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때는 너를 꼭 안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

라하빛전

-주의: 메인 퀘스트 5.4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 포함

그라하 티아는 무언가를 읽는 기쁨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탑의 단말이 된 후, 수정에 기록된 탑의 기능을 숙지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심지어는 멸망해가는 세계에서 눈을 떠, 그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허겁지겁 파악했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알라그 마안의 비밀을 찾아 샬레이안의 금서고를 뒤지던 어린 시절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책이나 입으로 전해지는 영웅담에 귀를 쫑긋 세우던, 아주 어린 시절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한편으로 그라하 티아는 기록이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는 늘 이런 것을 궁금해했다. 위업을 달성한 뒤의 첫 식사에서 영웅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제대로 식사를 하긴 했을까? 그를 위해 차려진 진수성찬을 마다하고 침대로 가진 않았을까? 혹은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든 채로 기절했을지도?

재치 있는 어른이라면 아이가 기록의 불완전성을 알아차리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그라하 생각에는 영웅이 어떻게 행동했을지 질문하며 기록의 빈 부분을 메워줬으리라. 안타깝게도 그의 부친에게는 그런 종류의 재치가 없었다. ‘붉은 눈의 진실은 알라그 제국의 역사에 있다!’ 때문에 그라하는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기를 은밀히 꿈꾸었다. 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영웅담의 다른 판본을 찾는 것뿐이었지만.

오랜 잠에서 깨어난 직후, 그라하 티아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뿐이었다. 그는 멸망한 세계의 역사를, 잠들기 전에 알았던 한 모험가의 기록을 집착적으로 수집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라하의 행동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세계의 경계를 뛰어넘고, 멸망을 막을 힘이 있는 영웅을 구해내자. 세 가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광기에 비하면 기록에 대한 집착은 건전한 편이었다.

그라하는 영웅의 본명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영웅이 철저하게 비밀을 지켰거나, 영웅의 의사를 존중한 주변인들이 이름을 남기지 않은 덕이었으리라. 혹은, 영웅의 진짜 이름을 알았던 누군가가 멸망에 휘말렸던 탓일지도 몰랐다.

그라하 티아는 그렇게 수정공이 되었다. 빈 퍼즐 판을 메울 조각을 끝까지 찾는 사람에서, 영영 찾을 수 없게 된 조각도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청년이 노인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은 점이 있다면, 조각을 찾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 그는 영웅의 이름을 아는 누군가가 기록을 남기는 세계를 원했다. 그 기록이 소실되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는 세계를. 행복한 결말을. 그리된다면 퍼즐의 빈자리를 메우는 이가 자신이 아니어도 족했다.

때문에 수정공은 탑과 함께 시공을 뛰어넘었다. 그라하 티아가 탑과 함께 봉인되었듯이.

결국 조각을 찾아 빈자리를 메우게 된 사람이 누구일지는 둘 다 알지 못했지만.


영웅이 가명을 쓴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가 쓰는 이름은 노골적으로 별명처럼 들린다. 누구든 한 번은 이렇게 묻는다. 진짜 그런 이름인가요? 영웅은 그 답으로 ‘무슨 문제라도?’ 라고 말하듯 어깨를 으쓱인다. 아무도 두 번 묻지 않는다. 영웅은 그 우스꽝스러운 별명으로 야만신을 토벌하고, 용시 전쟁을 종결지었으며, 알라미고 해방을 이끌었으니까.

새벽의 혈맹 내에서도 영웅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빛바랜 바위나 쿨테네처럼 오래된 혈맹원은 물론이고, 모래의 집 시절부터 동고동락한 위리앙제, 산크레드, 야슈톨라조차 그의 이름을 모른다. 이유는 제각각이다. 아예 관심이 없던 사람, 슬쩍 캐물었다가 역린이라 지레짐작하고 발을 뺀 사람, 그를 소개한 민필리아를 믿는 사람…. 야슈톨라는 이런 말도 했다. ‘본명도 모르고 보증인도 없는 수정공과도 같이 일했는걸요?’

