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BG3/아스타리온 드림/아스타브

발더스게이트 3 - 풀밭에 눕는 이야기 * 언더다크로 향하기 직전

몽유기담 by 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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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별은 빛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연이은 전투의 나날 속에서도, 포식한 올챙이가 트림 후에 긴 촉수를 자랑하는 문어로 자라날지 모르는 공포의 나날 속에서도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내일이면 한동안 볼 수 없겠지. 한동안이 아니라 결국은, 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텅 빈 것만 같은, 사실은 올챙이가 박힌 머리로 바드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침이면 이슬로 축축해질 어두운 풀밭 위에 누운 채 밤공기로 숨을 내쉰다. 넘어가는 날짜와 머릿속 올챙이를 생각할수록 자신이 길을 맞게 고른 건지, 도중에 치료법을 놓친 것은 아닌지, 너무 돌아온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생각이 함께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방향을 잃은 채 매몰되기만 할 것이란 걸 안다. 우선은 보이는 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같은 경우는, 달오름 탑이라는 최종목표를 두고 캄캄한 언더다크를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하고.

위험한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를 쥔 손으로 구름에 가린 달 대신 수많은 별들에게 언제까지일지 모를 작별인사를 던지던 때였다. 수풀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감상에서 깨어난 바드가 눈을 떴다. 모두와 함께 꾸린 야영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바로 앞에는 흐르는 개천이 있다. 머릿속에 여기까지 나와볼 만한 야영지 멤버 몇 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야영지 멤버가 아니라면? 당장 다음 순간에 목이 붙어있을지부터 확인해야겠지.

다행히도 직접 확인하기도 전에 그를 안심시키는 경박한 톤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게 뭐야, 먹음직스러운 게 좀 있나 배회 좀 하던 참에 더 맛있는 걸 찾아버렸잖아?”

“아스타리온.”

수풀에서 불쑥 내민 머리카락이 더 하얗게, 창백한 피부가 더 창백하게 빛났다. 수상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약간의 피를 묻힌 채 성격 나쁜 엘프가 빙글빙글 웃었다.

“좋은 밤이야, 자기. 이런 곳에서 뭐 해?”

“그냥 누워서 빈둥거리고 있었지.”

“흐흥, 그냥? 그냥이란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이죽거리며 웃는다. 위험인물이 아니란 것을 확인한 하프엘프는 그의 입가를 가리키며 “그러는 너는? 이미 야식 한 입하고 온 것 아니야?” 하고 되물었다.

“오, 맞아. 밤마실 겸, 식사 겸 다녀왔지. 사슴 한 마리랑 여우랑… 그럭저럭? 끼니 건너뛰는 것보다야 낫지. 숫놈이라 양도 그렇게 모자라진 않았고.”

“많이도 먹었네. 그런데 또 뭔갈 더 찾고 있던 거야?”

“자기, 아직도 날 그렇게 몰라? 그냥저냥 이 정도면 됐다, 한 것뿐이지 내 식욕을 채우려면 한참 모자라다고? 거기다 뭐, 쪼금만 먹더라도 맛이 더 중요할 때가 있잖아? 디저트가 있으면 더 좋지.”

그렇게 말하면서 아스타리온은 붉은 눈동자와 손가락 끝으로 풀밭에 누운 하프엘프를 훑었다. 그 쓸데없이 요염하고 요란한 몸짓에 타겟은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이 디저트는 조리시간이 더 필요해서 안 된대. 침낭으로 똘똘 말고 잠들기 전에는 안 된다는데?”

“그거 유감이네. 그래도 따뜻한 쪽이 더 맛있긴 하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그가 바로 옆에 앉으며 말했다.

“거기다, 때에 따라선 숙성도 중요한 법이잖아?”

가까이 붙어 속삭이는 바람에 뾰족한 귀에 입김이 닿을 정도였다. 어이없어하는 하프엘프의 반응을 보고 장난이 먹힌 것이 즐거운지 아스타리온이 실실 웃어댔다.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으로 답을 대신한 바드가 다시 드러눕자 그가 다시 물어왔다.

“그래서, 우리 친구는 이 밤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셨을까? 따뜻한 모닥불 앞에 안 앉아있고. 악곡 생각? 시 생각? 오늘 있었던 격렬한 전투? 아니면 내일에 대한 걱정?”

노래, 혹은 연기처럼 풍부한 톤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말을 듣는 것도 꽤나 재미있긴 하지만 노래 생각을 하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울한 상념을 고백하고 싶지도 않아서 바드는 눈 앞에 펼쳐진 별 하늘을 들먹였다.

