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때는 너를 꼭 안고
라하빛전
-주의: 5.4까지의 메인 퀘스트 스포일러 포함
-성별 포함 특정한 모험가 묘사가 없습니다.
미명의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잠든 모험가를 내려다보며, 그라하 티아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자기를 돌보지 않는 걸까? 크리스타리움에서처럼 좀 더 엄격하게 그의 휴식을 챙겨야 하지 않을까? 칸막이 너머에서 내내 인기척과 종이 넘기는 소음이 발생하는 잠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도 안쓰러웠다.
등을 가만히 두드리는 손길에, 그라하는 뒤를 돌아봤다. 알피노가 ‘자게 놔두세, 그라하 공.’이라고 입을 벙긋거렸다. 야슈톨라는 이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문서 검토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라하는 한숨을 애써 삼키고 다시 대출해온 문헌들 속에 파묻혔다. 방 저편에서 새근새근 잠든 사람 탓에 도통 집중이 되질 않았다.
1세계에서 새벽의 혈맹이 귀환한 뒤, 미명의 방은 언제부터인가 숙직실로 쓰이기 시작했다. 주로 자고 가는 사람은 연구직에 가까운 현자들이었다. 그라하도 몇 번인가 미명의 방에서 눈을 붙인 적이 있었다.
최근에는 모험가도 미명의 방 숙직에 합류했다. 며칠씩 시일이 걸리는 일을 맡지 않은 이상, 그는 매일 모르도나로 퇴근 도장을 찍었다. 그러곤 돌의 집에 있던 이들과 함께 저녁을 들었다. 그라하로 말할 것 같으면, ‘식사 하러 가자!’라고 외치는 모험가를 따라나서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식사 자리는 오붓할 때도, 시끄러울 때도 있었다. 그래도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늘 그라하와 모험가, 둘만 떨어지곤 했다. 어쩌다 모험가가 저녁 시간을 넘겨 돌아와도 함께 퇴근하는 건 변함없었다. 그라하가 남아서 일을 더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이상은.
그런 날이면 모험가는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그라하도 같은 마음이었기에, 모험가가 처음 미명의 방에 남았을 때에는 내심 기뻤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두 시간에 한 번씩 그라하를(때로는 함께 야근 중인 야슈톨라나 알피노 역시) 일으켜서 돌의 집을 한 바퀴 걷게 하고, 당 보충이라는 명목으로 간식을 먹이는 정도였지만.
중증 신도화 치료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아씨엔 파다니엘이 흉계를 드러낸 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혈맹의 현자들은 업무량이 서서히 늘어갔다. 그라하가 모험가의 휴식을 신경 쓰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다른 전투원들은 돌의 집 경비 같은 임무를 설 때 빼면 제때 쉬었다. 모험가의 퇴근 시간만 혈맹 업무와는 상관없이 들쑥날쑥했다.
혈맹의 일원들은 모험가의 자발적 숙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라하로서는 난처한 일이었다. 현재 맹주 자리는 공석이었다. 때문에 모험가를 쉬게 하려면 다른 혈맹원들 역시 그에게 휴식을 권해야 했다. 민필리아가 권위를 휘두르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쉬지 않으려는 모험가를 말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맹주로서 나섰을 테니까.
한편으로 그라하는 혈맹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1세계에서 봐 왔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그저 낯선 곳에 고립된 사람들 사이의 한시적인 유대감일 뿐이었던 걸까?
모험가를 숙소로 전송할 마법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써봤자 마력 낭비였다. 그라하는 다음엔 꼭 모험가를 돌려보내야겠다고 다짐하며 잡념을 털어냈다.
모험가는 콧노래를 부르며 돌의 집으로 귀환했다. 요즘 그는 기분 나쁜 날이 거의 없었다. 에오르제아 안팎으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고, 무슨 일이 터지면 1순위로 불려갈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어쨌거나 그전까지는 그라하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산크레드부터 그라하까지, 모두가 무사히 원초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한 직후 얼마 동안. 모험가는 말 그대로 땅에서 한 뼘 정도 떠다니듯 했다. 새벽의 혈맹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을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모험가만은 알았다. 자신은 새벽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이토록 들뜬 게 아니었다.
모험가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탈 타워에서 잠든 그라하 티아에게 소울 사이펀을 쥐여주었을 때. 혼과 기억을 담은 수정이 반짝 빛나고, 그에 응답하듯이 그라하가 눈을 떴을 때.
