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아스타리온 드림/아스타브
발더스게이트 3 - 그림 그려주는 이야기 * 최종장 엔딩 이후
요 며칠은 영 운이 따라주질 않는 시기였다. 발더스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절대자 신도였던 무리와 마찬가지로 대피한 피난민 무리로 인해 앰으로 가는 길이 꽉 막혔다는 소식을 접한 것까지는 좋았다. 원래는 물자 보급 겸 나쉬켈을 지날 생각이었지만 괜히 소란을 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고로 이런저런 무리를 피해 옆길로 빠지자는 결정을 한 것도 좋았다. 사람들이 덜 지나갈 작은 마을들을 통해 빠지기로 계획을 수정한 두 연인은 수정안대로 발을 옮겼고, 그들 생각대로 이쪽 길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 뒤 며칠 계속된 비로 지나가려던 다리가 끊어졌다는 말을 듣기까지는 말이다.
이 작은 마을에 길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그 다리 하나를 정비를 안 했단 말인가. 아스타리온은 어이가 없다며 다채로운 톤과 표현을 통해 속사포처럼 이 어이없는 사실에 대해 따지고 들었고, 그의 연인은 머리가 어지럽다며 의자에 앉아 설명을 기다렸다. 그리고 작은 여관 주인의 해명인즉슨 이랬다. 절대자들이 와글와글 들끓기 시작하면서 놀들마저 판을 치는 바람에 다리를 자주 보러 나가지 못했다고. 그리고 보탰다. 이 작은 마을에 치안, 방위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물론 키 큰 백발의 엘프 청년은 그에 대해서도 몇 마디는 더 쏘아붙이고 싶었던 것 같지만, 악기를 든 하프엘프가 그를 막았다. 비가 그치고 나면 놀들을 정리해주겠다고. 대신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나면 숙박료를 깎아달라는 조건을 붙여서.
여관 주인은 이 작은 여관에서 숙박료를 받으면 얼마나 받겠냐며 불만스러워했지만, 옆에서 듣던 다른 마을 사람들이 놀들을 치워주겠다는 말에 혹하여 거드는 바람에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 남은 건 비가 그치고 범람한 물이 좀 줄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아스타리온은 이러한 현황에 대해 투덜댔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사람 많은 길을 피하기로 한 것도 그를 위해서였고, 비가 그치고 물이 잠잠해지길 기다리기로 한 것도 그를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햇빛 아래에 나오지 않는 창백한 청년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그리고 흐르는 물에 의한 사고가 없도록.
거친 물살에 그나 연인, 둘 중 하나라도 휩쓸려가면 구할 방도가 없었다. 어떤 사람에게든 흐르는 물살은 당연히 위험하다지만, 뱀파이어인 아스타리온에게는 휩쓸린 시점에 확정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데다 파트너가 휩쓸려갈 경우에도 그는 손을 쓸 수가 없다. 그러니 얌전히 손가락이나 빨며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아스타리온은 고분고분하게 수긍하지는 않았다.
“성질나지만 맞는 말이란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 그치만 나는 손가락보단 다른 델 무는 게 더 좋아. 퀴퀴하고 작은 여관에서 내오는 싸구려 신 포도주랑 풍부한 향기의 숙성 포도주를 비교할 순 없잖아?”
“어련하시겠어.”
모두에게 친절한 바드는 싸구려 신 포도주를 홀짝이면서 연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넘겼다.
아직도 밖은 흐린 하늘에 가느다란 빗줄기가 추적추적 공기를 적시고 있었다. 작은 여관 겸 술집은 더 물기 어린 퀴퀴한 냄새가 났고 발에 밟히는 나무판자는 띄엄띄엄 끼걱거리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안에 있기에 쾌적한 환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놀 토벌을 나가기에도 좋지 않은 날씨다. 산 근처답게 하늘도 변덕스러운지라 잠깐 개는 정도로는 비가 그쳤나보다, 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갇힌 지 나흘째였다. 아스타리온은 그 잘생긴 얼굴이 구겨질 만큼 지루해 죽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벌써 나흘째라고. 사흘만 더 하면 일주일째인데, 그러면 세상이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돌아버릴 거야.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 산더미 같은 향락을 떠나 여기 이렇게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는 게 말이 돼? 어차피 틀어박혀야 한다면 차라리 막 깎아 만든 뽀송뽀송한 관짝이 더 낫겠어. 거긴 냄새라도 덜 날 테니까!”
