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아티] 눈꽃이 피면 별의 요람으로

02.

파이널 판타지 14 알피노 르베유르x아스트리엘라 로판AU

돌의 집, 주점의 안쪽, 숨겨진 문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또다른 공간이 나온다. 그리고 그 공간의 더 안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벽의 방」이라고 하는 작은 방이 나온다. 물론,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허가된 자의 에테르를 흘려넣어 잠금 장치를 풀어야만 한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정보, 심지어 국가의 기밀까지도 오가며, 특정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베일에 싸인 비밀 조직 「새벽의 혈맹」. 그 중심이었다.

똑똑, 안내인이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손이 문고리를 잡고 소량의 에테르를 흘려넣자, 철컥, 하고 문이 열렸다.

"들어가보세용! 민필리아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당."

여기까지 쌍둥이를 데리고 온 안내인이 생긋 웃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어제 한바탕 소란스러운 만남이 있었던 마법사 소녀와 같은 라라펠족이었다. 종족 특유의 앳된 외모에 희미한 주근깨가 귀여웠으나, 그녀는 확실한 성인이라고 했다. 어제의 그 소녀, 아리엘은, 지난 밤 돌의 집으로 돌아가는 안전한 샛길로 안내를 마친 뒤엔 홀연히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가면서 설명해준다던 것도 두 사람이 왜 이렇게 온 건지 상황 설명 정도뿐이고 그녀에 관한 건 일절 없었다.

어쨌든, 쌍둥이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소년, 소녀와 눈이 맞은 여성은 생긋 눈을 휘어 웃었다. 고갯짓에 따라 밝은 금빛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어서 와요. 이쪽으로 와서 편히 앉아요."

그녀가 권한 자리에는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상상과 달리 부드럽고 온화한 수장의 모습에 어쩐지 단숨에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알피노와 알리제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새벽'의 맹주, 민필리아예요.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요. 샬레이안 르베유르 공작가의 영식, 영애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저도 정말, 꿈에도 몰랐지만……."

정확하게 두 사람의 정체를 집어 말하는 그녀를 보고, 알피노의 눈빛이 깊어졌다.

"……전부, 알고 있다는 전제로 받아들여도 괜찮겠나?"

"…네, 그래요. 위리앙제에게 부탁받은 것도 있고, 파파리모에게 들은 것도 있고, 또… 저희 주요 인물들, 그러니까 조직의 핵심이 되는 동료들은 모두 샬레이안의 현인 출신들이거든요. 지금은 다들 각자 임무로 흩어져 있어서 여기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정황은 전부 파악하고 있었어요."

"그럼 어제 그건 뭐였는데?"

"아, 그 일 말이죠……. 그에 관해선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정세가 바뀌면서, 저희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거든요. 본의 아니게 큰 일을 치르게 했네요."

알리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늘어뜨렸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한 셈이니까. 심지어 편히 가는 길도 있었는데도!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놀라웠어요. 두 사람의 전투력이 상당해서요. 그것도 그냥 뜨내기 모험가 정도가 아니라, 실전, 그것도 기습에 익숙한 것 같았다고, 목격자가 그러더군요."

"……목격자?"

그 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자 세 사람의 시선이 문 쪽으로 집중되었다. 쌍둥이를 안내해주었던 라라펠 여성이 꽤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저, 말씀 중에 실례합니당, 민필리아 님. 잠깐 급히 와 주셔야겠는데용……."

"지금요? 무슨 일이죠, 타타루 씨?"

"그게, 저기, 갑자기 병사들이 찾아와서 불시 검문을 하겠다고 다짜고짜……."

하필. 민필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새벽'도 '새벽'이지만 르베유르 쌍둥이의 존재는 더더욱 들켜선 안 됐다.

"알겠어요, 지금 나갈게요. 두 사람은 여기에 있어요. 이 방은 외부인에겐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용히만 있으면 안전할 거예요. 밖이 시끄러워도 절대 나오면 안 돼요, 절대."