“그냥, 별이 예뻐서.”

“오, 별. 예술적 천성에 어울리는 주제네. 난 또, 우리 리더 친구가 당장 내일이면 들어가야 하는 어둠 속 세계 때문에 침울해하나 했지 뭐야. 중임을 짊어진 기수라 깃발도 흔들고 나팔도 불어야 하는데 말이야.”

“깃발은 모르겠고 그래도 나팔은 불 수 있겠네. 그랬으면 좋겠어?”

“설마.”

그가 코웃음 쳤다.

“이백 년 동안 어둠 속에서 지내봐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사실 뭐 그거 자체는 살만은 해.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우리가 내일부터 갈 길엔 말라붙은 빵마저 구할 데가 없다는 거지. 당장 버섯부터 시작해서 안 먹던 것만 주야장천 주워 먹어야 한다고.”

“경험과 주관이 우러난 위로와 경고 고마워. 큰 도움이 되겠네.”

그리고 그런 면에선 아마도 언더다크 생활을 해보았던 할신이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몇 번인가 언더다크에 내려 와봤다는 윌이라든가. 두 팔로 머리를 받치고서 누운 하프엘프가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하던 말 안 끝났다는 듯 팔꿈치에 닿을 정도로 그가 바짝 다가붙었다. 밤하늘을 가릴 만큼 가까이 내려다보면서 아스타리온은 눈앞에 섬세한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별말씀을, 이게 다 얼굴만 고운 게 아닌 내가 친애하는 널 생각해준 덕분이지. 그런데 넌 내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라니 실망이야.”

“아, 네 생각. 당연히 했지.”

“자기는 평소 거짓말도 잘하면서 이럴 땐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더라.”

“미안, 티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러는 자기도 실망스러워하거나 낙담한 척이라곤 기색 한 조각도 보이질 않는 주제에 잘도 이죽거린다. 말로만 상처를 운운하던 성격 나쁜 미남은 금방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다른 생각 때문에 잠을 못 자던 거라면, 좀 더 잠들기 쉽게 도와주려는 생각도 있었는데 말이야.”

긴 손톱을 아름답게 뻗은 손가락이 누워있는 바드의 옷깃에 닿았다. 쇄골 사이 오목한 곳부터 손톱 끝이 피부와 옷 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일직선으로 내리긋는다. 잘생긴 얼굴에 띄운 표정과 눈빛, 그리고 과하게 허물없고 솔직한 손짓이 담은 의미는 명백했다. 매혹적인 입술이 더 내려오기 전 내밀어진 손바닥이 그를 제지했다.

“고마워, 그런데… 오늘은 괜찮아.”

“정말? 언더다크에 내려가고 나면 이렇게 분위기 괜찮은 데는 못 찾을지도 모르는데?”

“응, 괜찮아.”

굳이 탐지하지 않아도 말도 안 돼, 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거의 소리만 안 냈지 대놓고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아스타리온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훑는 것을 하프엘프는 모르는 척 외면했다.

“그냥… 오늘은 기분이 안 나네.”

“아니, 뭐, 그래. 의외긴 한데… 다른 누구 생각 때문인 건 아닌 것 같고… 나랑 하는 게 싫을 리도 없으니. 됐다, 네가 그럴 기분이 아니라면 아닌 거지.”

엘프의 붉은 눈동자에 감돌던 의심의 기색이 수그러들었다. 흥도 같이 식었는지 옷깃을 놓아주고 다시 고쳐앉는다. 그게 우스우면서도 신경 쓰였던 하프엘프가 애써 어색하지 않게 킥킥 웃었다.

“실망한 건 아니지?”

“응? 내가… 내가 그럴 수도 있지. 우리 잘 맞잖아? 그런 거.”

“으응, 뭐.”

모호하게 대답한다. 그걸로 끝, 그대로 일어나 야영지로 돌아가거나 사냥하러 돌아갈 줄 알았는데 아스타리온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게 더 의외였던 바드는 그의 등을 짐짓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기.”

“음?”

“지금도 내 생각해줄 기분이 남아있어?”

그 말에 “응?”하고 눈을 크게 뜨던 그가 “뭐든지, 자기.” 하고 말했다. 너무 완벽하게 예쁜 미소다. 분명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진심이 아니겠구나, 하고 바로 감이 왔었는데 지금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더 남을 잘 속이게 되었거나 진심은 아니지만 거짓말도 아닌 다른 무언가가 아닐까. 그도 아니면 내가 홀려서 눈이 흐려졌든가, 라고 생각하면서 바드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여기 누울래?”

