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쉴서월]
고록
가을날이 청명하다. 에쉴은 나이 든 떡갈나무 아래에 서 등을 기대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투명한 시간. 언덕에는 들풀이 자라고, 청설모가 톡톡 뛰어다녔으며, 더 먼 곳을 보면 도시의 높은 건물이 굳건하다. 발뒤꿈치를 톡톡 차면 낙엽이 바스락댔다. 덩달아 곱게 포장한 안개꽃 다발도 함께 사각거렸다. 에쉴은 재킷 주머니에 빈손을 찔러넣고 초조하게 오솔길의 끝을 응시했다. 중요한 순간을 앞둔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이. 작은 상자가 손안을 구르다가 풀려나길 반복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각보다도 이르게 도착한 것은 에쉴. 아직은 더 기다릴 필요가 있다. 에쉴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고개를 들자 주황색 빛이 잎새를 지나 감은 눈꺼풀을 어루만졌다. 그 따사로운 감각은 소나무가 자라고 흰 꽃이 피던 공터에서의 시간과도 비슷했다. 에쉴은 천천히 지난 일을 회상했다.
***
몇 년 전, 에쉴은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휴가를 명목으로 한 방문이었다. 기차 좌석에서 몇 번의 낮과 밤을 보내고, 에쉴은 더플백과 엽총을 갖고 숲의 초입에 들어섰다. 등에는 금이 간 하얀 검을 멘 채로.
"에쉬이이이일!"
날렵한 형체가 팍 튀어나오더니 에쉴에게 뛰어들었다.
"비버 언니!"
그를 안아 든 에쉴이 환하게 웃었다. 지친 낯빛에 생기가 돌았다. 에쉴에게 '비버 언니'라 불린 이는 조이 비버. 날렵한 체구에 밤갈색 머리를 짧게 친 사냥꾼으로, 에쉴의 가족이었다. 조이가 에쉴의 뺨에 뽀뽀를 퍼부었다.
"우리 강아지! 왜 이제 왔어,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저도요!"
비버는 에쉴이 간지럽다며 깔깔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계속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도 잠시 에쉴은 비버를 꼬옥 안고 있다가,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 주었다.
"오는 길 안 힘들었어? 고생 많았지. 로베르타 님이랑 보어 씨는 지금 집이야. 모두 너 오는 거 준비하는 중인데, 무슨 요리를 하는지 알면 놀랄 걸..."
비버가 종알종알 에쉴 곁에서 떠들며 걸었다. 에쉴은 싱긋 웃으며 내내 비버에게 시선을 두었다. 집을 떠나서 있다 만나는 가족은 애틋한 법이다. 앞을 보지 않고 걷다 나뭇잎에 얼굴을 긁혀, 가지를 대충 걷어내고 더플백을 고쳐 맸다. 비버는 뒤늦게 에쉴이 든 짐을 의식하였다.
"내 정신 좀 봐, 가방 이리 줘! 무겁게 그걸 왜 들고 있어? 날 주지."
"아니예요! 정말 별거 안 들었어요."
에쉴이 비버의 등을 떠밀었다. 비버는 발뒤꿈치에 힘을 주곤 흙을 직직 그으며 밀려났다.
"아니, 무겁고 가볍고가 아니라. 싫음 가방 말고 딴 거라도 이리 내. 등에 그건 뭐야?"
"아, 이건..."
에쉴이 설명하기 전 비버가 쏙 검집을 빼갔다. 검 자루를 뽑자 이가 나가고 금이 간 검신이 드러났다. 비버가 시린 금속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의 이능력인 '수선'을 사용하고자 함이었다. 사람 옷이나 피부 같은 것을 꿰맬 때가 대부분이지만, 종종 다른 것도 고치는 힘.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검은 처음 그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안 되네."
"그런가요."
"응."
비버가 혀를 내두르며 무기를 갈무리했다.
"고철 수준이야, 얼추 이어 붙인 금속 조각 정도. 이런 건 쇳조각은 왜 갖고 왔어? 십자 베기라도 했다간 아주 그냥 먼지처럼 흩날리겠는데."
깨끗이 닦인 검집이 찰그락 검을 담았다. 에쉴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동료 유품이에요."
둘 사이에는 순식간에 적막이 돌았다. 몇 발자국을 채 떼기도 전,
짜아아아악!
"비, 비버 언니?!"