도망자 신세라는 건, 한없이 불편하고 거슬리는구나. 본인이든, 주변인에게든. 덩그러니 남겨진 방 안에서, 알리제는 이를 악물었다. 그새 식어버린 붉은 찻물 위로 고스란히 비춰진 제 표정이 분한 마음을 가중시키는 듯 했다.

민필리아가 타타루와 함께 급히 나갔을 때는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주점 입구를 막고 서서 점원들과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반 손님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불안하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민필리아는 침착하게 병사들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일이시죠?"

"네가 이곳의 주인인가?"

"네, 그렇습니다만."

"여기서 내어주는 차에 미약이 섞인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검사를 해야겠으니 협조해라."

"미약이라니요, 단언코 그런 걸 유통한 적은 없어요!"

"결백하다면 순순히 보이면 될 게 아닌가. 자, 어서 수색해라!"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점원들도 제지에 나섰으나 당연히 힘으론 밀렸다.

"이쪽에도 문이 있습니다!"

"창고인가? 뒤져라!"

진짜 돌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 잘 보이지 않는 안쪽에 있고, 벽의 일부인 양 붙어있기도 해서 웬만해선 찾기 힘든 편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빨리?

"―기다려요!"

"……미약은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게 아냐?"

민필리아의 외침에 이어, 어느 소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돌아보니, 주방을 둘러싼 바 근처에 작은 누군가가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서 있었다.

"뭐라고?"

"당신들이, 곁을 지나고 움직일 때마다, 향이 나."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수상한 자로군. 얼굴을 보여라!"

소녀가 팔을 올렸다. 그 손이 향한 곳은 그녀의 후드자락이 아닌 바로 옆에 있던 병사의 소매였지만. 팔목 보호대 틈새로 드러난 소매를 또 언제 손에 쥐었는지도 모르는 가위로 튿어낸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아무도 소녀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소매가 튿어져 난 구멍에서 하얀 꽃잎 같은 것이 몇 장, 팔랑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병사들 사이에 당황한 기색이 퍼져나갔다. 소녀는 떨어진 꽃잎을 주워 향을 맡아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락슈미의 연'이 맞네. 일반적인 연꽃차와 향이 비슷하지만, 미세하게 달달하고 화한 향이 섞여 있지."

"……!"

"수색하는 척 하면서, 의도적으로 꺼낼 생각이었겠지?"

병사들의 통솔자로 보이는 자가 험악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소녀의 행동을 침착하게 지켜보던 민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신고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할 분들이 할 일은 아닌 것 같군요. 게다가 '락슈미의 연'이라면, 유통은 물론 개인적으로 채집해 소지하는 것 또한 불법으로 지정된 마화예요. ……역으로, 저희 쪽에서 여러분을 신고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실례했군. 해당 건은 허위 신고로 파악되었다. 이만 철수하지."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을 내보낸 그는, 마지막으로 그들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소녀를 노려본 뒤 돌아섰다. 한바탕 소란이 그치고 어수선해진 가게 안에서,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타타루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야말로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용……."

"저들의 수법이 갈수록 수단을 가리지 않는군요. 우리도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네요."

그들이 물러난 자리를 심각하게 바라보던 민필리아는, 이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도운 소녀를 향했다. 동시에, 안쪽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쌍둥이가 뛰쳐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제 괜찮은 거야?"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네."

"아니에요, 조용히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뜻밖에 도움을 받았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저들의 계획을 알아챈 자가…… 응?"

"…어? ……너!"

저를 바라보는 푸른 시선이 셋, 그 중에서도 깊은 바닷빛을 한 낯익은 두 사람의 눈이 저를 알아보고 동그랗게 뜨인 순간, 소녀는 살짝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병사의 소매를 찢었던 가위를 쥐고 있던 손이, 어쩔 수 없이 천천히 후드를 걷어냈다. 알리제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역시! 어제 그 애… 아리엘 맞지?"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어제 그 일로 셋이 만났겠군요. 이걸, 인연이라 해야 할지……."

