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9. 타냐가 흑화했다면?
Infinite Nightmare
무한히 반복되는 악몽이다.
타냐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인형 같은 미소를 유지했다. 한창 아르바이트를 위해 출근하는 중이었다. 카페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는 타냐는 오로지 그것에만 시간을 쓰며, 그 자리에 멈춰 서있었다.
그래, 타냐의 시간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스무 살의 그날에서 멈춰 있었다.
끼익-
낡은 카페의 문이 묵직한 소음을 낸다. 그것은 타냐를 우울하게 만들지 못한다. 타냐를 우울의 수렁에 박아넣는 것은 고작 그런 것이 아니다. 타냐는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점장님, 안녕하세요~”
“타냐 씨, 왔어? 얼른 옷 갈아입고 와. 점심은 먹었고?”
“당연하죠.”
사실은 먹지 않았지만, 그런 대답으로 자신을 ‘돌봐줄’ 핑계를 만들어주기 싫었던 타냐는 태연하게 탈의실로 향했다. 언제나와 같은, 회색뿐인 하루였다. 절망만이 가득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대학은 자퇴했다. 그런 짓을 한 사람이 본가로 돌아가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진 않아 자취는 계속해서 이어갔다. 사람과는 만나지 않는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나는 동료 역시 가벼운 인연일 뿐. 타냐는 인형 같은 미소로 그들을 밀어내는 자세를 고수했다. 그도 모자라, 저를 아는 이가 늘어가는 게 보기 싫어 주기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 보면 좋아하던 것은 회색빛으로 바래져 가고, 싫어하던 것 역시 감흥이 없어진다. 자기 자신조차 회색에 먹힌 채, 어찌할 수가 없어서-
타냐는 그렇게 머물기로 한 것이다.
이 의미 없는 삶을 끝낼 용기조차 없어서.
‘지난 8년간 자살율이 --.-로, 1.5% 이상 상승하여-’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타냐는 사거리에 울리는 뉴스의 음성을 흘려들으며 아슬아슬하게 도로변 쪽의 인도를 걸었다. 가끔 궁할 때 뛰고는 하는 전단지 알바를 할 차례였다. 타냐의 외양은 꽤 눈에 띄는 편인데다가, 사람의 동정을 사기 쉬웠다. 아무리 받아주지 않는 사람이라도, 타냐가 내미는 손은 잡아주는 경향이 있었다. 타냐에게는 제격인 알바였다.
“받아주세요-”
“…”
물론, 그래봤자 5명 지나치고 한 명 받아줄 정도일 뿐이지만. 스쳐 지나간 손을 기억하며 타냐는 남은 전단지의 양을 헤아렸다.
그때였다.
“저…”
“?”
“그, 너무 예쁘셔서요. 혹시 번호 주실 수 있을까요?”
“아-”
갑자기 평범한 회사원이 말을 걸었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로 보였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어수룩한 얼굴. 편안한 집이 있고, 돌아가면 저 나름대로 피로를 풀며 평범한 가족 속에 파묻혀-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법한 얼굴이었다. 타냐는 환히 웃으며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제가 지금 일을 하고 있어서요. 답장은 좀 늦어질 것 같아요. 괜찮을까요?”
“아, 네, 네.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그렇게 남자는 지하철역 안으로 사라졌다. 타냐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난 8년간, 이런 일은 흔했다. 남녀 가리지 않고 타냐를 원했고, 타냐는 그것에 기꺼이 어울려주었다. 이번엔 타냐가 원하는 사람을 제대로 찾았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고, 한 달도 가지 않아 헤어지기 일쑤였다. 내가 기대가 너무 높은 탓이지. 타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나눠줘야 할 전단지가 많이 남아있었다. 얼른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데, 전단지 알바는 이게 안 좋단 말이지. 하지만 아쉬운 입장에서 그만둘 수도 없다.
에휴, 타냐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고단한 하루였다. 미래가 없는 막연한 하루이기도 했다. 하지만 취업하기엔 타냐가 아는 것이 없었고, 그를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할 열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잔물결에 흘러가는 부평초처럼, 그저 쓸려나가는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그럴 때면 종종 생각하고는 한다.
왜 나만?
타냐가 이렇게 추락한 경위를 살피자면, 제 의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이 타냐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원망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혐오스러운 인간들 덕분에 대리로 죄책감을 느낀 것, ‘타냐를 감싼다’며 서로를 헐뜯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를 말리지 못해 죄책감을 느낀 것, 원하지도 않은 특기를 갖게 되어 제일 가까운 가족을 공격한 것…. 이젠 포기할 지경이다.
‘남극 크릴오일 인지질 48% 40g’
저거 때문에 크릴 새우가 또 엄청나게 잡혔겠네. 타냐는 무감하게 생각했다.
이제 인간의 욕심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들이 민폐를 끼치는 것에는 타냐도 익숙해졌다. 익숙해지지 않은 것은 이 우울이란 징벌이다. 타냐는 이 모든 징벌이 자신의 죄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어떤가? 나와 같은 업을 업고도, 그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 않은가? 타냐는 그것에 미치도록 부러웠다.