“냄새가 덜 날 거라고 자신하지 마. 똑같이 젖은 나무일 테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미리 만들어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좋은 마감재를 썼을 수도 있고.”
“그렇게 마감까지 끝내주게 만들어놓은 관이 과연 이런 산골에 있을까?”
“자기, 자꾸 그렇게 초를 칠 거야?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건 완전 시간 낭비라는 거야. 더 문제인 건 날씨는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고, 제일 큰 문제는 이렇게 심심한 게 나뿐이라는 거지!”
탁 소리 나게 포도주병을 내려놓으면서 아스타리온이 씩씩거렸다. 술병을 움켜쥔 창백한 손 위로 불거진 힘줄과 짙은 붉은 색으로 빛나는 눈이 이 불만이 진심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말이 많은 엘프 청년과 악기를 든 하프엘프가 발을 묶인 이 며칠간 아스타리온은 그의 말 그대로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늘이 흐려 햇빛이 없는 건 좋은데 비가 내려서 그는 거의 꼼짝없이 방에 갇혀있었다. 비가 그친 잠깐잠깐 마을을 둘러보는 게 전부였으나 그나마도 작은 마을이라 구경할 거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술집 안에서 놀 거리를 찾기엔 이 작은 술집에 무슨 재미진 놀잇감이 있으랴. 적당히 해쳐도 되는 나쁜 놈 하나 없나 매의 눈으로 술집을 둘러보아도 사흘 동안 있던 거라곤 술집에서 과하게 취한 하플링과 드워프 주민 서너 명이 전부였다. 볼기짝을 걷어찬 것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놀아줄 사람이라곤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뿐인데 이 연인이라는 분께서는 갑자기 여관 주인이 헛간 정리를 부탁해왔다며 사흘 전부터 그가 자고 있는 아침 댓바람부터 방을 나서고 있었다. 오후엔 돌아와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준다곤 하나 모닝 키스 하나로 달래기엔 누적된 지루함이 너무나 컸다. 불만은 물길이 터지듯 막힘없이 쏟아져 나왔다.
“자기가 하는 일에 불만이 있는 건 아냐. 24시간 찰떡같이 착 달라붙어 엉겨있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물론 뭐, 그랬으면 하는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자기가 없다고 말라 죽는 건 아니니까. 그치만 그런 모든 걸 떠나서 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곳에 사흘이나 날 내버려 두는 건 매우, 몹시, 굉장히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하거든? 이 작은 여관방 안에 그림이 걸려있는 건 새롭긴 했는데, 그렇다고 쪽방이 호화로운 저택 방으로 변하진 않잖아.”
몸에 밴 특유의 비아냥으로 온몸으로 불만을 표출하며 아스타리온은 그 날카로운 눈매를 있는 대로 찡그렸다.
“무슨 헛간이 문 열어보니 미궁이었다거나 하면 쬐금은 이해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진상은 뭐야? 대체 뭐가 있었길래 나는 허름한 방구석에 처박아둔 채 혼자만 재미 보고 있는 건지 이제는 말해줘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스타리온, 같이 가자 했을 때 헛간 정리 같은 건 재미없다고 거절한 건 너잖아.”
“하! 당연히 재미없지! 그걸 말이라고 물어?”
아스타리온이 버릇대로 불쑥 몸을 내밀었다. 그랬다가는 저도 이건 뭔가 아니었다 싶었는지 그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다시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그리고 그, 뭐야, 하루면 끝날 줄 알았지. 이틀째엔 이젠 끝났으려니 했는데 사흘이 지났는데도 자기가 일이 안 끝났다잖아. 그게 말이 돼? 이 날 혼자 두고 자기는 걱정도 안 돼?”