"아니,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입술이 다 부었는데도!"
"신경 쓰지 마, 이래도 싸. 정말로. 내가 미쳤지, 입이 방정이지, 진짜..."
중얼중얼 뻘겋게 부은 입과 더없이 침착하게 번쩍이는 벌꿀색 눈이 대조적이었다. 에쉴이 입을 벌리고 할 말을 찾는데, 비버가 허리가 땅에 닿도록 꾸벅 숙이고는 두 손으로 검집을 내밀었다.
"미안, 미안해. 그럼 이만. 곧 보자!"
에쉴이 얼떨결에 검을 받아서 들자마자, 비버가 나무 사이로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나타날 때처럼 순식간이었다. 에쉴은 멍하니 전나무 가지를 보다 난감하게 웃었다.
"길을 모르겠는데, 어쩌지..."
***
에쉴이 고향에서 미아가 되는 일은 없었다. 낯익은 전나무 몇 그루, 거친 둥치에 새겨진 낡은 표식들을 더듬더듬 짚어가며 걷다 보니 사냥개 두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맞아주었다. 하나는 말만 한 덩치였고, 하나는 쌀알처럼 동글동글한 개였다. 들개나 문 앞에 버려진 개들을 하나씩 맡아 길렀기에, 이 침엽림의 사냥개들은 에쉴의 가족들처럼 모두 다른 생김새였다. 하지만 순진하고 다정한 눈망울은 예전부터 모두 같았다. 에쉴은 반가운 마음을 못 이겨 그들의 목을 꼬옥 안고는 이마를 맞대어 따뜻한 털가죽에 비볐다. 이후로는 순조로웠다. 에쉴은 금세 그리운 오두막에 도달했다. 큼직큼직한 통나무로 지은 투박한 집, 모든 쓰린 기억과 추억을 품고 있는 땅. 마당의 개가 반갑게 짖고, 경첩이 끼리릭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짙푸른 장발을 느슨하게 묶은 이가 나타났다. 로베르타 길리스. 연회색 눈동자에 다정한 빛이 반짝 돌았다. 로베르타는 실내화를 신은 채로 달려나와서는 에쉴을 포옹했다. 사각이는 흰 셔츠에서 연기와 나무의 향이 배어났다. 숲에 사는 이들의 체향이다. 에쉴은 본인이 향수하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재차 상기한다. 침엽과 이끼, 오랜 시간 보지 못한 가족들. 문득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잠겼다. 에쉴이 로베르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아가."
로베르타가 에쉴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떼었다. 사냥개 수어 마리가 마당 구석구석과 집 안에서 달려 나와 꼬리를 흔들며 핵핵댔다. 침엽림의 영리한 사냥개들은 오랜 세월 떨어져 있던 가족도 금세 알아보았다. 로베르타가 편지에 적었듯, 그와 가족들이 아침 식사 중이든, 잠들기 직전이든, 수십 수백 번이나 에쉴이 오는 것을 상기하며 그치지 않고 기뻐한 게 원인일지도 몰랐다. 사냥개들은 사람의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으니까. 공통된 언어를 구사하지 않더라도, 긴 세월 같은 적에 맞서 싸우며, 사냥개들과 사냥꾼들의 영혼은 일정 부분, 어쩌면 전부가 끈끈하게 이어진 것 같기도 하였다. 모든 적이 사라진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어서 들어오렴. 많이 피곤하지? 옷이라도 갈아입고 편히 있으렴, 짐은 천천히 풀어도 된단다."
예절과 규칙에 엄격한 로베르타에게서 이런 관용을 끌어낸 건 긴 시간 여행길에 머물렀던 가족에 대한 걱정이자, 한동안 보지 못한 얼굴에 대한 관용일 터였다. 에쉴은 어렸을 적 읽은 책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펼쳐 놓거나, 존댓말을 잊어 꾸지람을 듣던 것을 떠올리며 즐겁게 웃었다. 로베르타 역시 제 가족의 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마냥 예쁜 듯 미소 짓다, 두 뺨을 뽀득뽀득 쓰다듬어 주었다. 에쉴은 순순히 다정한 손길을 받다가 로베르타에게 이끌려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러고 보면, 비버는? 만났니?"
에쉴이 어색하게 웃었다.
"음, 네.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요."
"그래? 이상하구나..."
로베르타가 더 자세히 묻기 전 전 문이 열렸다.