그러니까- 이런 걸로 화풀이를 하는 게 무어가 잘못이란 말인가? 어차피 타냐가 징벌하는 것은 오로지 죄 많은 인간뿐일 텐데. 타냐는 스쳐 지나가는 낯선 온기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무슨 일이지.
21살의 나가는 이제 제법 롤링핀에 익숙해졌다(나이프의 체포 이후 스푼은 이름을 바꿨다). 대형 임무에 참여하는 것도, 새벽까지 퇴근하지 못하고 아침에 새로이 출근을 찍는 일도. 이젠 롤링핀에서 쪽잠을 자는 것이 익숙해져서, 밥 먹는 것만 아니면 거의 집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어쨌든, 나가는 오늘 아침도 멀쩡히 출근하자마자 서장실로 불려 나갔다. 아마 새로운 업무 관련 내용이겠지. 나가를 비롯한 비행조는 그 능력이 능력인 만큼 많은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대규모 작전에 동원되는 일이 잦았다. 오늘도 아마 그런 일이지 않을까? 좀 쉬운 일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다짜고짜 자살률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는 소리다.
“올해 들어 10만 명당 자살률이 몇 명인지 아냐?”
“네? 아뇨?”
“근 60명이야. 참고로 8년 전에는 25명 정도였지.”
“오… 그렇군요…?”
“이 새끼가.”
나가는 다나에게 꿀밤을 맞고 나서도 억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살률 같은 거, 뉴스에서나 나오는 얘기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장인인 나가가 실감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률이니 뭐니 하는 것의 가파른 상승은 뜬금없는 얘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 말을 바꾸지, 8년 전 자살률은 20명이었다. 4년 전 자살률은 40명으로 급 상승했고, 그 후 4년간 꾸준히 상승한 결과 50명이지.”
“…?”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해마다 지역을 바꿔서 집중적으로 자살률이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작년은 C시였지. 그리고,”
-올해는 A시일 예정이다. 우리가 막지 않는다면.
다나는 주먹을 꽉 쥐었고, 나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귀능이 가리키고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 단순히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범죄 집단의 소행으로 보는 것이 옳았다. 나가는 조용히 구석에 박혀 있다가, 사사가 손을 들어 질문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덤, 다샤를 이당안 번제가…?”
“아니, 위장은 아니다. 피해자들은 틀림없이 자살로 죽었어. 오히려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특기를 가진 특기자의 소행으로 생각해야 겠지.”
그리고 전국을 동시에 주무른 게 아니라 해마다 지역을 옮겼다. 소수이거나, 최악의 경우 단 한 명일 수도 있어.
섬찟, 나가는 어깨를 떨었다. 사람을 함부로 조종할 수 있는 특기라니. 어찌 보면 나가의 특기보다 위험하지 않은가? 심지어 이미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20명은 기존 자살률이니 제하고, 10만 명당 20명이면 전 인구로 계산하면 만 명이다. 해마다 만 명을 죽여? 그럼 4년간 거의 4만 명이다.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가는 차라리 이게 어떤 거대 범죄 조직의 소행이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나가의 특기라면 인원이 몇 명이든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 누군가? 심지어 한 명일 수도 있다. 긴장으로 속이 메슥거렸다.
잠깐, A시?
“저, 그런데 왜 올해는 A시라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나가는 문득 생긴 의문을 가만두지 않았다. A시라면 지금 나가가 사는 도시였다. 심지어 알고 있는 사람도 많고. 만약 나가의 친구들이 그 위험한 사람을 만난다면-
“좋은 질문이다.”
“뀽, 민간인으로부터 의뢰가 들어왔어요. 자기 아들이, 언젠가부터 이상행동을 보인다고. 최근 들어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어요. -자살률에 이상한 경향이 보이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요.”
“지방엔 롤링핀 지부가 없으니 신고할 수 없었겠지. A시이기 때문에 신고가 들어온 거다. 그 이후는 간단해. 사이코메트러인 마고가 그 아들의 핸드폰을 받아 그가 만난 모든 사람을 조사했다.”
팟,
화면에 각 용의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살인마의 작업기간인 1년을 고려해, 만난 지 1년이 되지 않은 인물들만 추려냈다고 한다. 나가는 그 화면으로 시선을 옮겨 천천히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천사를 발견했다.
꿀로 빚어낸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 은테의 동그란 안경이 더없이도 잘 어울리는, 다정한 미소의 여자였다. 나가였다면 바로 번호를 따고 싶어 멈칫거렸을.
“나가, 덩신 차려.”
사사가 그런 나가를 옆에서 흔들었다. 나가의 유구한 취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나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화면을 제대로 읽었다. 그 여자 밑의 간단한 특기사항에는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전 여자친구’. ‘전’? 저런 여자친구를 무슨 정신으로 차버린 거람. 나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저 사람이 용의자일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였다.
“자, 그래서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 여자를 조사하는 거다.”
“?!”
