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8. 타냐가 사사, 송하와 동기였다면?
남겨진 사람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세 명의 입사 동기, 그중에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꿀로 만든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곱게 반묶음 한 타냐였다. 사사는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렇다. 세 사람은 동갑에, 동기라고는 하지만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였다. 사사와 송하는 각자 다른 조에 속해 있고, 애초에 타냐는 특기를 개발하느라 바빴으니까.
그래서 6개월 뒤, 그런 세 사람이 친한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전적으로 타냐의 역할이 컸다. 사사는 자신의 발음을 놀리지 않는 유일한 인물인 타냐의 곁에 붙어 있기를 자처했고, 송하 역시 과하게 컨셉추얼한 자신의 모습에 호들갑 피우지 않는 데다가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는 타냐를 편하게 여겼으니까. 타냐에게 배정된 상담실은 곧 세 사람의 아지트가 되었다.
“사사는 커피?”
“응.”
“송하는 녹차지?”
“네.”
사실 그들이 친구로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뿐. 타냐는 그 시간에 차트를 정리했고, 사사는 책을 읽었으며, 송하는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광합성을 했다. 그 사소한 시간이 쌓여 호의가 된 것이다.
-타냐를 구하는 일에는, 꼭 두 사람이 차출될 정도로.
“타냐!”
“여긴 없습니다.”
1년 사이에 타냐는 냅킨의 정신적 지주가 되다시피 했다. 아, 물론 첫 번째 지주는 서장이지만··· 타냐가 그만큼 사원들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것이다. 덕분에 은퇴율은 줄었고, 나이프의 위협에도 나름 굳건하게 맞설 수 있었다. 뒤에서 그들을 믿고 위로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히어로니까.
하지만 그만큼 나이프의 타겟이 되는 일이 잦았다. 애초에 사건 사고가 잦은 체질에, 나이프의 테러까지 겹치자 타냐는 늘 재앙을 앞두는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전투조가 곁에서 늘 호위하는 것은 일상, 외출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그만두기만 하면 살려준다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내가 특별히 기회를 주는 건데 말이야-”
백모래…!
곁에 메두사와 오르카도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사와 송하는 눈빛을 교환했다. 일단 무전으로 연락하며 대기하자는 합의였다. 당장 진입하면 타냐도 위험할뿐더러 쪽수에 밀린다. 한 명의 인질을 떠안고 3대 2 싸움을 진행하는 것은 어딜 보나 무모한 짓이었다. 먼 곳에서 상대를 저격하는 것이 적성에 맞는 사사에게는 더더욱.
“제 일이 당신의 사랑에 뭐가 그렇게 방해가 된다고 이러는 건지 궁금하네요.”
그렇게 무전을 하는 와중에도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대체로 백모래가 타냐의 목숨을 들고 협박하는 것에 타냐가 부들거리면서도 의연하게 대응하는 내용이었다. 사사는 속으로 타냐를 응원하며, 냅킨의 빠른 대처를 기다렸다.
“덕분에 히어로가 줄지를 않잖아. 멋대로 우리 애들을 회유하기도 하고 말이야.”
“보스, 그냥 이 여자가 맘에 안 드는 거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만. -아, 연락 왔다. 난 갈게. 죽이면 돼. 알지?”
그때, 난데없이 백모래가 현장을 탈주했다. 히어로들이 사사의 연락을 받고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목적은 명확했다. 일부러 히어로들의 시선을 끌고 다른 목표물을 노리는 것이다! 사사는 다급하게 무전을 켜 송하에게 내밀었다. 상황을 보고하라는 뜻이었으나-
[랩터가 연락 두절이다. 원래 보낼 인력의 절반을 보낼 테니 분전해라.]
어쩐지, 사사는 입을 악물었다. 직접 협박도 할 겸, 주의를 끌 겸 이 폐건물에서 보란 듯이 사사와 송하의 주의를 끌었던 것이다. 언뜻 마주쳤던 시선에서 비웃음이 지나간 것 같다. 사사는 타냐를 처리하기 위해 손을 드는 메두사를 향해 바로 총을 쏘았다.
“어머, 이제 끼어들기로 한 거야? 아까까진 눈치나 보면서 대기하더니.”
콰각,
옆에서는 송하가 오르카를 향해 휘두른 칼이 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타냐는 그 사이에 건네받은 단검으로 청테이프를 끊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어지간히 험하게 다뤄졌는지, 곳곳이 상처투성이인 것에 사사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와중에도 메두사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사사가 쏘아낸 총탄을 피하고 있었다.
“로지, 지원 왔습니다~”
그때, 지원군이 도착했다. 이제는 수적 열세가 분명한데도, 메두사는 빙글대며 웃고 있었다.
“메두사 님,”
“아~ 알았어. 이제 가야지?”
