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아티] 눈꽃이 피면 별의 요람으로

01.

파이널 판타지 14 알피노 르베유르x아스트리엘라 로판AU

트라이아 제국의 동편, 한때는 모르피나 백작령이었던 마법사들의 도시 룬 셸터를 지나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국경 지대였던 땅이 나온다. 지금은 왜 국경이 아니냐고 하면, 바로 그 몇 달 전에 이웃에 있던 왕국 하나를 침략해 종속시키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현인들을 길러낸 지식의 나라 샬레이안.

왕가의 피를 잇긴 하나 왕좌에 앉기보다는 대대로 뛰어난 마법사로서의 이름이 더 높은 르베유르 공작가 내부에서 침략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가는 뿔뿔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는 이야기 또한 일부 현인들 사이에서만 오갔을 뿐, 일찍이 항복을 택한 왕으로부터 이제는 속국이 된 나라의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불씨같은 것은 한 톨도 없었다.

딸랑.

작은 종이 매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활기가 가득한 주점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은 아주 잠깐 주변을 훑어보고는, 주점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가 있는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 그 앞에 서자, 점원이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어서 오세요. 아직 어려 보이는데, 모험가신가봐요."

보기에 청소년 쯤 되었을까, 두 사람의 키는 엇비슷했다. 짐도 간소한 편이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오래 입고 다닌 듯 로브가 꽤 낡아 있었기에 그는 두 사람이 당연히 여행자일 것이라 추측했다. 이곳 모르도나는 원래도 모험가들이 많이 거쳐가는 곳이었고, 아카데미의 학기가 끝나는 시기여서인지 최근에는 생각보다 어린 여행자들도 많이 보이는 편이었다.

"모험가라고 할지, 이곳저곳 다니고 있긴 합니다만……."

끝자락이 헤진 후드 아래로 한 사람이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듣기 좋은, 부드러운 소년의 목소리였다.

"실은 저희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이 있어서요. 이곳에 오면 알 수 있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뭐죠?"

"……들장미입니다."

한 순간, 시선이 몰렸다고 생각했다. 정말 찰나의 것이었기에 주점 안의 분위기는 여전히 활달했으나, 두 사람 사이에선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을 응대하던 점원은 조금 난감한 듯이 눈썹을 올렸다. 그의 눈빛에는 금세, 단순히 어린 모험가 손님을 향한 것이 아닌, '사람'을 관찰하는 날카로움이 스몄다.

"그렇군요. 그런데 어쩌죠, 요즘 토지 환경이 조금 안 좋다보니, 그냥은 내어드릴 수가 없네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이번에 대꾸한 것은 소년에 비해 힘이 실린 듯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점원은 곰곰히 고민하는 척 손끝으로 바의 식탁을 톡, 톡, 치더니, 이내 그 밑의 서랍장에서 돌돌 말린 양피지 하나를 꺼냈다.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동굴이 하나 나와요. 동굴의 반대편 출구로 나가면 가파른 길이 하나 나있고, 그 길을 쭉 내려가면 좁은 해변가가 나오죠. 찾아보면 작은 오두막이 하나 있을 거예요. 지금 거기서 잠깐 머물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에게 이걸 전해주세요."

"……그것뿐?"

"왜요, 너무 쉬워 보이나요? 그 동굴은 A급 마물들이 모여 있는 소굴로 유명하고, 하나 난 가파른 길은 얼음이 얼어서 까딱하면 미끄러져 떨어지기 딱 좋죠. 내일 아침 일찍 가려고 했는데, 두 분이 때마침 찾아왔으니, 의뢰로 맡겨보겠어요."

소년과 소녀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떤 시선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내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조금 비장하게도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두 사람은 곧장 양피지를 들고 주점 밖으로 나섰다. 다시금 딸랑, 울리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주점 안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이 나간 자리를 쳐다보았다. 호기심과 염려가 뒤섞인 시선들이었다.