새벽의 혈맹 행정 총책임자인 타타루는 이렇게 말한다. ‘모험가분들은 워낙에들 특이하셔서용! 이름을 숨기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녜용.’ 그러곤 덧붙인다. ‘왜 별명을 쓰는지 궁금하긴 하네용. 모험가님 본명이 너무 평범해서 그런 걸까용?’ 그라하는 얼결에 이유를 알아내 주기로 약속한다. 영웅에게 허락을 받는 것이 먼저지만.

르베유르 쌍둥이의 반응은 서로 대조적이다. 알피노는 살짝 풀이 죽고, 알리제는 묘하게 우쭐거린다. ‘라하, 뭘 그런 걸 고민해? 그냥 물어봐! 알피노처럼 꽁하니 있지 말고.’ 당황한 오빠가 반박하면, 동생은 남들 들으란 듯 큰 소리로 받아친다. ‘그럼 그 사람한테 물어보러 갈까? 알피노가 당신 이름이 궁금한데 묻지도 못했던 적이 있나, 없나?’ 그라하는 알피노를 위해 물러나 주기로 한다.

영웅의 곁을 오래 지켰던 사람들을 떠봤으니,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는 명백하지만…. 그라하는 생각한다. ‘내가 그런 걸 물어봐도 될까?’ 습관적인 망설임은 기록을 읽는 자로 너무 오래 살았던 부작용이다. 그는 아직 적응 중이다. 자신 역시 기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노아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새벽의 혈맹의 일원으로서, 영웅의 소중한 동반자로서.

몸 둘 바 모르고 손을 꿈지럭거리는 그라하를 보며, 알리제가 ‘역시 그 사람이 아깝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에.

때마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영웅이 묻는다. ‘셋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그라하는 살짝 긴장하지만, 알리제는 여상하게 말을 돌린다. ‘별거 아니야!’

결코 그라하를 위해서는 아니다. 아까의 일을 일러바치면 당장은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웅은 그라하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온몸으로 기뻐하는 티를 낼 게 분명했다. 그런 포상을 받으려면 적어도 자기 입으로 부끄러운 말을 하는 손해 정도는 봐야 하지 않겠는가?

알리제의 작은 심술을 모르는 영웅은 말한다. ‘그럼 저녁은 뭐 먹을까?’ 늘 그랬듯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연구실에 틀어박힌 누군가를 끌어내고,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모를 산크레드가 오늘은 어느 집 식재료가 신선하다며 귀띔하고…. 식사가 끝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 르베유르 쌍둥이를 숙소까지 배웅하는 건 대체로 영웅과 그라하다.

그런 다음에야 연인은 슬그머니 손을 잡아 온다. 전에는 누가 보든 말든 덥석 껴안거나, 껴안거나, 껴안거나…. 어째 뒤에서 끌어안긴 기억만 잔뜩 있지만, 그때마다 고장 난 마법인형처럼 삐걱거렸더니 요즘은 자제하는 눈치다. 그라하는 참으로 오랜만에 안도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미 잡은 손에 힘을 주거나 살짝 끌어당기는 정도이나…. 그것만으로도 연인은 배시시 웃으며 손깍지를 끼고, 다정하게 어깨를 맞댄다.

사철 서늘한 모르도나의 밤바람이 부는 귀갓길에, 연인이 묻는다. 우리 집에 가볼래, 라하?


이런 이유로, 그라하 티아는 그리다니아 신시가지의 어느 가정집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수락이 떨어지자마자 영웅은 일정부터 말해주었다. 사흘 일정에, 하루는 누나 집에서 묵고, 하루는 검은장막 숲 깊은 곳의 어머니 집에서 묵고…. 첫날에는 도시 투어, 둘째 날에는 숲의 경치 좋은 곳을 돌아보자고. 교통수단이며 이동 시간이며 막힘없이 나오는 것이 꼭 사전에 준비한 것처럼 보였다. 물어보니 요전에 휴가를 다녀왔을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라나.