“가긴 어딜 가?!”
대뜸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두 사람을 향해 총칼이 날아든다. 그것은 여유롭게 웃고 있는 얼굴 위를 무용하게 스쳐 지나갔고,
“그럼 다들 잘 빠져나가 보라구.”
쿠광-
땅 밑으로부터 폭음과 함께 진동이 덮쳐왔다. 연속적인 폭음이 고층까지 덮쳐오는 것을 보면 분명 폭탄이었다! 사사는 다짜고짜 타냐를 들고 창문 밖으로 날아올랐다. 폭탄이니 피하라고 외치는 것은 덤이었다.
“뽁탕, 삐해요!”
…참으로 긴장감 없는 말투였다. 때에 맞지 않게 웃음이 터져버린 로지는 배를 부여잡으며 부유 특기를 가진 히어로에 의해 무사히 실려 갔고, 송하와 타냐는 날 수 있는 사사에게 매달려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날따라 날 수 있는 특기와 체질을 갖고 있는 히어로가 배치된 덕에 인명피해는 없었고, 불과 몇 시간 만에 폭탄 테러 현장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납치 피해자인 타냐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녹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거창할 것도 없는 티백 녹차였다. 사사는 그 곁에 앉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간단한 사사의 심정이었다. 올해 들어 타냐가 납치당하거나 테러에 휘말린 것만 벌써 여섯 차례였다. 아직 더운 여름일 뿐인데도 그랬다. 그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랩터가 유난히 타냐를 마음에 들어 하고 의지했기 때문에.
뭐, 백모래 입장에서는 랩터의 연인 헤이즈만큼이나 눈엣가시겠지.
“타냐, 괜찮겠어?”
“네? 뭘요?”
다들 그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타냐는 그런 생각의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랩터에게 상처가 될 거라고 했던가. 정말 눈이 부시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사사는 서장이 타냐에게 말을 거는 것을 지켜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계속 히어로 하는 거 말이야. 네가 힘들다면 그만둬도 되는데.”
“저, 잘리나요? 아무래도 민폐라서….”
“아니, 그런 게 아니지! …네가 힘들지 않느냔 얘기야.”
“에이, 당연히 괜찮죠.”
사사 여기 있었네. 아, 상제 성배님….
사사는 어느새 곁에 다가온 상제를 보며 간단히 속으로 인사했다. 그는 어차피 독심술로 사사의 인사를 알아볼 테니까. -서장과 타냐의 대화는 그사이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사사는 상제가 가만히 타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봤다. 그는 독심술 특기가 있었다. 그것을 떠올리니 작은 의문이 생겼다.
-지금 괜찮다 말하는 타냐는, 정말로 괜찮은 걸까?
“다른 히어로들이 더 고생이죠. 제가 좀 힘이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넌 애초에 전투 인력이 아니잖아.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치료나 잘 받아. 그럼 난 간다?”
“네! 안녕히 가세요~ 어, 상제 씨 언제 오셨어요?”
아, 대화가 끝났다. 타냐는 멀어져 가는 인영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고선 다시 앉았다. 언제 왔냐며 선배인 상제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덤이었다. 그때, 뜬금없이 상제가 타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
“기특해서 그런다. 기특해서.”
그 뜬금없는 스킨십에 타냐도 사사도 놀랐지만 상제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사사는 타냐의 속마음이 어땠길래 상제가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고, 타냐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곧 멋쩍은 표정이 되긴 했지만. 결국 혼자만 상황을 모른 채 사사만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타냐쌤! 여기 조서만 좀 써주라~”
“아, 네! 가요!”
그때, 저 멀리 누군가의 부름에 타냐가 자리를 비웠다.
사사는 지그시 상제를 쳐다봤다. 저도 궁금하다는 무언의 요구였다. 물론, 타냐의 속마음을 허락도 없이 건너 듣는 것은 실례지만 에둘러 말해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사사의 마음을 읽었는지, 상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 지내라. 드물게 속마음이랑 겉모습이 일치하는 애니까.”
“?”
그건 알고 있지만, 진짜로 괜찮은지… 가 궁금한 건데요.
“아주 괜찮은 건 아니지만, 회복이 빨라. 그냥 너희가 잘 붙어있어 주기만 하면 도움이 될 거야.”
“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사사는 대강 납득하는 척 침음을 흘렸다. 그것을 알고 있는 상제는 꽁, 사사에게 꿀밤을 먹이며 웃어 보였다.
“너희들이 위로만 잘해주면 금방 기운 차린다는 얘기야.”