마을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하는 걸음은 망설임은 없었으나 의지와는 별개로 무겁게 느껴졌다. 늘 제 몸의 일부처럼 차고 다니던 무기마저도 말이다. 그만큼 피로가 쌓여 지쳤다는 뜻이겠지. 알리제는 곁눈질로 알피노를 살폈다. 그는 뛰어난 치유사이고, 그녀도 치유 마법을 할 줄 알긴 했지만, 치유 마법도 사용하려거든 정신력을 소모해야 하고, 마법으로 치유를 한다 해도 어느 정도의 피로는 누적이 되기에 실질적으로 쉬어줘야만 회복이 된다. 두 사람 다 그러지 못한 지 꽤 오래 되었고 알피노는 알리제에 비해 체력이 약한 편이었다. 내색하지 않아도 분명 저보다 힘이 들 것이라고, 알리제는 생각했다.

그 날, 모르피나 가가 하룻밤 새 멸문한 것을 확인하고 샬레이안으로 돌아간 뒤로, 두 사람은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던 영애의 행방을 찾아 백방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라면,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왕좌에 손을 뻗지 않았더래도 왕족에 속하는 귀족이 타국의 사교장에 나갈 일이 얼마나 됐겠으며, 하물며 그 영애는 극히 내성적인 탓에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파티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니 거의 들은 것만으로는, 이름은 '아스트리엘라'이고 나이는 그들과 같은 열여섯이며, 연한 크림색이 섞인 옅푸른 머리카락에 오드아이를 가진 라라펠족 소녀라는 정말 기본적인 정보뿐인 것이다. 이외에 가장 결정적인 단서라면, 모르피나 가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신체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는 나비 문양인데, 아스트리엘라는 그것이 오른뺨에 새겨져 있다고 들었다. 눈에 띄는 특질인 만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긴 했지만 쌍둥이는 어떻게든 그러한 소녀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는 새에, 질리지도 않게 또다시 모종의 피습이 있었다. 몸을 피하고, 배후를 찾아내기도 전에 트라이아 제국의 새 황제의 군대가 샬레이안의 땅을 침범해왔다. 교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왕은 최대의 피해가 나기 전에 무릎을 꿇는 것을 택했다.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은 앞서 싸우다 이미 전사했거나, 후일을 도모하며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다. 알피노와 알리제 또한 그 중 하나였다. 당분간 부모님과 떨어져 따로 행동하기로 한 쌍둥이는 로브 한 장으로 모든 것을 가린 채 결연하게 고국을 떠나 국경을 넘었다.

몇 달을 발로 뛰어 모르피나 영애를 찾아다녔으나 여전히 손에 잡히는 소식은 없고, 그러던 중 할아버지의 제자였던 이들이 활동하고 있는 조직이 제국 내에 있다고 들어 여기까지 왔다. 알리제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세검 위로 손을 올렸다.

"이 동굴인 모양이네."

"아아. 마물들의 소굴로 유명하다더니, 과연 느껴지는 기운이 다른 것 같군."

"…좋아, 내가 길을 뚫을게. 잘 따라붙어!"

"잠깐, 알리제……!"

길게 생각하기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그녀답게, 알리제는 재빠르게 세검을 꺼내들고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쩔 새도 없이 동굴 안쪽으로부터 짐승의 괴성 같은 것이 연이어 들려왔다. 알피노는 서둘러 현학 도구를 띄우며 알리제를 뒤쫓아 달려갔다.

* * *

동굴 입구에 다다랐을 때만 해도 막 노을이 질 무렵이었는데, 반대편 해변에 다 내려왔을 때는 이미 노을은 물러가고 밤이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틈틈히 치유 마법을 걸었어도 몸 곳곳에는 생채기가 남고, 안 그래도 너덜했던 로브는 이제 거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알피노는 당장이라도 픽 넘어질 것처럼 무릎을 짚고 서서 숨을 골랐다.

"괜찮아?"

"……그러다 큰일 나, 알리제."

"잔소리 할 여력은 남아 있구나. 그래도 덕분에 빨리 뚫고 나왔잖아? 이제 오두막만 찾으면 되겠네."

