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쉴서월] 메리 하모니

(*인용된 캐럴 링크!)

https://youtu.be/oIKt5p3UmXg?si=BX2P8uOtlrPxODz1

만연한 겨울, 시침은 5시를 가리켰다. 사계 중 가장 추운 날을 짚으라면 달력에서 오늘 날짜를 찾아 빨간 동그라미를 죽죽 긋는 것만이 정답일 날씨. 들새조차 울지 않는 거리를 비틀비틀 가로지르는 인영이 있었다. 부츠 밑창의 조용하고 거친 소리와 엽총이 사냥꾼이 입을 법한 가죽 재킷 자락에 마찰하는 음이 서로 뒤섞였다. 희고 길게 이어지는 숨을 뒤로 하고 달리다시피 걸음을 서둘렀다. 드문드문 선 난색의 가로등이 흐리게 빛나며 인영을 비추었다 가리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한 콘크리트 건물 앞에 도달한 그는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고 입구에 카드키를 갖다 댔다. 삐리릭- 잠금이 해제되는 것과 동시에 밀치듯 문을 닫고 실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스위치를 탁 누르자 청백색의 형광등 빛이 너른 공간을 채웠다. 발갛게 튼 창백한 피부와 금속의 윤기가 도는 연보랏빛 단발이 조명 아래 드러났다. 재킷 주머니 안에 카드키를 집어넣는데, '에쉴 허밍버드, 히어로'라는 글자가 얼핏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 새로 보였다.

에쉴은 히어로의 기지에 도착했고, 아마도 첫 출근자인 것처럼 보였다. 에쉴은 바깥의 공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실온을 개선하려 보일러를 가동했고, 전기 주전자를 세척했다. 물을 끓일 생각이었다. 드러난 맨손에는 형태 다른 흉터들이 뚜렷했다. 히어로가 되기 전, 키메라가 서식하는 숲에서 사냥꾼으로 살며 얻은 흔적들이었다. 긴 화상 자국부터 발톱에 긁혀 난 상처, 이빨의 크기대로 패인 흉까지. 생존했기에 누리는 영예였지만 이른 죽음을 부를 수 있었던 사건들의 선명한 기록이었고, 그렇기에 항상 눈길을 잡아끄는 흉터였다. 하지만 주전자를 씻는 에쉴의 눈길은 왼손 약지의 은반지에 더 오래 머물렀다. 실수로 수도꼭지를 잘못 작동해 셔츠 소매 끝에 물방울이 튀었다.

"일찍 왔네, 에쉴~?"

에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에쉴은 화색 하며 돌아보았다.

"서월!"

들어온 이는 에쉴보다 키가 한 뼘 큰 남자였다. 목을 살짝 덮은 곱슬머리가 실내를 아른아른 채운 빛에 남색 기를 머금었다. 순한 인상의 단정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금색 눈동자에 감도는 다정하고 장난스러운 눈빛은 단 한 번도 사그라든 적이 없었을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주로 입는 흰 셔츠와 회색 정장 조끼 외에도 무릎까지 오는 외투를 입은 서월은 단화에 얕게 묻어난 눈을 툭툭 털고,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날개를 퍼득 폈다가 갈무리했다.

에쉴은 수건으로 손을 닦고 한걸음에 서월에게 다가갔다. 두 손으로 감싼 볼은 옅게 상기되어 있었으며, 차가웠다. 잠시나마 실온에 있었던 에쉴의 손이 다시 따뜻해진 것도 있으나, 서월의 체온은 본래도 낮았다.

"간밤엔 잘 잤어요?"

"그럼~ 에쉴은?"

대답이 채 나오기 전, 서월이 에쉴의 머리를 팍팍 쓰다듬어 헝클어뜨렸다. 장난 섞인 애정 표현이었다.

"좀 더 자지, 왜 벌써 왔어. 담요 꺼내줄까? 잠깐 눈 좀 붙일래?"

"새벽 훈련을 빨리 끝내서요. 오는 길이 추웠는데, 그래도 서월을 일찍 봐서 좋아요."

"그건 나도 그렇지만."