모험가는 치밀어오르는 감정의 결을 하나하나 읽어낼 수조차 없었다. 재회의 기쁨이라기에는 약간 서글펐고, 안도감이라기에는 좀 더 후련한 기분이었다. 실컷 울고 나서야 진정되리라는 점은 똑같았다.
그라하가 책무에서 벗어나 삶을 누리기 시작한 만큼이나, 이 붉은 머리 태양의 추종자에 대한 모험가의 감정도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비겁하게 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수정공을 대할 때는 분명 지금처럼 들뜨거나 하진 않았는데, 그라하 앞에서는 이렇게까지 태도가 변한다면…. 나는 그라하의 겉껍데기만을 좋아했던 걸까? 모험가는 1세계에 갈 때마다 수정공이 남기고 간 석상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파고들어봤자 소용없었다. 살아 움직이는 그라하 티아 앞에서는 다 잊어버렸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모험가의 고민에 답을 준 건 그라하였다. 새벽의 혈맹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저녁을 들고, 어쩌다 보니 숙소로 들어가는 그라하를 배웅하게 되었을 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라하는 그날 새벽의 혈맹과 처음으로 사적인 자리를 함께 했었다. 현자들과 르베유르 쌍둥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 발단은 그라하와 저녁을 먹고 싶었던, 그러나 자기 딴에 연심은 숨기고 싶었던 모험가가 제안한 환영식이었지만….
모르도나는 그날따라 요마의 안개가 자욱했다. 둘을 은빛눈물 호수 방면으로 이끈 건 아마도 술기운이었으리라. 누가 제지한 것도 아닌데, 그라하는 성문 앞에서 움찔 걸음을 멈췄다. 모험가는 몇 발짝 더 걷고서야 그라하가 뒤처진 걸 눈치챘다. 이제는 탑에 매인 몸도 아닌데 문 앞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모험가는 대뜸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라하는 얼떨떨한 얼굴로 경계를 넘었다.
길이 이어진 대로 걷다 보니 성 코이나크 재단 조사대 야영지였다. 그라하는 오랜만에 보는 옛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에게는 오래되었고, 그들에게는 얼마 되지 않은 추억의 회고를, 모험가는 질투심도 없이 경청했다. 돌아가는 길에 그라하는 말했다. 조사대 동료들과 다시 인사를 나눌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아무리 수정공의 퇴장 연출이 기각되는 걸 봤다고는 하지만, 기획자이자 당사자의 입으로 희생을 감수하려 했음을 확인받으니 속이 쓰렸다. 흐르는 모래를 놓치기 싫은 아이처럼, 모험가는 손에 힘을 주었다. 문득 깨달았다. 모르도나 성문을 나선 순간부터 줄곧 그라하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마침 그라하도 이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모험가는 그가 손을 놓을까 봐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러나 그라하는 손을 고쳐 잡았을 뿐이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 줘서 고마워.’
혼자였다면 예정된 끝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라하는 말했다. 예기치 못하게 잡은 기회를 이번에는 어떻게든 이어가 보겠다고. 나의 죽음으로 누군가를 살리기보다는, 함께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모색하겠다고.
그 순간 모험가는 알게 되었다. 수정공 앞에서는 잘 걸려 있었던 마음의 빗장이, 어째서 이제는 이리도 쉽게 빠져 버리는지. 비겁함은 맞았다. 짐작했던 바와는 방향이 조금 달랐다. 지금의 그라하라면 안심하고 마음을 쏟을 수 있었다. 상처받을 걱정은 없었다. 그의 목적지는 이제 아득히 먼 지평선 너머에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곳까지 이어진 길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끝에 다다른다면 그저 운이 나빴던 탓이리라. 명확한 끝을 목적지로 두었던 수정공과는 다르게….
물론 상처를 받느니, 마느니 운운하기 전에 그라하의 마음부터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모험가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언젠가 사귀었던 맹우가 가르쳐준 것 중 하나, 좋아한다면 표현을 미루지 말 것. 더는 말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언제라도 올 수 있으므로.
모험가의 애정 공세는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그라하 앞에서는 언제나 표정이 풀어졌고, 그를 콕 집어서 저녁 식사를 청하곤 했다. 사소한 스킨십이 늘어난 건 당연지사로, 알피노가 ‘과한 신체접촉은 자칫 성희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진지하게 충고할 정도였다. 모험가가 혈맹의 신입에게 치근덕거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딱 셋뿐이었다. 제국 내부 조사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산크레드와 위리앙제, 그리고 그라하 티아 본인.