말은 그렇게 해도 알리제 역시 이제는 남은 체력이 바닥인 듯 했다. 차라리 빨리 일을 마치고 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알피노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에는 달이 밝고, 총총한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하늘과 같은 색이 스며 검푸르게 물들어가는 바다가 보내는 잔잔한 파도 소리가 한계에 다다른 몸을 노곤하게 만들어주려는 듯 했다. 모래 위를 적셨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물자욱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그나마 조금 넓어지는 면적의 안쪽으로 작은 집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인가 보군."

"정말 이런 곳에 오두막이 있네. 생필품을 사려면 저 동굴을 넘어야 하는데, 이런 곳에 집을 둬서 생활이 가능하긴 할까?"

"……그래, 조심하는 게 좋겠어. 저런 동굴도 넘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머물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

도무지 쉴 틈을 주지 않는 것 같아 더욱 피로가 가중되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경계 섞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두막은 사람 한 명이 지내기에 딱 좋을 크기였다. 생각보다 잘 지어진 집이었고, 조용했다. 똑똑, 문을 두드려보았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문 옆에 난 작은 창문은 커튼이 쳐져 안쪽을 들여다보기도 어려웠다. 쌍둥이는 잠깐 눈짓을 주고 받은 뒤,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았다. 잠기지 않은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쉽게 열렸다. 그리고는——.

"위험해!"

시야가 트이자마자 극도로 시린 냉기가 훅 덮쳐들었다. 동시에, 대비하고 있던 알피노가 보호막을 전개했다. 아주 조금만 늦었어도 그 자리에 얼어붙었을 것이다. 마력이 서린 채 흩날리는 서리 가루 너머로 곧장 다음 마법을 위한 마력을 모으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알리제가 알피노를 붙잡고 뒤로 물러나자 바로 그 자리에 새빨간 화염이 터졌다.

"마법의 전환이 빨라. 시전 속도도 빠르고. 보통 실력자가 아니야."

"동의해. 하지만 이게 함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차없이 공격당하고 있는데 속은 게 아니면? 실력 테스트라도 돼?"

오두막에서 멀어져 바다에 근접한 거리까지 물러나니 더이상 마법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알피노는 거기서 확신한 듯 대답했다.

"저쪽도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군. 저 오두막은 은신처였던 거야."

"……그래, 그렇다고 치고, 저럴 것도 알고 우릴 보낸 거겠지? 어쩐지 열받네."

"알고 보냈다면 「실력 테스트」냐는 알리제, 네 말이 어떤 의미로는 맞겠구나."

"그럼 어떡하자고? 일단 쓰러뜨려? 설득이 먹힐 것 같지는 않아."

알피노는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기다리자."

"뭐를?"

"저 자가 먼저 밖으로 나올 때까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저쪽에서도 이쪽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여보겠지. 집 안에는 무언가 장치를 해놓았을 가능성도 크니, 밖으로 나오거든 붙잡아보는 게 좋겠어. 굳이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아."

"……."

또다시 전투를 치르기에 두 사람은 많이 지친 상태이기도 하고, 알피노의 말은 옳았다. 알리제는 세검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오두막 안에서는 다짜고짜 두 사람에게 마법을 날린 이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바깥을 경계하고 있었다. 첫번에 공격에 대비해 방어를 준비했던 것 치고는 아직까지 반격이 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조금 더 있어보아도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는 천천히 소리 죽인 걸음으로 문가로 걸어갔다. 세 걸음 정도 앞에서 밖을 내다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밤바다뿐이었다. 도망갔나? 그럴 리가. 이쪽으로 넘어오는 샛길을 모른다면 이 지역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마물이 드글한 동굴을 넘어서 왔다면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니란 소리였다. 그에게는 위험한 침입자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도 둘이나!

심각하게 머리를 굴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여전히 밖은 조용했다. 그 쯤 되어서야 그도 경계가 조금 풀어졌다. 살금, 살금, 발걸음이 오두막 밖으로 향했다. 환한 달빛이 실내의 어둠에서 빠져나온 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지금!"

"잡았다!"

"……!"