그 휴가는 그라하에게도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 연인이 되고서 처음으로 길게 떨어져 봤으니까. 링크펄 통신을 걸까 말까, 고민하다가 매번 먼저 걸어온 연락을 받았었다. 연인은 그때도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그리다니아로 갔다. 얼핏 듣기로는 쫓겨나듯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했다. 그라하는 연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연인 쪽에서 먼저 그의 하루를 궁금해했던 탓에 물어볼 때를 매번 놓쳤다.

문고리를 잡고 두어 번 노크하자 자그마한 미코테 여성이 달려 나온다. 달의 수호자 부족 특유의 동그란 동공에 반가움이 넘실거린다. 뒤로 눕힌 귀며, 바쁘게 살랑거리는 꼬리 끝이며…. 반기는 말에는 약간의 타박이 깃들어 있다. 영웅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일단 그 역시 귀와 꼬리와 표정으로 반가워하기 바쁘다. 가족 상봉 앞에서 그라하는 약간 민망한 기분이 든다.

여성은 영웅의 넷째 누나다. 집주인인 셋째 누나는 아직 퇴근 전이다. 넷째 누나는 그라하와 대충 통성명을 한 뒤, 음식 준비가 바쁘다며 주방으로 돌아간다. 누나가 사라지자마자 연인은 긴장을 풀라는 듯, 그라하의 손을 잡고 살살 문질러준다.

셋째 누나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상이 차려진다. 다른 사람의 집에 처음 가는 이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라하는 연인의 집에 맴도는 분위기가 낯설다. 부족 간 문화 차이도 조금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식탁을 차린 달의 수호자 남성이 넷째 누나의 애인이라는 말에, 그라하는 저도 모르게 놀란 티를 내고 만다. 당연히 영웅의 친혈육이거나, 셋째 누나의 남편인 줄 알았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미코테족 손님을 위해, 집주인이 가족 구성원을 정리해준다. 이 집에는 모험가의 셋째 누나와 넷째 누나가 살고, 아이들은 셋째 누나 핏줄이다. 같이 사는 남자의 정체는 아까 들었으니 생략.

누나들은 남동생의 애인을 짓궂게 놀린다. 이 정도에 꼬리가 부풀면 내일은 어쩔 셈이냐고. 자기들도 요즘 세상치고는 상당히 전통적으로 살고 있지만, 어머니 집은 이보다 더한 분위기라고. 자매들이 신나게 겁을 주는 동안 ‘매형’은 슬그머니 주방으로 사라진다. 영웅이 나서서 말린 뒤에야 누나들은 사과를 건넨다.

조카들이 침실로 들어간 뒤에는 좀 더 진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주로 가족의 눈으로 본 영웅의 행적과 집안 식구들에게 둘러댄 엄청난 거짓말에 관해서다. 그라하에게는 매우 알찬 시간이다. 영웅의 본명만큼이나 영웅의 가족에 관한 얘기는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었으니까.

영웅은 원래 장인 지망생이었다. 그리다니아에 남아 가죽 공예를 배울지, 울다하에서 재봉 일을 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달의 수호자 남성은 성인이 되면 독립한다는 전통도 있고, 해서 울다하로 마음이 기울던 차에 전쟁이 터졌다. 그는 조카들의 부양을 돕기 위해 독립을 미뤘다.

카르테노 평원 전투가 마무리된 다음에도 몇 년 동안은 애들 뒤치다꺼리에 바빴다. 누나들은 동생이 미적거리다 제 길을 못 찾을까 걱정이 되어 독립 자금과 함께 쫓아냈다. 어디 자리 잡기 전까지는 연락도 말라고 엄포를 놨다. 한데 재봉사 길드가 아니라 주술사 길드에 찾아갔을 줄이야!

동생은 모험가가 되겠다는 낌새를 내비친 적이 없었다. 모험가로서 대고 다닌 별명이 본명을 연상시킬 리 만무했다. 셋째 누나는 한탄했다. ‘야만신 이프리트 토벌 건으로 쌍사당에도 소문이 짜했죠. 그 이상한 별명 때문에 인상착의를 들어놓고도 몰랐다니까!’ 넷째 누나가 자기도 그때 일이 기억난다며 말을 거든다.

