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아티] 눈꽃이 피면 별의 요람으로

00.

파이널 판타지 14 알피노 르베유르x아스트리엘라 로판AU

모두가 잠들고 달빛과 별빛만이 깨어있는 깊은 밤. 숲을 타고 바람처럼 이동하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다만 그들이 풀을 스치는 소리가 바람만큼 부드럽지 못한 것은, 그들이 품고 있는 것이 하나같이 밤의 고요함과 동떨어져 잘 벼려진 철의 냄새이기 때문일 테다. 이윽고 숲속 어두운 공터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서로 눈짓만을 주고받고는 반으로 나뉘어 방향을 달리 했다.

같은 시각, 소년은 등불 하나 들지 않고 희미한 달빛에만 의지해 어두운 숲을 걸어나가고 있었다. 익숙치 않은 길인데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고도 보이는 것이 많지 않아 옷자락이 몇 번이고 거친 나뭇가지에 걸렸으나,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위험을 줄여야만 하는 길이었기에 그렇게 했다.

이내 하얀 풀꽃이 핀 작은 갈림길이 나오자, 그 때까지 쉬지 않고 이어온 걸음이 비로소 멎었다. 목적지인 약속 장소였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난 소년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심한 시각인 만큼 무거운 고요가 깊이 내려앉아 있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뒤집어 쓴 로브의 후드 아래 긴장한 듯 굳은 입매에는 어쩔 수 없이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에게는 이 은밀한 접선이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의 나라와, 수많은 국민들을 구할 수 있는.

장갑 아래 감춰진 곧은 손가락이 품에서 꺼낸 회중시계를 열었다. 약속된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기다리는 사람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중요한 약속을 잊거나 어길 인물들은 아니었을 텐데.

시계를 꾹 쥔 손이 표정과 함께 굳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일었다. 그것을 감지한 소년이 급히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나무 위에서 불쑥 튀어나간 그림자가 시린 검날을 곧장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 순간에 반드시 죽을 거라 생각했다.

챙! 하고, 그를 노렸던 무기 끝이 무언가에 가로막혀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리기 전까지는.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의 앞에는 똑같이 로브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그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폼으로 익숙한 세검을 든 채 의연하게 서 있었다.

"설마… 알리제?"

"그럼 누구겠어, 알피노 이 바보야! 그 좋은 머리 엇다 두고 혼자 나오란다고 이런 데를 덥썩 혼자 나가!"

단단히 화가 난 듯한 소녀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그와 영혼을 나눠 가진 쌍둥이 동생의 것이었다. 굳었던 손이 조금 풀려나갔다.

"미안하다, 내 실책이야. 분명 그들이라면 도움이 되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이야기는 나중에. 우선 저것들부터 해치우고 여기서 빠져나가자!"

눈을 들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검은 복장의 자객들이 보였다. 빠르게 세어보니 일곱은 되었다. 소년, 알피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로브 안으로 감추고 있던 무기를 공중에 띄웠다.

한편— 수많은 마법사들의 동경인 어느 도시의 한복판에서는 고요한 소란이 일었다. 봄이면 히아신스가, 여름이면 수국이 색색으로 탐스럽게 피던 아름다운 저택은 누구도 모르는 아비규환의 피바다로 빠르게 잠겨갔다. 무엇이든 산산이 부서지고 불에 그슬려도, 비명을 질러도, 바깥에서는 아무도 그 참상을 알지 못했다.

"지하에 비상 탈출용 마법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서 내려가세요, 아가씨!"

"하지만……!"

"이제 이 저택에 남은 모르피나 가의 주인은 아가씨뿐이세요! 저희는 마지막 명령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반드시, 아스트리엘라 아가씨를 살려 내보낼 것."

"일샤즈!"

"사랑스러운 제 작은 아가씨, 당신을 모실 수 있어 행복했어요."