기세가 수그러들고서도 그의 말은 도통 끝나질 않는다. 투덜거리며 말을 잇던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마지막 말을 되씹어보더니 슬쩍 곁눈질로 연인을 흘끗거렸다.
“그 헛간에 끝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모를까…. 예를 들면 매력적이거나, 멋지거나, 조그마한… 가여운 모습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있겠냐, 그런 게.”
“누가 알아? 지금까지 가는 곳마다 자기에게 도와달라 요청하는 녀석들 천지였는데! 십 년만 지나면 자기에게 도움받았던 사람들로 발더스게이트에서 앰까지 줄도 세울 수 있을걸? 거기다 자기는 그런 말을 들으면 항상 발 먼저 들여다 놓고 보잖아?”
그는 온몸으로 커다란 제스처를 그리며 지금까지 도운 사람 수를 표현했다. 그 중 먼저 도와달라 요청한 사람들을 구분한다해도 한참 긴 행렬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아스타리온에겐 있었다. 화재 현장에서의 구출을 도와달라던 용병대, 죽은 부인의 유품을 찾아달라던 남편, 자신을 젠타림으로부터 사달라며 애원하던 화가, 동족을 구해달라던 노움, 적을 치고 원수의 머리를 베어달라던 마이코니드, 폭탄을 들고 도망간 동족을 찾아달라던 노움, 잡혀간 친구를 도와달라던 노움 등 지역, 종족 상관없이 다양한 행렬이 되겠지. 개중엔 길고 긴 인연이 되어 발더스게이트에서까지 도움을 요청한 얼굴들도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바드 본인은 그의 표현이 과장되었다 생각했지만 어쨌든 재미있으므로 말리지는 않았다. 어디 더 해보라지, 하는 가볍기 그지없는 마음가짐으로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인 채 아스타리온을 보고 있자 그는 뚱한 얼굴로 연인을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사람 돕는 게 나쁘다는 건 아냐. 물론 속 터지는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였거든. 포기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진짜 나쁜 놈들이 걸리면 재미도 있고. 어쨌든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안 그래? 그냥 나 몰래 혼자 할까봐 그러는 거지.”
아무래도 다른 이유로 그를 눈빛으로 추궁한다 생각한 모양이다. 쭉 늘어놓던 아스타리온은 너무 갔다 싶었는지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래서, 헛간에 뭐가 있길래 날 이렇게 내버려 두는 거야? 내가 진짜 심심해서 온몸을 비틀거나 다른 재미를 찾으러 나돌아다니면 어쩌려고.”
“어쩌긴, 그럼 찾아서 데려와야지.”
언제나처럼 재미있는 말꼬리 잡기와 실랑이였지만 이쯤 해야 할 듯싶었다. 잘생긴 꽈배기를 상상하던 바드는 머릿속 이미지를 거두고 혀끝으로 맛없는 포도주를 홀짝이며 물었다.
“무지 궁금한 모양이네. 그럼 직접 확인해볼래?”
“직접? 같이?”
“응, 딱히 숨기려던 것도 아니고. 열쇠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들어 보인 손에 거칠고 무거워 보이는 열쇠가 있었다. 슬쩍한 물건이 아니라 정리를 위해 정당하게 맡겨진 물건이다. 바드는 한눈에 봐도 헛간 열쇠처럼 생긴 금속 물체를 그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아스타리온은 고혹적인 눈매를 가늘게 뜨며 연인의 기색을 살폈다.
“숨기려던 건 아니란 말이지. 그럼, 저녁 먹고 바로 구경 가도 되겠네?”
아, 웃고 싶다. 놀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 웃는 것보다는 좀 더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더 크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몰래 숨겨놓은, 도움이 필요한 가련한 중생의 존재 여부를 탐색하는 눈길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바드는 미소지었다.
“물론이지.”
