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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1 (1/3)

Devil may cry - Sparda/Eva

회유기록 by 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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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도 채 오지 않는 아이 둘을 키운다는 것은 꽤나 고된 일이다. 적어도 사적인 시간이 황금처럼 느껴질 만큼은. 그래도 자신의 손가락이 여전히 마음먹은 대로, 또 생각하기 전에 먼저 물 흐르듯 움직임에 만족스러워하며 에바는 손가락을 놀렸다.

아주 오래전, 어느 작곡가가 연주자인 아내를 위해 만들었던 아름다운 곡이었다. 때로는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때로는 경쾌하게 춤추는 발소리처럼, 그리고 때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자개 모빌처럼. 제목 그대로 아내에게 사랑을 헌정하는 곡이었다. 새털처럼 건반을 두드리는 손끝으로 리듬과 운율과 음에 맞추어 수를 놓던 짧은 한 곡이 끝나고, 겨우 4분 남짓한 시간이 남기고 간 여운에 미소지으며 돌아본 옆에는 사랑해 마지않는 남편이 있었다.

“역시,” 하고 그가 입을 떼었다. “당신이 치는 피아노는 아름답구려.” 연주할 때마다 곧잘 듣는 말이었다. 에바는 미소지었다.

“피아노만요?”

“…음, 실언이었군.”

오랜만에 보는 남편은 곤란한 듯이, 하지만 그마저도 품위 있는 동작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미안하오. 당신도 당신이 치는 피아노도, 였소.” 그답게 성실한 대응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나날마저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에바의 미소가 짙어졌다. 오늘은 꼭 그간 생각해왔던 바를 이루리라.

선공을 날리는 데에 성공한 그녀는 남편의 손을 잡아끌었다.

“당신도 쳐봐요, 스파다.”

“내가?”

그가 쓴 단안경 너머로 의아해하는 눈빛이 비쳤다. 손을 잡아끄는 것만으로는 끌려오지 않을 거구임에도 순순히 이끄는 대로 옆자리에 앉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뭐든 처음은 있는 법이잖아요.”라며 에바는 남편의 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세상 그 누가 알까, 이 항상 진중한 얼굴의 남자가 실은 내심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차분한 음성 속에서 머뭇거림을 읽어내며 그녀가 웃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상, 그리고 권하고 있는 사람이 아내인 그녀인 이상 사양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에바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처음일지도 모르는 당신을 위해 쉬운 곡으로 골라줄게요.”

남편에게 남은 패는 항복선언뿐이었다.

“당신에겐 못 당하겠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말한 대로 더 쉬운 악보를 골라 펼치는 손길에 힘이 있었다. 쉽게 놓아주진 않겠군. 앞으로 있을 일을 가늠하며 스파다는 순순히 아내가 하는 양을 따라 하였다.

“자, 여기에 손을 올리고… 악보 보는 법은 알죠?”

“모른다고 하면?”

“설마요.”

웃는 목소리에 단호함이 어려있었다.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걸까. 시키는 대로 남편이 따라올 것을 확인한 에바는 하나씩 스텝을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손목 흔들지 말고, 손끝으로 치는 거예요. 힘은 빼고…. 당신이 힘을 주고 치면 큰일 날 테니까요.”

“새 피아노가 필요하게 되겠지.”

“번거롭게도요. 우선은 도부터 하나씩 쳐볼래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스파다는 손을 움직였다. 처음엔 한 음계씩, 그다음엔 두 건반을, 그다음엔 세 건반을 함께 누른다. 처음엔 오른손으로, 다음엔 왼손으로, 그리곤 두 손으로. 원래는 더욱 험악한 것을 두드리는 다부진 손이 몇 도든 무슨 음이든 거리낌 없이 건반 위를 누볐다. 단순히 연습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치는 것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손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모습을 보며 에바가 속삭였다.