“네?! 어딜 봐도 무고한 사람인데요?”
뻑!
“나가 군….”
반사적인 대답이 나간 찰나, 불 주먹이 다가왔다. 머리에 혹을 두 개나 달게 된 나가는 아야야, 소리를 내며 머리를 문질렀다. 특기로 방어할 걸 그랬나, 좀 조용히 하고 있을 걸 그랬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짙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말로 말이 안 되는걸. 저 타냐라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고한 피해자상이었다. 설마 저런 다정한 미소 속에 4만의 사람을 죽이겠다는 음험한 속셈이 있겠는가? 나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틀림없는 촉이 왔다!
“이 새끼가 설마 얼굴만 보고….”
“에이, 아니겠죠. 나가 군, 이미 확인은 끝났답니다?”
“9명의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찾아가 물어봤다. 공통적으로 저 여자를 본 기억이 있다고 진술했다. 전혀 관련 없는 열 사람, 유일한 공통점은 저 여자.”
저 여자를 조사해서 조직을 파고들어 간다.
다나는 탕, 단상을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5초 만에 자신의 촉이 망했음을 깨달은 나가는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런 나가를 혜나가 뒤에서 토닥였다. 괜찮아. 오빠 촉은 원래 똥이잖아. 혜나야…!
“그럼 접근해봐라. 해산.”
명령을 받은 비행조는 타냐에게 접근할 방법을 짜고 있었다. 처음 입을 연 사람은 혜나였다.
“미인계를 쓰자.”
“머?!”
“음, 사사 선배라면 확실히 통할지도.”
그에 사사는 화들짝 놀라고, 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잘생겼다. 3살 차이면 나이 합도 맞았다. 잘 되기만 한다면 세기의 커플이 될 만한 얼굴합이었다. 여전히 타냐가 대략 4만 명을 죽음으로 이끈 범죄자일 거라는 사실을 잠시 외면한 나가였다.
“일단 번호 따는 것부터?”
“응, 그리고 자연스럽게 데이트도 하는 거지. 자연스럽게 정보를 뱉게 만들자구.”
“가연 그덜가….”
그더케 멍쳥아진 아늘텐데.
사사가 말한 것에 다시 혜나와 나가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이상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제스쳐였다. 그냥 일단 잡아 올까? 특기 발동하면 어떡해. 우린 오빠 못 막는다구. 마자…. 그냥 잡아 와서 조사하는 거라면 쉬웠을 텐데 타냐가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특기 하나로 일이 굉장히 까다로워졌다.
사람을 조종하는 특기. 그게 얼마나 위협적인가. 혹시라도 타냐가 나가를 휘두르게 되면 희대의 살인마는 곧 세계 최강의 에스퍼를 부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조건이 뭘까? 설마 아무 조건 없이 그런 무지막지한 특기를 쓸 리가 없잖아. 그럼 피해자가 훨씬 많아졌을걸.”
“음, 그러게….”
“눙 마두치기?”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님 손잡기? 그냥 접촉일지도 몰라. 어느새 이야기는 살인마의 특기로 넘어갔다. 그만큼 특이한 특기였다. 밝혀진 것이 없기도 하고. 조직의 규모도 몰라, 특기도 제대로 몰라, 동기나 목적도 몰라.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막연했다.
그래서 나가는 중얼거렸다.
“근데 왜 잡아달라는 것처럼 대놓고 일을 벌였을까.”
“그런 것치곤 최소 4년이나 활동했지만 말이지.”
“그건 또 그러네.”
오디오를 쉴 새 없이 채우며 수다를 떨던 것이 언제냐는 듯 세 사람은 침묵에 잠겼다. 접근 방법을 찾지 못하니 아예 다른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이다. 살인마의 의도를 찾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은 없다지만, 그 무구한 얼굴을 생각하면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간시미 피료해서…?”
“오….”
“진짜로 그러겠어? 그냥 잡혀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그게 왜냔 말이지.”
“몰라몰라, 살인마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가늠하겠어?”
결국 혜나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사사 역시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도 이 문제는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접근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니 말이다.
“손님, 아메리카노와 프라푸치노, 카페라떼 나왔습니다~”
“더….”
“네?”
타냐는 오늘 역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이젠 한 몸처럼 익숙해진 유니폼, 자연스러운 이동 동선, 매일 쓸고 닦는 카페의 전경. 모든 것이 익숙해졌다. 정신을 놓고 있어도 능숙하게 일을 해치울 수 있을 만큼.
그때, 난데없이 까마귀 혼혈로 보이는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귀여운 척을 하는 건 아닐 테고, 혀가 심히 짧아 보였다.
“더, 더나버노 좀….”
“제 전화번호요?”
끄덕,
아, 그건가. 타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컵홀더에 번호를 적어주었다. 영혼이 깃든 해맑은 미소는 덤이었다. 요즘 들어 번호를 묻는 사람이 별로 없어 역시 나이를 먹었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름 자존감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걸로 자존감을 채우면 안 되는 걸 잘 알고는 있지만서도.