깜짝 파티를 준비하던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재주 많은 하프엘프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연인이 보여줄 반응을 기대하며 반쯤 남은 포도주를 넘겼다. 그들이 넘긴 재료로 만든 저녁 식사가 나오고 나면 바로 그가 원하던 구경을 갈 수 있으리라.
저녁으로 나온 것은 적당히 있던 고기와 야채를 뭉텅뭉텅 썰어넣고 아스타리온이 좋아하지 않는 맥주를 털어 끓인 스튜였다. 방금 전까지 형편없는 맥주라도 대충 적당히 끓이면 먹을 수 있는 물건이 된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이고 다행스러운 재생산이라는 아스타리온의 입담을 듣고 있던 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쇠를 꺼냈다. 등불을 든 아스타리온은 두 손바닥을 맞대며 눈을 빛내었다.
“좋아, 이제 요 며칠간 자기가 묻혀있던 비밀의 공간을 구경할 수 있겠네.”
“그건 좀 표현에 곡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 신경 쓰지 마, 방치된 당사자 느낌 그대로 표현했을 뿐이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비밀의 문이 열릴 거라는 거 아니겠어?”
부정적으로 들릴 만한 뉘앙스와 반대로 한껏 신난 엘프는 끝없이 입을 놀렸다. 열쇠가 맞물린 열쇠 구멍에서 소리가 나자마자 기대에 찬 아스타리온은 섬섬옥수와 답지 않은 힘으로 냅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했던가. 재미난 사건, 사고, 인물 등에 대한 그의 기대와 달리 헛간은 창고 그 자체였다. 막 정리했어요, 좀 낫죠? 하고 티 나는 인사라도 거는 마법의 문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문짝조차 없었다. 제법 넓은 공간 안에 여기저기 선반 위로 쌓아 올리고 끼워 맞춘 물건, 물품, 가구 등등을 볼 때 정리 좀 도와달라 부탁할 정도로 어수선하긴 했겠다는 견적이 서긴 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내부를 둘러본 지 수 초 만에 재미난 것이라곤 한 톨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통찰력 있는 판단이 선 아스타리온의 눈에 실망한 기색이 짙게 드리웠다.
“이건… 그냥 창고잖아.”
“응, 그냥 그거야.”
“이런 데에 사흘이나 썼다고? 어디 감춰둔 문이 있거나 숨은 녀석이 있는 게 아니고?”
아무리 자신이 징징댔다지만 직접 데려오기까지 한 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아스타리온이 헛간 안을 기웃거렸다. 안쪽에 의자와 용도를 알 수 없는 도구들이 놓인 작은 테이블 따위가 들어선 약간의 공간이 더 있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놓인 물품들 위로 사뿐히 거친 천이 드리워져 있긴 해도 숨겨진 비밀 문 따위는 없었다. 낙담으로 물든 아스타리온이 유난히 퀭한 눈가가 도드라진 얼굴로 한치 혀와 열쇠 하나로 여기까지 데려온 주인공을 돌아보았다.
“이게 다야? 정말로?”
“응, 다인데?”
바드는 문신과 화장으로 장식된 눈매를 귀엽게 휘며 실실 웃었다. 낚인 물고기는 허연 팔을 드러내고 보란 듯이 팔짱을 껴 보였다.
“정말? 진심으로?”
붉은색 의심의 눈초리가 연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곳에 재미를 미끼로 그를 불러들였다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그렇고 그런 의도로 보였겠지만… 아스타리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 어떤 특정 의도로 유혹한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환영이긴 한데… 자기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건 아니라고 말해둘게.”
느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비친 의심에 돌아온 대답은 일말의 여지없이 단호했다. 선정적이라거나 고혹적이라는 단어와는 단 한 글자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앞에서 실실 쪼개고 있는 하프엘프의 모습에 아스타리온은 턱을 쳐들며 머릿속으로 짐작 가는 것들을 추려보았으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헛간 문을 연 순간부터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그의 반응을 즐기던 악질은 결국 소리내어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너무 놀렸나. 기대하던 그런 건 없다고 이미 말해뒀는데, 대체 뭘 생각한 거야? 정말 누가 있을 줄 알았어?”