“그것 봐요, 당신은 손이 커서 잘 칠 거라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랬었지." 하고 수긍하며 스파다는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그럼 이제 악보를 보고 쳐볼까요? 틀리더라도 안 웃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주 자비로운걸."

“그럼요, 학생에겐 관대해야지요. 하지만 당신이 너무 잘해서 조금 난이도를 높여도 될 것 같네요.”

“방금 했던 말은 취소해야겠군.”

아내는 아주 즐거운 모양이었다. 아내의 기쁨은 그의 기쁨이기도 했다. 스파다는 잠시 건반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흑백이 교차하는 건반은 자신과 같은 이름의 검과는 달리 단아한 멋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자리한 손이 낯설고― 그러나 싫지는 않다. 눈앞에 자리한 아까와 다른 악보를 보며 그는 아내의 기대에 찬 시선 속에서 생애 첫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가볍고 아름다운 음이 건반 위를 튀었다. 나비가 춤을 추는 듯한 멜로디다. 짧은 악보에 세기 쉬운 박자, 반복이 많은 선율까지, 확실히 아내의 선곡은 적당히 초보인 그를 위해 배려한 것이 분명했다. 악보의 기호만 놓치지 않는다면 실상 그가 못 칠 것은 없다. 하지만 아내가 직접 연주한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우리라. 그런 것을 연주자의 표현력이라 한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잘하네요, 혹시 전에 이미 쳐본 적 있는 건 아니죠?”하고 에바가 농담을 했다. “전혀.” 성실하게 대답을 붙이면서 그의 짧은 연주 역시 성실하게 끝을 맺었다. 늘 아내의 연주를 주의 깊게 보고 있던 것이 생각도 못 하게 빛을 보았다. 이렇게나마 손을 놀릴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칭찬하고 있는 아내 덕임을 고백하며 마무리하려던 참이었다.

“승복해, 동생아. 내가 이겼어.”

“아니야! 이기긴 누가!”

“끈질기네. 세 번이나 넘어진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단테.”

“아니거든! 엄마! 버질이―”

아이들의 성난 목소리가 현관을 울렸다. 두 아이가 우당탕 발을 구르는 소리도 함께. 아침 댓바람부터 놀러 나갔던 사랑스러운 형제가 흙먼지를 날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꼭 같은 나이, 꼭 같은 몸집에 꼭 같은 얼굴의 아이 둘은 어머니를 찾으며 입을 열었다가는 이내 다른 모양으로 입을 모아 소리쳤다.

“아빠!”

“버질, 단테.”

그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턱없이 짧은 한 줌 시간에 불과하건만 아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자랐다. 서두르기만 하는 시간이 아깝고 아쉽고 귀중해서 안타까울 만큼. 목조차 가누지 못한 갓난쟁이들이 목검을 들려주는 아빠 팔 안에 파고들고, 제 엄마에게 서로 안기겠다 다투게 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불과 요 며칠 못 본 사이에도 금세 키가 자란 것만 같아 스파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와 아내의 아이들은 인간처럼 태어나 인간처럼 자라고 있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도 인간으로 살 수 있을지는 그의 폐부 속에 항상 심려로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얘들아, 흙은 털어내야지.”

걱정을 젖히듯 다정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아이들을 감쌌다. 며칠 만에 보는 아버지에게 언제 왔냐며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던 아이들이 멈칫하더니 얼른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지금 몸집이라면 에바 허리께쯤이나 올까. 그와 나란히 서면 얼마나 오련지.