갑작스레 덮쳐온 두 그림자에 오두막의 마법사는 속수무책으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손에서 놓친 주술봉이 빛을 잃고 모래 위에 파묻혔다.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리는 마법사를 힘을 합쳐 꾹 누르던 소년과 소녀는, 이내 의아한 표정을 그려냈다. 그들처럼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 써서 마법사의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키도 체구도 예상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이다.

"어, 설마, 어린애?"

"그럴 리가. 그럼 그 마법은……."

잠시 서로를 쳐다본 알피노와 알리제의 눈이 다시금 밑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작은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윽, 이것, 놔……!"

"!"

로브 안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맑으면서도,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하기엔 성숙한 감이 있었다. 쌍둥이는 푸른 눈을 똑같이 동그랗게 떴다. 이내 알리제가 손을 뻗어 마법사의 후드를 벗겨냈다. 달빛에 드러난 마법사의 얼굴은 작고, 앳되었다. 피부는 밀빛, 뺨은 꽃물을 들인 듯 옅게 물들어 있고, 양갈래로 곱게 땋아내린 머리카락은 시린 잿빛에 부드러운 크림색이 섞여 있었다. 상당히 예쁘게 생긴 소녀였으나,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청명한 하늘색의 두 눈이 도저히 어린아이로는 볼 수 없는 깊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외관을 마주하고 잠시 당황하던 알피노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자네는 라라펠족이로군. 초면에 거칠게 대해서 미안하지만, 우리도 지금 사정이 좋지 않아 다른 방법이 없네. 진정하고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나? 내 이름의 명예를 걸고, 절대 자네를 해치지 않겠다 약속하지."

"……."

소녀의 몸짓이 멈췄다. 그를 돌아보는 눈에는 날 선 경계심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당신, 말하는 게 귀족 같아."

알리제는 속으로 제 이마를 쳤다. 신분을 숨기고, 눈에 띄는 외관을 숨기더라도, 몸에 배인 습관이나 화법 같은 것은 쉬이 고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알피노는 예전부터 제 나이에 맞지 않게 고풍스러운 말투를 썼다. 이걸로 들키면 어떡하지?

"아, 혹 내 말투 때문이라면, 내가 조부님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말투까지 이렇게 된 것뿐이라네."

"그게 아니야. ……이름의 명예를 건다기에."

"……그렇다면 묻지. 귀족이 아닌 평민에게는 그 이름에 걸린 명예가 없나?"

라라펠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긴장하며 듣고 있던 알리제는 곧 질린 듯이 눈을 반으로 접었다. 뛰어난 현자이기도 하지만, 알피노의 본 무기는 두뇌와 말이었다. 함께 아카데미에 다닐 때만 해도 그는 어떤 토론에서도 져본 적이 없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을 명명하는 본질과도 가깝네. 그 사람의 존재를 말하는 단어지. 스스로에게 지켜 마땅한 명예와 신념이 있다고 자신한다면, 그 이름을 내걸고 맹세를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

"……."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진 소녀가 입을 다물었다. 알피노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되겠나?"

"……주술봉을 들게 해줘. 마법, 안 쓸 테니까."

"그 편이 안심이 된다면."

제압이 풀리자 소녀는 일어나 옷에 붙은 모래를 털어냈다. 떨어뜨린 주술봉도 모래를 털어 두 손에 쥐었다. 세심한 장식으로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주술봉은 소녀의 키보다도 커서, 그녀가 들기엔 무거워 보이기도 했다.

"이제 됐어."

"믿어주어 고맙네."

"믿는 거 아냐. 내 얼굴은 멋대로 들춰 보고, 당신들은 얼굴도 보이지 않았잖아."

알리제가 어깨를 움찔했다. 경황 없는 중에 여러모로 예상이 빗나가 당황해서 그랬던 건데, 이렇게 되면 두 사람도 소녀에게 얼굴을 보여야만 했다. 그녀는 어떻게 얼버무려 보라는 눈으로 알피노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가능성은 아주 낮긴 했으나,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를 굳이 각인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건, …무심코 실례를 범했어. 미안하네."

"……나도 먼저 공격한 건 실수했으니까, 하나씩 번갈아 받은 걸로 해. 이제 조건이 같아졌으니까, 서로 제대로 자기소개 하면 되겠네. 그렇지?"