"…인연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는 게 좋겠네요. …아리엘, 같이 들어와줄래요? 중요한 이야기에요."

"……."

잠시 후, 새벽의 방에는 한 사람이 추가되어 네 사람이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되었다. 새로 우린 차가 한 잔씩 앞에 놓였다. 민필리아가 눈을 휘며 미소지었다.

"미약은 들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당신은, 농담도 그런 농담을……."

"후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서, 풀어주려고 말이에요. 한 모금씩 먼저 들어요.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예요."

"…하하. 고맙네, 잘 마시겠네."

따뜻한 차를 마시니 조금 전 일로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긴장을 늦추게 하는 부드럽고 은은한 향이 입 안에 감돌았다.

"……우선, 감사 인사가 먼저겠죠. 고마워요, 아리엘. 덕분에 잘 넘어갈 수 있었어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운? 우리도 상황이 궁금해서 몰래 보고 있었는데, 네가 말했던 락슈미의 연 특유의 향은 생각보다 옅어. 그걸 구분할 정도면 감각이 보통 예민한 게 아닌걸."

"…네. 알리제의 말이 맞아요. 아리엘은 남들보다 감각이 조금 예민한 편이죠. 더불어 마법적 재능도 뛰어나서, 실은… 저희 '새벽'에 스카웃 제의를 하기도 했고요."

"새벽의 혈맹에? …혹, 그녀가 은신처에 머물던 것도 그 때문인가?"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죠. 은신처를 내어주는 대신,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으로. 그런데, 어떻게 딱, 셋이 만나버렸네요."

민필리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도 우리가 아리엘과 만난 것이 인연이라는 말을 했었지."

"네. ……위리앙제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두 분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사람 찾기 때문이라고요."

어느새 미소가 걷히고 진지한 얼굴이 된 민필리아의 말에, 알피노와 알리제 역시 표정이 굳었다. 본 목적까지 도달하는 데에 정말 길게 돌아왔다. 알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그걸 알고 있다면 누굴 찾고 있는지도 들었겠지?"

"제대로 전달된 것이 맞다면… 모르피나 가의 아가씨를 찾고 있다고요."

달그락, 찻잔이 떨리는 소리가 났다. 줄곧 무표정이던 아리엘의 입매가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알리제가 의아하게 미간을 좁히고, 알피노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대로 가만히 흔들리는 찻물을 응시하던 청명한 벽안이 곧 천천히 민필리아를 향했다. 눈빛만으로 무언의 대화가 오간 듯 하더니, 이내 민필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침 아리엘이 모르피나 가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인연이라고 생각했죠."

"뭐?!"

"그게 정말인가?"

"……."

"그러니 여기서,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요."

"제안…?"

"우리는 정보상이에요. 대가 없는 정보는 제공하지 않죠. 설사 그 상대가, 은인의 친손이라 해도요. 제가 보기에는 세 사람의 목적은 비슷하거든요. 실력도 검증되었고 하니… 우리 새벽의 혈맹에 들어와서, 팀으로 일해보는 건 어때요? 대신, 원하는 만큼의 정보와 은신처를 제공해드리겠어요."

두 손을 깍지낀 채 차분히 말을 잇는 민필리아가 내놓은 제안이란, 세 소년소녀에겐 간단한 듯 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현재 은신해야 하는 처지이며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걸 맞닥뜨렸던 당사자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새벽의 혈맹의 이름 아래 숨는 것은 쉽겠지만 셋이 팀이 되어 움직여야 한다면 분명 걸리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목적이 비슷하니 뭐니, 굳이 팀으로 일하기를 입에 담은 건, 우리가 셋이 묶여야만 하는 건수가 있는 거지?"