남자는 꾸벅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행으로 보이는 회색 머리 남자와 분홍 머리 여고생이 잘했다며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친구라기엔 나이대가 맞지 않는데. 무슨 사이지? 타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사귀게 된다면 소개해주겠지. 그러지 않아도 별 상관없다. 타냐의 기준을 넘지 않으면 그리 깊게 갈 관계도 아닐 테니까.
“-런 사람이 정말로-”
“얼굴 때문에- -러지? 정신 차-”
“도용이 좀-”
그래도 꽤 잘생겼는데. 오래 갔으면 좋겠네. 타냐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인형 같은 미소를 유지했다.
그것은 카페가 닫을 시간까지 유지됐다. 타냐는 빈자리를 샅샅이 닦고 자재를 정리하고 난 뒤에야, 11시가 거의 다 된 시각에 카페를 나설 수 있었다. 추운 겨울날의 날씨 덕에 후우, 하면 하얀 김이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것이 안개처럼 공중에 흩어지고 나서야, 타냐는 멍하니 서 있는 것을 그만두었다.
집 가기 싫다.
“더기,”
“?”
그때, 저녁에 봤던 바로 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전화번호를 따갔던 바로 그 남자였다. 꽤 잘생겼던. 카페가 닫을 시간까지 버티는가 싶더니 밖에서 기다렸나. 추웠을 텐데. 타냐는 마음의 빗장이 조금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타냐라고 해요. 이름이 뭐예요?”
“…사사.”
? 묘하게 경계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타냐는 고개를 갸웃대다, 기분 탓으로 넘겼다. 나름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제게 이렇게 공을 들이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라서. 딱히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왜 기다렸어요?”
“미앙애요. 그래도, 데려다쥬고 시퍼서.”
“아,”
어느 정도 눈치채긴 했지만, 정말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이다. 타냐는 눈을 접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내리는 길, 집으로 향하는 길. 뒤로 남는 두 쌍의 발자국. 어쩐지 간지러운 공기가 맴돌았다. 집까지 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사사 씨,”
“?”
“전 주말에 언제든 괜찮은데. 언제 만날래요?”
“아….”
그건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순진한 남자네. 타냐는 능청스럽게 보이리만치 밝게 웃었다.
“잘하잖아, 오빠!”
“그냥 그쪽에서 의외로 저돌적으로 나온 게 한몫한 것 같은데….”
현재 비행조는 축제 분위기였다. 사사가 타냐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화번호를 딴 당일에 데이트 약속을 잡는 것도 성공했다. 물론, 나가의 말처럼 그쪽에서 먼저 다가온 것이 한몫했지만.
그래도 문자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수백 개의 고구마를 예상하고 있었다며, 혜나는 방방 뛰었다. 그 과정이 생략된 것이 엔간히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런 것에 대해 잘 모르는 나가는 박수를 치며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사사는 이미 넋을 놓고 있었다. 희대의 살인마일지도 모르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게 생긴 것이 영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쯤 되면 나가는 사사가 불쌍해졌다.
“언니도 잘했다고 전해 달랬어. 자, 이거 신호기.”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 아침, 대망의 데이트 날이었다. 나가는 이 상황을 말릴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사사를 응원해주기로 했다. 사사는 이젠 체념했는지 혜나가 챙겨준 신호기와 녹음기, 그리고 혜나와 나가가 엿듣기 위한 도청기를 잘 챙겼다. 늘 입고 있는 각종 무기가 들어있는 코트 역시 잘 챙겼다.
“달 하쑤 이쓰까….”
“당연하지! 못하겠어도 해야 해, 알았지?”
나가는 데이트 장소인 수목원까지 도착해서 멈칫거리는 사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나가가 보기에도 순진한 쑥맥인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헉, 보인다! 얼른 가!”
“사사 선배, 파이팅~”
“~!”
그때, 타냐가 입구에 나타났다. 갈색의 긴 스커트와 귀여운 숏 패딩, 털목도리까지 야무지게 껴입고 나온 타냐는 무척이나 청순했다. 다시 한번, 이 짓에 회의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혜나는 ‘맞으면 살인마 잡는 거고, 틀리면 사사 오빠 애인 만들어주는 거 아니냐’며 이 일을 강행하긴 했지만….
“나가 오빠, 저 둘 들어가고 있어! 우리도 빨리 가자!”
“어, 어!”
그때, 혜나가 나가를 불렀다. 나가는 부리나케 그 둘을 쫓아가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거 잘하는 짓인가?
두 사람은 무척이나 평범한 데이트를 이어갔다. 각종 사진을 함께 찍고, 상술인 걸 알면서도 비싼 수목원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대화는 타냐가 이끌었다. 무척이나 능숙하고 유쾌한 태도였다. 나가는 타냐가 어디서나 호감을 얻을 법한 인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친구가 카페 알바하는 걸 봤는데, 너무 멋있어 보이고 부럽더라구요.”
“응.”
“나중엔 제가 직접 운영하는 게 꿈이에요.”
“-”
“사사 씨는 어떤 일을 하세요?”