“…”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었다. 힘들어하는 타냐를 곁에서 지켜봐 주란 얘기가 아닌가. 사사는 타냐가 괜찮았으면 했다. 타냐라는 좋은 동기와 최대한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 상제의 조언을 잘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하지만 어떻게? 늘 위로하는 것은 타냐 쪽이다 보니, 이제 와서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것이 힘들었다. 일단 고민 없냐고 하고 얘기를 들어주면 되는 걸까, 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하는 어울려줄 것 같지 않은데… 나 혼자라도 뭔가 해봐야 하나.
그리고 어쩐지 분위기를 잡은 뒤 ‘고밍 업더?’라 물어보는 사사에게 타냐가 폭소한 것은 불과 일주일 뒤의 일이다.
타냐가 집에 다녀온다.
오랜만에 찾는 어머니의 기일이라고 했던가. 덕분에 호위는 동기 두 사람으로 정해졌다. 타냐는 잘 됐다고 활짝 웃으며 환영했다. 아버지가 회사 사람들을 그렇게 궁금해했다나. 친구의 부모님을 보러 가는 것이 처음인 송하 역시 조금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사사는 그 둘 사이에 껴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타냐를 알아보는 사람이 곳곳에 보였다. 이러나저러나, 언론에 얼굴이 공개된 냅킨의 히어로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테러하려는 사람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피곤할 뿐. 이 정도면 나갈 때마다 무서울 법도 한데, 늘 아무렇지 않은 얼굴인 타냐의 속내가 사사는 조금쯤은 궁금했다.
“? 사사, 왜 신발을….”
“? 로지 성배가 비앵기에서능 신바를 버서야 항다고….”
“…그거 아니니까 그냥 타십시오.”
속았다!
비행기에 오르는 사이에 한 번 더 로지에게 골탕을 먹은 사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명씩 앉는 좌석은 송하와 타냐, 사사가 쭉 앉으면 딱 적당했다. 앉은 후에도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는 사사를, 타냐는 부드럽게 웃으며 달래주었다. 그나마 일행 중 놀리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사사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오늘 OO에어를 이용해주신 승객 여러분]
비행기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륙 방송이 들려왔다. 승무원은 구명조끼 이용법과 탈출구를 안내하고 있었고, 타냐는 편하게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수학여행도 버스, 배뿐이었던 사사는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비행에 어느 정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송하는 피곤한 낯으로 창밖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세 사람이 각자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타냐는 송하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발견한 모양이다.
“송하, 요새 잘 못 잤어?”
“아무래도 일이 많으니까요.”
“짬짬이라도 자야지. 여기서 좀 잘래?”
“제 업무는 엄연히 호위입니다. 호위 중에 잘 수는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내 손 잡아봐.”
바로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주의가 쏠린 사사는 고개를 돌렸다. 안 자겠다며 버티는 송하와 그런 송하의 손을 잡고 버티는 타냐가 보이고 있었다. 사사는 타냐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설마 공중인데, 비행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겠냐는 안일한 마음가짐이었다.
“내가 지키고 이쓸 테니가 돔 자.”
“봐봐, 사사도 그렇다고 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럼 10초만, 10초만 특기 쓸게. 이래도 안 자면 포기할 테니까. 응?”
“…알겠습니다.”
거봐, 송하도 자고 싶은 거라니까.
타냐는 사사를 향해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속삭인다고는 해도 다 들리는 거리라 송하가 발끈했지만, 타냐가 잘 다독였다. 그에 사사는 절로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긴장이 풀릴 수밖에 없는, 언제나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5분 뒤,
“사사, 사사. 송하 좀 봐.”
사사는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타냐의 속삭임에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는-
타냐의 손을 꼭 잡고 색색 자는 송하의 모습이 보였다. 사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소리 없이 쿡쿡대고야 말았다.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할 만큼 먼 거리에 있는 타냐의 고향은, 어쩐지 같은 나라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이국적이라 하기엔 좀 부족하고, A시라기엔 좀 더 토속적인 지방 특유의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럴 리 없지만, 사람과 건물마저 좀 더 투박해 보이는 것이 그런 분위기에 더욱 한몫했다.
세 사람은 차를 빌렸다. 괜히 대중교통을 이용해 위험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을 올리느니, 차라리 차를 타고 조용하고 한적한 길을 골라 주행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운전이 가능한 사람이 있어 내릴 수 있는 판단이기도 했다.
“사사, 믿어도 되는 거지?”
“응.”
“믿겠습니다.”
-하지만 타냐의 사건 체질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어쩐지 비행기는 조용하다 싶었다고, 사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중간중간 포진해 있는 교통사고 현장에 지독한 안개까지. 예상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세 사람은 우물쭈물하며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아니, 사사만 그랬던 것 같다. 타냐는 중간에 ‘아빠한테 전화했으니까 괜찮아’라며 그를 다독였고, 송하는 묘하게 당당했기 때문이다.
“아빠, 다녀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녕하떼오.”