알리제가 푸른 눈을 날카롭게 뜨며 팔짱을 꼈다. 새파란 바닷빛이 지금은 밤을 몰아내기 시작하는 새벽 하늘의 빛깔과 같았다. 몰락한 왕조의 피를 잇는 자, 그저 이름 높은 가문의 공녀로 자랐으나 실로 왕녀의 기백을 가진 소녀. 검으로 왕관을 가져올 수도 있으나 도리어 그 검으로 왕좌를 베어 무너뜨릴 수도 있는. 알피노의 무기가 두뇌와 말이라면, 알리제의 무기는 행동력과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꽃이었다.

잠시간의 감상을 흩뜨린 민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아리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가만히 찻물만 응시하고 있는 하늘색 눈에 어떤 번민이 스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민필리아뿐이리라.

"뭐, 난 좋아.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건 당신뿐이니, 우리 셋이 팀이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에도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든 그래도 괜찮다는 근거가 있을 테고. 하지만 우리에겐 이야기해주지 않겠지?"

"지금은요."

"과연 세상 어떤 정보든 거쳐간다는 비밀 정보상의 수장답네."

"후후. 칭찬이죠? 고마워요. 다만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건 분명 세 사람에게도 이득이 있는 일일 테니까요."

"……어떻게 할래, 알피노?"

아직도 침묵하고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던 알피노가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선 선택지가 그것뿐이니 우리로선 택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건 아리엘 역시 수락해야만 가능해지는 문제 아닌가?"

시계도 없는데 초침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리엘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민필리아와 시선이 교차했던 그 순간부터 눈앞에 떠오른 수많은 잔상들이 그녀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시선들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소녀는 이제, 정체를 숨기고 있는 쌍둥이의 비밀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또한 망설여졌다. 민필리아는 무슨 생각일까. 생각의 파도에 젖어, 아리엘이 드디어 목소리를 냈다. 지그시 감았다 뜬 두 눈은 얼음보다 시린 빛을 담고 몇 마디 글줄만을 주고 받던 공자와 공녀를 직시한다. 그래, 저와 그들이 만난 건 인연은 인연이다. 그들이 숨기고 있는 이름에 걸린 것만큼이나, 제가 숨기고 있는 이름에 걸린 것 또한 무거운 진실이니.

"…당신들은 왜, 모르피나 영애를 찾고 있는 거야."

간신히 뚫렸던 목구멍이 순식간에 다시 막혀들 듯 해서, 간신히 답답함을 숨기고 표정을 지워냈다. '아리엘', '아스트리엘라'를 부르기 쉽게 줄였을 뿐인 이름을 가림막으로 세우고 있는 소녀는 선택하기 전에 그 답을 들어야만 했다. 제안이 성립되면, 그녀가 그들의 앞에서 얼마간 '아리엘'이어야 할지도 선택해야 했기에.

"……갚아야 할 빚이 있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그건 아마도 모르피나 가가 하룻밤 새 소리없이 재가 되어버린 그 날에 있을 테다. 아리엘은 제 손톱에 붉어지는 손끝을 탁자 아래로 숨겼다.

"그건 결국, 당신들의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일 아냐? 당신들이 진 빚이 뭔지, 그녀는 알 것도 없이 그저, 살아남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조차 모를 텐데."

얼음도 날카롭게 깎이면 살을 벨 수 있다. 그러나 앞에 있는 것은 베이는 것도, 극히 낮은 냉기에 데이는 것도 두려워 않고 뛰어들 수 있는 당찬 용기가 강한 사람이다.

"너,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아는 거야?"

"……아니."

"모르면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 모른다는 건 어떻게 알지? 만났으니까 아는 거 아냐?"

알리제는 눈치가 빨랐다. 많이 재지 않고 필요하다면 당장 앞으로 달려나가는 그녀에게 중요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아리엘도 만만하진 않았다. 거짓말을 잘 못하는 것과 자신을 숨기는 것은 다른 일이다. 생사가 갈린 그 날부터 무엇 하나 그녀에게 드러내도록 허락된 것은 없었다. 참상의 밤이 드리운 짙은 어둠이 솟아오르려는 감정을 삼켜냈다. 덕분에 아리엘은 여전히 무표정일 수 있었다.