"저 왔어요."
비버가 앞머리와 연갈색 피부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나타났다.
"세상에, 조이? 이게 무슨 일이니?"
호수에 탄창을 빠뜨려서요, 같은 답변이 우물우물 지나갔다. 에쉴은 천천히 검을 비롯한 짐을 거실 구석에 내려놓고, 들뜬 기분이 되어 부엌으로 갔다. 향신료와 채소, 구워진 고기의 기름진 향이 연기와 함께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부엌을 가득 채운 뒷모습. 노을을 닮은, 목을 살짝 덮은 황금빛 머리칼에는 아직도 흰머리 한 가닥 없다. 그 모습에서 에쉴은, 키메라를 사냥할 적이면 항상 선두에 서던 제 가장 든든한 가족, 미하엘 보어를 떠올린다. 지금은 요리가 제대로 익었는지 아닌지를 고민하느라 바쁜 것 같지만. 에쉴에게는 자신을 위해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는 보어를 보는 것도, 이 시간 속에 배어난 평화를 느끼는 것도 더없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이리 가까이 오지 않고, 에쉴."
나직한 목소리가 에쉴을 불렀다. 에쉴이 멋쩍게 볼을 긁었다.
"들켰네요... 조용히 들어왔는데."
"아직 멀었지."
에쉴이 그 뒤로 다가가 보어의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보어는 마치 에쉴이 처음부터 오두막에 있었던 것처럼, 일상적으로 에쉴을 제 옆으로 가까이 오게 하였다. 통으로 구운 새 고기의 속에 감자 및 채소를 채워 넣은 요리, 오븐에서 꺼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 김이 났다.
"먹어 볼 테냐? 간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괜찮아요, 다들 먹을 때 같이 먹어요."
"상관 없다."
오늘은 네가 온 걸 축하하는 날이니까, 라고 말하듯, 보어가 깨끗한 손등으로 에쉴의 머리를 쓰다듬게 주었다. 보어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으나 에쉴은 그의 속내를 쉬이 알아차리곤 했다. 그러고는 기어코 새 요리의 다릿살을 발려 에쉴의 입에 넣어주었다. 부드럽고 고소한 기름기가 입안에 퍼져 나갔다. 에쉴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했다.
"바로 식탁에 올려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러냐."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미하엘은 접시를 들고 이동할 준비를 하지도, 제게 안겨 온 에쉴을 떼어놓지도 않았다. 에쉴 역시 품에 차는 온기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기차표를 처음 손에 받았을 때부터, 줄곧 기쁠 것만 예상하였는데, 에쉴은 어째서인지 울적한 생각이 들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향수에 허전하던 마음에 오랫동안 멀었던 애정이 차오르며, 자신도 모르던 약해진 한구석이 흔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보어를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에쉴은 늦게나마 말간 얼굴로 보어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어리광이 심하죠."
"..."
보어는 빈약한 말재주로 제 품의 에쉴을 안심시키는 대신, 허리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키메라가 숲을 배회하던 시절, 잠들지 못하던 아이를 재울 때 그랬듯이. 에쉴 역시 그 기억을 떠올린 듯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이제 키메라가 나오던 시절은 옛일이 되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되었으니까. 에쉴이 키메라의 주인을 죽였기 때문에...
"에쉴."
"네."
"너는 우리 중 누구도 해내지 못한 걸 이뤄냈어."
에쉴이 고개를 끄덕했다.
"밖에서도 많은 것을 이뤄낸 걸 안다. 널 항상 믿고 있고, 하지만."
보어는 잠시 말을 고르기 위해 숨을 들이쉬었다.
"그게 네가 힘들지 못할 이유는 못 된다, 에쉴."
"..."
"힘들었던 일이 있거든 말해라. 언제든 들어주마."
잠시 답이 없었다. 이미 잘 버티고 있던 꿋꿋한 마음에 무용한 말을 건넨 게 아닐까 후회하며, 에쉴을 믿지 못하여 하는 얘기가 아니라며 보어가 해명하려던 참에. 에쉴이 보어에게 와락 기대었다. 이미 다 큰 아이가 어릴 적처럼 달려든 탓에, 보어는 조리대에 급히 손을 짚었다. 가지런히 쌓은 접시 몇 개가 딸그락 요동했다.
"에, 에쉴."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에요, 정말."
에쉴이 환히 웃었다.