“딸 왔나? 그동안 얼굴도 안 보여주고. -응? 자네들은 왜 상복을 입고 있나?”
“원래 저렇게 입는 거예요, 아빠. 방은 준비됐어요?”
발음을 트집잡히지 않은 것에 안도한 사사는 한숨을 쉬며 타냐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얼굴에 보라색 눈동자는 타냐와 조금도 닮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머니를 닮은 걸까? 그걸 물어볼 용기는 없지만서도, 소소한 궁금증이 일었다.
“일주일 동안 맛있는 거 많이 사줄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라. 알았지?”
“괜찮다니까요, 아빠.”
그래도 딸에 대한 애정이 가득해 있는 얼굴이, 어딜 보나 딸을 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는 오랜만에 오랜 일정 고향에 와 있는 딸이 반가웠는지 딸려온 호위들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타냐를 챙기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로 그렇게 허둥지둥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딸 가진 아버지들은 원래 다 저런 건가…?
“타냐, 그래서 어느 쪽이냐?”
“네?”
“애인, 말이다. 애인.”
“커흡, 쿨럭!”
“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뜬금없는 질문은 송하가 물음표를 띄우게 했고, 사사는 죽을 것처럼 기침하게 만들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타냐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아버지를 다그쳤지만, 그는 뻔뻔했다.
“거, 요즘은 사내 연애는 안 한댔나? 그래도 타냐 네가 데려온 데에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이렇게 짐작하신 건가, 그럴 법도 하지만…. 사사는 아버지가 회사 동료들을 궁금해하셨다며 그들을 환영하던 타냐의 얼굴을 떠올렸다. 순수한 의도로 그들을 소개하러 데리러 왔던 타냐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타냐가 조금 안쓰러워지고, 사사는 평정을 되찾았다.
“저는 따로 마음에 둔 분이 있습니다.”
“그럼 이 검은 쪽?”
“아빠!”
송하?!
사사는 난데없는 송하의 배신(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에 화들짝 놀랐다. ‘그’ 송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핑계로 혼자 쏙 빠져나가다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 짧은 순간, 사사는 타냐와 깊은 아이컨택을 했다. 알았어? 아니, 너는? 나도. 그런 종류의 의사 표현이 지나갈 때쯤이었다.
짤랑-
“아빠? 타냐?”
“어, 아들 왔나?”
현관문에 달린 풍경이 울리는 소리가 또 다른 인물의 등장을 알렸다. 타냐의 아버지와 꼭 닮은 젊은 남자였다. 잔뜩 당황한 모습의…. 그것은 타냐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태연한 것은 타냐의 아버지인 로디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이어지고 나서야, 타냐의 가족과 사사는 제대로 통성명을 할 수 있었다.
숨 막힐 듯 어색했던 자기소개 때와는 달리, 제법 평안한 며칠이 이어졌다. 타냐도 어머니의 기일이라기보단 휴가를 온 기분으로 고향을 즐기고 있는 듯싶었다. 그만큼 송하와 사사를 데리고 쏘다녔다는 소리다. 물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오늘도 그런 일상의 일환이었다.
“여기, 이쪽!”
“내비게이션은 좀 더 돌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여기서 옆으로 꺾는 것이 어떤지.”
“앗, 그런가? 이쪽 동네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네….”
“이딴 송아 마대로 하께.”
그동안 사사는 타냐의 성향을 또 하나 파악했다. 타냐는 지나치게 내비게이션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덕에 없는 길을 맞닥뜨리거나 가려던 맛집을 문을 닫고 있는 상황이 속출, 옆에서 송하가 그를 보조하게 되었다. 타냐 혼자 길을 찾던 상황보다 훨씬 나아진 것은 당연했다. 계획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 사사는 핸들을 꺾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다였다.
탁 트인 해안선, 이른 겨울의 초입인데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몇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아침이었다. 이쯤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만 남기고 사라진 듯이 고요할 법도 했다. 그런 곳에 도착한 타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모래톱에 발을 들이며 하늘을 끌어안는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한없이 화창한 얼굴은 덤이었다.
“와, 오랜만이다!”
사사는 그런 타냐를 잠시 감상하듯 바라보며 차를 단속했다. 송하는 이미 타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결 나쁜 장발이 앞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며 사사도 발을 떼었다. 타냐는 어느새 앉을 자리를 찾았는지 야무지게 돗자리까지 깔고 난 뒤였다.
“아, 좋다. 가끔 우리 셋이서 이렇게 놀러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안 그래?”
“…”
“응.”
해맑은 타냐의 물음에, 송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사사도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정말로, 사사는 이런 일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소 타냐의 일상은 지나치게 단순한 편이기 때문이다.