서월이 제 뺨을 감싼 두 손을 조심스레 잡아 내려 주었다. 날이 추웠다는 말 하나 때문이었으리라. 서월은 제 서늘하게 식은 체온을 형벌처럼 여겨, 타인과 가까이 닿는 걸 꺼렸다. 남들의 떨떠름한 반응을 좋아하지 않았거나, 그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둘 다일지도 몰랐다. 다만 에쉴에게는 예외를 두어 손길을 받아들였으며, 달가워했다. 그러나 체화된 배려는 쉽게 거둬지지 않았던 탓으로, 특히 차가운 겨울날에는 상대를 오래 괴롭히려 하지 않는 것처럼 거리를 두었다. 서월은 잡은 손을 잠시 잡고 있다가 아쉬운 양 천천히 놓아주었다. 에쉴은 서월의 손가락에서 자신의 것과 같은 반지를 찾고, 간지러운 만족감이 마음에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담요보다도, 물을 끓이려고 하는데. 같이 커피 마실래요?"

"아, 좋아! 잔 가져올게."

즉석에서 결정된 커피 시간은 순조롭게 준비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향긋한 커피 가루를 탄 잔을 하나씩 들고 긴 소파에 앉았다. 뜨끈하게 달궈진 자기 표면을 조심스레 감싸면 손바닥부터 온몸이 따뜻해졌다. 서월은 맞은편의 에쉴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사려 깊고 순수한 애정, 냉기를 쫓아내는 건 갓 끓인 커피뿐만은 아니었을 테다. 서월과 에쉴은 날씨와 오늘의 업무, 최근 겪거나 목격한 재밌는 일이나 훈련의 진척도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쉴,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내일이요?"

에쉴이 골똘히 손가락을 접었다.

"일요일이요. 왜요, 서월?"

여즉 기지에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거리에 사람이 많아지는 주말엔 히어로의 대부분이 파견을 나갔으며, 행정 업무를 하는 히어로들은 전투 인원이 없을 때엔 기지에 머무르며 인질이 될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재택 업무를 신청했다.

"음~ 그렇긴 하지."

서월의 반응은 시원하지 못했다. 에쉴은 의문이 들어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오늘이 12월 24일이니까... 내일은 25일, 일요일 맞네요."

입으로 내고 보니, 어쩐지 익숙한 날짜 같이 느껴졌다. 에쉴은 고개를 기웃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추측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똑똑똑-.

작고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둘은 일순간 긴장했다.

"...올 사람이 있던가요?"

"음. 글쎄? 일단 우리 동료라면 노크를 할 것 같지는 않네."

서월이 제 목에 걸어 두었던 카드키를 들어 흔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검 손잡이에 손을 가까이 두고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는데, 에쉴 역시 엽총을 장전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문밖에는 뜻밖에도 와글와글 말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다 왔어요?"

"선생님, 여기 눈 있어요!"

"저 히어로 내복 입고 왔어요."

"나는 히어로 양말 신었어요!"

"흐아암."

"선생님, 언제 들어가요? 빨리 열어요!"

"추워!"

에쉴과 서월은 맥 빠진 기분으로 깜빡 서로를 보았다. 에쉴은 현관문의 외시경에 한쪽 눈을 갖다 댔다. 아직 학교도 가지 않았을 듯한 나이의 아이들이 열두 명 정도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선 몹시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아마도 보호자일 어른이 능숙하게 아이들을 한데 모으고, 목도리를 고쳐 매 주고, 칭얼대는 걸 달래는 중이었다.

"여러분? 기지에선 모두 조용히 해야 해요. 씩씩하게 약속했지요?"

달칵.

에쉴이 렌즈에서 눈을 떼자 서월이 문을 열었다.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어린 얼굴들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시선을 보냈다. 소란스러웠던 게 거짓말이었던 양 꼬옥 다문 작은 입매가 기대로 들썩들썩 씰룩댔다. 둘은 이 손님들을 더 밖에서 기다리지 않게 하기로 했다. 선생님이 겸연쩍고 곤란한 얼굴로 말을 고르던 중, 에쉴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문을 젖혔다.

"괜찮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서월은 총총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다 주전자를 찾아 나섰다. 따뜻한 음료가 더 필요할 듯했다.

***

"늦은 시간 정말 죄송해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라 불린 사람이 김이 잔뜩 서린 안경알을 목도리 끝자락에 문질렀다.