"그러니까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럼, 보어 씨나 우리나, 썩어 넘치는 게 시간인데."
두 사람이 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조이 비버가 문틀에 기대어 둘을 보고 있었다. 어색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비버가 엄지로 거실을 가리켰다.
"슬슬 가죠? 먼 길 온 애 굶기지 말고요. 뭐 겸사겸사 저랑 로베르타 님도 기억해 주시고."
그래 놓고는 에쉴이 옮기려던 음식을 한 손으로 휙 낚아채 갔다.
"얘는, 저리 안 가? 쉬러 왔으면 쉬기나 할 것이지. 가서 앉아 있어!"
비버가 에쉴의 등을 팍팍 떠밀며, 얼떨결에 걸음을 옮기는 에쉴의 귓가에 다시 한번 "미안"하고 속삭였다. 나한테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에쉴은 자신도 납득할 수 없는 담담한 기분이 된다.
한편 로베르타는 식기를 정리하다 에쉴에게 반갑게 말을 붙였다.
"에쉴, 저기 둔 검은 전리품이니? 미리 말해 주었다면 장식대를 정리해 두었을 텐데."
"아, 그건..."
"검날이 상한 건 괜찮단다. 비버가 못 고친대도, 검집을 그대로 둔다면 적당할 것 같구나."
에쉴은 잠시 망설였다. 오두막 구석에 고이 내려뒀던 검 자루가 투명하리만치 맑은 빛을 반사했다. 그 빛을 본 에쉴은 솔직할 용기를 잃었다. 이상하게도.
"괜찮아요, 제 검이 아니라서... 곧 옮길 거예요."
중요한 내용을 편집했다.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에쉴은 부러 목소리를 밝게 했다.
"그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재밌는 일을 얘기해 드릴까요? 편지로 못 적은 말이 정말 많아요."
"그래. 먹으며 들으마."
보어가 잘 익은 고기 요리를 묵직하게 식탁에 내려놓으며, 자신 역시 착석했다. 넷은 간단히 기도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대화는 별무리가 뜰 때까지 이어졌다. 그립던 시간이었다.
***
에쉴은 동이 트자마자 밖으로 나섰다. 산책을 나간다는 간단한 메모를 남긴 뒤였다. 오두막 근처에서 멀어지자마자 주위는 두꺼운 나무줄기에 가려 어둑했다. 아침 공기가 서늘했다. 에쉴은 붉고 가는 천을 여러 조각 챙겨, 낮은 가지에 묶어 표식을 남기며 걸었다. 사냥개와 동행할 때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지만, 에쉴은 혼자를 선택했다. 밤사이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등에는 검이 있었고, 허리띠에 갈무리한 삽이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렸다.
가벼운 바람을 따라 걷자 호젓한 공터가 나왔다. 소나무 숲이 에워싼 작은 땅. 엷은 햇살 조각이 침엽에 부서져 조각조각 떨어져 내렸다. 에쉴은 찾던 곳을 발견했다. 삽을 나무뿌리 곁에 꽂아 놓고 검을 두 손에 들었다. 둥치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검날을 매만졌다. 차가웠다. 처음보다는 낫지만, 에쉴은 여전히 그 매끈하지 못한 면에서 날카로운 서리를 연상했다. 주인이 있을 적에도 그랬던가? 확신할 수 없었다. 타인에게 제 무기를 내맡기는 이가 아니었다. 서월은. 서월, 입속에서 이름을 굴려 보았다. 분명 아는 이름인데, 어째서 그 주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던지...
서월의 검을 숲까지 가져온 건 충동이었다. 에쉴은 다른 말로 그 결정을 설명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처음 의도는, 검을 서월과 연이 있는 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가족이든, 절친한 이든, 서월의 부고에 오랫동안 슬퍼할 사람에게. 죽은 이를 기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갖고 싶어 할 이들에게 고이 싸서 돌려줄 마음이었다. 서월은 그 전투 때 흔적도 없이 소멸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아꼈던 이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가여운 처지를 달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서월은 인망이 없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사 친절하고 장난이 많았기에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동료들도, 시민들도 그를 아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였다. 다만 서월이 히어로가 되기 전의 옛 인연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다. 소식이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에 머무르는지, 불화가 있었는지,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었다.