사원 숙소에서 일어나면 마찬가지로 사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헬스장에서 운동, 출근하고 나면 일, 일, 일. 그게 평일 동안 반복된다. 더 심각한 것은 주말이다. 분명 문자를 넣으면 연락은 되는데 방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가끔 밥이라도 먹으러 나갈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을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사는 가끔 타냐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연락하는 편이었다.
물론 그것이 자기방어의 일종임을, 사사는 잘 안다. 밖에 나가면 각종 사건 사고에 나이프의 테러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굳이 밖에 나가고 싶어 하겠는가.
하지만 이곳만큼은 아니었다. 나이프가 활동하는 주 무대도 아니었고, 휴가철이 아니라서 사람도 적었다. 타냐는 그동안의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의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
사실 사사는 타냐의 자유도 자유지만, 그 시간을 이렇게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기꺼웠다.
“송하, 해산물 좋아? 여기 해물라면 맛있다던데.”
“해물은 괜찮지만, 라면은 그리 끌리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그냥 횟집 갈까.”
사사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타냐는 잔뜩 들뜬 듯이 밥을 고르고 있었다. 사사는 말을 덧붙였다.
“오때 보니까 갠차는 버거집또 이떤데.”
“그것도 좋다!”
타냐가 이끌어서 나오긴 했지만, 그조차 자세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렇게 놀러 다닐 것을 염두에 두고 온 휴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사할 시간은 부족했고, 타냐는 그것을 목적지를 정하는 것에 썼다. 덕분에 먹을 것은 그때그때 눈에 보이는 곳을 찾아가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어제 국숫집에서 거한 실패를 겪었더란다.
“오늘은 맛있는 거 먹어야지! 여기 후기 괜찮은 것 같은데 어때?”
“그런 인터넷 매체로 올라오는 후기들은 광고일 확률이 없잖아 있으니 차라리 가게를 운영한 지 오래된 곳을 찾는 것이…”
“하지만 어제 그렇게 했다가 망했잖아….”
“…”
“난 조아.”
…그들은 그 길로 전복죽이 기가 막힌다는 횟집으로 향했다.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마딧덧떠.”
“그치, 괜찮았지?”
이번엔 성공했나 봐!
한 시간 뒤, 세 사람은 만족스러운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식당을 나설 수 있었다. 근처 카페에서 산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며 산책하는 와중에도 감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 사람에게는 익숙한 정적이 찾아왔다. 원래 말이 없는 송하와 사사도 그렇지만, 타냐 역시 대화가 필요 없는 것에 구태여 말을 붙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그래서 세 사람은 정적이 자연스러운 사이였다. 그들은 그저 눈앞에 놓인 바다의 풍경에 집중하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점심시간이라 조금 더 활기가 돌긴 했지만, 사람은 여전히 없었다. 사사는 사건 사고 없이 이 여유를 좀 더 오래 유지하게 된 것에 대해 잠시 감사하며 타냐를 흘긋 바라보았다.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타냐가 곧 정적을 깼다.
“그러고 보니, 송하.”
“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아. 며칠 전의 이야기였다. 처음 타냐의 본가에 왔을 때 타냐의 아버지가 던진 질문에 필요 이상으로 당황했던 사사는 조금 아련해졌다.
하지만 그때도 송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의외였다. 한 입으로 두말할 사람도 아니고, 아마 진심일 텐데. 평소에 그런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만, 그게 그렇게 의외인 일인가 싶군요.”
“아니, 역시 송하랄까. 전혀 티를 내지 않아서.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도 돼?”
타냐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사사는, 이어지는 질문에 저도 모르게 송하를 주목했다. 송하는 이런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운 듯,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곤 특유의 진지한 목소리로 간단히 답했다.
“…강한 분이십니다.”
“그렇구나.”
“?”
이걸로 설명이 된 건가?
사사는 의문스러운 기분에 이번엔 타냐를 바라보았다. 어딜 보나 뜬금없고 성의 없는 답변에도, 타냐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가 한 질문도 아니건만 충족되지 않은 기분이 들었던 사사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그것은 송하도 의문스러웠는지 타냐에게 되물었다.
“더 묻지 않으십니까?”
“아니, 말하기 싫은 것 같은데 억지로 듣고 싶은 마음은 없는걸. 사사도 그렇지?”
“응? 응.”
“…감사합니다.”
사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의외라는 듯, 송하는 눈썹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간단히 감사 인사를 남겼다.
“그래도 좀 걱정은 된다.”
“네?”
“송하라면 왠지 사랑 때문에 목숨도 걸 수 있을 것 같아. 히어로는 아니지?”
“…”
“앗, 히어로야?”
사사는 정곡을 찍어버린 타냐를 보며 잠시 송하의 짝사랑 상대가 타냐는 아닌지 의심했다. 왠지 송하라면 짝사랑 상대를 앞에 두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강한 분’이라고 했으니 타냐는 아니겠지. 그 뒤로 떠오른 것은 부서장인 다나였지만 곧 생각을 지워버린 사사는 다시 송하를 관찰했다.