“어서 오렴.”하고 팔을 벌리자 아이들이 품에 덥석 안겨 왔다. 어머니 말을 잘 듣고 있었는지 묻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서로를 꼭 닮은 얼굴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단테가 자꾸 제 몫까지 탐내요.” “버질이 자꾸 혼자 놀아요!” 수없이 긴 세월을 살아왔지만 육아는 그에게 낯선 분야였다. 듣기로는, 다들 이렇게 아웅다웅하면서 자란다는 것 같다. 초보 아버지로서 그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불만을 아우르고자 했다. 너무나 무던한 방법이었지만 아이들은 아버지의 손이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조금 거칠진 몰라도 귀여운 아이들이다.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눈에 띄는 점이라곤 그를 닮은 백발 정도일까. 그와 같은 백발과 푸른 눈이 볼 때마다 다 자란 뒤에도 그를 똑 닮을 것이라 선언하는 듯했다. 아이 둘을 안고도 넉넉한 품으로 언젠가는 훌쩍 커버릴, 그러나 아직은 작은 아이들의 체격을 가늠하며 스파다는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에바에게 자리를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일어났다, 가 아니라 일어나려 한 것으로 끝난 것은 에바가 그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에바?”

“마침 잘 됐잖아요. 좋은 추억이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눈에 기대가 담겨 있었다. 그 기대가 어떠한 뜻을 담고 있는지 깨닫는 데에는 일이 초쯤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때엔 이미 아내가 아이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단테, 버질. 외투 벗고 이리 와서 앉으렴. 아버지가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신대.”

“아빠가? 피아노를?”

“피아노? 아빠가요?”

한참 서로를 탓하며 아웅 대던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저들 아버지를 향했다. 두 쌍의 푸른 시선이 눈부셔서 스파다는 짐짓 고개를 돌렸다.

“에바….”

“힘내요, 애들 아빠. 멋지게 한 곡 보여줘요.”

“당신은 잘 할 수 있어요,” 하고 에바가 속삭였다. 이게 과연 초보자에게 관대한 것이 맞는지.

“연습도 없이 콘서트라. 어깨가 무거운걸.”

“리허설이 없는 게 신경쓰여요? 좋아요, 그럼 같이 칠까요?”

에바가 일어나 책장을 향했다. 그러고 보면 연탄聯彈이라는 게 있었던가. 아무래도 아내는 그에게 기대치를 높게 걸고 있는 모양이었다. 빽빽하게 꽂혀있는 책장에서 악곡을 고르는 모습을 보며 스파다가 말했다.

“쉬운 것으로 부탁하지.”

“아무렴요.”

다시 돌아온 에바의 손에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제목이 쓰여 있었다. 어느 의자에 자신이 앉을 것인지 투닥거리던 아이들은 그새 저들끼리 의견 합의를 보았는지 각기 앉을 의자를 끌어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눈을 빛내며 앉는 모습에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했던 말마따나 어깨가 무거웠다. 가져온 악보를 바꿔놓으며 아내가 말했다.

“페달은 내가 밟을게요. 당신에게 맞춰줄 테니까 걱정 말아요.”

“음.”

자세를 고쳐앉으며 건반 위에 손을 얹는다. 희고 검은 건반 위에 크지만 각기 다른 손이 넷, 자기 자리를 잡았고 페달을 찾는 그녀의 발이 바지 끝자락을 스쳤다. 앞에 놓인 이 얇은 악보와 앞으로의 몇 분에 아버지로서의 위신이 걸려있었다. 어쩌면 향후 아이들이 살아갈 긴 시간동안 그들 아버지라는 한 단어에 붙을 이미지 중 하나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준비됐나요?"하고 묻는 에바에게 스파다가 입을 열었다.

“고맙소, 에바.”

그 말이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에바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우리 멋진 모습을 보여주도록 해요. 혹시 알아요? 우리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나중에 이 아이들도 멋진 연주를 들려주게 될지.”

“분명 당신을 닮아서 뭘 해도 잘할 거예요.”

아내가 상냥한 목소리로 세상 다정한 압박을 속삭인다. “그러면 좋겠군.” 하고 내심 자신보다는 그녀를 닮길 바라면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에 손가락을 놀린다. 춤추듯이, 뛰어놀듯이 사랑스럽고도 명랑한 연주가 저택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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