 것이 있다. 눈보라는 떠나가고 초록 위에 내리는 햇살 같은 봄비 사이에. 싸늘하게 가라앉은 박무 사이로 멀찍이 떨어진 두 사람이 있다. 수십 수백의 물방울이 떨어질 때도, 두 입술사이는 떨어 줄 몰랐다.

 

‘나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엔도는 제 심장께를 툭, 툭 치면서 그 거리와 입술 사이를 자책하지만, 그 이상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구름으로 꽉 막힌 하늘, 그 아래의 생물은 응당 자신의 하늘을 따라야만 한다는 듯이. 그렇게 굳게 입 다문 하늘에 책임을 지운다. 그렇지만 여전히 혀끝을 떠나지 않는 질문.

왜,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이런 말들을 곱씹으려면, 시곗바늘을 되돌려야 한다. 아주, 멀리.

며칠, 혹은 몇 주, 몇 달을 돌려서……벚꽃도, 진달래도 피기 전으로…….

 

 


 

 

“오늘은 신년이 아닌데, 아루지?”

“옆 나라에서는 음력 새해도 기념한대. 그러니까…….”

 

움켜쥔 두 손에는 기대를 가득 머금은 설렘이 있었다. 아직은 봄꽃이 피기에 이른 늦겨울의 오후. 마당 너머 작은 대나무숲을 가르는 바람이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느지막이 들어온 햇살은 퍽 따뜻했다. 그 햇살은 엔도의 꼬물거리는 두 손아귀에도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주인께서는 무얼 원하시는 걸까나? 작은 기대감을 입에 건 아즈키는 제 사니와의 작은 두 손을 어루만지듯 껴안았다. 그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엔도는 작은 소리를 내며 웃다가 손을 펼쳤다.

 

“쨘! 신년 열려서 축하해!”

 

작은 두 손안에 움켜쥐고 있던 것은 오마모리였다. 하늘빛으로 촘촘히 엮은 실타래 사이에는 파랑과 분홍의 꽃잎들이 너울너울 그 작은 하늘을 날고 있었고, 중앙에는 한자와 히라가나가 꼬물꼬물거리며 제 말을 열심히 나르고 있었다. ‘신년 열려서 축하해!’(新年開けましておめでとう!)

 

“검집에 걸을 수 있게 끈을 이어봤어! 아, 음……. 걸리적거리려나? 안 되려…나?”

“그럴 리가 없잖아.”

 

뒤늦게 그런 생각에 미쳤는지 엔도는 아차, 하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두 눈에 잔뜩 즐거움과 행복을 머금은 아즈키가 걱정을 깨끗이 지워줬다. 다시 한번, 제 사니와의 두 손을 꼬옥 잡으면서.

 

“……그렇지만, 열려서(開け)가 아니라 밝아서(明け)야. 발음은 같지만.”

“응? ‘밝아서’는 어떻게 쓰는데?”

“자아, 해 일에, 달 월을 쓰면 되는데…….”

 

어느새 자신의 사니와를 품에 꼭 껴안은 아즈키는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어 왔다. 바닥에 해 일의 첫 획을 긋자,

점등.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그어진 것은 덜 녹은 흙더미가 아니다. 숨을 다시 내몰면,

 

“헉……하아…….”

 

한 오라기까지 찢어진 오마모리. 둘이 있어도 하나 뿐인 숨소리. 거뭏게 타버린 옷자락에서 나는 잿빛 냄새. 그 사이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피. 영원히 아물지 않을 듯한 상처들. 뇌리 속에서 벌벌벌 떨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걱정마. 이건 나쁜 꿈일 뿐이야. 아루지, 그러니까……그러니까……

이 이상은 볼 수도 맡을 수도 없다.

꿈은 늘 여기서 끝나므로.

그러나 가쁜 숨을 진정할 수 없다.

꿈은 현실을 뇌 속에 영사한 것이므로.

 

 

비가 내린다. 쏟아진다. 그로부터 무수한 해와 달이 뜨고 졌지만, 비구름이 가득 찬 하늘 아래 여전히 숨이 막힌다. 그녀는 악몽을 망각하지 못하여 꿈 밖의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바보 같은 선택이다. 찢긴 오마모리와, 한 오라기만 남았던 제 도검남사의 목숨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왜 자꾸만 그를 멀리하게 되는지.