"…한 번, 우연이었어.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어. 조용히 수소문하는 중이야."

"자네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는 건가?"

"그래."

"만났던 곳은 어디였나? 말해줄 수 있겠나?"

"……그걸 안들."

"아아, 정말이지!!"

드디어 폭발한 듯, 알리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상은 하고 있었을 알피노도 눈을 동그랗게 뜨곤 제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알리제는 아랑곳 않고 한 손은 허리에 얹고선 다른 한 손은 아리엘을 향해 척, 손가락을 뻗었다.

"잔말 말고, 그럼 너는 왜 그렇게 사리는데? 더 답답하게 굴지 말고 전에 네가 말했던 대로 공평하게 하나씩 까자고!"

"으음, 알리제…"

"알피노 넌 조용히 해. 이대로라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겠어. 나도 막 나가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필요해. 아리엘. 너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거겠지. 그게 네게 있어 아픈 일이라면 굳이 들쑤시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진실이 알고 싶어. 아니, 알아야 해. 그 날 밤 모르피나 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무기를 들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내뻗은 손에는 가늘게 벼려진 세검이 우아하게 들려 있는 듯 했다. 놀라서 조금 뒤로 물러나 의자 등받이에 붙어 있던 아리엘은 천천히 얕은 숨을 내쉬었다. 같은 목적, 그것을 파헤치는 이유는 다른 것. 목적이 '비슷하다'고 했던 민필리아의 말은 정확했다.

국경 너머에서의 도움 요청에 응한 것은 그녀와 그녀의 가문의 의지였다. 그럼에도 원망과 후회는 피어올랐었다. 머리로 앎과 마음으로 느낌은 다른 것이므로. 길고도 찰나였던 시간에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잃은 그녀에게는 더더욱.

아스트리엘라 모르피나는 다시금 눈을 감는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이. 잠시 후 아리엘이 감정이 완전히 잠잠해진 눈을 떴다. 진실이 그녀의 손에도 잡힐 때까지, 앞으로도 그녀는 '아리엘'이어야 했다.

"……내가 아스트리엘라를 본 건 그 밤으로부터 날이 샌 새벽, 모르피나 영지의 끝자락을 지나는 작은 강가에서였어. 죽음을 앞둔 사람의 얼굴로, 스스로의 삶을 강요하고 있었지. 아침 해가 완전히 밝을 때까지, 끊임없이."

제 이름을 완벽한 타인처럼 언급하는 일은 쉬웠다.

어느 젊은 마법사 부부가, 집안의 주축이 되기 전까지 평범하게 오가며 휴일을 났을 그림같은 작은 집. 그 앞 풀밭에 가려 있던 전송 마법진은 기다려왔던 역할을 드디어 끝냈다는 듯, 재를 뒤집어 쓴 소녀를 덩그러니 놓아둔 채 증발해버렸다. 멀지 않은 데서 들리는 거친 물소리를 따라 조금 걸으니 그 끝에는 폭포가 있었다. 물안개 너머 보이지 않는 아래를 향해 끝없이 쏟아져 부서지는 하얀 물살을 보며 그녀는 그 몸을 던짐과 붙듦의 사이에서 남김 없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제 3자의 시선으로 그것을 읊어내는 아리엘의 눈에서, 알피노는 또다시 짙은 어둠을 읽어낸다.

"……아리엘, 자네는 혹, 모르피나 영애의 친우였던 자인가?"

현재 그에게 가능한 가장 합당한 추측일 테다. 그렇게 추측하기를 바랐던 아리엘은 그제서야 만들어진 미소를 자아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리엘은 민필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별빛은 깊이 잠재워 가라앉히고, 흐린 물거품을 앞세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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