"자고 일어나면 준비하고 가자고 아이들에게 일러 두었는데, 전부 꼭두새벽에 다 같이 일어나서는, 하하..."

"괜찮습니다, 마침 기지에 저희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에쉴은 그 멋쩍은 웃음에서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꼈다. 유진은 에쉴과 함께 비교적 조용한 모서리 쪽의 탁자 앞에 앉아서도 연신 소파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흘끔거렸다. 서월은 아이들에게 정수된 물을 섞은 미온수를 각각 건네곤 비스킷을 꺼내오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얌전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듯했으나, 어린이들이 늘 그렇듯 손을 꼼실거리거나 다리를 팍팍 흔들고, 속닥대거나 몸을 뒤척이며 부스럭부스럭 부산스럽게 들떠 있었다. 새하얀 겉옷에 두툼한 옷을 여러 겹 껴입은 아이들은 마치 동글동글한 오목눈이 같았다. 시선을 돌리기 전 에쉴은 서월과 눈이 마주쳤다. 서월은 본인 쪽을 걱정하지 말란 듯 환히 웃었다. 에쉴 역시 미소로 화답하고 손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쉴은 선생님에게 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인사가 늦었습니다. 에쉴 허밍버드입니다. 성함이?"

"아, 앗.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에 눈꽃교육원의 서포터 반 담당 인솔자가 된 유진이에요."

유진은 안경을 고쳐 쓰고 허둥대며 인사를 받았다. 유진이 각별히 심약했기에 나온 반응은 아니었다. 에쉴은 타고 나기를 냉막한 인상이었는데, 표정을 지우고 사무적인 어투를 쓰면 그 자체로 상대를 긴장케 하는 면이 있었다. 히어로이기 이전 평생을 사냥꾼이었던 사람의 다듬어지지 않은 날카로운 분위기도.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결례를 저질렀다는 죄책감도 작용했을지도 몰랐다. 정작 에쉴은 예를 갖춰 진중하게 상대를 대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에쉴이 수첩과 연필을 들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유진 님?"

"히어로 양성 교육기관 실습의 경호를 신청하러 왔어요."

유진의 설명은 이랬다.

"태어날 때부터 이능력을 타고나는 아이들은 특정한 교육원에서 필요한 훈련을 받아요. 능력을 다루고 조절하는 방법은 어릴 때부터 배워 두는 게 좋거든요."

"그렇군요."

"저희 반의 아이들은 서포터 계열의 능력을 가졌는데, 그중에서도 음악과 연관된 힘을 사용해요. 저 역시도 그렇고요."

유진이 콧노래로 단조로운 곡조를 불렀다. 에쉴은 짧은 순간에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들은 상대를 잠재울 수 있어요. 대단치 못한 능력이라, 완전히 구사하려면 30분 이상은 필요하지만요."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때는 좋겠습니다."

"네? 하하!"

유진은 눈을 잠시 깜빡이다가, 이내 소리 내 웃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도움이 되긴 해요. 저 개구쟁이들..."

유진이 아이들이 있는 쪽을 보았다. 아이들은 이미 서월과 친해진 듯, 무릎에 눕거나 팔에 매달리기도 하고, 재잘재잘 무언가를 묻고 말하느라 바빴다. 비스킷 포장지가 그새 탁자에 가득했다. 유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거둬졌다.

"막상 아이들이 위험해지기라도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요."

이능력이 있는 세계, 이는 즉 삿된 방향으로 힘을 쓰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이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빌런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았다. 이용하기 쉬우며 높은 가치를 가졌기에. 에쉴이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습니다. 지키는 게 히어로의 일이니까요."

고개를 든 유진이 마주한 연녹색 눈동자는 굳건하고 깨끗한 빛을 띠었다. 자신이 하는 말의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이를 실천할 힘을 가진 사람만이 가지는 특권이었다. 마음과 힘, 둘 중 하나라도 흔들린다면 비슷하게나마 따라 할 수 없을 태도였고. 유진은 에쉴을 온 마음으로 신뢰하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유진은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가, 묵은 기억을 대뜸 털어놓고 싶었다가, 대신에 그저 웃었다. 에쉴이 화답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유진은 하던 설명을 마저 이어갔다.