가장 괘씸한 건, 재봉사로 잘사는 척 편지를 부치곤 했다는 거였다. 나나모 국왕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이슈가르드에 망명한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 때문에 갔다더니, 사실은 정치 문제에 휘말렸던 탓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내 기분이 어땠겠어요?’ 영웅은 실종된 혈맹원들을 찾다가 셋째 누나에게 본업을 들켰다. 쌍사당 군인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으니 그제야 적발된 것도 운이 좋기는 했다.

얘기가 길어지자 영웅은 몇 번이나 말을 끊으려고 시도하지만, 누나를 이기지는 못한다. 그는 연인의 눈치를 살핀다. 정작 그라하 본인은 흥미롭게 귀 기울인다. 신선한 관점이었다. 가족이 보는 영웅은 마치 조용한 사고뭉치 같다. 사실 영웅의 가족이라는 말 자체가, 그라하에게는 낯설다.

그라하는 반쯤은 영웅의 연인으로서, 반쯤은 새벽의 혈맹으로서 하소연을 받아준다. ‘내 동생 작작 부려 먹으라’는 뜻으로 일부러 눈치 주는 중이란 걸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당황한 영웅만 빼고. 자리가 파한 뒤, 연인은 ‘한 도시의 수장을 백 년 동안 역임한 연륜이 느껴졌다’는 평을 내린다.

다음날 그라하는 주방을 빌린다. 숲길 안내를 연인에게 맡겼으니, 자신은 끼니나 준비하자는 취지에서다. 어머니 집의 손님맞이를 도와야 하는 자매들은 남동생 일행보다 먼저 출발해야 한다. 그들은 그라하에게 주방 뒷정리를 맡기는 걸 미안해한다. 남동생이라면 모를까 손님에게, 그것도 남동생의 연인으로 온 사람에게. 그라하는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며 연인의 누나들을 안심시킨다. ‘아버지랑은 딴판이네.’ 그런 소곤거림이 들려서 자매들을 보면, 그들은 연인과 닮은 얼굴로 배시시 웃는다.

온 집안이 외출 준비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영웅은 일어날 기색이 없다. 누나들은 전에 왔을 때도 똑같았다고 말해준다. 독립하더니 더 게을러졌다는 타박도 잊지 않는다. 귀를 쫑긋 털어내는 모양새나 미묘하게 찡그려진 콧잔등이, 동생보다는 동생의 업무 환경에 불만을 표하는 듯하다. 조카들이 ‘삼촌 일어나!’를 연창하며 영웅을 깨운 뒤, 집에는 둘만 남는다.

연인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라하를 부른다. 사람도 없겠다, 평소였다면 팔을 잡든 껴안든 했을 텐데 이상하게 머뭇거린다. 그라하는 연인을 부르려다 아직도 그의 본명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색한 침묵이 지나간다.

먼저 움직인 쪽은 그라하다. 입장이 반대였다면 자신도 머뭇거렸을 테니까. 그라하의 영웅은 부스스한 꼴이 뭐가 문제냔 듯 서슴없이 거리를 좁혔을 거고. 서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연인은 평소답지 않게 움찔 물러선다. 그라하는 웃는다. 목이 잠긴 연인의 입가에서 박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숲을 구경하며, 연인은 이따금 쪽 넘김이 느슨한 수첩을 꺼낸다. 수첩의 정체를 물어보면 어떤 탐험가가 넘겨준 비경 가이드라고 한다. 에오르제아 뿐만 아니라 기라바니아, 오사드까지 망라하는 물건이라고. 아직 다 가본 적은 없지만, 최근에 그리다니아 지역의 비경들을 미리 답사해뒀다고.

다음에는 같이 찾으러 가자, 라하. 연인들의 손가락이 다정하게 얽히고, 그라하는 밤바람이 서늘하던 며칠 전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숲의 밤은 이르게 찾아오며, 나무가 빽빽할수록 낮이 짧다. 둘은 예정 시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다. 연인이 나고 자란 어머니의 집이다. 외관이 기묘한 것은 보수와 개축을 거듭한 탓이다. 그 집을 축으로 주변에도 작은 집들이 듬성듬성하다. 아이를 낳은 자매들이 분가한 흔적이다. 지금은 대부분이 비었지만…. 오늘은 그중 하나에서 자게 될 거라고 연인은 말한다.

