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타래:알데베가
그녀의 4번째 생.
정확히는 4번째인, 그 아지랑이를 본 생에서 그녀는, 아니 그 애는 처음 세계를 엿보았다. 아무것도 없던 그저 수풀 사이의 공간에 누군가의 옷이 걸려 찢긴 듯한 검은 부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 애 또한 휙 보고 지나갔지만 다음 일정을 위해 바삐 발을 옮기면서도 그 애는 생각을 놓지 못했다. 펄럭거리는 옷가지가 아니라 어떠한 공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 애는 다시 그곳으로 심장이 부서져라 뛰었다. 온 힘을 다해 뛰었으므로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지만 그 공간 앞에서 몇 분이고 심장이 제 규칙대로 돌아오기를 기다려보아도 심장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며 그 공간을 들여다 본 지 10 여 분이 지나고 그 애는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 어두컴컴하게 찢어진 듯한 공간으로 손을 뻗어 담갔다. 순간 몸이 빨려들어가고 그 애가 있던 곳에선 그 애가 떨어트린 일회용 핫팩 밖에 없었다.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러한 빛의 침묵에 빠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 영원할 것만 같던 어둠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시리도록 아름다운 새파란 하늘과 살아 움직이는 들판이 보였다. 그곳의 하늘은 그 애가 원래 있던 곳의 하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매연 없이 청명한 것이 꼭 과학시간에 말로나 듣던 태초의 하늘을 바라보는 듯 아름다웠다. 그동안 그저 바라만 보고 스쳐 지나가던 그동안과의 하늘과는 전혀 달랐다. 난생 처음보는 찬란함. 아름다움을 쫒아 살아가던 그 애에게는 너무나 무섭고도 설레는 미지였다. '이리 와'고 말하는 듯이, 물방울이 맺힌 잔디밭에 자유로이 날개를 펄럭이는 나비 떼가,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람에 나부끼는 들꽃이, 의도치 않은 여행을 즐기게 된 나뭇잎이. 그 모두가 그리 말하는 듯 했다. 그 아름다움에 넋이 빠져 그녀도 모르게, 홀린듯이 그곳에 발을 딛었다. 빽빽하게 자라난 잔디 사이 발을 둔 채로 귓가를 스쳐 머리칼을 날리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자그마한 철새들이 부지런하게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늘 그래왔듯이 정신 없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피로가 쌓인 몸과 마음에 태초의 자연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편안함은 정신을 놓고 현재를 즐기기엔 너무나도 매혹적이었고 사랑스러웠다. 마치 종교인들이 말하는 천국이나 극락 같은 게 있다면 여기인가 싶었다. 그동안 신이라는 증명할 수 없는 존재를 믿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게 여기지 않았던 태도를 자연스레 반성하게 만들었다. 정말 신이 있다면 이 곳을 가장 공들여 오랜 시간 지었을 것 같았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무섭도록 높고 시릴만큼 푸르던 하늘 빛이 점점 따스운 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애는 보랏빛이 되어가는 하늘을 마주하고서야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두드렸지만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전원을 켜기 시작했고 오래된 핸드폰은 주변을 둘러보고도 남을 정도로 아주 느리게 켜졌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찾아보았던 수 많은 사진들 중에서도 이렇게나 가슴이 뛰는 풍경은 본 적이 없었고, 그동안 상상해 왔던 수 많은 절경들도 이곳의 아름다움엔 미치지 못 할 것만 같았다. 핸드폰이 켜지고 나타난 시간은 저녁 6시가 얼마 남지 않은 5시 49분. 한겨울이면 이미 해가 졌어야 할 시간에 이곳은 아직도 황혼이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계절도 달랐다. 원래는 롱패딩을 목 끝까지 올려 잠그고도 귀와 손이 시려 모자를 뒤집어 쓰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걸었는데. 이 곳은 날씨가 따듯해 아직 수 많은 풀벌레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입고 있었던 롱패딩은 저 멀리 어딘가 벗어던지고 온 몸에 풀물이 들은 지 오래였다. 이렇게 정신을 놓고 놀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곳은 지난 시간과 그 사이의 삶을 후회하게 만들었다.하지만 넋 놓고 있기엔 그 애는 아직 어린 여자애일 뿐이었다. 어딘가에 던져두었을 가방과 겉옷을 찾으며 싱그러운 잔디 사이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이쯤이었던 거 같은데. 이곳에 그녀를 허락한 검은 공간과 그 애가 벗어났었던 짐들이 보였다. 이제는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짐을 챙겨든 채,그 애는 이 아름다운 곳에 안녕을 말하고 다시금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하지만 가는 길 내내에도 옷에선 한겨울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풀내가 났다.
그날 밤. 어지간해선 꿈을 꾸지 않던 그 애는 오래간만에 꿈을 꾸었다. 하늘을 날아가는 느낌, 바람이 몸을 스쳐 지나가는 느낌, 아래를 내려다보면 푸른 잔디 사이에 작게 핀 들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꿈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그 애는 잠에서 깨어났다. 다음 날 새벽이었다. 아주 느리게 뛰다 못해 멈춘 듯 조용해야 할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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