“‘누군가’는 아니어도 ‘무언가’라도 있을 줄 알았지!”
무료함을 달랠 무언가의 사건을 간절히 원하던 그가 기대의 무게만큼이나 땅이 꺼질 기세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런 건 없다고 몇 번이나 언질 줬다 한들 여기까지 데려온 이상 기대할 여지를 남긴 대가를 물어야만 했다. 원망 서린 눈빛으로 아스타리온이 한 발짝 다가섰다.
“이렇게 된 이상,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내 기대에 대한 책임을 자기에게라도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내 탓인가?”
“자기 탓이지. 최근 있었던 자기 장난 중 제일 재미없었어.”
놀 거리를 보채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새로운 것이 없다면… 다른 것으로라도. 책임을 추궁당한 하프엘프가 “흠.”하고 팔짱을 끼자 아스타리온이 연극조로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괜찮아, 내 사랑. 재미가 없으면 둘이서 만들면 되지. 자기랑 함께라면 뭔들 재미없겠어? 퀴퀴한 방에 처박혀있거나 혼자 내버려 둔 게 아니라면 말이지.”
“그건 고마운 말이긴 한데.”
그러나 어떠한 유혹을 함의한 말에도 사랑하는 이는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그를 보고 있는 회색 눈동자는 여전히 아까와 같이 이후 반응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뒤져보는 건 어때? 어쩌면 심심풀이 정도는 나올지도.”
“하, 여기서 보물찾기를 하라고? 자기, 여길 너무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거 아냐?”
아스타리온이 이죽대며 헛간을 가리켰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미 확인한 풍경이 변신하지는 않는다. 감춰진 문이 나오는 경우…는 있지만 여기엔 없지 싶었다. 등불이 어른거리며 물건들이 움직이는 것만 같았지만 착시 현상에 불과했다. 창백한 손이 물품 위로 덮인 천들을 화풀이라도 하듯 끌어내렸다.
“돈 나가는 거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있는 거라곤 잡동사니들뿐이잖아?”
대충 아무 선반이나 긴 팔이 닿는 대로 당긴 천이 펄럭이면서 작은 먼지며 톱밥, 가루가 공기 중에 휘날리고 온갖 잡동사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망치 등의 생활 공구, 빠진 서랍장, 틀이 부러진 액자, 여분 자재로 보이는 판자, 낡은 그릇 등 모두 그가 예상한 범위 내의 것들이었다. “이것 봐,”하고 첫 번째 선반, 두 번째 선반, 세 번째 선반을 지나 의자와 테이블 앞에 있던 천을 걷어냈을 때였다.
“이런 것들 외엔 먼지밖에―” 하고 말을 이어나가던 아스타리온이 눈을 껌벅였다. 예상 못 한 물건의 등장에 보인 그의 반응에 바드가 소리 없이 웃었다. 의자 앞에 놓여있던 것은 캔버스였다.
물론 예상 못 한 물건이긴 했으나 캔버스가 하던 말을 잊을 만큼 놀라운 무언가는 아니었다. 아스타리온을 놀라게 한 것은 캔버스라는 물건보다는 거기 그려진 미완성 그림이었다.
“화가 연습생이라도, 있었나 보지―.”
늘 하던 빈정거리는 말 한마디를 끝내려던 아스타리온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밑색만 깔린 그림은 배경도 다 차 있지 않을뿐더러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것이 썩 멋진 작품은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누가 봐도 그림 연습하는 사람이 있나보구먼, 하고 지나갈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그려진 주인공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
그림 속에 한 남자가 손에 든 책을 보고 있었다. 활동성 좋은 여행자 옷차림으로 바닥에 둔 짐 배낭에 등을 기댄 채 손에 든 두꺼운 책에 시선을 두고 있는 모습이 낯선 듯 낯이 익었다. 그의 일상과도 닮은 풍경 속에 상반신까지 그려진 그 남성은 구불거리는 백발을 흐트러지게 넘기고서 긴 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눈은― 아직 물감이 닿지 않은 여백으로 그 색을 비워두고 있었다.