무기를 넘긴 뒤 열흘 남짓의 시간이 지나고, 본부에서 검이 회수되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뿐이었다. 기증자에게 의무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사실이랬던가. 듣기 좋은 소식은 아니었지만 다행이었다. 상태가 좋은 것은 기부하거나 본부에서 재량껏 재사용하는데, 다 부서진 검은 이어 붙여도 조각에 가까운지라, 무기로도 부장품으로도 쓰이지 못할 유품은 폐기 처리가 된다 하였으니. 검을 다시 수령하러 갈 수 있는지 묻자 허가가 떨어졌다. 명예로운 죽음이었고, 서월의 이름은 언젠가 세워질 추모비에 새겨질 예정이었다. 그 누구도 서월의 유품을 폐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범람하는 죽음 사이에서 한 목숨만을 특별히 아낄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처사일 테다. 그렇게 되뇌며 관리 부서를 찾았으나 웃으며 담당자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검을 건네받고 인사 없이 자리를 떠났다. 유품을 찾으러 오는 부서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울고 찌푸리고 화를 낼까? 얼마나 많은 물건이 그곳에 쌓이지, 이 혼란한 세상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태연하게 담당자를 보는 편이 나았다. 상대의 죽음에 절망할 수도 날뛸 수도 없을 사이라면. 무엇보다 에쉴은 적에게서 서월의 유언을 전해 들었다. '검은 버리던지, 누군가에게 전달하던지,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었댔나.
그러나 끝내 에쉴은 태연하지 못했다. 그 의례적인 추모와 담담한 낯빛에 표정을 굳히지 않을 방법을 몰랐다. 시간을 되돌린대도 그럴 것 같았다. 아집이었나? 총구를 겨눠 복수하기를 단념하고 되찾은 유품에, 더한 가치가 매겨지기를 바랐나? 더 깊이 파고들 필요 없이 분명한 오답이었다. 사실 정답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마음이 흔들리는 건 사냥꾼의 마음을 잊은 탓으로.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두 눈을 적에게 향하면, 이기지 못할 상대는 없다'는 말. 지금은 문장만이 희미하게 머릿속을 떠다닐 뿐이었다. 항상 옳지는 못했대도, 항상 확신을 갖고 있다 믿었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검의 용도를 질문받았을 때, 무심코 답해 버린 지난 낮과,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지난 저녁이 떠올랐다. 스스로 원하는 것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털어놓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누구도 모르기를 바랐다. 직면해야 할 마음이 한켠에서 박동했는데, 그러는 대신에 영영 묻어두고 싶었다...
에쉴이 줄곧 매만지던 검을 내려두었다. 삽자루를 들어 거친 풀뿌리를 끊어내며 마른 땅을 파헤쳤다. 우묵한 구덩이를 파낸 후에는 잠시 그 자리에 서 바라보았다. 무덤 치고는 얕다. 그러나 검을 꽂아 두기에는 적당하다.
바삭, 등 뒤에서 마른 가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고의로 낸 인기척. 에쉴이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미하엘 보어가 있었다.
"오셨어요?"
에쉴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보어는 어쩐지 착잡해 보이는 얼굴로 인사를 받는다.
"방해하려던 건 아니다."
"괜찮아요, 이제 다 했어요."
에쉴이 쌓아 놓은 흙더미를 신코로 톡톡 찼다.
"마무리만 하면 돼요. 금방 돌아갈게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보어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천천히 에쉴의 곁에 다가와 섰다. 비버 언니가 다 말해준 걸까, 에쉴은 궁금해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로베르타가 전리품을 가져온 거냐고 물었을 때, 에쉴은 부엌 쪽에서 살벌한 시선을 느꼈다. 상황을 아는 조이 비버가 눈총을 보낸 게 뻔했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더니, 친근하게 말을 붙이려던 둘은 실수를 하고, 아무것도 묻지 않던 쪽만 이를 면한 게 제법 우스웠다. 에쉴은 바랐다면 얼마든지 편지에 검에 대해 언질 줄 수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덧붙였다면, 아무도 곤혹스럽지 않았을 터. 침묵은 금이라지만 이럴 때도 적용되는 말은 아닐 테다. 그런데도 에쉴은 후회하지 않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가겠다는 건 당시 할 수 있었을 말 중 가장 허술한 거짓말이었을 테니까.
