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 째 날, 그리고 반지:알데베가

메리 크리스마스

눈이 내렸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아주 오래 전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난 그 곳에서의, 아주 오래된 명절.

그저 쉬는 날. 누군가의 생일이 큰 도움이 되는 날.

집에서 뒹굴고 친구와 놀고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 중 가장 큰 날.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로 했다.

어젯 저녁에 함께 식사를 하며 길잡이가 모두 모여 마지막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잠에 든 전날이 지나고

드디어, 눈이 기쁘게 나리는 이브가 왔다.

예전이야 신이나 온갖 것들을 믿지 않았고 나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그냥 그려려니 했지만 이번만큼은 의미가 달랐다.

영원을 약속한, 베가와 처음 맞이한 그 곳의 명절.

이전부터 중간계에는 이런 저런 명절이 있고 특히 크리스마스는 정말 큰 세계인이 즐기는 명절이란 것.

특히 눈이 온다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부르며 더욱 아름다운 날이 된다는 것.

전 날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인 큰 나무를 집 안으로 들여 여러 장식을 달아 크리스마스 트리로 만들어 공간을 꾸미고

다음 날 아침, 크리스마스 당일에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놓아둔 선물을 풀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빨간 옷을 입은 선물 주는 할아버지 분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가지고 싶어했던 선물을 해주는 날.

그렇게 길잡이들과 교수님들,학생들 그리고 학교 빡은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이젠 폴라리스로도 알려지고 세상을 관리할 다음 세대로 내정 됐으니 이 참에 권력을 남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일 아침 5시, 일어난 내 곁에는 아직은 잠에 빠져 곤히 자고 있는 베가가 있었다.

일어나기 전에 이 예쁜 남자 얼굴 한 번 빨아먹어야겠다.

"애기. 일어나. 눈이 왔어. 눈에 가득 둘러쌓인 상태로 귀여운 애기가 보고 싶은데. 응?

일어나줘. 나를 향하는 그 아름답게 새파랗고 깊은 눈이 보고 싶단 말야."

앗, 빨개진다.

진작에 주문제작한 옷을 길잡이들과 함께 입고 한동안 잔뜩 사서 보존 마법을 걸어둔 물건을 확인했다.

이젠 내 마음대로 안전하게 균열을 열고 닫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법 또한 훨씬 발전했기에 사물들은 각인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바로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정도 규모의 물건을 모아두기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모든 선물들을 바리바리 챙기지 않게 되어 차림이 정말 편안해졌다.

마지막으로 외투를 걸치고 베가와 함께 손을 잡고 나갔다.

학교 밖의 알린의 사람들과 약속을 했었다.

이 겨울의 따뜻함을 아직 알지 못 하는 아이들과 떠났던 내가 돌아오기 전 난장판이었던 알린을 버텨내고 지켜준,

기약 없는 약속을 한 나를 기다려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선물이자 보답을 하기로 했다.

그 약속의 균열로 인한 피해가 정말 컸다. 다행히도 시리우스가 문탑을 부술 때 만큼은 아니었지만

마법사도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더 힘들고 슬픈 재앙이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원인은 나니까 적어도 어느정도는 책임을 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 약속을 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거리.

미법으로 현수막부터 커다란 이동식 식탁, 옷가지, 음식, 접시 준비까지 모두 마쳤다.

사람들은 이미 저 먼 곳까지 줄을 서 있었다.

시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 마법사들도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럼 이제..

"나눔 시작합니다!"

아크투르스와 폴이 주도해 다른 마법사들이 배고픈 아이들과 노약자에게 따뜻한 스프와 작게 자른 고기,샐러드 같은 몇 가지 음식을 나누어주고 다 먹은 후에는 보존기한이 긴 음식과 깨끗한 물과 함께 간단한 비상약과 영양제를 나누어 주었고 스피카와 알페라츠는 내가 대량으로 보온 마법을 중첩해 걸어놓은 이불과 외투, 장갑과 모자 같은 방한용품을 나누어 주는 부서로 들어갔다. 시리우스는 혹시 몰라 변장한 몇몇의 능력있는 마법사와 함께 눈과 마법을 이용해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눈 조각상과 이런 저런 모양과 장난감을 만들어주고 혹시나 우리 이후의 세대가 될 마법재능을 가진 아이는 없을까 살펴보고 몇몇 아이들이 이번 주 내로 칸텔마법학교로 견학 겸 분석을 위해 방문하기로 했다.