“오, 이건… 여관 주인을 그린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배우자도 엘프가 아니었다. 백발은 더더욱 아니었고. 아스타리온은 여관 주인의 잊지 못할 첫사랑이라도 되나, 하고 억지 농담으로 말을 마치려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직감적으로 스쳐 간 생각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그는 이내 입담을 살리길 포기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음, 그러니까― 내가 또 먼저 설레발을 치려는 건 아닌데, 자기.”
“응.”
“자기 그림이야?”
“실망했어?”
“응? 오, 아니. 딱 아마추어가 그린 티가 나는데, 아무리 봐도 여관 주인 그림같진 않아서― 그 손가락으로 이 붓을 쓰진 않았을 것 같거든.”
테이블 위를 둘러보던 아스타리온이 때마침 눈에 들어온 붓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장담하건대 1분 전까지만 해도 저기 붓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거라 생각하며 바드 겸 그림 연습생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았으니 더 해봐라, 라는 의미의 몸짓이었다. 내가 먼저 말하지 않을 테니 네가 말해.
멋쩍음을 다 감추지 못한 아스타리온이 그 뒤에도 무언가를 더 꺼내보려 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혀가 돌아가질 않는 모양이었다. 어물거리던 그는 결국 먼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다소 자신 없이 마음의 준비를 마친 아스타리온은 백발을 흐트러진 채 긴 귀를 드러낸 채 자신과 꼭 닮은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잘 생겼네.”
“그렇지?”
“잘 생겼다 했었잖아.”하고 연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주 예전 거울을 든 채 그가 자신의 외모에 대해 물었을 때에도 연인은―그때엔 연인이 아니었지만— 같은 말을 해주었었다.
“실물은 더 잘 생겼을 것 같은데.”
“내 실력이 실망스럽다 이거지?”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지!”
“사실 맞아. 실물이 더 나아.”
“정말?”
“응.”
“뭐, 네가… 네 눈에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
눈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계속 시원스럽게 긍정하는 얼굴과 그림을 번갈아 보던 아스타리온은 다시 그림 속 남성을 바라보았다. 등불 빛이 비쳐 불그스레하게 보이긴 해도 그림을 알아보는 데엔 문제가 없었고, 그림이 다소 어설프긴 했어도 그림 속 인물이 잘생겼다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한 엘프 남성은 곱슬거리는 백발을 적당히 흐트러트린 채 책을 보고 있었다. 덜 칠해진 피부엔 온통 창백한 밑색이 깔려있었고, 보고 있는 게 그리 재미있는 책은 아닌지 입은 언덕 모양으로 다물려 있었다. 흰옷을 입었다면 그림을 온통 흰색이 잡아먹었겠지. 손에 든 책은 실제로도 재미없는 책이었을 것이다. 아스타리온은 얼굴을 다시 천천히 뜯어보았다. 날렵한 얼굴선에 눈두덩이 깊은 눈가가 도드라졌다. 광대가 강조되는 것은 뺨이 너무 말랐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면 연습생이 실력이 부족하여 잘못 그렸거나.
“자기가 그림도 그리는 줄은 몰랐는데.”
“응, 몰랐었어. 발더스게이트에 있을 때 그림을 맡긴 동안 조금 배워뒀지.”
검게 칠한 입술 사이로 나온 것은 그들이 도와주었던 화가의 이름이었다. 바드는 다가와 그와 나란히 선 채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처음부터 널 그려달라고 할 걸 그랬나 싶지만… 뭐 어쩌겠어. 어쨌든 내가 배워두면 두고두고 네 얼굴을 보여줄 순 있을 것 같아서. 거울만은 못하니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실력이 좋아지면 ‘아, 내가 어떻게 생겼구나~’ 정도는 될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뭐, 내 노후 수입원이 되든가. 헛간을 정리하다 보니 이젤이랑 판넬이 나오길래 채색에 도전해봤어. 처음이라 몇 장 망쳐서 시간을 좀 많이 먹긴 했네.”