조금 일찍 돌아왔기 때문에 아직 식사 때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모험가는 에페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직접 차를 우려 미명의 방으로 갔다. 그라하는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각국의 학술 기관에 자료를 요청하는 편지거나, 신도화 치료에 쓰일 수식일 것이라고 모험가는 짐작했다.
일에 집중한 나머지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듯 보이지만, 문 쪽으로 쫑긋거리는 귀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모험가는 그라하 몫의 찻잔을 책상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의 옆에 서서 등을 감싸듯 팔을 뻗었다. 반대쪽 어깨를 지그시 쓸어내리며 이름을 불렀다. ‘라하, 쉬어가며 해.’ 어깨를 잡는 순간 그라하는 움찔 몸을 떨었다. 모험가는 싱긋 웃었다.
오늘은 뭘 했는지 잡담을 나누며, 모험가는 그라하의 반응을 살폈다. 어깨에서 손이 떨어지자 그라하는 눈에 띄게 긴장을 풀었다. 얼굴에 뜬 홍조가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면 좋을 텐데. 찻잔에 닿는 입술을 물끄러미 보며, 모험가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라하는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알피노조차도 모험가의 연정을 알아차린 이유는, 비단 숨길 마음 없는 태도 때문만이 아니었다. 초월하는 힘이 발휘되었을 거라고 모험가는 추측했다. 이 힘은 누군가의 강렬한 감정이나 인상적인 기억 앞에서 종종 반응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는 정도야 예상 범위 내였다. 그라하에게 침 발라두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고.
정작 그라하에게 잘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초월하는 힘으로 알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방에게 실례일 것이고, 거절이라도 직접 듣고 싶었다. 언제, 어디서 운을 띄울지가 문제인데…. 모르도나는 개척도시로서 번성하고 있었지만, 분위기를 잡을 데이트 코스가 영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적절한 기회가 찾아오기만 한다면 모르도나가 다 뭐냐,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고백할 수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를 때를 기다리느니 계획을 세워두는 쪽이 더 효율적이었을 뿐이다. 그라하를 모르도나 밖으로 끌어낼 핑계가 없을까? 모험가는 궁리했다. 다행히도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사실은 그라하도 알고 있었다. 모험가가 보내는 다정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근거도 없이 확신이 든다는 게 미심쩍었지만, 모험가는 종종 마음의 벽을 뛰어넘어 감정을 전하곤 했다. 그래서겠지, 생각하면서도 그라하는 의심했다. 이건 내 착각이 아닐까?
모험가를 좋아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투사라면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인했다. 비단 신체적 능력에만 국한된 평가는 아니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는 만들어진 신을 토벌했다. 비록 누군가를 떠나보내더라도, 끈질긴 다정함으로 그이가 사랑한 것을 지켰다. 그게 설산의 도시건, 빼앗긴 땅이건, 세계 그 자체이건 간에. 그라하가 돌고 돌아 이 자리에 오게 된 것도 결국엔 모험가가 남긴 다정함의 조각들 때문 아니었던가?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특별한 친애를 보이는데,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은가? 모험가의 마음이 부담스러워서는 아니었다. 그라하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감정을 그가 들춰내고 있어서였다.
자신이 모험가에게 품은 애정의 일면을 발견할수록 그라하는 망설였다. 내가 그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 건 아닐까? 인과 관계가 틀려먹은 걱정이었지만 그라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두려움이 눈을 가린 탓이다.
결국 그라하는 모르는 척했다. 모험가가 저녁 식사를 청하면 세 번에 한 번은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미명의 방에서 자고 가기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가끔은 단 둘뿐인 귀갓길을 피하고 싶었다. 그 탓으로 그는 종종 자괴감을 느꼈다. 최선을 다해 두 번째 기회를 살아내겠다, 큰소리를 땅땅 쳤으면서 이런 꼴이라니…. 하지만 누가 그라하를 탓하겠는가? 일상이 평화로울수록 사랑은 재해가 되기 마련인 것을.
재해가 닥친 것은 여느 때와 같은 저녁 식사를 끝낸 뒤였다. 할 일이 남았다는 말에 모험가는 자연스럽게 돌의 집으로 따라 들어왔다. 실랑이가 길어질 것을 예감한 그라하는 미명의 방에서 결판을 보기로 했다. 선객으로 와 있던 야슈톨라가 도와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조금쯤은 있었다.