집은 작은 공터를 마당처럼 끼고 있다. 한쪽에는 대형 식탁이 여러 개 붙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요리가 한창이다. 통통한 돼지 두 마리가 통째로 불 위에서 익어가고, 꼬치가 쉴 새 없이 불판에 올라왔다가 내려간다. 어떤 이는 수프 냄비에 붙어 국자를 휘젓는다. 어떤 이는 ‘식탁에 오르지도 않은 음식에 손을 대는 게 누구네 딸 버르장머리냐!’ 호통을 친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누군가가 이쪽을 보더니, 어떤 이름을 외친다. 그라하는 모르는 이름이다. 우렁찬 선창에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든 여자들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반가움을 표한다. 손을 흔들고, 벌써 왔느냐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고…. 쏟아지는 환대에, 모험가가 손을 들어 응답한다. 나 왔어요!

발걸음을 서두르는 모험가의 손을 그라하가 잡는다. 잡은 이유를 묻는 대신, 연인은 손깍지를 끼고 장난스레 두어 번 흔든다. 그라하를 이끈다.

모험가의 어머니는 꼬치 굽기를 감독하고 있다. 손을 놀리는 건 열대여섯쯤 된, 영웅의 여동생과 조카들이다. 호랑이 같은 할머니가 버티고 있으니 굽는 애들도, 노동에서 면제된 어린 애들도 군침을 삼키며 손가락만 빨고 있다.

모자는 영 닮은 구석이 없다. 아들이 ‘오늘 바쁘네요’ 두 마디를 하면, 노인은 혼자 스무 마디 이상을 줄줄 풀어놓는다. ‘그럼, 바쁘다마다. 오늘 너 온다고 열흘 전부터 환술사 부른다, 정령님 비위 맞춘다, 어찌나 푸닥거리했는지. 멧돼지 두 마리는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결국 도시에서 사 왔잖니. 너는 어떻게 된 애가 전엔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더니, 이번엔 갑자기 애인을 데려온다질 않나…. 내일 가기 전에 청소나 좀 하고 가라.’

아들은 싱긋 웃으며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노인은 못 당하겠다는 듯 어이구, 탄식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남자애가 징그럽게.’ 의외로 모험가는 한 마디를 안 진다. ‘그러니까 직업이 이 모양이죠.’ 원초세계와 1세계를 구한 영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직업을 헐뜯는다. 그라하는 잠시 연인의 어머니 앞인 것을 잊고 웃음을 터트린다.

노인은 그제야 아들이 데려온 손님에게 관심을 보인다. 호구조사가 이어진다. 이름, 나이, 가족관계, 직업 등등…. 영웅은 오늘도 가족의 곤란한 질문만은 끊어주지 못한다. 그라하는 적당히 진실을 숨긴다. 도시에 사는 누나들을 제외하면, 가족들은 영웅을 일개 모험가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학자이고, 모험가와는 유적 발굴을 진행하다 알게 되었고…. 사실 그다지 숨길 것도 없다. ‘그라하 티아’로서의 경험만 읊으면 되니까.

정말로 곤란한 것은 수입은 어떻게 되는지, 같은 질문이다. 지금까지 책임질 입이 본인뿐이었던 그라하는 말문이 막힌다. 노아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을 때는 연구 지원금이 나왔고 실무자도 따로 있었다. 수정공이던 시절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탑에 남아있던 알라그 제국의 유물이 비상금 역할도 해주었고. 연인은 ‘내가 잘 버니까 괜찮아!’ 외치며 급히 구명줄을 던진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그라하를 한량으로 여기는 눈치다. 옆에서 꼬치를 굽던 아이들까지 키득키득 웃는다.

노인은 둘을 쫓아낸다. 손님은 손님답게 산책을 하든, 집구경을 하든 부를 때까지는 공터에 얼씬도 말라고 한다. 그라하는 연인이 유년기를 보낸 집을 둘러보기로 한다. 집 안에서 길을 잃으면 아무 창문으로나 탈출하자고, 그런 농담을 하며 둘은 시시덕거린다.