저렇게 평범한 꿈을 꾸는 사람이 과연 수많은 사람들을 자살로 이끈 살인마일까? 나가는 마음속에서 점점 더 커지는 회의감을 느꼈다.
“사사 오빠는 대체 언제 정보를 캐는 거야? 아까부터 얘기를 듣기만 하고-”
“저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그런 얘기를 꺼내겠어.”
난데없이 특기 있으세요? 라고 물어볼 수 없는 것 아닌가. 나가는 두 사람을 따라 들어온 카페에서 갓 시킨 음료를 쪽 빨며 생각했다.
“저, 타냐 씨능 특기가 잇서요?”
“아, 특기요? 있긴 하죠.”
-진짜 물어봤네?
나가는 혜나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엿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어떵…?”
“특기를 막아준달까, 제게 위험한 거로부터 보호해주는 거예요. 뭐, 위험한 일이 없으니 쓸 일도 없죠. 그 외에도 무의식적으로 쓰는 모양인데… 잘 몰라요.”
사사 씨는요?
“-?”
세 사람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예상했던 특기와 수천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 대답이었다. 혹시 헛다리를 짚은 걸까? 혜나는 바로 다나에게 문자를 넣었다. 내용은 나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언니, 전혀 다른 특기라는데? 정도의 말이겠지.
결국, 그날의 데이트는 별 수확 없이 끝나고야 말았다.
“-그래서, 미인계를 썼다?”
“네, 네….”
“-하아, 확실히 뾰족한 수가 없었겠지만 미인계라니.”
“그래도 특기도 알아냈잖아, 언니! 이 정도면 헛다리 아냐?”
나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해한 얼굴의 타냐는 마찬가지로 무해한 특기를 갖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희대의 살인 조직의 일원이라니. 그리고 그걸 캐내야 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범죄 조직을 죄 잡아다 자백을 듣는 게 편하겠다! 나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헛다리는 아니다.”
“혹시 촉이 왔어?”
“어.”
어, 그럼 얘기가 다른데. 나가는 서장실의 모두가 생각을 돌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서장인 다나는 야생의 감이라고 해도 놓을 만큼 정확한 촉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다나가 이 정도의 확신을 갖고 말할 정도면 타냐는 적어도 범죄 조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특기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맞아요. 직접 보여준 건 아니죠?”
“응.”
“하지만 증명해달라고 하기도 좀….”
“그럼, 차라리 잠복해서 일과를 살펴봐.”
-결국, 그것이 비행조가 타냐를 스토킹하게 된 이유였다.
“오빠, 일과가 이것뿐인 게 확실해?”
“이딴 그러케 말핸는데.”
“사람이 이렇게 단순하게 살 수 있나? 거짓말 아냐?”
“왜, 우리도 그렇게 살잖아.”
“아.”
세 사람은 사사가 알아낸 타냐의 일과를 보고 타냐의 뒤를 밟는 중이었다. 타냐의 일과는 간단했다. 카페 알바, 편의점 알바, 전단지 알바. 그 외는 죄다 집. 특유의 사건 체질 때문에 외출은 최소화한댔나.
“사건 체질은 뭐야?”
“모라.”
“문자에 보면 온갖 사건, 사고에 잘 휘말린다고 하는데…. 모르겠네요.”
“아, 저기 나온다. 지금은 전단지 알바지?”
-그리고 세 사람은 타냐의 사건 체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타냐는 집에서 나오자마자 교통사고에 휘말릴 뻔했고, 공사장을 지나가다 자재가 떨어지는 것에 그대로 머리를 맞을 뻔했다. 지나가는 길 한쪽에서는 소매치기가 등장하고, 다시 교통사고- 이 모든 게 타냐가 서 있는 지하철역 부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타냐는 꿋꿋하게 목 좋은 지하철역 앞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딘자 안대?”
“어… 네.”
그 와중에 사사는 나가에게 타냐에게 정말 특기가 먹히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아까부터 타냐에게 가벼운 타격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카락 정도를 들어 올리는 것은 통했기 때문에, 타냐가 말한 대로 ‘해를 가하는 경우’의 상황을 실험해봤으나….
"정말 안 통하는 것 같은데요?"
그 실험방식은 타냐에게 작은 공기 탄을 쏘기. 물론 나가는 양심 통을 느꼈지만 다나의 촉을 믿으며 최대한 살살 염동력을 담았다. 하지만 타냐는 타격은 무슨 바람 한 점 불었냐는 듯 산뜻한 태도였다. 일단 타냐의 말은 진실이다. 그것을 확인한 세 사람은 다시 타냐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사사와 타냐는 제법 여러 번 만남을 반복했다. 타냐는 슬슬 사사가 고백하는 것을 기다리는 기색이었다. 사사는 그것이 못내 부담스러워 이 상황이 어서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말이 진짜라고?”
“네.”
“그냥은 되지만, 공격될 만한 위력을 담으면 염동력이 하나도 안 통하던데?”
“흠….”