숙소가 아닌 곳에서 눈을 붙이면 피곤한 게 당연하다, 게다가 어제도 외박하지 않았느냐, 걱정되니 오늘은 돌아가라…. 그라하의 설득 시도에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다.
“피로가 쌓인 것 같지는 않아. 애초에 미명의 방 침대는 오래 누워 있던 사람들 때문에 들여놓은 거고.”
야슈톨라가 그건 그래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사람들을 오래 눕혀놨던 원흉은 잠자리의 불편함을 더는 피력할 수 없었다.
“…심심할 텐데.”
“라하가 일하는 걸 보는 게 재미있으니까 괜찮아.”
“정해진 일과가 끝나면 너도 하려던 게 있었을 거고….”
“이게 그건데? 격무에 시달리는 현자님들 쉬는 시간 챙기기.”
“당신, 다른 건 다 좋지만 날 핑계로 대진 말아요.”
모험가가 명랑하게 사과를 건네고, 야슈톨라가 커피 쿠키를 담보로 관용을 베푸는 동안…. 그라하는 약간 화가 났다. 자신이 용기를 내지 못한 결과로 모험가가 편히 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언짢았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피력하고 있으면서, 정작 편하게 쉬라는 걱정에는 고개를 젓는 모험가에게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그 탓으로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넌 괜찮아도, 난 불편해. 신경 쓰여서 집중이 안 된다고. 대체 왜 남아 있겠다는 거야?”
내뱉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세상의 어떤 마법도 입에서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순 없는 법. 모험가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라하는 급히 수습할 말을 찾아 머리를 굴렸지만….
“이거, 좀 섭섭하네.”
모험가가 더 빨랐다. 그라하의 꼬리가 순식간에 축 처졌다. 모험가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라하는 사과밖에 할 수 없었으리라. 야슈톨라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모험가의 ‘왜긴 왜겠어?’ 다음에 이어질 말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라하는 냅다 도망쳤을 것이다. 이때까지는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재해는 전조도 없이 그라하 티아를 덮쳤다.
“헤어질 때는 너를 꼭 안고 입을 맞추고 싶어. 네 허락 없이는 그럴 수 없으니, 숙소까지 바래다주는 거로 만족하는 거야. 하지만 네가 남아서 일하고 있으면 배웅도 못 하잖아. 그냥 가긴 아쉽고, 그럼 어떡해? 남아야지. 잠들기 전까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걸.”
말을 끝낸 모험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내 숨소리가 너무 큰가? 뺨이 화끈거리는데, 꼴사나워 보이는 건 아닐까?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은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진정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모험가에게도 이 재해는 전조 없이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섭섭하다는 말을 뱉을 때까지는 농담으로 말을 이으려고 했다. 정확히는 농담처럼 들리는 진담으로, 대수롭지 않게, 무겁지 않게…. 그 순간 어떤 확신이 모험가를 찾아왔다. 지금 말해야 한다고. 지금 아니면 안 된다고. 그렇게 속삭인 것이 상대방의 묵묵부답에 조바심치는 연정이었는지, 그라하를 상대로는 발휘되지 않기를 바랐던 초월하는 힘이었는지, 모험가로서 쌓아온 직감이었는지…. 어쩌면 셋 다였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그라하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띄엄띄엄 읊은 대답에는, 모험가도 놀랐다.
“그럼, 그렇게…. 하고, 가.”
한편 그라하 티아는 평소의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언가 대답을 줘야 하는데, 열 오른 머리로는 말이 되는 문장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서술형 답안을 요구하는 문제에 원망을 품었다.
그라하의 상태를 마법인형으로 설명해 보자면, 논리 회로가 약간 타 버린 것과 같았다. 고장 난 머리는 일단 과부하를 일으키는 원인을 치우기로 했다. 모험가가 남아 있으면 일에 집중할 수도 없고, 제대로 된 답을 생각할 수도 없을 테니까. 문제는 그라하가 전에 없이 당황했다는 점이었다.
“너 지금 무슨 말 했는지 알고는 있지?”
“알아.”
“진짜 알아?”
“안다니까….”