"음악 계열 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정기적으로 음악회를 열어요. 내일 있을 게 그 음악회고요. 원래는 회장을 따로 예약해 두었지만."

유진이 쓰게 웃었다.

"어제 그 근방에서 전투가 발생해서, 무대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하더라고요."

"유감입니다."

"다른 곳을 잡으려고 해도... 요즘 같은 시기엔 공연장이 다 차 있으니까요. 급한 대로 근교의 평야에 간이 무대를 열려고 하거든요."

"하지만 인가와 떨어진 곳이니 위험한 일이 생겨도 도움을 구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래서 동행을 원하시는 게 맞습니까?"

"네! 오늘 오후 두 시에 마지막으로 합을 맞추는 연습이 있어요. 실수를 고치는 시간을 고려한다면 두 시간 반 정도 이어질 거고요. 크리스마스 당일에 할 공연에도 보조해 주신다면 감사할 거예요."

에쉴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에쉴,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내일이요? 일요일이요, 서월. 왜요?"

"크리스마스."

"아, 역시 어려울까요...!"

"앗, 아닙니다! 이건 다른 것 때문에... 괜찮습니다."

둘에게 다가온 서월이 에쉴의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괴어 몸을 기댔다.

"맞아요, 선생님~"

"아, 서월."

"뭣보다 애들이 꼭 공연을 보러 오라고 해서, 벌써 약속을 잔뜩 했거든요."

서월이 에쉴에게 찡긋 눈인사를 하곤 능청스레 유진을 안심시켰다. 유진의 눈이 반짝 안도감으로 빛났다.

"그랬군요...! 두 분께서 도와주신다니 마음이 놓여요. 정말 감사합니다."

유진은 둘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 의자 옆 바닥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서둘러 어깨에 멨다. 더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이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얘들아? 이제 가자?"

유진이 종종걸음으로 아이들이 있던 자리로 향했다. 에쉴이 유진과 서월을 뒤따라가자, 담요와 쿠션으로 꼭꼭 둘러싸인 아이들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평온한 고요, 서월이 아무도 깨지 않도록 조용히 입을 열었다.

"더 계시다 가세요. 다들 피곤했나 봐요."

"...감사해요..."

***

눈꽃교육원에서 온 손님들은 해가 높이 뜨고서야 군잠에서 깼다. 서월과 에쉴은 그들을 배웅했고, 그동안 하던 서류 작업을 마무리한 후 밖으로 나섰다. 순찰을 위해서였다. 간밤 내린 눈에 햇살이 잘게 부서져 빛났다. 에쉴은 처마의 고드름을 개머리판으로 우득 쳐 깨뜨리고 서월과 걸음을 맞췄다. 크기 다른 발자국이 나란히 이어지길 잠시. 에쉴이 넌지시 운을 띄웠다.

"25일이 크리스마스인 걸 몰랐어요. 서월은 알았나요?"

"음, 그랬지? 나도 애써서 외우려고 한 건 아니었어. 그냥, 이맘때는 다들 들떠 있으니까."

건물들이 밀집한 거리로 나오자 보이는 사람이 늘었다. 함뿍 흰 눈 속에 파묻힐 만큼은 못 되었으나, 뽀얗게 떠오르는 들뜬 숨과 포근하게 몸을 감싸는 털실 직물만으로도 공간은 어여쁜 설경을 입었다. 훈훈한 계피 향이 마른 공기를 적셨다. 카페의 입구 근처 스피커에서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에쉴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네요. 저기 들리는 건 캐럴이고요."

"맞아. 듣기 좋네."

서월과 에쉴은 순찰자로서 주위에 대한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사담을 이어갔다.

"에쉴은 원래 크리스마스를 챙겨?"

"생각날 때만 그랬던 것 같아요. 보통은 새해를 더 기다렸고요."

에쉴이 장난스레 웃었다.

"항상 어른이 되고 싶었거든요. 성인이 되면 키메라 사냥에 같이 가도 된다는 말 때문에요."

서월이 에쉴의 손끝을 보았다. 검은 가죽 장갑에 가려진 흉터를 떠올리며, 서월은 에쉴이 담담히 이야기한 옛일들을 떠올렸다. 감당하기 어려웠을 그 모든 사건들을 거쳐 왔음에도 에쉴은 여전히 선하고 올곧은 의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서월이 에쉴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개었다.