그리고 보고 시간. 나가는 다나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패는 것을 확인하며 고민을 거듭했다. 더 이상 파봤자 아무것도 나올 게 없었다. 타냐를 이미 몇 번이나 미행했지만 정말로 특별한 게 없었고, 만나는 사람도 없었다. 철저히 혼자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혼자라는 점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뭔가 사정이 있겠지.
사실 이쯤이면 타냐에게 집착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나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야, 차라리 데려와.”
다나가 더 참지 못하고 폭탄 발언을 한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서장실에 있던 모든 인원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그만큼 뜬금없는 말이었다. 지금 잡아 올 수가 없어서 이 고생을 하는 게 아닌가.
“?”
“여, 여냉애와요?”
“참고인으로 진술이 필요하다고 하면 되잖아. 너네가 말하는 거 보면 꽤 순순히 따라올 것 같은데.”
“설마 그렇게 순순히 따라올까요?”
“어. 사사가 말해서 데려와라. 어차피 롤링핀 소속인 거 안다며?”
나가는 그 순간에도 지목된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에 짧게 안도했다. 아니, 타냐가 정말로 살인마와 연관된 사람이면 순순히 따라오겠냐고. 다나의 판단을 의심하긴 싫지만, 제정신 아닌 명령이었다.
-그리고 타냐는 정말로 사사를 따라왔다. 나가는 서장실로 올라온 타냐를 어이없게 바라봤다. 이렇게 떳떳한 거 보면 진짜로 일반인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서장실을 채우고 있는 인원은 나가를 비롯한 비행조와 다나, 그리고 다나의 비서인 귀능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5명의 시선을 받는 타냐는 조금 부담스러운 듯, 슬쩍 다나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조금 숫기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그래서 제 진술이 필요한 게 어떤 부분일까요?”
“가빈, 29세, OO전자 사무직. 생각나는 게 있나?”
“어, 제 전 남자친구인데요. -무슨 일 있나요?”
타냐는 사사의 눈치를 조금 보는가 싶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현재의 안부도 모르는 것이, 정말로 무구해 보이는 태도였다. 회의감이 그 자리를 더욱더 불리기 시작했다. 나가는 차라리 다나를 말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미온, 세이라, 휴고, 나루, 리카- 아는 이름은?”
“그분들은 처음 듣는데, 저와 관련이 있나요?”
“…전부 너와 접촉한 뒤 자살한 사람들이다. 2명은 자살 미수지만.”
안 돼요, 안 됩니다 서장님! 나가는 차라리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전혀 관련이 없을 법한 사람에게 다짜고짜 이거 너지? 물어보겠다는 생각은 역시 최악이었다. 아무리 서장님이라지만 그런 식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가는 사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 역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4년 전부터 자살률을 급격히 올라가고 있는 것의 용의자가, 너로 지목되고 있다. 저 피해자들이 접촉한 이들 중 유일하게 겹치는 인물이 너니까.”
“아, 그런가요? …혹시 우울증으로 자살했나요?”
-어?
“그래. 하나같이 우울증을 호소했다. 덕분에 자살률은 분명 해봐야 20명 수준이었는데, 1년 만에 40명이 되더니 어느새 50명까지 올라왔지.”
“그렇게 오른 줄은 몰랐네요 으음… 전부 저랑 접촉한 사람이란 말이죠?”
“그래.”
“…그럼 짚이는 게 있긴 해요.”
어어?
“-그거, 범행을 인정하는 말로 봐도 되나?”
“아니, 사실 애매한데요….”
“뭐?”
“전 죽이려고 한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제가 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C시, E시, G시에서도 자살률이 많이 증가했나요?”
“…”
“제가 살았던 도시인데…. 그럼 아마도 제 탓이 맞겠네요. 그런데 어떻게 확신하고 저를 데려오신 거예요? 좀 신기하네요.”
저도 몰랐는데.
어어어?
나가는 순식간에 흘러가는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어 입을 떡 벌리고야 말았다. 이런 막 나가식 취조가 통한 것은 둘째 치고, 타냐가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믿기 힘들었다. 그것을 제 입으로 인정했다는 사실도! 이렇게 자수할 거라면 대체 왜 그런 짓을 벌였는가? 심지어 타냐는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나가, 나가 군? 염동력으로 취조실까지 연행 좀 해주시겠어요?”
“앗, 넵.”
그리고 그런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타냐에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반항은 없었다. 그래도 접촉하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나가 군이 염동력으로 들어서 옮겨주세요. 귀능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 늘 그렇듯, 귀능이 직접 취조하려는 기색이었다.
“저, 저도 좀 봐도 되나요?”
“나도, 나도 볼래!”
“네~ 어차피 기록될 테지만, 직접 듣고 싶다면 보러 오세요. 대신 조용히 해야 하는 거 알죠?”
결국 서장실에 있던 인원 그대로 취조실에서 모이게 되었다. 타냐는 그렇게 연행되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제 발로 롤링핀에 찾아올 때처럼 순순히 염동력에 들려오고 있었다. 나가는 문득 궁금해져서 그의 표정을 돌아보았지만-
“…”
인형 같은 미소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자, 기본적인 인적 사항부터 물어볼까요? 타냐, 28살, F시 출신, 1남 1녀 중 막내. OO여대 자퇴. 그런데 특기는 없다고 되어있는데, 무슨 일이죠?]
