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별은 왜 새벽별인가

CM ; 게이트에 내리는 비

카즈밀레. 트위터에 쓴 글을 다듬은 것.

※ G20, 나의 기사단 영입 이후

※ 둘의 사이는 동료.

※ 오리지널 밀레시안의 묘사가 나옵니다. 주의.

비가 내렸다. 아발론 게이트의 타일들이 제각기 물을 먹어 미끌거렸고, 알터는 견습 기사들에게 바깥에 내놓은 물건들을 안쪽으로 정리해 두라고 외치는 한 편 그들을 도왔다. 아침부터 구름이 짙게 끼이는 걸 본 아벨린이 미리 대비를 해 두어 망정이었다. 톨비쉬는 웃으며, 게이트는 문제가 없겠다는 실없는 소리를 했다. 손바닥을 내밀어 비를 가늠하던 피네가 따라 웃으며 아벨린이 저렇게 든든한걸요, 라는 말을 붙였다. 오늘따라 사도도, 그렇다고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아 기사들이 할 일이라곤 아발론 게이트 근방의 되살아난 시체들을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리고, 변이한 동물들에게 뒤늦은 휴식을 선물하는 것 뿐이었다. 마을을 모두 돌아보고 온 각 조의 조원들은 오래간만의 휴식이 아니냐며 저마다 화색을 띠었다. 주신의 뜻을 따라서 고군분투하는 그들에게는 별 것 아닌 틈새도 귀했으므로. 톨비쉬는 오늘만큼은 잠시 긴장을 풀어두되 언제든 위험에 응답할 준비를 해 두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 엘베드 조 뿐만 아니라 다른 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쉴 때엔 쉬어야 했으니까. 조원들은 저마다 휴식을 즐기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고, 게이트에는 조장급 기사들이 드문드문 남아 혹시 모를 침입을 대비했다. 평소보다는 허물어진 태였다. 빗줄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거나, 눅눅하지 않은 곳을 찾아 잠시 다리를 쉬게 하거나, 아니면 남아있는 조원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카즈윈은 팔짱을 낀 채 적당한 비막이가 되어 줄 차양 아래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곁에 누군가를 두지는 않았다. 그는 귀찮은 것을 대단히 싫어했고 그걸 모르는 이는 없었기에, 헤루인의 조원들이나 피네 역시 몇 마디의 말을 건넨 후 그의 곁을 비워 주었다. 사실 정말 귀찮았다면 게이트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는 것이 조금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몇 분 후에, 청회색 눈동자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게이트로 허정허정 들어서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게이트에 막 도착한 손님은 긴 머리에 듬뿍 적신 빗물을 짜낼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곁에는 투구를 쓴 거대한 강아지를 끼고 -때때로는 등에 아름다운 풀꽃이 자란 고래가 있기도 했다- 자신이 관리하는 견습 기사들에게 한 번씩 들러 임무를 지시하거나 훈련을 시키는 모습은 평소처럼 권태롭기 짝이 없었다. 카즈윈은 물끄러미 그 입이 어떤 모양을 짓는지 조망했다. 비 맞지 마라, 너는 이번에 신성력을 다듬는 게 좋겠다, 티르 코네일에 또 이상한 로브를 쓴 놈들이 나왔다더라, 그래도 비 와서 쉬니까 좋지, 그치면 더 열심히 해라. 몇 개를 더 읽어내던 이가 눈을 떼어낼 때쯤, 게이트의 손님은 그제야 무거워진 머리에서 물을 짜냈다. 

기침도 한 번 없었고, 재채기도 한 번 없었다. 신성을 받아들인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영웅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풀꽃보다는 단조된 강철에 가까운 것이 그 속에 들어있어서일수도 있었다. 여신을 구출한 영웅, 빛의 기사, 에린의 수호자, 드래곤의 감응자, 그림자의 영웅, 마침내 신의 힘까지 닿은... 곧이어 카즈윈은 자신이 붙잡았던 어깨를 생각한다. 찬란한 수식어들이 부지불식간에 눅신해지던 둥근 어깨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어떤 단어도 함부로 새겨지지 못했을 온기를. 그 때에 조약돌을 내려놓듯 그 위로 제 마음을 내려놓았던 것이 옳았는지를 생각한다. 이제는 정착된 습관 같은 거였다. 옳고 그름을 나눌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그는 때때로 그걸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어깨 위에는 많은 것이 올라가 있었고, 저마다의 무게로 별을 내리누르고 있었으므로. 다만 별이 무너질까 걱정하기보다는 제 마음 따위는 깃털만도 못한 무게가 아닐까 재어보는 것에 가까웠다. 스스로가 우스워 절로 끊어지는 생각들이었다. 허공에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 시선이 우연히 마주친다. 그는 말 없이 한 손을 들어 까딱인다. 기가 차다는 듯 웃던 이가 질질 끌리는 걸음을 딛어 다가오는 것이 눈에 밟혔다. 비교적 평온한 상황에서... 아니, 대체로 많은 경우에서 그는 거절을 하지 않았다. 카즈윈에게 있어 그게 기꺼웠는지는, 모호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그럴 테니까. 하물며 그저 지나는 행인에게도. 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그래서야 지나는 바람과 다른 게 뭔가.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축축하게 적신 이가 차양 아래로 들어와 머리의 빗물을 짜냈다. 주르륵, 하고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비가 꽤 사납게 오는군."

