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베로즈 #4
아침은 언제나처럼 밝아왔다. 가벼운 새벽 공기에 눈을 뜬 빈센트는 제 옆자리에 누워 자는 여자를 내려다본다. 검은 머리칼이 베개위에서 굽이치고 유려한 곡선의 어깨가 한쪽으로 돌아누워 볼록 솟아있다. 그리고 그곳에 남은 잇자국이 간밤의 정사를 추억하게 만들었다. 드러난 맨어깨가 추워보여 이불을 덮어준다. 제 옆사람을 바라보다 오늘의 일과를 떠올린다. 신혼여행이 잡혀있었다. 말이 신혼여행이지, 영국에 머물고 있는 그녀의 부모를 만나러 가는 자리다. 사실 엘리스하고 있는 것은 불편하지 않았다. 서로 원하는 바를 알고 있기에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부모와의 자리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이 엘리스에게 호감이 있는 줄알고있다. 심지어 그들은 엘리스의 사진을 전달해줬다고한다. 아무래도 에드거가 가운데서 빼돌린게 분명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종종 그런 장난질을 치고는한다. 얼굴을 보고 마음에 안 들까봐 그랬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엘리스는 빈센트의 마음에 차는 여자였다. 성격도, 외모도, 아직 잘 모르지만 그녀라는 사람이 꽤 마음에 들었다.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 연모의 감정이 아닌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돌돌 감아보며 장난친다. 제 옆의 여인은 깊은 잠에 빠져있다. 보통의 신혼부부라면 입맞춤으로 제 반려를 깨우겠지만 이 두 사람은 그런 관계는 아니다.
빈센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가 씻는다. 물소리가 컸을텐데도 나와보니 그녀는 깊이 잠들어있다.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며 생각했다. 이렇게 깊게 자는 사람을 깨워도 되는 것인가, 하는. 하지만 뱃길이 멀고 지금 식사를 놓치면 점심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뜰 것이다. 항구까지도 오래 걸려 빈속에 여행을 시작하는 것은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빈센트는 조심스럽게 엘리스를 흔들어 깨운다. 눈을 여러번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 확인하는 것 같다. 그녀도 결혼을 했다는 것이 낯선가보다. 자신이 나체라는 건 신경 쓰이지 않는지, 상황파악이 끝난 엘리스는 양 팔을 들어 올리며 기지개를 편다. 흘러내린 이불 때문에 가슴이 훤히 드러나 빈센트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렸다. 엘리스는 가릴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 돌린 제 남편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는 것을보아 샤워를 할 모양이었다. 빈센트는 욕실 문 앞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먼저 식사하러 갈테니 천천히 내려오라고. 물줄기 소리 사이로 엘리스의 대답이 들린다.
빈센트는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사용인들이 그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면 빈센트는 일상이라는 듯 지나친다. 식당에 가까워질수록 아침 식사의 풍성한 냄새가 풍겨왔다. 의자에 앉아 깔끔하게 펴져있는 신문을 집어든다. 열판에 올려진 커피와 홍차 중 커피를 선택한다. 뺑 오 쇼콜라, 크루와상, 바게트와 다양한 종류의 잼이 테이블 위를 장식한다. 미국인인 제 아내를 위해 주방에서는 베이컨을 굽고 있으며 팬케이크와 와플 역시 준비되어 있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인님.”
“그래.”
“마담께서는 아직 주무시는지요.”
“곧 내려올걸세. 식사를 준비해주게.”
“알겠습니다.”
그의 집사는 그를 위해 자리를 피한다. 열판 아래에서 불꽃이 타는 소리가 약하게 들려온다. 신문의 1면에는 프랑스의 사건사고가 크게 실려있다. 유명인의 스캔들, 살인, 정치문제, 주가폭락, 기타 등등. 가십거리를 지나 사사로운 이야기들까지 모두 읽고 난 뒤에 신문을 내려둔다. 어느새 자신의 맞은편에는 엘리스가 앉아있다. 그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요리사가 만들어준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를 토스트에 올려 먹고 있다.
“일찍 나오셨군요.”
“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맛있네요.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다시 침묵이다. 두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했고 빈센트의 접시가 먼저 비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스 역시 양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렸다.
“그럼 오늘의 일정은 어떻게 되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기면 됩니다. 차를 타고 항구로 나가서 4시 배를 탈 예정이죠. 옹플뢰르 항구로 갈 생각입니다. 포츠머스 항구에 내려서 런던까지 차를 또 타야하니 아마 밤에나 도착할 것 같군요. 아, 옹플뢰르에서 구경을 좀 할 생각입니다. 인상주의 미술을 좋아하십니까?”
“미술에 대한 견문이 좁은 편이라.”
“그렇게 말씀하시기에는 양친께서는 미술품에 관심이 많지 않으십니까. 예술가를 후원하고 계시다고도 들었습니다.”
“그건 부모님이죠, 제가 아니에요.”
“그렇습니까.”
“부모님께서 당신을 좋아하세요. 파리의 예술가들의 친구라고. 파리는 예술가의 도시잖아요? 파리로 가면 작품을 보내달라고 하시더군요. 아마 영국으로 가면 이야기 나눌것같네요.”
“몰랐던 사실이네요.”