모험가는 더 확인해봤자 소용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렇게까지 해 달라는데 들어줘야지. 모험가는 그라하가 고장 난 틈을 타 사심을 채우기로 했다. 섭섭한 마음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도 있었다. 어디 한 번 실컷 당황이나 해봐라, 그라하 티아.
요령 좋게 등을 감싸는 팔에 이어 그라하가 느낀 것은, 모험가의 ‘꼭 안는다’는 ‘꽉 껴안는다’에 가깝다는 거였다. 목 뒤를 어루만지는 손 탓에 거기서 생각이 멎었다. 얼굴이 가까워지나 싶더니 코끝이 부딪혔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것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이 아쉬웠다. 그라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틀었다. 각도가 맞으니 입술이 한층 긴밀하게 맞물렸다. 팔을 들어 상대를 끌어안으려던 순간.
모험가가 입술을 뗐다. 갑자기 끝난 입맞춤에 그라하는 얼떨떨해졌다. 모험가는 잠시 그 표정을 감상하다가, 장난스럽게 코를 비비고는 그라하를 놔주었다. 그는 개운하게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내일 봐!”
즐거운 듯한 콧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라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은은한 미소를 지은 야슈톨라가 보였다. 그는 딱 세 마디 했다.
“젊네요, 둘 다.”
그라하 티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날 야슈톨라는 미명의 방을 혼자 썼다.
목격자인 야슈톨라뿐만 아니라, 혈맹원들 대부분은 모험가와 그라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라하가 모험가를 볼 때마다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반응에 따라 모험가가 치근거리는 빈도도 덩달아 줄었다. 신입이 안쓰러우니 도와주자는 것이 중론이어서 요즘은 매일 저녁이 새벽의 혈맹 회식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주로 르베유르 쌍둥이가 동행했다.
그라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도움은 환영이었다. 모험가를 보면 자꾸만 그날의 포옹과 입맞춤이 떠올랐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고, 전에는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졌다. 자신에게도 마음이 있는 이상 그날의 고백에 대한 답이나, 하다못해 긍정적인 신호라도 줘야 한다는 생각은…. 늘 숙소 방문을 닫은 뒤에나 찾아왔다.
그라하가 사랑 앞에서 우물쭈물하거나 말거나, 혈맹의 현자는 할 일이 많았다. 중증 신도화 치료 연구는 대륙 각지에 출현한 탑으로 인해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탑을 조사하러 갔던 사람들이 신도화와 비슷한 증상을 보였고, 결국 그들을 제압하느라 큰 피해가 났다는 리세의 연락 때문이었다. 모험가를 비롯한 초월하는 힘의 소유자들이 탑의 조사에 투입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모험가는 꾸준했다. 그는 여전히 저녁이면 미명의 방을 두드리고, 함께 식사를 들지 않겠느냐 권했다. 매일 오지는 못했지만, 올 수 있을 때면 반드시 왔다. 마치 그가 돌아올 자리가 돌의 집인 것처럼.
모험가는 늘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은 정세가 변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정체 모를 탑이니, 세계 멸망이니 하는 얘기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모험가가 혼자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 자체가 그라하에게 현실감을 일깨워주었다. 미처 다 지우지 못한 전투의 흔적을 보노라면, 그는 어쩐지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모험’에 따라가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그날 이후 그라하는 내내 정시 퇴근을 준수했다. 하지만 치료 연구의 실마리가 잡힐 듯 말 듯 가까워지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안전이 걸린 일이었고, 모험가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 걱정되는 게 있다면 모험가가 돌의 집에서 자고 가겠다 뻗대는 것 정도였다. 그날과 같은 작별 인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아니, 걱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라하는 애써 자신을 속였다.
“어쩔 수 없지.”
정작 모험가는 곧바로 수긍했다. 망설인 끝에 돌의 집까지 그를 끌고 와버린 그라하로서는 맥 빠지는 전개였다. 모험가는 거기에 한술 더 떴다. 앉아만 있지 말고, 밤은 새지 말고, 출출하면 뭐라도 먹고…. 심지어는 나가는 길에 에페미에게 주방 사용 허락을 받아주겠다고까지 말했다. 잡다한 당부를 건넨 다음에는 정말로 미명의 방을 나섰다. ‘내일 봐!’ 외치는 목소리가 그날처럼 경쾌했다.