에쉴은 검을 구덩이에 고정해 놓고 천천히 흙을 덮었다. 보어는 몇 발자국 뒤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완성된 모습은 오래된 검을 꽂아놓은 둔덕을 닮아 있었다. 맨흙이 드러나 곱지 못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금이 간 검신만은 여린 햇빛에 고고하게 반짝였다.
에쉴은 처음 검을 가져올 때부터 자신이 이런 순간을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이를 떠올릴 수 있을 자리를 만드는 것. 묻을 관이 없다 하더라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사람이니, 그가 소지하던 가장 망가진 것이나마 두고 가꾸어 기억하는 것.
"로베르타에게 물으면, 꽃을 심는 법을 알려줄 게다."
"...흰 꽃을 심는 게 좋겠죠."
에쉴이 하늘을 보았다. 소나무 가지에 가려져 푸른빛이 얼마 보이지 않는다.
"좋아하실까요?"
주어가 없어도 가리키는 대상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에쉴은 그날, 검을 다시 돌려받을 때, 자신이 왜 웃을 수 없었는지 깨닫는다. 에쉴은 서월에게 돌아갈 곳이 있기를 바랐다.
"장이 열리면 꽃씨도 팔겠죠?"
"그럴 게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때 다 같이 가 보자."
에쉴은 여전히, 아마도 영원히, 서월에 대해 아주 적은 사실만을 알았다. 서월 역시도 그러했을 테다. 하지만, 뭐 어때? 에쉴은 앞으로도 빈 무덤을 가꿀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잊지 않겠지. 또렷하게.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나? 이미 알던 아주 작은 사실만이라도 흩어지게 두지 않는 것. 그것이면.
에쉴은 검을 보며 씨익 웃었다. 마지막으로 함께 싸우러 갈 적, 서월은 이런 웃음을 보았을까?
마음을 정리하기는 아직도 멀었다. 그러나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에쉴은 꽃을 심으러 찾아올 마음이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단단하다. 다시 올 순간을 알고 있는 탓이다.
***
에쉴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숲에 머무르게 되었다. 사정을 알던 상사가 근처 지역으로 파견처리를 해준 덕이었다. 일시적으로 주어졌던 기간 동안 착실하게 활동했고, 장기간으로 이어졌다. 여전히 바빴으나 가족들의 얼굴을 볼 여유는 있었다.
에쉴은 항상 시간을 내 무덤가를 찾아왔다. 끼니를 간단히 때우거나 잠을 조금 줄여서라도. 비료를 붓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거나 주위를 슬렁대는 들짐승들을 겁줬다. 그리고 검에게 항상 말을 걸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었다. 새로운 동료나 까다로웠던 임무, 날씨나 그날 식사 같은 것들. 하지 못했던 말들을 인제야 몰아서 하는 것처럼 초조해 보일 때도 있었고, 이날만을 위해 아껴 두었던 듯 태연할 때도 있었다.
수첩과 펜을 드는 날도 있었다. 노력에 비해서는 곱지 못한 필체였지만, 에쉴은 매 획을 반듯하게 그리려고 했다. 어떤 것들은 휘갈긴 글씨로는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마음을 쏟지 않고는 잃어버릴 기억을 그러쥐고, 하나하나 헤아리고 관찰하는 일. 번거롭게까지 보일 일에 에쉴은 오랫동안 힘을 쏟았다. 희고 맑은 꽃이 피고 지는 동안.
***
서월曙䬂. 사전을 살펴보았다. 새벽의 산들바람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어울리는 이름이다. 날개가 검은색이었다. 까마귀의 깃털과는 다른 빛깔. 설명할 방법을 알 수 없었는데, 새벽하늘을 닮은 빛깔이었다. 곱슬거리던 머리카락도. 부드러운 색.
마주칠 때마다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었다. 장난을 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번번이 머리를 다시 정돈해야 했지만 싫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항상 청명하게 웃었다. 내가 똑같이 행동하면 받아줄지 궁금했다. 한 번도 시도한 적은 없었다.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질문을 던지고, 모든 사람들의 답변을 재미있어 하며 들었다. 막상 관심이 쏠리면 회피하고 싶어 했으며,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졸라 본 적이 있지만 이렇다 할 만한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내킬 때에 다시 들려주겠지, 하고 물러난 기억이 있다. 그럴 일은 이제 없게 되었다. 아쉽긴 하지만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저 충분히 믿음을 주지 못한 것일 테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를 동경했다.