어쨌든, 타냐의 생각은 일견 맞는 부분이 있었다. 사사가 보기에도 송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송하는 한결같고, 또 일단 정한 것은 누군가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그대로 밀고 나가는 외골수적인 면이 있었다. 하나뿐인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정도야 송하에게 예사일 것 같았다….
“음…. 아무리 그래도 우리를 좀 생각해줘.”
“네?”
“네가 죽으면 우린 너무 슬플 테니까. 도와달라고 한 번만 말해달라는 거야.”
네 성격엔 절대 그러지 않을 것 같으니까.
사사는 송하가 그래도 바로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하는 깊은 고민에 빠진 기색이었다. 사사는 문득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사사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인물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고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송하를 걱정하는 마음은 사사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마자, 마래조. 도아주께.”
“…”
어째선지 긴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타냐와 사사는 숨죽여 송하의 대답을 기다렸다. 송하는 결국 그에 못 이겼는지, 한참을 시간을 끈 끝에 분명히 대답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걸로 됐다. 사사와 타냐는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중한 송하의 성격을 고려하면 썩 괜찮은 대답이었다.
송하가 변했다.
원래도 무뚝뚝했지만 훨씬 더 과묵해졌고, 어딘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런 낌새는 평소에 가까운 사이였던 사사와 타냐가 제일 잘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사사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타냐를 달래주며 송하를 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습에는 별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 송하에게 태클을 걸기가 어려웠다.
-그것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컥, 흐으, 하, 헉-”
“…!”
타냐는 배가 길게 베여 바닥에 버려지듯 쓰러져 있었다. 조금만 그대로 두면 과다출혈로 죽을지도 모르는 중상이었다. 사사는 숨을 멈추며 총구를 겨누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 절친이었던 자를 겨누려고 하자 손이 파들파들 떨려 제대로 고정하기가 어려웠다. 제 친구였던 이를 망설임 없이 베었던 송하와는 달리.
“가하, 가버릴, 끕, 거야…?”
“…”
그 와중에 용케 정신을 보전하고 있었는지, 타냐는 떨리는 목소리로, 피가 끓는 목소리로 겨우 질문을 던졌다. 당장이라도 끊길 듯한 여린 목소리였다. 사사는 이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탕, 탕, 치명적인 약점을 노리며 총을 쏘고, 예상 경로로 다시 쐈지만 송하는 쉽게 피해냈다.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사는 그런 질문과 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타냐는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었고, 송하를 쫓아내거나 죽이지 않으면 힐러에게 옮길 수 없었다. 잔인한 양자택일 앞에서, 사사는 냅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송하는 명백한 배신자였으니까.
“왜…”
잦아드는 목소리를 끝으로, 끝내 타냐는 눈을 감았다. 사사가 급해진 마음에 총구가 더욱 흔들리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송하를 상대하고 있을 때-
벽이 뚫리며 무너져 내렸다. 그 뒤에 있는 스텔의 모습으로 보아, 특기로 소리를 질러 벽을 부순 모양이었다. 송하는 그런 스텔을 향해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면서 읊조리는 말을, 사사는 들었다. 아니 읽었다.
‘그분을 위해서.’
사사는, 그 의미를 평생토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타냐는 천만다행으로, 완벽히 회복할 수 있었다. 몸도 마음도 말이다. 자만일지도 모르지만, 사사는 그것에는 자신의 역할이 컸으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다른 히어로들에게는 완벽한 모습을 보였으나, 사사 앞에서는 마음을 놓고 연약해졌기 때문이다. 송하와의 추억을 기억할 수 있는, 직접적으로 배신을 공유한 유일한 사이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의존하는 것은 타냐만이 아니었다. 사사 역시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둘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우리가 몰랐던 건 우리 탓이 아니야. 말해주지 않은 송하 탓이지.”
“하디망, 마릴 수 이써쓸 텐데….”
“송하는 이미 마음을 먹었던 거야. 송하 성격 알잖아. 우리가 뭘 해도 절대 못 막았을걸?”
“…”
“슬프다, 그렇지?”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회복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년, 2년, 3년…. 그동안 새로운 히어로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많은 히어로가 죽어 나가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그때마다 무너질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서로에게 의지했다. 사사는 이제 상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 괜찮은 건 아니지만, 회복이 빨라. 그냥 너희가 잘 붙어있어주기만 하면 도움이 될 거야.’
비록 그 중 한 사람은 이제 다시는 함께할 수 없지만 말이다.
타냐가 실종됐다.