그라하는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긴장을 놓지 않았다. 예민한 귀에 멀어지는 발소리가 잡혔다. 그러고 있자니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안 해도 될 긴장을 했다는 게 억울한 것인지, 포옹이니 입맞춤이니 말해놓고 정작 오늘은 그냥 간다는 것에 배신감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남을 사정없이 흔들어놓고 혼자 멀쩡한 것에 화가 나서인지…. 어쩌면 셋 다일지도 몰랐다.
예전이었다면 오기 따위가 등을 떠밀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만큼의 책임감을 짊어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그라하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멀어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라하는 더 늦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마침 모험가는 돌의 집 문고리를 붙든 채, 아직 남아 있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참이었다. 그라하는 모험가가 문 앞에 있는 것만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시야가 좁아져서 다른 사람을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그라하에게 막 안겼을 때, 모험가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너무나 순순히 그라하의 팔 안으로 들어왔다. 그라하는 모험가의 목 뒤에 손을 얹고 끌어당겼다. 그때 이해했다.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기습한 쪽에서 눈을 감는 것까지는 저번과 비슷했다. 달라진 점이라면, 그라하가 떨어지려고 마음먹은 순간 모험가가 팔을 감아왔다는 것이다. 요전의 담백한 입맞춤이 거짓말인 것처럼 혀가 침범했다. 그라하는 속수무책이었다. 입술을 뗄 때 쪽 소리가 나는 것이 상당히 민망했다.
“작별 인사를, 안, 했잖아….”
말하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충동에 의지해 움직인 것도, 사고를 치고 뒤늦게 후회하는 것도 너무나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모험가를 볼 낯이 없어 아래로, 아래로 시선을 처박다가…. 그라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깃소리로 해명이 이어졌다. 사실은 그날부터 계속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그런데 네 앞에만 서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도무지 자연스럽게 굴 수가 없었다고. 왜냐면, 왜냐면….
그쯤에서 모험가는 다시 입을 맞췄다. 책망부터 고백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더듬거리는 그라하가 귀여웠다. 이런 얘기를 남들 다 있는 데서 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겪을 후폭풍을 걱정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가벼운 키스가 오간 뒤, 이번에는 모험가가 그라하를 꼭 안았다.
“그럼, 정말로 내일 봐!”
모험가가 사라진 뒤 뒤늦게 남아 있던 혈맹원들을 발견하고 굳어버린다거나, 다들 눈치를 보는 와중에 알피노가 던진 ‘일단…축하하네.’ 라는 말을 듣고 미명의 방까지 도망친다거나. 그 뒤로 한동안은 얼굴을 못 들고 다닌다거나, 와중에 모험가가 애정 표현을 숨기지 않아 두 배는 부끄러워진다거나….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사랑하는 이와 헤어질 때는 그를 꼭 안고, 입을 맞추는 나날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모험가를 안았을 때, 혹은 안겼을 때의 온기와…. 그라하는 멍하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헤어지지 않을 때도 너를 꼭 안고
어느 날, 그라하 티아가 전날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왔다. 대부분의 혈맹 일원들은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반응을 보였다. 남들 보는 앞에서 요란하게 고백만 하지 않았더라면, 다들 모르고 넘어갔을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다만 본인에게는 체감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그라하는 연인의 배웅을 거절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낯가림이 모험가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고백을 주고받은 뒤, 둘은 헤어지기 전에 으슥한 곳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날따라 입을 맞추다 불이 붙어서 ‘내일 봐!’가 ‘자고 갈래?’가 되어버린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헐떡거리며 내뱉은 질문에 그라하는 목 안쪽을 울리며 으응, 소리를 흘렸다. 그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신음인지, 대답인지 헷갈렸던 모험가는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로?’ 그라하는 대답 대신 입술을 붙여왔다. 한시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잠자리는 끝내주게 좋았다. 적어도 모험가에게는 그랬다. 열에 들떠 달아오른 연인이 잡아먹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정말로 먹을 수는 없어서 목으로 파고드는 얼굴을 붙잡고 수없이 키스했다. 미코테는 목을 문다더니 정말이구나, 얼핏 그런 감상도 들었다. 송곳니가 무뎌서인지 잘근잘근 씹힌 것에 비해 통증은 덜했다.
그라하의 거리두기가 끝난 뒤, 모험가는 당분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가기 싫다.’
딱 사흘 만에 자제력을 내팽개쳤다. 하지만 가야겠지…. 모험가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그라하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 순간, 내내 키스에 몰두하던 그라하가 모험가를 살짝 떼어냈다. 그러곤 이런 말을 했다.