[커서 발현했거든요. 고등학교 1학년 때쯤인가. 제게 위험한 특기를 무효화하는 거랑- 저에게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특기. 네, 이 정도로 하죠.]
[흠,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특기라. 이걸 어떻게 활용했길래 사람들을 자살로 이끈 거죠?]
[저와 공감한 것뿐이에요. 저는 늘, 저와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거든요. …그런데 그게 자살로 갈 줄은 몰랐어요. 정말요. 다들 생각보다 용기가 있나 봐요.]
[자세히, 제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죄송해요, 평소에 이렇게 자세히 말할 일이 없어서. 무엇보다, 이런 일로 스피치할 것도 아닌걸요.]
[…]
[진짜 제대로 말할게요. 음- 전 언제나 죽고 싶으니까. 그 감정에 공감하게 만드는 거죠. 기간은 사실 잘 몰라요. 특기를 조절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도 몇 달은 별짓을 해도 우울감에 허우적거려야 할걸요? 죄책감이며 자괴감은 덤으로. 자살은… 옵션? 인데 걸린 사람이 ‘좀’ 많았나 봐요. 그걸 바란 건 아닌데….]
“-진짜였네요.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전 진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공감하길 바란 것뿐이에요. 아무도 저를 100% 이해해주지 못할 테니까.]
나가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무구하게만 보였던 미소는 이제 살인마의 돌아버린 그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타냐는 그만큼 뻔뻔하게 웃고 있었다. ‘몇 달’은 무슨, 최소 1년의 감정을 저당 잡은 주제에 슬프다며 한숨 쉬는 그 밉살맞은 태도에, 귀능이 성질을 내기 직전인 것이 그대로 보였다.
그나저나, 죽고 싶다니. 나가라면 평생 가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었다. 우울증이 나름 중병이라고는 들었지만, 사람을 저 정도로 돌아버리게 할 수 있는 건가?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들어보니, 타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뭉쳐 있는 덩어리라 할 수 있었다. 그 자체로 스스로를 죽여버릴 수 있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얼굴 보고 판단하는 거 좀 고쳐라.”
“아냐, 언니. 나가 오빠는 이상형에만 반응하니까!”
찌릿-
이 와중에 다나의 째림을 받은 나가는 어깨를 흠칫거렸다. 혜나야…. 나가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리며 취조에 집중하는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특기의 조건은?]
[닿기만 하면 돼요. 간단하지만 까다롭죠?]
[그럼 더 본격적으로 물어보죠. 어떻게 그 정도 사상자를 낸 겁니까? 별달리 접촉도 없었던 것 같은데. 경로를 밝히시죠.]
[매일 성실하게 일하면 돼요.]
[제가 지금 그런 걸 물어보는 것 같습니까?]
[어, 음, 진짠데. 매일 20명씩만 조금씩 손등이 스치는 정도로 접촉해도 충분해요. 서비스직이라면 간단하죠. -애인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3, 65, 곱하기…. -그렇게 해도 1년에 만 명 남짓 아닙니까?]
[에이, 접촉한 당사자만 생각하면 안 되죠.]
-우울은 전염되는 법이에요.
타냐는 여전히 말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가는 헛숨을 집어삼켰다.
[한 사람이 우울해지면, 가까운 사람 최소 한 명은 그걸 감당하죠. 특히 가족이요. 친구도 그렇지만요. 그런데 자살까지 했다, 라…. 자살유가족이라고 알아요? 자살한 사람을 가족의 자살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져요. 가족 전체가 우울해지는 거죠. 뭐, 그런 경우엔 제 특기를 쓴 게 아니니까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나아질 수 있겠지만.]
-어쨌든 시간이 갈수록 환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제가 딱히 손을 댄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저 작은 입에서 잔인하고 무감정한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가는 입을 뻐끔거리며 차마 소리도 내지 못했다. 혜나도, 사사도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기록관들도 혀를 찼고, 오로지 다나만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선명한 혐오가 두 눈동자에 떠올라 있었지만.
[하… 언제부터 그런 짓을 한 거죠?]
[어… 제가 20살 때부터…?]
“?!”
“4년 전부터 자살률이 올랐다고 하지 않았어요?”
“쯧, 사람들이 그렇게 바로 픽픽 죽을 리가 있겠냐.”
“…”
그러니까, 다나의 말에 따르면 타냐의 특기에 당한 사람들은 몇 년간 버티다가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게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게 4년쯤 전이고. 나가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이제는 나가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혜나가 나가자고 하기를,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동기는 뭐죠?]
[-음 얘기가 길어지는데.]
[시간은 충분하니까 일단 말해보시죠.]
[전 죄책감 때문에 이렇게 됐거든요. 그런데 죄의식 없이, 저 같은 고통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다시 한번, 충격으로 취조실이 쩡 얼어붙었다.