별을 불러낸 이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던 듯 별 반응 없이 젖은 옷가지를 마저 짜낼 뿐이었다. 차양에 빗방울이 부딪혀 시끄러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고요해질 때에 맞춰 상대는 이따금 목소리를 내었다. 네가 드러누울 곳이 없어 유감이라느니, 비가 이렇게 많이 오면 기사들도 강제 휴식이냐느니, 비가 오니 더 을씨년스럽다느니 하는 소리들이었다. 그는 몇 개에는 대답했고 몇 개에는 어깨만 으쓱였다. 상대는 웃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굴기도 했으며, 때때로는 카즈윈의 어깨를 툭 쳤다. 켜켜이 쌓인 신뢰가 즐겁게 달그락거리듯이. 카즈윈은 그의 구원을 잊지 않았고, 그는 카즈윈이 꽤 재미있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 같았다. 아마도.) 그 너머에 흘러가는 것들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이따금 이어지는 대화는 대체로 유쾌했다. 그리고 눅눅하게 젖은 머리가 말라 갈 때쯤, 물음에 대답만 하던 이가 입을 열었다.

"요새는 무슨 일을 하지?"

그치지 않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골몰하던 자가 고개를 들었다. 곧 나태한 미소가 그 얼굴에 깃든다.

"말하면 아나."

그래, 모르겠지. 카즈윈의 흉곽이 조금 더 크게 부풀었다. 아무것도 아닌 질문에 아무것도 아닌 대답이 돌아왔는데도 역증이 빠끔 고개를 내민다. 그는 당연스럽게도 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태생부터가 달랐고, 살아온 궤적은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벌어져 있었으니까. 별은 그걸 잘 알고 있으므로 굳이 그 선 안에 그를 들이지 않고 장난스레 밀어냈다. 너는 우리를 잘도 읽어내면서 우리에겐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지. 어린애 투정 같은 생각이 가슴 속의 상자를 냅다 열고 튀어나온다. 똑바로 따지자면, '그건' 카즈윈이 부탁한 일이었고, 해야만 했던 일이었다. 상대 스스로가 피네를 구하고자 하는 의지로 그의 부탁을 받아들어 해냈던 일이었다. 이런 쩨쩨하고 치사한 감정을 가질 이유가 하등 없었다. 선 밖으로 밀어냈다고 누워서 유치하게 떼를 쓰는 꼴이라는 걸 카즈윈도 잘 알았다. 제 생각이 더 정확히, '우리'가 아니라 '나' 라고 지칭되어야 하는 것도 잘 알았다. 카즈윈은 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그래도 말해봐."

"오늘따라 왜 이런담. 비가 와서 그런가."

"그래, 비가 와서 그러니까... 네 얘기를 해봐."

붉은 눈이 느른히 카즈윈을 바라보다 빗줄기 사이로 돈다. 어디 보자, 하고 가볍게 눌러 딛는 목소리는 빗줄기 사이로 부드럽게 섞여들었다.

"낚시도 했고, 요리도 했고... 불을 피우고 사람들과 둘러 앉아있기도 했지."

카즈윈은 다시 입을 다문 채 듣기로 했다. 그 모든 행위를 상상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말하면 알겠냐'고 물은 이도 그걸 모를 거란 상정은 하지 않았다. 

"때때로는 지루했어. 하루 종일 청새치를 골라내야 했거든. 아, 그리고 높으신 양반들의 서신철도 훑어 봐야 했고. 그림자 세계에서 날뛰는 놈들도 손을 봐줬고."

카즈윈은 '왜?'라는 물음을 하지 않으려 입을 다문 것이었다. 설명해도 설명되지 않는 것들은 거기에 있었다. 

"낚시는 어떤 영감님을 도와주려 한 거였고, 서신철은 그냥, 어쩌다보니. 무슨 음모에 휘말려서. 그림자 세계야 북풍처럼 돌아오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는 묻지 않아도 마음을 들여다 본 것처럼 대강의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그걸 하필 왜 네가 해야 하느냐고, 카즈윈은 묻고 싶었다. 너 말고도 사람은 많지 않은가. 별에서 온 자들은 말 그대로 별들처럼 이 에린에 많지 않은가. 꼭 세상을 구한 자만이 그런 것들을 해야 하는가. 지리멸렬한 말들이 이를 두드리며 제 자리를 찾으라고 극성이었다. 그러나 수리부엉이의 눈은 입을 굳건히 다물었다.

"재미없지?"

빗줄기가 사나웠다. 별은 옅게 웃는다. 되짚어보면 카즈윈도 그에게 매달렸던 적이 있었다. 그 둥근 어깨에. 영혼을 잇는 가느다란 실에. 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제발 구해 달라고. 이 자는 뭇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딱 들어맞는 퍼즐 조각처럼 필요할 때에 도래하는 자. 이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다는 듯이. 실제로 몇몇은 그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남자는 긴 숨을 내뱉는다.

"재미없군."

예상했다는 듯 권태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잠시 눈을 감는다. 별무리가 눈 앞에 희미하게 깜박이는 듯 했다.

"가봐야 해."

빗줄기로 내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았거든. 다음에 봐. 만날 수 있다면의 이야기겠지만. 비 오니까 땅바닥엔 눕지 말고, 카즈윈."

짧은 인사 후엔 기척이 금세 사라졌다. 눈을 뜨면 연하게 부연 시야 너머로 게이트를 나서는 인영이 보였다. 상대가 듣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고서야 가늘게 입이 열린다. 

"다음에 봐."

다음에는, 네가 나를 기다리고, 찾아 줘. 그 말은 결국 입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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