그와 같아지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서로가 지향하는 바가 꼭 맞춘 것처럼 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나는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는 동료이고 싶었던 것 같다. 받은 도움이 많았고, 최선을 다해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매번 한 번도 예상한 적 없었던 것처럼 난처해하였는데, 그 모습이 재밌었던 것도 같고... 하지만 그보다도, 나 역시 그에게 무언가 유의미한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던 것 같다. 부채감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그와 같은 선에 서기를 원했다. 어떠한 자격을 부여받기를 바랐을지도, 어쩌면 많은 것은 바란 적도 없었을지도. 언제나 위태로운 곳이었고, 누군가는 언제나 싸워야만 했다. 면제될 수 없는 의무, 다만 나는 가끔 그가 홀로 검을 들고 서는 날을 상상하다 잠들었다. 인망이 좋은 이였으니 동료 중 누구라도 그가 바란다면 힘을 보태 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밤 동안 나는, 그가 도움을 구하는 모습은, 도통 떠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돕기를 청한 적 없는 작고 큰 일들에 할 수 있는 한은 개입하려고 들었다.
욕심이었다. 감당하지도 못 할 일에 덤벼든 걸지도 모르지.
뜻모를 말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말은 듣는 순간에는 명료하면서, 떠올리고 되짚을 수록 아리송해지고 마는 것이다. 위험해지거든 도망가라던 당부와 자신 역시 그러겠다던 약속. 명예로운 전사에 가치를 둬야 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너머로 보였던 미소를 떠올리면, 역시나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고 만다. 흰 장미가 개화했다. 아직도 내게는 나 자신이 히어로라고 단언하기가 어렵다. 사냥꾼으로서 살아온 시기가 히어로였을 적보다 짧아지기 전까지는 그저 먼 이야기일 것 같다.
그가 어쩌다가 히어로가 된 것인지는 상상밖에 할 수 없다. 번번이 또렷하지 못한 이유만 지어내다가, 그만둔다. 사실 그가 가졌던 이유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앞에 죽음을 들이밀고, 으스러진 검날을 하나씩 쥐여주며, 감내할 자신이 있는지 끝까지 따져 묻고 싶었다.
그렇지 않다고 하거든, 다시 그를 따라 나가서, 어떻게든 마지막을 피하게 해주고 싶었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새까맣게 줄을 쳐 지운 흔적) 그래도 상관 없이 곁에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대도 그래야 할 것 같다.
(변하지 않은 필체, 위의 기록 직후에 적힌 듯하다.)검이 따뜻하다. 어째서? 오늘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날인데도. 서리가 내려 있던 검날. 묻은 이후로 한 번도 건드린 적이 없다. 수리되었다 해도 상태가 좋지 않아, 자칫했다 깨뜨리고 말까 봐. 만약 그러게 된다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글자를 적었다가 긋고, 다시 같은 말을 적어 놓았다) 실수였다. 하지만 그러길 잘했어. 정말.
검을 회수하던 날이 떠오른다. 나는 적절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분노해줄 사람. 매일 같이 이곳을 찾아오면서,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백합 구근을 심었다. 나는 앞으로도 여기를 가꿀 것이다. 시간이 흐른대도 소홀함 없이, 계속.
다정했던 눈빛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묻는다면, 허락해주지 않을까? 앞으로도 계속 그리워해도, 힐난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아 주겠다고, 꼭 특별한 사람이었어야만 슬퍼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좋아하는 꽃만은 물어봤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지금, 에쉴은 나이 든 떡갈나무 아래에 서 꽃다발을 어루만졌다. 싱그러운 꽃망울이 향 없이도 곱다. 그 무결하고 순진한 작은 것들을 보고 있자니 긴장이 잦아드는 것 같았다. 에쉴과 서월에게 찾아온 기적. 첫 안개꽃이 피어난 날, 화원의 꽃이 천천히 바스러졌고, 하얀 검이 고고하게 빛을 내었다. 그리고 그리던 이가 돌아왔다. 에쉴은 평생에 걸쳐, 그토록 오래 울어본 기억이 없었다...
주머니 속 상자가 달그락 움직였다. 그것을 꺼내 손에 올려 덮개를 들췄다. 크기 다른 은반지 한 쌍이 반짝, 햇빛을 머금었다. 에쉴이 반지 상자를 꽃다발 속에 파묻었다.
에쉴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고는,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는다. 한편 길 끝에서는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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