마법으로 작동하는 승강기가 내려가며 경악한 얼굴의 소녀가 멀어져갔다. 억지로 그녀를 밀어 보낸 비에라족의 메이드는, 이내 예민한 귀에 잡히는 기척을 듣고는 재빨리 승강기를 작동시키는 식이 새겨진 핵을 찾아 부숴버렸다. 그녀는 마법에 대해 무지했지만 그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녀의 작은 주인이 그것을 관찰할 때, 그녀도 그 옆에 있었던 덕이었다. 사고를 방지하려 한 번 발동한 마법이 깨지지는 않을 거라 했으니, 당장 부숴버리더라도 그녀의 아가씨는 안전하게 지하에 도달할 것이다. 이걸로, 이 저택의 사용인으로서의 마지막 일을 마쳤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떠밀려서 지하에 다다른 소녀는 다시 올라가기 위해 승강기를 작동시키려 했다. 하지만 승강기는 소녀를 내려주자마자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꺼져버렸다. 작동 마법식은 알고 있다. 매개는 없으나 주술봉을 쓴다면 에테르를 긁어모아 전도시켜 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올라가면, 그 다음에는?

"이제 이 저택에 남은 모르피나 가의 주인은 아가씨뿐이세요!"

일샤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부유 마법은 배우지 못했다. 무식한 방법으로 올라간다 해도 바로 적을 마주친다면 이길 자신은 없었다. 황제의 총애하는 마법사이나 온건파였던 소녀의 부친과 온화한 치유사였던 모친은 애지중지하는 딸에게 공격마법 같은 건 기초만 가르치고 깊이 알려주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법적인 재능이 있다 해도 그녀는 전장에는 서지 않았을 테니까.

마침내, 소녀는 절망했다.

검은 연기와 열기가 뻗치기 시작했다. 윗층에 불길이 번진 것이다. 머지 않아 이 저택은 완전히 무너지겠지. 빛을 잃은 시선이 품에 안긴 가방에 가 닿았다. 일샤즈가 떠밀어 안겨준 가방 안에는 겨우 며칠 분의 비상 식량과 금화 한 주머니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주저앉았던 소녀는 주술봉을 의지해 일어났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가 탈출용 마법진 위에 섰다. 눈부신 빛에 삼켜지기 직전, 소녀는 울음을 삼키며 깊은 묵념을 올렸다.

* * *

새벽 하늘이 밝을 무렵, 숲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답답한 후드를 잠시 벗어 넘겼다. 거울을 사이에 둔 듯 똑닮은 미형의 앳된 얼굴에서 고된 전투의 피로감이 가득 엿보였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높이 올려묶어 땋은 새하얀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한 눈을 가릴 정도로 긴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긴 알리제가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 둘이서 공격과 치유가 가능해서 다행이야. 생각보단 빨리 해결했네."

"정확히는 알리제, 네가 내 뒤를 밟은 게 다행이었지. 도우러 와줘서 고맙다."

"흥, 알면 됐어. 그보다, 저기서 살아나온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접선을 시도했던 그쪽 사람들이야. 확답을 받은 게 맞아?"

"그래.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은 두 가지군. 우리가 그들에게 속았거나, 중간에 첩자가 섞였거나."

"첩자? ……그럼 그쪽도 위험한 거 아냐?"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바다와 같이 새파란 두 시선이 무언의 대화를 주고 받았다. 지저분해진 후드를 다시 눌러 쓴 두 사람은 발길을 서둘렀다.

해가 완전히 떠오른 아침이 되어서야 도심에 다다른 남매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큰 초상이라도 난 듯한 분위기로 저마다 수근거리는 사람들이었다. 게중에는 정말로 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충격을 받아 질린 사람들과, 무언가에 분노한 듯한 사람들도 있었다. 잠시 그들을 둘러보던 알피노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섰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뭐요? …행색을 보니 여행자인가?"

"그렇습니다. 동생과 함께 먼 길을 걸어 이제 막 도착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군요."

"맞게 봤소. 밤새 아주 큰 일이 있었더군."

"혹,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차피 곧 온 제국에 퍼질 테니 알려주리다. 이 도시가 모르피나 백작령인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오. 헌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하룻밤 새 땅 주인이 바뀌었지 않겠소."

"예? ……그 말씀은."

"그래, 더 이상 이 도시가 모르피나 백작령이 아니게 되었단 말이오. 그뿐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삽시간에 분통에 찬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보다 낮아졌다.

"밤새 일가의 저택이 완전히 무너졌다오. 기가 막힌 건 백작과 백작 부인은 물론이고 사용인들까지 완전히 끔살당했는데, 그 소란을 이 아침까지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단 것이오!"

후드 아래 숨겨진 푸른 눈이 크게 떠졌다. 당장 달려가보려는 알리제의 팔을 붙잡은 알피노가 겨우 침착한 목소리를 내었다.