"어렸을 때부터 용감했구나, 에쉴."

"고마워요."

에쉴은 닿은 손을 깍지 끼어 가볍게 잡았다.

"서월도 그랬잖아요?"

왁자지껄 즐거운 웃음과 수다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소란스러운 곳에서는 오히려 서로 나누는 대화가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안정감이 드는 법이다.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긴밀한 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타인에겐 말하고 싶지 않던 주제도 꺼내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심리였고. 서월은 본래 자신의 유년기, 더불어 과거에 대한 모든 발화를 꺼렸다. 그러나 서월은 에쉴에게는 이미 많은 것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 그러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티 없이 진솔한 애정에 화답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몰랐다. 연녹색 눈동자의 맑은 빛을 바라보자면, 무엇이든 받아들여 줄 것만 같은 천진한 믿음이 들기도 하였고.

"나는 결국 천계의 기사단원은 못 되었는걸? 에쉴은 매번 나를 좋게 봐주네."

"그랬는데도 결국엔 히어로가 되기로 했죠. 서월은 어디에서든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런가?"

길모퉁이를 돌았다. 서월은 무심코 쇼윈도에 시선을 던졌다. 검은 머리칼과 날개깃의 상이 보였다. 지독한 비극까지는 못 되었지만 영영 지고 가야 할 낙인은 될 얼룩. 천사였던 걸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과거의 순백색은 흔적도 없이 어두운 빛깔로 대체되었다. 어릴 적 느꼈던 절망은 퇴색된 지 오래이나, 천계에서 추방된 걸 증명하는 검은 날개는 여전히 죄를 증명하는 상징으로 남았다. 설령 그것이 기억나지 않는 시절의 악행이었다 하더라도.

곱지 못한 흑색도 새벽하늘을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은 흠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서월은 에쉴만큼은 지금처럼 쭉 맑기를 바랐고,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서월은, 어쩌면, 에쉴을 동경했다. 서월이 씨익 미소를 그렸다. 최선의 진심을 담았으나 온전히 후련하진 못했다. 서월은 에쉴이 그것을 눈치챘을 거라 생각했고, 에쉴은 과연 화제를 돌렸다.

"오늘 온 애들은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모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던걸요."

"하하, 정말 그랬지~ 애들은 항상 힘차다니까."

과연, 눈꽃교육원에서 온 아이들은 전부 낯도 가리지 않는 듯 서월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질문을 퍼부었었다. 일반인들보다도 더 히어로에 대해 좋은 말을 많이 듣고, 또 그 길을 자신의 미래로 여기기 때문이리라. 보통 아이들에게 히어로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였고.

"히어로가 하는 일이랑, 빌런이랑 싸운 이야기 같은 게 궁금했다더라. 그 외에도 웬만한 이야기는 다 했지, 아마?"

서월이 큭큭 웃었다.

"노래 연습도 정말 열심히 했대. 작년 크리스마스가 끝나자마자 올해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단 것 같더라."

"하하! 기대해야겠네요."

"그렇지? 오늘 꼭 와서 들으라고 하더라. 너도 같이."

"애들이 저도 부르던가요?"

"응, 왜냐면..."

서월이 한 쪽 날개로 에쉴의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왔다. 에쉴의 귓가에 서늘한 숨이 닿았다. 귓바퀴가 달아올랐다. 인파가 둘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간이 아주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크리스마스에 함께 캐럴을 들은 연인은 영원히 함께 행복할 거래."

서월이 깍지를 낀 손을 가까이 가져와, 에쉴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서월의 손가락에서 은반지가 반짝, 빛났다.

"애들이랑 반지 이야기도 했거든!"

장난스런 목소리, 그러나 황금빛 눈동자는 단단한 애정으로 빛났다. 에쉴은 추위에도 변화 없던 얼굴색에 발그레한 홍조가 도는 걸 보았다. 잠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에쉴은 서월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형상이 비치는 건 볼 수 없었지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어쩐지 짐작이 갔다.

"...그러면 우리는 매일이 오늘만 같겠네요?"