베가는 집과 길을 잃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잃어버린 가족을 만나 안전하게 귀가하도록 하고 혹시 다친 사람이 있다면 간단히 응급처치를 해주거나 겨울동안 임시로 운영할 치료소에 데려다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나눔의 초반에는 부족한 물품을 추가로 소환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러 마법사들을 도왔다. 가끔 남는 시간과 후반에는 거리를 거닐며 만나는 밥을 다 먹은 아이들에게 시장에서 파는 간식거리를 조금씩 사주고 어른들에게는 이런저런 불편한 일은 없나 혹은 칸텔에서 도울 일은 없는지 물어보며 다녔다. 오후에도 참여하려 했지만 사실상 거의 모든 자원을 내가 준비했고 소환하고 전달하는데에 많은 마나가 든다는 것과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사실을 아는 마법사들은 와도 안 끼워주고 내쫒을 거라며 좀 쉬고 꼭 돕고싶다면야 저녁에 정리할 때 오라며 자꾸 돌려보냈다.

나는 갑자기 생긴 이 자유시간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중간계에 가서는 기억이 나지 않아 눈물을 흘렸던,

나의 길고 긴 생 중 가장 많이 사랑했고 가장 오래 머물렀던, 내가 지켜냈던 이곳. 경계 알린을 돌아보기로 했다.

일을 하며 걸리적거려 벗어두었던 외투를 툭툭 털어 다시 걸치고 가볍게 몸을 띄웠다.

각자의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있는 마법사들과 그들을 도와주는 주민들, 배불러 빵빵해진 배로 열심히 눈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술 한 잔을 곁들이며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상인들, 치료소에서 웃으며 나오는 사람들, 일을 하다 잠시 모여 뜨거운 차 한 잔을 쥐고 쉬며 떠들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어떤 작은 예술가의 음악소리까지.

이 따듯한 광경이, 마침내 찾아온 평화가, 그리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내가 있음으로써 이 경계 알린이 온전히 안전하고 행복하다고,말해주는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나를 즐겁게 했다. 언젠가 또 다시 재앙이 찾아와도 목숨을 바쳐 지켜낼, 내가 사랑을 알려주고 일깨워 준, 결국 내가 사랑하게 만든, 사랑하는 나의 알린.

벌써 밤이다. 모든 마법사들이 제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야시장에 나가거나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의 낮은 정말 바빴다. 그리고 그 뒤처리도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일을 최대한 분담하고 통제에 힘 쓴 덕분인지 사건사고가 없었고 반 정도의 마법사는 나가 놀 생각인지 외투를 걸치거나 어느 집 밥이 맛있더라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 밤은 베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둘이 아닌 다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베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 크리스마스는 내가 알린에 돌아오고 난 이후 우리가 공개적으로 서로의 연인임을 알린, 하지만 사실상 결혼을 그리 오래 남기지 않았음을 알린 100번째 날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냥 연애 100일 이라는 것일 뿐이지만 우리에겐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길고 긴 생을 살며 작은 인간에서 세계의 신이 되기까지. 이 길고 긴 여정에서 마음 둔 곳은 없었다. 있었을지언정 내가 기억하기엔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가버렸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곳들에 머물기엔 내가 너무 오랜 삶을 살았다. 단지 몇 십 년을 사는 그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일은 끝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내겐 너무나도 아팠다. 다행히도, 이곳의 사람들은 꼭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약 80년에서 길어야 100년을 사는 일반적인 인간들과 달리 평균적으로 90년에서 110년 정도를 살고, 또한 인구 수에 비해 사회의 재생률과 자본이 훨씬 깨끗하고 풍요로웠으며 심지어 마법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그였다. 얼마 살지 않은 초반의 생에선 어릴 적 첫사랑을 잊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 좀 더 나중에는 에우리디케로,또 수많은 생을 겪고 나서 또 어떤 생은 견우로, 그리고 형용하지 못 할 수 많은 생 중 모든 사랑과 관심은 그였다. 내가 이슈타르의 실타래에 감겼음을 알고 권한이 생겨 과거와 실타래를 모두 볼 수 있게 되기 전까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실타래를 모두 풀어 시작부터 천천히 되감으며 그 모든 사람이 너였구나, 그 내가 사랑한 유일한 영혼이 너라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너를 평생 내 옆에 묶어두기로 했다. 새로 생신 전화부스 앞에서, 서로의 눈 색을 담은 목도리를 매고 손을 붙잡고.

너에게 청혼을 했다. 아직 웨딩링은 아니고 약혼반지라 내가 말했었던 레드 다이아몬드는 아니지만 노란색과 파란색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너와 나의 시간과 감정을 담은 반지는 너를 사랑한다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그게 승낙의 의미임을 알아차리고 네 얼굴을 감싸안았다. 사람이 어찌 이리 아름다울까. 누군가는 외모만을 보고 아름답다 말하겠지만 나와 함께한 지난 기억들을 떠올리는, 오직 나만의 향한 사랑이 담긴 눈을 쳐다보는 일은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그치고 내 사랑에게 말해주었다.

"사랑해.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너의 모든 크리스마스에는, 그리고 너의 모든 기억 옆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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