맑은 빛깔의 두 눈이 똑바로 그들을 향했다. 그것은 단순히 두 사람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타인을 향해 깊이 가시 박힌 불신이었다. 알피노는 알리제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지금 이걸 전해봤자 곧이 곧대로 받아줄 것 같지 않군.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불신이 짙어."

"결국 최소선까지는 하나씩 패를 까야 한다는 거네. 하아, 너무 얕봤어. 전혀 쉬운 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괜찮겠어? 우린 지금 만약의 만약까지 신경써야 하잖아."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다만, 이건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마지막 기회니까."

"잠깐만, 앞에 그 말 무슨 뜻이야?"

"……이런저런 상황에서 앞뒤 안 재고 뛰어든 건 맞잖니."

대화가 투닥거림으로 번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속닥속닥 이어지는 실랑이―라고 하기에는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았지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이내 들고 있던 주술봉을 거두었다. 소녀가 움직이자 두 사람의 말도 뚝 끊겼다. 돌아보니 눈빛에서 경계가 사라지진 않았지만 소녀의 표정은 긴장을 한 겹 벗겨낸 평범한 무표정을 그리고 있었다.

"어, 어라? 왜 갑자기?"

"……바로 앞에서 말다툼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좀."

"……."

"……하하,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덕분에 자네가 조금은 마음을 풀어주어 다행일세. 내 이름은 알피노, 그리고 이쪽은 동생인 알리제라고 하네. 지인이 이곳에 있다 들어 찾아왔는데, 그들을 만나려면 아무래도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 같더군. 자네에게 이걸 전해달라고 했어."

알피노가 점원에게서 받아온 양피지 묶음을 건넸다. 그런데, 소녀는 어쩐지 미묘하게 놀란 듯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왜 그러지?"

"……."

"무언가 잘못됐나?"

"……아니, 그게, 이름이, 뭐라고? 성은?"

한숨처럼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마, 알아들은 걸까? 타국의 고위 가문의 이름까지는 어떻게 들어 알 수 있어도, 그 일원의 이름까지 세세하게 알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알리제가 얼른 말을 꾸며냈다.

"성은 없어. 우린 지도에도 없는 변방에서 살던 평민이거든. 뭔가 문제 있어?"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서."

"어디서, 들었기에?"

"……꿈에서. 당신이 알피노, 당신이 알리제인 거지? 나는, 아리엘이라고 부르면 돼."

소녀, 아리엘은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가 알피노가 건넨 물건을 받았다. 리본을 풀고 양피지를 펼치자 딱 한 줄의 짧은 마디 아래로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공백이 나왔다. 아리엘이 차분하게 종이에 에테르를 불어넣으니, 그제서야 숨겨진 글씨가 반짝반짝 떠오르다 불씨가 되어 순식간에 양피지를 싹 태워버렸다.

"……밀서? 그런데 어떻게?"

까만 재조차 남지 않은 손 위로 내용을 되새기듯 하던 아리엘이 알피노와 알리제가 지나 온 동굴을 가리켰다.

"저 동굴 안에서만 캘 수 있는 특정 광석으로 만드는 마법 잉크가 있어. 그대로 쓰면 평범한 잉크처럼 쓰이지만… 제작 후에 에테르를 각인하면 그 사람의 에테르에만 반응하는 투명 잉크가 돼. 그런데 이것도 우연히 발견한 특성이고, 아는 사람이 극소수여서 지금은 거의 '새벽'에서만 쓰는 방법이래. 알아두라고 하네."

"……어?"

"지금 당신들이 준 서신에 그렇게 써 있었어. 이제 나도 여기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돌의 집까지 안내해줄게."

"잠깐만, 그게 무슨 말인가?"

"가면서 설명해줄게. 둘 다, 휴식이 절실해보여."

아리엘은 두 사람의 너덜너덜한 로브를 보며 그렇게 말한 뒤, 앞장 서서 모랫길을 걸어나갔다. 약간의 당황이 섞인 의문을 표하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작은 소녀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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