“응? 물론, 당연하지, 자기.”

뾰족한 이가 드러날 만큼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전에 서둘러 손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그를 제지했다. “그거 말고.”라는 말에 순순히 그가 누웠다.

“고마워.”

하프엘프가 만족스러운 한숨과 함께 웃는다. 그렇게 눕고도 몇 분, 그 뒤로 아무 움직임이 없자 그의 말대로 풀밭에 나란히 누운 아스타리온은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

“응? 끝인데?”

하프엘프가 옆에서 꾸물거리더니 조금 더 가까이 다가붙었다.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그의 어깨에 관자놀이를 붙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잠잠해지는 기척에 아스타리온은 설마 이대로 잠든 건가, 하는 마음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다야?”

“응, 다야.”

반면에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평온과 만족에 젖어있었다. 설마 정말 눈을 감고 잠이 드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아스타리온이 반쯤 몸을 일으켜 홱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대로 자고 있으면 한 대 쥐어박을 생각이었건만, 다행히도 두 눈은 색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예쁘고도 분명하게 뜨여있는 채였다. 금빛 문신과 검은 화장으로 꾸며진 단아한 얼굴 위로 구름에서 막 벗어난 달이 달빛을 내리쏟는다. 그에게 머리를 기댄 채 아까처럼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눈동자가 한 박자 늦게 그를 향했다.

“왜?”

“아니, 그냥.”

태평한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진 것조차 바보같이 느껴졌다. 화를 내야 하나? 나를 무시한다고? 굳이 즉각 반응을 내보인다면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고. 잠시 고민했지만 그 외에 뭐라 할 말을 바로 찾아내지 못한 아스타리온은 다시 누워버렸다. 물론 그런다고 황당함이 가시진 않았기에 그는 언제나 잘 놀리는 입을 언제나처럼 나불대었다.

“있지, 뭐랄까. 좀처럼 없던 일이라 어색하긴 하네. 그러니까 내 말은, 혼자 자는 거 말고, 아니, 혼자 자는 것도 좀처럼 없는 일이긴 한데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알지? 누군가와 한 자리에 누웠는데 이렇게… 순박하고 무구하게 있는 것 말이야. 그것도 옷은 잘 입은 채로. 아마 처음 아닐까? 적어도 요 이백 년 동안엔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은데.”

“나름대로 괜찮지 않아? 나랑 이렇게 있는 게 싫거나 불쾌하지만 않다면야. 처음을 즐겨.”

“아니, 그게. 싫거나 불쾌한 건 아닌데…. 이게 끝이야? 네가 원하는 게 이게 정말 다야? 알잖아, 내가, 음, 이런 것보다는 다른 쪽에 더…”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간결한 반응에 결국 횡설수설에 이른 그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 황당함에 벌떡 몸을 일으켰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몸짓이었다.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하프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게 다야. 네가 같이 이렇게 있어 줬으면 했어.”

그리고 잠시 눈을 껌벅이다가 덧붙였다.

“고마워, 이제 충분해. 지루할 텐데 다시 가봐도 괜찮아.”

“아니, 그… 괜찮아. 나도 별을 감상하거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정도의 감성은 있다고.”

여전히 목소리엔 당황한 기색이 묻어 있었으나 아스타리온은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좀 더 목과 어깨에 힘을 빼고 느긋이 자세를 고쳐잡는 것이 정말로 바로 일어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중에라도 아쉬워하지 마. 자기가 원한 거니까.”

“돌겠네, 정말.”

그칠 줄 모르는 확인 질문에 일부러 장난스럽게 신음하자 편하게 누운 아스타리온이 헛기침을 했다. 왜 어색해하면서도 일어나 가버리지는 않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다. 얘가 왜 이러는지 몰라 당황스러운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래도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다. 당장 내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조차도 불분명했다. 그저 분명한 건 그는 정말로 이렇게 있고 싶었다는 것뿐이었다. 아스타리온이 그냥 그의 곁에 있어 주길, 지금 살을 섞지 않더라도, 당장 피를 빨지 않더라도 함께 누워있어 주길.

이 순간이 낯선 것은 아스타리온뿐만이 아니다. 마지막일지 모를 달빛 속에 어색한 처음을 즐기면서 하프엘프는 느긋하게 긴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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