“너무, 거기만…. 물고 빠는 거, 아니야?”
무슨 얘길 하나 싶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거기’가 어딘지 짐작도 안 갔다. 와중에 단어 선택이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 탓에 그렇게 들린 건지도 몰랐다. 그라하가 말을 이었다. 그날 아침에.
“아랫입술만 부어 있었다고….”
그러곤 이상한 데에 집착하는 연인 탓에 얼마나 낯이 뜨거웠는지를 토로했다. 옷은 이틀쯤 같은 걸 입을 수 있다, 그렇지만 입술이 그 모양인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사정없이 남의 목에 달라붙은 건 기억에 없는 모양이었다. 모험가는 조금 억울해졌다.
“너는 목만 물었잖아.”
“…내가?”
그라하는 시선을 이쪽저쪽 돌리다가, 작은 소리로 사과했다. ‘싫었다면 안 할게.’ 즉, 자기는 입술 부은 게 싫었다는 뜻이다. 정확히는 밤을 같이 보낸 티가 노골적으로 나는 게 싫은 거겠지만. 모험가는 입맛을 다셨다. 피하지 못하도록 손을 뻗어 연인의 머리를 감쌌다. 입술 사이에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만 남기고 얼굴을 딱 붙였다.
“그렇지만 라하는 아랫입술이 섹시한걸.”
속삭였다. 사실은 후드 아래로 코랑 입만 보일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고. 수정공은 대체 정체가 뭐길래 저렇게….
“입술만 야하지?”
그라하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럴 만했다. 수정공을 자칭했던 시절, 그의 자기인식은 노인이었다. 혹은 너무 오래된 수정 탑의 단말. 홀로 돌아온 죄인. 그러니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수정공’이 누군가에게 성적인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모험가는 굳어버린 연인에게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부터 빨기 시작해서 혀로 입안을 휘저었다. 그라하가 느릿느릿 따라붙었다. 너무 놀렸나? 이제 그럴 마음이 안 드나? 설마 기분이 나빠졌나…? 모험가는 이내 키스를 마무리했다. 그라하는 멍하니 시선을 맞춰 왔다. 놀라서인지, 열이 올라서인지 알 수 없었다.
“더, 안 해?”
싫은 건 아니었군. 모험가는 안심했다. 그래도 계속 달라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라하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이미 몸이 달았다. 말을 꺼내자니, 연인이 동의할지도 문제였다. 간밤의 일이 티 나는 게 민망하다는 사람에게 굳이 조르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도 약간은 상했다. 모험가는 남 탓을 했다.
“입술 얘기 듣고 기분 상한 것 같,”
“아니! 아니야. 놀라긴 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라는 말이 이어졌다. 당시의 정확한 몸 상태를 아는 건 그라하뿐이었고, 겉으로 드러난 건 수정화된 신체 일부 정도였다. 모험가는 그것에 놀랐고, 수정공의 의도를 의심했을지언정 그가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비슷한 존재로 여겼으니 ‘그런 마음’을 품었을 법도 했다. 상당히 관대한 사고방식이었다.
“그래도 지금이 더 좋지 않나….”
“젊어져서?”
농담조로 말을 받자, 연인은 킥킥 웃었다.
“적어도 딱딱하진 않잖아.”
모험가는 별안간 입을 딱 다물었다. 순간 스쳐 지나간 농담 중 한 가지라도 뱉었다간 그라하가 진짜로 자신을 피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성인이고, 연인 사이고, 조금 전까지 틈도 없이 들러붙어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저런 농담을 한다는 건…. 노림수 아닌가?
모험가는 속으로 ‘자존심’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평정을 되찾는 데 집중한 나머지, 그라하가 머쓱한 듯 눈을 내리까는 것도 몰랐다. 자존심, 자존심, 자존심……. 같은 게 다 무슨 상관이냐. 저 도톰한 입술 앞에서. 모험가는 굴복했다.
“자고 가도 돼?”
승낙은 흔쾌했다.
그라하가 또 자신을 피하는 걸 막기 위해, 모험가는 조건을 내걸었다. 자신은 키스하고 싶어질 때면 목을 물 테니, 그라하는 반대로 하라고. 제안을 수락한 그라하는 다음날, 모험가의 입술이 부어도 자신이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런 건 헤어지기 싫으니 같이 있자는 연인 앞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사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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