[지금 추산으로 거의 5만 명을 죽인 사람의 입에서 죄책감이란 소리가 나옵니까?]
[으음… 죽을 줄은 몰랐다니까요. 그리고 반대예요. 사람들은 개미를 죽이면서 죄책감을 느끼진 않잖아요? 그런데 전 개미를 죽이는 것조차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미안하죠.]
[…]
[그런데 사람들은 제 욕심으로 다른 동물을 서슴없이 죽여요. 생존이 아니라 사치와 향락의 목적으로. 그뿐이에요? 잘살아 보겠다고 자연을 밀어버리기도 하죠. 전 그때마다 제가 사람인 게 부끄러워요. 뭐, 다른 계기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주로 그런 고통을 가지고 평생을 고통받아왔죠.]
[본인은 깨끗한 것처럼 말하는군요.]
[아뇨, 저도 예외는 아니죠. 그래서 얼마나 미안한데요. 그래서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데- 저와 똑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고통 따위는 모르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잖아요.]
[허….]
일단, 나가가 떠올린 것은 아모르였다. 세상의 모든 생물을 사랑한다는 그 사람. 모든 생물이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타냐는 어쩐지 굉장히 비틀려 있었지만, 그 사상이 아모르와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차이점이라면,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제가 알려준 거예요. 원래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한다고. 조금은 날 이해해보라고- 호소한 거죠. 우울하고, 죽고 싶고, 그럼에도 죽을 수 없고, 나아질 기미는 안 보이고. 그런 감정을… 다들 느꼈으면 했어요.]
[전 인생의 절반을 버렸는데, 겨우 몇 달 괴로워하는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 정도로 죽을 줄은 몰랐지만….]
-애초에 아모르와 같았다면 인간 역시 사랑했을 것이며, 사랑하는 인간에게 이런 짓을 하진 않았겠지.
[어쨌든 제가 관여한 게 맞으니, 전 잡혀가겠죠?]
[당연하죠. 취조는 이걸로 끝입니다.]
[…그래도 괜찮은 엔딩일지도 모르겠네요.]
나가는 어째선지 쉽게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재주를 가진 두 사람을 비교해보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결국 타냐는 잡혀갔다. 특기의 조건이 손을 통한 접촉이라는 자백을 믿고,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손을 꽁꽁 싸매 둔 채로. 그동안 타냐는 시종일관 순종적인 태도였다. 결론적으로 그 모든 행적이 ‘단순한 화풀이였다’는 것이 믿기는 태도였다. 화가 나서 좀 찍어 건드려 본 건데 누가 경찰까지 신경 쓰겠는가. 물론 이번 화풀이는 심각하게 규모가 컸지만.
나가는 아는 지인 중에 타냐와 만난 사람이 없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부르릉,
-흔적이 남지 않는 특기 덕분에 자백 외에는 증거도, 증인도 남지 않은 사건이므로 대서특필되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차에 실려 갔을 뿐이다. 나가는 창문 밖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입맛을 삼켰다. 타냐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웃고 있었다.
‘잡혀가면, 전 죽을 수 있을까요?’
‘…’
‘그랬으면 좋겠네요. 전 그동안 운이 좋아서 죽고 싶어도 못 죽었거든요. 자살은 무서워서 꿈도 못 꾸고. 겁쟁이죠?’
‘…’
‘차라리 누가 날 죽여주길, 그동안 얼마나 많이 바랐는지 몰라요.’
‘…너에겐 아쉽게도, 죽진 않을 거다.’
‘괜찮아요. 이미 계획을 세우고 있거든요.’
아무도 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나같이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어쨌든, 롤링핀에서는 타냐로 인한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타냐와 접촉한 피해자보다는 1차 효과, 2차 효과로 퍼져나간 경우의 피해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의 치료를 지원하는 것밖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마저도 그건 롤링핀의 관할이 아니었고.
직접 접촉한 피해자를 찾아도 문제였다. 하나하나 타냐에게 보내는 것도 큰일일뿐더러, 타냐가 그걸 원래대로 돌릴 능력이 있는지, 그럴 마음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결국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번처럼 롤링핀이 무력한 사태는 나이프 이래로 처음이었다. 아니, 나이프는 공격할 수라도 있지, 타냐 같은 경우는 전혀 다른 유형이기 때문에 더욱 최악이었다.
“-우울증이라는 건, 어떤 기분일까?”
“모르능 게 조으껄.”
“역시 그렇지?”
사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나가는 몰랐기 때문에 무어라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란 생각도 좀 있고. …음, 결국 이런 분야에서 별 능력이 없는 나가로서는 피해자들을 향해 심심한 동정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에도 타냐로 인한 피해자들은 자신의 감정이 자신을 공격하는 수렁에 빠져 있을까?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는 나가지만, 이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고작 타냐라는 소 재앙의 ‘공감해달라는 호소’란 것으로, 그들은 앞으로 오랜 시간 끊이지 않는 악몽Infinite Nightmare에 갇혀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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