악기를 타던 손이 테이블 위의 화구들을 뒤졌다. 물감을 개는데 사용된 달걀, 안료, 붓 따위에는 최근 쓰인 흔적이 선명했다.
“오, 그러면 나중엔 자기 그림을 팔아먹을 수도 있겠네.”
“팔리면 말이지.”
연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웃었다. 아스타리온도 마주 웃었다.
“아주 말도 깜찍하게 해.”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데 웃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꿀 절임마냥 머리가 행복에 재워질 것 같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얼굴이 당길 정도로 미소가 번졌다. 아스타리온은 몸에 익은 능청스러운 톤으로 웃음을 철철 흘리며 말했다.
“흠, 좋아, 어디 보자. 내가 그림에 전문가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는 눈이 아예 꽝인 건 아니란 말이지. 그런 내 눈으로 보건대~”
“아, 그러셔?”하고 연인이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한껏 신이 난 채 두 손으로 크게 호를 그려 보이며 말을 이어나가는 엘프의 흰 얼굴엔 천을 젖혀보기 전 배어있던 무료함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자기가 아무리 재능이 많다 해도 한 번에 이만큼 그려내진 못했을 것 같거든. 꽤 연습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많이 하긴 했어. 그리기가 꽤 어렵더라고.”
“내가 너무 잘 생겨서?”
“아니, 네 머리카락이 너무 제멋대로라.”
연인은 곤란하단 듯이 팔자 눈썹을 그려 보였다. 그래 봐야 평소 순해 보이는 인상이 더 울상으로 보일 뿐이라는 걸 본인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건 어쩔 도리 없는 인상 문제였다. 기대와 다른 대답에 아스타리온이 살짝 심통 난 얼굴을 했지만 그 정도로 멈출 기세는 아니었다.
“그렇게나 날 열심히 훔쳐봤다 이거지? 모델값을 비싸게 불러야겠는걸.”
“이 그림으론 모자라?”
“글쎄, 나쁘진 않지만 더 받아야겠어.”
아스타리온의 턱 끝이 새침하게 위를 향했다. 테이블 위에 등불을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어디, 우선은 자기가 날 어떻게 그리고 있었는지 확인부터 해야겠는데? 습작들도 봐야겠어.”
“그게 궁금해? 어렵지 않은 거라 다행이네.”
연습생은 웃으며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구릿빛 손가락이 근처에 놓인 배낭을 뒤적이더니 금방 스케치북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문외한이 봐도 연습생이 적당히 연습용으로 쓸법한 투박한 스케치북은 이미 반가량이 습작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무엇을 그렸는지는 대충 넘겨봐도 알 수 있었다. 사물이나 옷 등이 중간중간 계속 섞여 있었으나 대부분은 예의 그 얼굴이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얼굴은 갖가지 방향으로 반복되며 연습생이 꾸준히 실력이 나아졌음을, 또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늘 모델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도.
“이건 꽤, 재미있네.”
“그래?”
“응. 웃기게 그렸다 싶은 것도 없진 않지만 자기는 연습생이니까 이해해줄게. 내가 너무 잘 생겨서 그리기 어려운 걸 어쩌겠어.”
옆에 붙어 앉아 스케치북을 넘겨보던 아스타리온이 으스대며 말했다. 잘생긴 얼굴에 만연한 미소는 색이 바랠 기색이 없었다.
“당연하지만 계속 그려줘야 해. 자기가 실력을 계속 쌓아야 언젠가 자기 그림으로 한탕 해 먹지.”
“잘 나온 건 엘프 미남의 초상 같은 이름을 붙여서 팔아먹고?”
“바로 그거지. 역시 자기야. 이렇게 말도 잘 맞고.”
아스타리온이 속삭였다. 속삭이는 숨결마저 스치는 거리를 두고 창백하고 긴 손가락이 연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자기가 계속 옆에서 그려서 보여줄 거잖아.”
“나 전업 화가 하라고?”
“자기야 하면 되지. 전업 바드 겸 소서러 겸 화가 겸…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되지. 전부 해, 내 사랑.”