심지어 그를 공격한 사람은 송하. 그 소식을 듣고, 사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타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드디어 송하가 타냐를 죽이기까지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이라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송하라는 배신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조의 과중한 업무에 이리저리 휘말려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사사는 송하와 타냐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중 좀 하라고 혜나가 곁에서 잔소리를 할 정도로 그래서 사사는 선택했다.
밤낮없이 자신을 몰아붙이기로.
어차피 타냐의 수색조도 아닌 사사로서는 도울 방법이 없었다. 타냐를 믿고 돌아오기를 바라며 당장의 할 일을 해치우는 수밖에. 사사는 잠도 자지 않은 채 일에 몰두했다. 타냐가 알았다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마침 히어로 대선배인 영정의 은퇴로 밤낮없이 범죄가 창궐했고, 스푼은 매우 바빠졌기 때문에 할 일은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자꾸 머릿속에 타냐의 얼굴이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사는 질끈 눈을 감으며 다시 나가의 집 근처를 순찰했다. 요즘 들어 범죄율이 상승한 것에 나이프의 개입이 있다는 설도 있어서, 그런 나이프가 노리고 있는 인재인 나가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복한 것이 벌써 며칠째였다.
쿵, 카각-
그때, 멀리서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다. 사사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전투의 소음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
그렇게 달려갔을 때 사사가 목격한 것은,
“-안녕히 가십시오.”
나가의 어깨를 가볍게 딛고 칼을 찍어 누르려는 송하의 모습.
사사는 앞뒤 잴 것 없이 튀어 나가 나가의 후드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나가는 아슬하게 칼날을 피해 갔고, 칼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바닥을 부수는 것에 그쳤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녹빛과 흑빛의 시선에는 각자 다른 감정이 담겼다. 무심함과 복잡함이 그것이었다.
“오랜만이군요…. 귀여운 후배를 지켜주려고 잠복을?”
“나가, 뒤로!”
“그냥 둘 수 없죠. -죄송합니다.”
그리고 송하는 망설임 없이 나가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나…!”
후두둑,
“?!”
“아, 살았네….”
하지만 다행히, 나가의 특기가 심장을 보호한 모양이었다. 사사는 깜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송하의 검은 아주 단단한 것에 부딪히기나 한 것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나가는 피곤해 보이지만 무사하다. 이대로 나가를 보호하며 대치 상태를 유지하면, 유리하다. 게다가 나가는 텔레포트가 가능하니-
“뭐, 전 검이 좀 짧아져도 상관없지만요.”
생각이 이어질 새도 없이 격전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지쳐 있는 나가는 저 뒤로 나가떨어지고, 사사는 그 앞을 막아섰다. 이리저리 검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자리에서 피하되 결코 뒤로 물러나진 않았다. 송하의 검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검날이 스치는 것은 막을 수 없어, 선혈이 흩날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백모래님…!”
아이러니하게도, 송하를 데려간 것은 나가를 노린다고 생각했던 나이프의 보스, 백모래였다. 사사는 졸려서 쓰러져가는 나가를 이끌고 어떻게든 스푼으로 데려갔다. 날개가 뻐근했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아모르에게 물어보는 한이 있어도.
왜냐하면, 송하가 어떤 이유로 백모래의 의사를 무시하고 나가를 노리는 것에는 사랑하는 ‘그분’과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는 감이 강력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채 묻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데구르르-
낯익은 얼굴이 뎅강, 바닥을 굴렀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타냐와 함께 몇 번이나 그렸던, 배신자임에도, 그 전에 친구였기 때문에 차마 완벽하게 미워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
송하의 머리가 바닥에서 구르고 있다. ‘그’ 대배우이자 히어로 계의 대선배인 영정에 의해서.
-알고 있었지만…
분명, 이렇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오빠….”
곁에서 혜나가 사사를 부르는 것이 들려왔지만, 사사는 눈을 질끈 감는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머리에 이명이 울렸다.
사사는 송하와의 이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상해봤다. 사지 멀쩡히 잡혀갈 때도 있었고, 사사의 총알에 숨이 멎을 때도 있었다. 사람이 죽을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송하는 사사의 악몽 속에서 등장했다. 배신자의 끝은 원래 그랬다. 그런 걸 알면서도, 사사는 똑같이 눈물을 흘리며 깨어나야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악몽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파리 죽이듯 가벼운 힘으로, 가벼운 손짓으로 송하는 숨을 거뒀다. 본인조차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듯 두 눈을 부릅뜬 채로. -그래, 사사는 송하와의 작별이 죽음일 것을 반쯤은 알고도 각오하지 않았다. 그날이 최대한 오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래, 그렇게 유예하며, 사실 각오 따윈-
‘송아능 자피게찌?’
‘…응.’
없었다.
‘…주그면 어떠케?’
‘글쎄, 어떡할까.’