집 구조는 과연 복잡하다. 연인은 이 모퉁이, 저 모퉁이를 돌며 어릴 때 썼던 방을 찾아보려다 포기한다. 그들은 저녁 식사 호출을 놓치지 않기 위해 거실로 되돌아온다. 어린 시절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연인을 위해, 영웅은 최선을 다해 기억을 더듬는다.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놓은 뒤 그라하는 조심스레 묻는다. 가족들이 너를….

‘…라고 부르던데, 혹시 본명이야?’

연인은 무척이나 미안해한다. 미리 언질을 줘야 했는데 말할 틈이 없었다고. 별명으로 일한 지 오래됐고, 이 이름을 쓸 때 처음 만났던 탓인지 새삼 자기소개를 하기가 민망했다고.

‘그래도 계속 알려주고 싶었어…. 라하니까.’

이 순간 그라하 티아는 생각한다. 너는 사실 알고 있지 않았을까? 내가 잠에서 깬 뒤 너의 이름을 찾아 헤맸다는 걸. 너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무사히 기록을 남겨서, 탑에 잠든 ‘내’게 도달할 수 있는 세계를 바랐다는 걸. ‘나’는 결국 알 수 없을 테지만, ‘나’는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을 테니 괜찮다고…. 애써 자신을 설득했고, 설득당했다는 걸.

다행히도 착각은 오래가지 않는다. 좀체 부끄러워하지 않던 연인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알려준다. 그의 말은 그저 그라하를 향한 애정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연인은 신에 필적하는 존재에 맞서 두 세계를 구해낸 영웅이지만, 힘든 의뢰를 끝낸 뒤에는 꼬박 하루를 잠으로 보내는 모험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러니 ‘나도 계속 네 이름을 알고 싶었다’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크리스타리움에서도, 돌아와서도 내내….’ 그러했음을 고백한다면, 무척이나 기뻐하리란 것을.

그라하 티아는 확인한다.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은 조금 민망한 상황에 부딪힌다. 모험가의 아버지가 거실로 나왔기 때문이다. 나이 든 태양의 추종자와 인사를 나눈 뒤, 그라하는 달의 수호자답지 않은 연인의 붙임성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다.

손님이라고 상석을 양보받은 사실을 빼면, 식사 자리는 평범하다. 어른은 아이를 챙기고, 음식과 가까운 사람은 멀리 앉은 이들의 접시를 대신 채워준다. 그라하는 음식과 가까웠는데도 연인의 식사 시중을 받는다. 눈치 볼 줄 모르는 어린애들도 자기 몫의 식사를 받고서는 금세 그라하에게서 관심을 끈다.

잠자리는 예상대로 비어있던 집 중 하나였다. ‘이 근처는 밤이면 조용하다’는 놀림과 함께 둘은 숙소로 들어선다. 어제오늘 그라하는 가족의 무례를 사과하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침대는 하나만 쓰기로 한다. 둘이 누워도 될 정도로 큰 데다가, 아까 놀림당한 것에 오기가 생긴 탓도 있다. 조용하게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겠다는 반발이라고나 할까. 연인은 나란히 엎드린 채 꼬리를 엮으며 잡담을 주고받는다.

문득 그라하는 깨닫는다. 역시 이런 얘기를 영웅담에 넣을 수는 없겠다고. 영웅의 본명 정도라면 모를까. 하지만 영웅이 별명으로만 알려진 사람이라면, 그의 본명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영웅을 아끼거나, 영웅이 친애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렇다면 자신에게 영웅의 이름이 중요했던 이유는….

그라하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진다. 갑자기 고개를 파묻은 그라하를, 연인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놀리려 든다. 달아오른 얼굴 탓에 반박은 별 소용이 없다. 둘은 말다툼을 하며 엎치락뒤치락 침대를 구른다.

잠들기 전, 연인은 입술을 가볍게 누른다. 내일 보자는 속삭임이 그라하의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온다. 아침이 되면 그라하는 입맞춤과 함께 인사를 돌려줄 것이다.

그라하 티아는 비로소 여기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순간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