그리고 그 옆엔 자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상상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형용 못 할 전율이 꽂혔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 흥분, 행복, 감격, 그런 모든 것들이 분리해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강렬히 섞여들었다. 아스타리온은 나긋하게 속삭이던 입술로 금빛 문신을 수놓은 뺨을 훑었다. 이미 어느새 스케치북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강하게 끌어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의 뇌리를 채운 강렬한 색채 그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없었다. 가녀린 어깨를 품에 쏙 들어오게 부둥켜안고서 아스타리온은 뾰족하지만 짧은 귀 끝을 지분거렸다.
“아, 그리고 나중엔 꼭 누드도 그려줘야 해. 가능한 한 사실을 반영해서. 연습 중인 걸 감안해서 내가 친절하게 얌전히 기다려주긴 할게.”
“그건 거울 없어도 볼 수 있잖아. 알아서 목욕할 때 봐.”
“그림은 시점이 다르잖아. 그리고 이정도로 잘생겼으면 하나쯤 기록을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서로 끌어안은 채 이어나가는 농담 따먹기조차 행복했다. 피 한 방울 내비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도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던 시절로 돌아가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살고 있었다. 다정한 한 명 덕분에.
“고마워, 자기.”
“응.”
“사랑해.”
“나도.”
유난히 포옹을 좋아하는 연인은 사양 않고 그의 어깨에 푹 머리를 기대어왔다. 연인의 행복이 곧 그의 행복이라고 말하기엔 성향상 차이를 무시할 수 없지만, 행복해하는 연인의 모습을 보는 게 곧 그의 행복이라는 건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행복도 사랑도 함께 하고 싶다. 아스타리온은 말로도 포옹으로도 다 못 다하는 지금 이 기분을 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곱씹었다.
그동안 한껏 온기를 즐기던 연인은 그의 넓은 등을 도닥이며 물었다.
“이제 좀 기분은 풀렸어? 심심해 죽을 것 같던 위기를 넘겼으면 슬슬 돌아갈까?”
“그게 말인데, 자기.”
“응.”
“그건 그거고, 우리는 따로 재미 좀 보다 가도 되지 않을까?”
“응?”
품 안에 묻혀있던 얼굴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아스타리온은 빠져나갈세라 허리를 바짝 끌어안은 채 나긋나긋하게 유혹적으로,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을 이었다.
“봐, 여긴 싸구려 여관이라 개방된 단체실이다 보니, 우리 실내에서도 못 했고, 밖은 밖대로 비가 와서 못 했고… 그렇잖아? 그러니까, 우리… 응?”
“으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방에 늦게 돌아간다고 문이 닫히는 것도 아니고.”
“흠—.”
눈을 가늘게 뜬 채 연인은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며 노골적으로 고민하는 티를 내었다. 웬만하면 그의 권유에 응해주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NO할 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몸이 단 쪽은 아스타리온이었다.
“괜찮잖아, 응?”
“흐응.”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소리로 답할 뿐 연인은 계속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마와 귀, 뺨에 온통 입 맞추며 얼마를 보챘을까. 수 분이 지나 이내 긍정의 사인이 떨어졌을 때였다.
“그래도 위험하니까 등불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이블 위에 있던 등불이 사라졌다. 의자 위로 던지듯 떨어진 등은 이미 불도 꺼져있었다. 불빛이 꺼지고 색이 사라져도 그들에겐 하등 문제가 없다. 기쁨 역력한 목소리로 그가 노래하듯 속삭였다.
“걱정 마, 자기. 난 아마추어 연습생이 아니잖아.”
“아, 그러셔.”
목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리자 입술이 닿기 편하도록 목을 길게 내어준다. 이미 오래전에 합의된 암시적 허락 표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날마다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늘상 하는 생각을 되새기며 아스타리온은 이를 드러내었다. 붉은 눈동자가 한층 더 붉게 빛난 것도 잠시, 색채는 금방 어둠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후 다시 등에 불이 붙을 때까지는 온전히 그들만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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