악몽은 그럴수록 더 찾아오는 법임에도.

 

그녀는 얼핏, 저 멀리 아즈키가 있을 자리를 바라본다. 얕게 떠는 대나무 숲 사이의 정자. 멀겋게 보이는 그의 윤곽은 ‘그날’ 이후로 변함이 없다. 예전과 같았다면 스위츠를 주면서 다정히 달래 주었을 그이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미워하지는 않을까, 원망하지는 않을까. 혹은 정말로……나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을까? 추락하는 빗방울의 수만큼 그가 궁금하지만, 엔도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 또다시 아즈키를 잃을 뻔한 내가, 함부로, 감히…….

여전히 비가 내린다. 쏟아진다. 자신마저 사라진 듯한 마루에서, 엔도는 혼자를 끌어서 안는다. 툭, 툭, 무심히도 혹은 잔인하게도 비가 떨어진다. 툭, 툭, 그리고……

똑똑.

분명히, 아주 확실히 들린 소리.

빗방울보다 짧은 간격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아루지.”

 

올곧게 자신의 사니와를 부르는 소리가 있다.

 

“저기, 아루지. 들어가도 돼?”

“……아니.”

 

아즈키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사니와를 부른다. 그녀는 자신만 가득했던 세상에 문득 떨어진 타인의 목소리에 놀란다. 그럼에도 돌아가는 대답은 최대한 매정하다.

 

“아루지.”

“안 돼, 아즈키.”

“자아, 그러면 문밖은 되는 거야?”

“나 농담하는 거 아냐.”

“……엔도.”

 

흠칫, 들려온 자신의 이름에 놀란 듯한 기척이 있다. 정말 미안해, 아루지. 멋대로 이름 불러서. 그렇지만, 한 번 더 미안할게. 아루지, 내 말, 들어보겠어?

 


 

‘그날’ 이후로 부쩍 현세에 가는 날이 줄었지. 혼마루에 틀어박혀선, 잘 나오지도 않고. 자꾸 그러면 현세의 사람들도 걱정한다고. 물론 나는 혼마루에 있는 아루지가 좋지만. 그렇게 혼마루에 난 쥐구멍이라도 찾는 것 같은 아루지는 내 욕심마저도 쏙 들어가게 하는걸?

많이 고민해 봤어. 아루지만 그러는 게 아니라고. 어야, 그것도 안 돼. 그렇게 자신을 조소하는 소리 말이야. 문 닫고 있어도 들리고 보인다네. ……여하간, 내 첫 숨을 아루지가 조각한 이후 두 번째로 느린 숨을 쉬며 가장 긴 생각에 빠졌지.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깐, 정말 긴 생각이네. 그래서 내가 내린 결과는, 아루지.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이러는 건, 혼마루의 엔도나 현세의 엔도에게나 둘다 피해 주는 거야. 현세의 엔도는 말할 것도 없고, 혼마루의 엔도는 말이지. 음, 봐줄래? 이렇게 자신의 속을 파고 있어. 찢어진 오마모리를 안고 다시 눈 떴을 때는, 나, 그런 아루지를 걱정할 힘이 없었어. 그 이후로도……. 어떻게 다가가야 할 지 몰라서, 괴로워하는 아루지의 슬픔이 너무 커다래 보여서 멀찍이 지켜보기만 했어.

그렇지만 이제 알겠어. 시간도 조금이나마 흘렀고 말이야? 그러니 현세의 문턱까지 함께 가자. 현세의 아루지는 갑작스레 사라진 거나 다름없잖아. 그래서 잠깐 빌려주는 거라고 할까나. 의심하거나 걱정하지는 않아.

반드시, 돌아오는 거야.

 

“나는 아루지를 아주 깊이 믿고 있거든.”

“……마마.”

 

문턱에서 막혀 자꾸만 되돌아가던 소리가 움직인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떠한 감정들을 잔뜩 머금은 눈물방울이 마루 틈 사이로 똑, 똑 떨어진다.

봄비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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