그가 타냐를 죽였단 걸 알고 있음에도… 자꾸 세 사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아, 하얗게 웃어 보이던 타냐의 얼굴에 이젠 검은 칠이 칠해졌다. 무자비하게 검은 칠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송하였고, 곧 그 얼굴 역시-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사사는 타냐의 상담실에 올라와 있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타냐는 인망이 좋으니까, 아마 다른 사원들이 신경 써준 거겠지. 그래서일까, 그만큼 타냐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마 타냐의 사망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이 상담실은 한참을 남아있겠지.
“타나….”
난, 어떻게 해야 해?
의미 없는 물음이 입 안을 맴돌았다. 절친한 사이였던 두 친구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사사는 그 절망감에, 허무함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 지금 타냐가 있었다면 꼴이 왜 이러냐며 다짜고짜 손을 잡아 왔겠지.
‘뭐가 그렇게 힘들어. 좀 도와줄까?’
…라며. 그리고 사사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의지했겠지.
아, 그 작은 온기가 그리웠다. 제발 살아있어줘, 돌아와 줘. 사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타냐가 늘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때, 사사는 무언가 발견했다.
“…?”
그 소파에 앉아있는 타냐의 시선에서나 보일법한 각도에 있는 전화기였다. 사무직원들이 사용할 법한 바로 그것. 그러고 보니 상담실에 직통으로 연결되는 번호를 봤던 것도 같다. 사사는 바로 타냐에게 연락하면 되니까 쓸 일이 없었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전화기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낭겨딘 메세디 항 건…?”
음성 사서함인가?
개인적인 연락을 훔쳐 듣게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공적인 연락을 대신 받아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사는 불현듯 호기심이 생겨 재생 버튼을 눌렀다.
[…]
그리고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누군가 실수로 음성 사서함을 남긴 걸까? 그렇다면 별 내용 없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사사는 이대로 끌까, 생각했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혹시나 내용이 나오면 듣는 거고, 나오지 않으면 자동으로 끊길 테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송하입니다.]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사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송하. 입사 동기이자 전 친우, 그리고 배신자.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 이것은 어쩌면, 그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사사는 전화기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쓸모없는 짓이란 걸 알고 있지만, 어쩐지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여전히 예전과 같은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으니까요.]
[제 손으로 당신을 묻을 때도, 끝까지 저를 잡고 있었죠.]
…아.
타냐는 죽은 것이 맞았다. 전 친우였던 송하의 손에, 결국 차가운 땅속에 묻힌 것이다. 송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생생한 증언이었다. 사사는 무너져내렸다.
게다가 이해할 수 없게도, 무덤덤한 목소리는 언뜻 보기엔 타냐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었다. 사사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저 기록이었다. 순간의 변덕으로 남긴, 받을 사람이 없는 편지. -아마도 송하는, 그것을 하필이면 사사가 들어버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
그리고 한참이나 정적이 이어졌다. 고민 섞인 정적이 이어지는 것에, 사사는 어쩐지 그때가 떠올랐다. 도와줄 테니 도움을 요청하라는 타냐의 말에, 송하가 한참이나 고민했던 것이. 그리고 그 끝에 약속하던 나왔던 대답이.
‘생각해보겠습니다.’
[…내일, 따라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명은 그때 하죠.]
송하는 끝내 우리를 외면했구나.
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형편없이 내다 버려진 기분이었다. 송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를 떠나 결국엔 죽음을 각오했고, 타냐는 그 길에 희생되었다. 사사는 홀로 남겨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급기야 세 사람의 만남을 후회까지 해가며 사사는 몸을 웅크렸다. 음성 사서함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날, 사사는 악몽을 꿨다.
익숙한 꿈이었다. 아주 예전에 죽었던 동료들이 살아 돌아와서는, 환히 웃다가 곧 스러지는 것.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속에 타냐가 있다는 것이다. 제 동료는 이렇게 죽지 않았다고, 그들이 남긴 흔적들을 되뇌며 버텨냈다. 하지만 타냐가 제 손으로 머리에 권총을 쏘자,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허억!”
사사는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푹 절어 있었다. 그저 사실을 나열했을 뿐임에도 악몽이 되는 것은 한두 번 해본 경험이 아니지만, 매번 처음처럼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사사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물기가 묻어나왔다.
그럼에도 사사가 버텨온 것에는 이유가 있다.
‘나, 또 악몽 꿔버렸어.’
‘너도?’
자신과 같은 기억과 악몽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타냐는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도 따스하게 사사를 위로해주었다. 아마 그 덕에 그 수많은 밤들을 이겨냈을 것이다. 때로는 울면서, 때로는 얘기하면서, 때로는 함께 기억을 그리면서….
그런 네가 없으면 난 이제 어떡하지? -사사는 식칼을 쥐었다.
제발 돌아와.
분명 밤임에도, 다시 한번 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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