"……마법으로 소란이 새나가지 않게 막은 겁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도 석연치 않단 거요. 아카데미의 학생들까지도 수군대더군. 사방팔방 마법사들이 즐비한 이 도시에서, 그 대저택의 경비 마법까지도 전부 완벽하게 감쌀 만큼의 통제 마법이 걸렸는데 누구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것이 이상하다더이다. 그러니 곧 하나둘 그럴듯한 소문을 만들더군."

"그럴듯한 소문?"

"이 도시를 넘으면 국경지대가 아니오. 그러니 국경을 넘어 첩자가 들어와 이 땅을 친 게 아니냐는 소리요."

"그게 무슨……!"

알리제가 발끈해서 몸을 내밀었다. 알피노가 붙잡은 팔을 살짝 당기며 경고하는 눈빛을 보냈다.

'지금은 안 돼.'

다행히, 남자는 의심하지 않았다.

"믿기 어려운가? 하기야 그렇겠지. 실은 나도 그렇소. 이 도시는 그 옛날 위대한 대마법사 셀레스티아가 나고 자란 땅이오. 그녀의 피를 이어받은 백작께서도 지현하여 폐하의 총애를 받는 마법사셨지. 그리 간단히 넘어왔을 리가 없지……. 허면 대체 이 해괴한 비극이 누구의 소행이란 말이오. 이 땅에 내려진 대마법사의 축복도 이제 기한이 끝났는가……."

"……조금 전에 땅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셨지요. 가문의 공자입니까?"

"아니. 모르피나 가의 후계자는 아스트리엘라 아가씨셨소. 공자께선 마법에 재능이 없으셨거든. 그마저도, 이번에……."

남자는 침통하게 말을 흐렸다. 알피노와 알리제 역시 각자의 감정을 삭이듯 입을 다물었다. 그 때였다. 또다른 남자가 그들과 이야기하던 이에게 다급히 다가왔다.

"이봐, 여기 있었군!"

"왜, 무슨 일로."

"내 기웃거리고 기웃거린 끝에 저택에 가까이 갔다왔는데, 그러다 얼씨구나 주워들은 게 있어!"

"뭔데 그래?"

"……병사들이 지들끼리 쑥덕대는데. 아무리 잔해를 뒤져도 아가씨 시신은 발견 못 했다대."

"뭐?!"

"아 이 사람, 소리 낮춰! ……지하로 통하는 장치가 있었다더군. 아마도 기적적으로 탈출하신 듯 하대."

"아니, 그럼……."

어느새 남매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대화 흐름에 탄 남자를 뒤로 하고, 두 사람은 조용히 물러나 곧장 도심을 빠져나왔다.

피로는 쌓일대로 쌓이고, 슬슬 허기도 졌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도 더는 없었다.

"……오빠."

걸음을 멈추고, 알리제가 입을 열었다. 돌아보면, 그녀는 분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제 감정에 솔직한 그대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늘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서 가려져 있는 편이지만, 그녀도 단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천재 소릴 듣고 자란 건 쌍둥이 둘이 마찬가지였다. 알피노는 저를 올곧은 눈으로 직시하고 있는 알리제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표적 온건파였던 모르피나 가가 의문의 멸문지화를 당했으니, 조금 전 들었듯이 온갖 유언비어가 일파만파 퍼지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지. 백작을 총애하던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고, 무엇보다 온건파의 한 축이 무너졌으니, 과격파가 힘을 얻는 것 역시, 금방일 거야. 온건파의 힘이 얕아지면 현 황제도 힘을 잃을 테고, ……나라가 뒤집히는 것도 곧이겠군."

"그렇게 되면, 우리도 끝이고. 그렇게 되는 걸 막아보려고 접선을 시도한 거였는데, 도리어 그게 그 집안에까지 엄청난 화를 불러왔어."

"……그래. 경솔했어. 같은 나라의 귀족들 간에도 권모술수가 끊이지 않는 법인데, 이국의 귀족과의 교류에선 더 신중했어야 했지. 살아남은 영애에게는,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고 말았군."

"……."

두 사람은 이내 같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걸음을 옮겼다. 늪을 걷기라도 하는 듯 다리가 무거웠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트라이아 제국은 국세가 변동할 것이고, 이윽고 새 황제가 등극하거든—

그들의 나라, 샬레이안은 마침내 멸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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