분명 서월의 표정을 닮았을 터였다. 에쉴과 서월의 시선이 교차했다. 에쉴이 발끝을 들었다.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떨어졌다. 착각이었대도 이상하지 않았을 찰나였다. 에쉴은 멍하니 서 있는 서월을 봤다가, 시선을 회피하며 제자리에서 톡톡 뜀박질을 했다가,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가, 서월의 손을 낚아채어 본인의 재킷 주머니에 쏙 넣었다.

"어, 어서 가요. 늦겠다."

서월은 달리듯 걷는 에쉴을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따라갔다. 맞잡은 손, 피혁이 아닌 살갗이 손바닥에 밀착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깍지를 끼고 있던 오른쪽엔 여전히 장갑이 있었다. 주머니 안은 따뜻했다. 서월은 뒤이어, 에쉴이 자신을 위해 여태 주머니를 데우고 있었단 걸 알게 됐다. 정말 매일이 오늘만 같을 수 있다면, 그 이상 아무것도 바랄 수 없을 거야.

빠른 맥박이 맞물린 손가락을 타고 전달됐다. 선율이 서월과 에쉴의 뒤로 멀어져갔다.

***

재재대는 목소리가 겨울 평야의 적막을 깨고 즐겁게 이어졌다. 에쉴과 서월은 유진을 도와 음악회를 열 자리를 고르게 정돈하고 추후 좌석으로 쓰일 간이 의자들을 고르게 놓았다. 유진은 키보드 거치대가 탄탄하게 자리 잡았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유진이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여러분, 같이 인사 드려야지요?"

"감사합니다~!!"

눈꽃교육원 아이들이 일제히 꼬박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새 눈놀이를 하느라 옷과 털장갑에 눈을 묻힌 채였다. 단출히 준비한 무대의 옆엔 아이 하나의 키에 맞먹는 큼직한 눈사람이 있었다. 에쉴은 아이의 등에 있는 눈을 털어주며, 목소리 톤을 높여 어색하지만 친근하게 물었다.

"눈사람 멋지다. 다 같이 만든 거야?"

"파슨 브라운 씨예요!"

"아하. 그게 누군데?"

"신부님이요!"

"자, 눈꽃교육원 여러분! 다들 연습한 대로 서 볼까요?"

유진이 부르는 소리에 아이가 쪼르륵 달려갔다. 에쉴은 궁금증을 풀지 못했지만, 파슨 브라운 씨는 제법 멋들어지게 보였다. 눈덩이를 마음껏 굴려서 키우고, 고르지 못한 부분은 조막손으로 눈을 퍼와 고쳐 만든 눈사람이었다. 머리 부분에는 흙 얼룩이 져 있었는데, 파슨 브라운 씨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콧수염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을 것 같았다. 에쉴이 눈사람의 머리를 툭툭 토닥이고 몸을 폈다. 때마침 서월이 에쉴에게 걸어왔다.

"에쉴~ 이제 시작하나 봐. 같이 가자."

"아, 좋아요. ..."

에쉴이 꿀꺽 침을 삼켰다. 평소처럼 여상히 답하고 따라가려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자 이상야릇한 기분이 밀려왔다. 공연히 주먹을 쥐었다 펴며 보폭을 좁혔다. 접촉, 떠올리자 얼굴이 달았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자가 모여 있는 장소에 도달했을 때, 에쉴은 이 많은 자리를 두고 서월의 바로 옆에 앉는 게 올바른지 고찰하기 시작했다. 너무 들이대는 것 같나?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되나? 좀 그렇다고 생각할까? 집중은 될까?

서월이 둘째 줄의 자리를 골라 앉고는, 삐걱거리는 에쉴의 모습에 파핫 웃었다. 하지만 무어라 농담은 하지 못하고, 대신 입을 꾸욱 다물곤 살짝 떨리는 눈동자를 반짝 빛내었다. 벅찬 감정을 갈무리하려는 사람처럼. 서월이 제 옆의 자리를 손으로 톡톡 쳤고, 에쉴이 앉았다. 유진은 건반을 조율하면서도 은근히 객석의 둘을 곁눈질했다. 귀여운 사람들이야, 유진이 속으로 미소를 삼켰다.