빈센트는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녀에게 궁금한 점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엘리스는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취미, 취향, 생각, 인맥, 에드거와의 관계를 포함한 그 모든 것들을 감춘다. 아니, 감춘다기보다 애초에 비워져 있는 것처럼 들춰보아도 아무것도 없는 백지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인물임을 안다. 그 백지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이다. 하얀 물감으로. 그 내용이 어떤 이야기일지 빈센트는 가늠조차하지 못한다.
짐을 가득 챙긴 여행가방을 차에 싣는다. 두 사람이 올라탄 뒤 차는 출발한다. 이대로 한참을 달려야한다는 빈센트의 말에 엘리스는 조신한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한다. 그런 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빈센트는 그녀가 살던 미국 뉴욕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세상을 눈에 담고 싶은 모양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뉴욕. 호황기를 맞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물이 솟아나는 도시. 술과 마약이 암암리에 점령한, 흘러넘치는 돈과 재즈가 거리를 가득 채운 도시. 앞으로 지낼 곳이 사건사고라면 둘째가기 서러운 도시인 파리라지만, 뉴욕의 느낌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좀 더 예술적으로 미쳐있는 도시가 파리라면 뉴욕은 돈에 미쳐있달까. 빈센트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엘리스는 눈치챘지만 그저 달라지지 않는 자세를 유지한 채 계속 창 밖이나 바라보았다. 언제쯤 도착할 지 알 수 없이 달리는 이 자동차가 지루하다. 엘리스는 도시를 그리워하고 있다. 런던, 파리, 뉴욕 그런 공간. 어릴 적 외로운 섬이 되어 본 적 있는 그녀는 군중 속의 고독, 다수의 무명인이 되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빈센트의 사람인 이곳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서로가 하룻밤의 인연인 도시로 들어가고 싶다. 그렇기에 풍경을 계속 바라보았다. 허허벌판인 풍경에 점점 건물들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안정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중간중간 휴식을 위해 멈춰 섰을때를 제외하고는 엘리스는 계속 같은 자세로 바깥만 바라보았다. 그 집요함에 지친 빈센트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한 그 순간에도.
한참을 달리고 마침내 옹플뢰르에 도착한다.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곳에 두 사람이 내렸다. 영국으로 보낼 짐을 먼저 부친 뒤 두 사람은 승선까지의 여유를 즐기기로 한다.
“허기지시진 않으십니까.”
“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걷고 싶네요.”
“좋습니다.”
두 사람은 바다를 등지고 걷는다. 맞은편에 즐비한 건물들은 각자 다른 색으로 칠해져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만든다. 둘은 항구를 지나 넓은 도로로 나갔다. 테라스가 있는 식당과 카페들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다. 여행자들과 승무원들이 뒤섞여 식당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친구나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은 행복한 얼굴로, 일하는 사람들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거리를 지나친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아무 표정도 없이 거리를 걷는다. 손도 잡지 않고 그저 옆에 나란히 서서 걸어 누가 보면 부부는 커녕 인연이 없는 사람으로 보일 지경이다. 빈센트만이 종종 제 아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곁눈질을 할 뿐, 엘리스는 앞만 보고 그저 걷는다.
“이쪽으로 가요.”
엘리스가 먼저 빈센트를 불렀다. 길이 좁은 골목길이다. 빈센트는 군말없이 앞장서서 가는 엘리스의 뒤를 따랐다. 마치 이곳에 온 적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길을 찾아가는 엘리스. 이것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린 것 같은 길에 흑백사진같은 두 사람이 지나간다. 빈센트는 앞서가는 엘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이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제 꼴 역시 마찬가지일 것임을 알고 있다. 햇볕을 가득 머금은 물감이 퍼진 가운데 흑백의 이질적인 두 사람. 하지만 그 둘은 서로 같은 모양새다. 일정한 속도로 걷던 엘리스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어딘가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재즈였다.
“재즈군요.”
“조금 더 가봐요.”
점점 가까워지는 음악소리. 소리의 근원지는 레코드판이었다. 축음기에서는 미국식 영어를 쓰는 가수의 목소리가 부서지듯 재생되고 있다.
“음악을 좋아하십니까?”
“네.”
거의 처음으로 들은 취향에대한 답이었다. 엘리스는 그 말 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양한 종류의 레코드를 팔고있는 가게다. 그녀는 주인에게 인사한 후 몇마디를 나누더니 어느 한 쪽 코너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진열된 앨범을 하나하나 넘긴다. 무언가를 찾는 것 같은 그 행동을 빈센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것을 보는 사람치고는 변화없는 표정이 인상깊었다. 저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짓지 않는 것일까? 그 순간 엘리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것을 빈센트는 알아차린다.
“이걸로 살게요.”
붉은색 커버의 레코드 앨범이 엘리스의 손에 들려있다. 빈센트는 주인 앞으로 가서 값을 묻는다. 값을 지불한 뒤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이제야 당신에대해 하나 알게되었군요.”
“그게 중요한가요?”
엘리스의 대답에 잠시 고민한다. 자신이 왜 이 말을 꺼낸 것인지 사실 알지 못한다. 빈센트는 스스로 답을 내리고 다시 말한다.
“아뇨.”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