대열이 최종적으로 다듬어지고, 아이들은 조금 긴장한 듯 입매에 힘을 주었으나, 잔뜩 설렌 듯 상기된 얼굴이었다. 에쉴과 서월은 첫 관객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두 명이 낼 수 있는 최대의 박수 소리를 내고, 환히 웃으며 가수들을 응원했다. 효과가 있었다. 아이들은 종을 꼭 쥐었던 손에 부드럽게 힘을 풀었다. 교육원의 일원들 외의 사람에게 응원을 받은 게 용기를 준 것도 있고, 무엇보다 동경하는 히어로가 들어줄 거라는 생각은 벅차고 즐거운 일이었다.

가장 떨려 하는 것 같던 가운데의 아이가 무대 앞으로 세 발짝 걸어 나와 준비한 인사말을 했다.

"안녕하세요! 눈꽃교육원 친구들이 크리스마스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노래의 제목은요, '마법의 겨울 나라'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준비된 말을 할 때의 어린이 특유의 리듬감 있는 목소리였다. 박수갈채와 함께 아이가 당당히 자리로 돌아가자, 유진이 건반을 눌렀다. 발랄한 멜로디에 청아한 종소리가 포개어졌다.

들리나요, 썰매 종이 울려요


들판엔 눈이 빛나고요


이 예쁜 풍경


행복한 이 밤


마법의 겨울 나라를 걸어요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녹이는 음악이었다. 아이들과 유진의 이능력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진심을 가득 담아 만드는 선율에는 마음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었다.

파랑새가 우릴 떠나면


새로운 새가 날아 와요


우리가 걸을 때


사랑 노래를 하러


마법의 겨울 나라로 와요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데 집중하며 동시에 종을 흔드느라, 박자가 조금씩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 사실은 공연에 어떠한 결함도 되지 못했다. 흙 얼룩이 묻은 비뚤비뚤한 눈사람도 못나지 않은 것처럼. 흉터가 겹겹이 그어질 동안 그만큼 괴물의 피를 손에 묻혔을 에쉴도, 천계에서 추방되어 영영 온기와 흰 날개를 되찾지 못하게 된 서월도, 분명...

들판에 눈사람을 만들어요


파슨 브라운 신부님인 것처럼


그분이 우리에게...

돌연, 섬찟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시선. 모를 수 없는 적의. 인근의 새들이 일제히 날개를 펴고 피신했다.

에쉴과 서월이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대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탄환을 장전하고 검을 뽑았다. 눈길이 멈춘 곳은,

"위!"

얼핏 낡은 천 조각 같기도 한 그것이 불길한 바람 소리를 내며 울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색, 허공을 잘라낸 것 같은 모습. 에쉴이 세 차례 격발했다. 무효했다. 탄환이 마치 그것의 신체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에쉴이 혀를 찼다.

"모두 몸을 숙이고, 흩어지지 마세요~ 유진 선생님, 부탁드려요."

서월이 전부를 안심시키려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상황에서 패닉 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좋지 않은 결과가 벌어질 터.

"...! 네!"

당부와 동시에 그것이 아이들의 머리 바로 위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채앵! 검과 발톱이 맞부딪혔다.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고, 유진은 창백하지만 결연한 얼굴로 모두를 모았다. 적이 다시 상공으로 솟았다.

"전부 눈 감고, 귀 막아요!"

경고 후, 에쉴이 다시 그것을 발포했다. 표적은 위협을 느낀 듯, 아이들을 다시 낚아채려 드는 대신 에쉴의 방향으로 하강했다. 에쉴은 두 발을 굳건히 땅에 딛고 날아드는 그것을 응시했다. 충분히 가까워지자 그것의 둥근 입이 보였다. 턱의 경계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뾰족한 이, 에쉴은 그것이 충분히 입을 벌리기까지 기다렸다. 뻐억! 섬광탄을 던져넣고, 위쪽 구강을 겨냥해 개머리판을 올려 쳤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울음과 함께 그것이 하늘로 쏘아지듯 날았다. 에쉴 역시 머릴 숙이고 귀를 막았다. 굉음. 손바닥에 막혀 먹먹한 소리.

내부에서 터진 섬광탄은 효과를 보였다. 그것이 몸을 뒤틀며 허공에서 꿈틀거렸다. 자리를 피하려는 듯하였다. 도망치게 둘 수 없었다. 아이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려 하였으며, 한 번 타격에 성공했다 하여 다음에 조우했을 때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서월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검집에서 뽑혀 나온 날이 차가운 빛을 냈다. 호기심을 못 이긴 몇 아이들이 유진의 품 안에서 살짝 고개를 들었을 때. 설화 雪花가 생을 입고 하늘을 뒤덮었다. 얼음으로 이뤄진 꽃잎이 크리스털처럼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서월이 얼어붙은 그것을 땅으로 데리고 사뿐히 내려왔다.

"괜찮아요?"

"응, 생포했어."

에쉴이 고개를 끄덕이고 본부에 연락했다. 서월은 기웃 에쉴의 상태를 살폈으며, 눈꽃교육원의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던 것도 잊은 듯 얼어붙은 그것을 보며 웅성웅성거렸다. 유진은 아이들이 그것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엄히 단속하면서도 눈에 띄게 안심한 모습이었으며, 나머지와 마찬가지로 감탄한 듯 보였다.

"유진 선생님, 얘들아~ 다 잘 해결됐어."

"모두 괜찮으십니까? 교육원까지 다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개체는 즉시 본부로 옮겨 격리 조처를 할 예정이니 안심하시길 바랍니다-라는 뒷말은, 급격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한 아이들의 찬사에 묻혔다.

"우와, 우와, 와!!"

"또 보여주세요!"

"펑 하고 쨍 했어!"

"진짜진짜 멋져요."

그러는 동안 유진은 모든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이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돌아온 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두 분 모두 정말, 정말 감사해요. 모두 무사해요. 덕분이에요."

에쉴과 서월이 빙긋 미소 지었다. 일행은 오솔길을 따라 평야를 떠났다. 서월과 에쉴이 얼음을 줄로 매어 이송하는 동안, 눈꽃교육원의 아이들은 멈추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유진은 둘을 도우려 시도하면서 아이들을 중재하느라 상념에 빠질 틈도 없어 보였다. 서월은 거들지 않아도 충분하니 유진에게 후방에서 아이들이 전부 잘 오는지 살펴봐 달라고 부탁했고, 유진은 그리 했다.

에쉴이 뒤따라오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표정이 밝았다. 아찔한 사건이 있었는데도 기운찬 아이들을 보자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습격은 이 도시에서 흔한 일이라, 큰 상처를 입지 않은 지금은 아이들에게 그저 박진감 넘치는 사건으로 기억된 것 같았다.

들판에 눈사람을 만들어요


파슨 브라운 신부님인 것처럼


우리에게 결혼했냐 물으면


우리는 아니라고 하겠죠


대신 파슨 씨가 도울 수 있다면서

급기야 한 명이 연습 중간에 끊겼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머지가 따라 했고, 유진까지 합류했다.

모닥불 피우고 꿈을 꾸며


미래를 말할래요


겁먹지 말고


우리 계획을 보며


마법의 겨울 나라로 가죠

발걸음이 저절로 경쾌해졌다. 오솔길엔 노랫소리가 가득했다. 이렇듯 왁자지껄한 공간에선, 입 밖으로 꺼낼 말이 상대에게만 전해질 거라 믿게 되는 법이었다. 안일하고 따뜻한 안정감. 서월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에쉴에게 속삭였다.

"있지, 에쉴. 여기 오기 전에, 그때 말야."

서월이 작게 웃었다.

"네가 입 맞추지 않았으면, 내가 했을 거야."

에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놀라지 않고,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 상황을 계속 재생해 보고, 다른 결과를 가정해 봤던 것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결과가 다정할 것에 의심이 없었던 것처럼.

"내일 크리스마스도 같이 보내줄 거예요?"

"당연하지? 광장에 트리를 보러 가자. 쿠키를 먹어도 좋고, 날이 추우면 집에만 있어도 돼."

"그리고 저녁엔 애들의 합창을 듣고요."

"하하, 그래야지!"

"무슨 일이 생겨도, 자정에는 행복할 거예요. 결국에는 전부 지나 보낼 테니까."

"그럼. 지금처럼."

"무엇보다 제 옆에는 서월이 있을 거고요."

"언제든지."

둘은 서로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숲길을 나오자 흰 눈이 코끝에 닿았다. 함박눈이 고왔다. 한편 캐럴은 그칠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오래도록 사랑할, 마법 같은 겨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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