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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에 꽃을 엮어

FFXIV 라하빛전 MF(설정 有) │ 6.0 이후

OVERTURE by KNOWN

<인터미션> 이후

“안개가 걷혀서 다행이야.”

휠체어를 천천히 끌며 그는 나직하게 말을 꺼낸다. 요 며칠 사이 요마의 안개가 모르도나 전역을 뒤덮어 한동안 외출이 금지되었으니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고도 남았을 테지만, 아직 균형을 유지한 채로 오랫동안 서 있거나 걷기가 어려울 정도로 거동에 신경 써야 하는 상태였다. 내 크고 작은 안위에 쿠루루나 의사가 예민해지는 건 당연했다. 나 역시도 이 몸을 끌고 그런 날에 무리해서 나가고 싶지도 않았기에, 바깥 공기가 그리워도 당분간은 잠으로 하루의 반을 보내며 얌전히 날이 개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약 닷새가 흐른 후, 지긋지긋한 안개는 걷혔다. 다만, 그렇다고 딱히 맑지는 않았다. 막 안개가 걷힌 밤하늘은 안타깝게도 옅은 구름을 깔고 흐릿했으니까. 구름이 어느 정도 걷힌 것은 밤이 깊은 이후였다.

“미안해. 밤에는 너도 쉬는 게 좋을 텐데…역시 그냥 들어가는 게,”

“당치도 않아! 나도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서류만 읽고 정리하느라 산책이 좀 그리웠거든.”

내 사과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게 하필 오늘 늦은 오후 즈음이었고, 딱 그 무렵 나는 잠시 돌의 집 로비에 나와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로비에 나오는 것까지는 얼마 거리도 안 되는 데다가 짧은 거리는 스스로 걸어보고 싶었기에…재활의 기념으로 걸어 나와 아무도 없는 적막한 로비에서 홀로 개인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가 로비에 들어선 건 그 무렵이었다.

「…니시나…?! 이 시간에 나와있어도 괜찮아?」

그는 두꺼운 책을 한아름 들고서 들어오다 나를 보고 적잖게 놀란 듯 했다. 아무렴, 요즘의 나는 이 시간에 수마에 빠져 있어야 정상이었으니.

「낮잠을 좀 오래 잤거든. 잠이 안 와서 잠깐 나왔어.」

「어디 안 좋아서 나온 건 아니지?」

「그랬으면 이미 의사를 불렀을 거야.」

입을 열 때마다 뿔 안 쪽에서부터 지잉, 지잉, 골을 울리는 진동이 거슬리고도 아주 얕게 울리는 게 느껴졌다. 텅 비고 두터운 쇠 기둥 안에 갇힌 채 누군가 밖에서 막대기로 마구 두들기는 듯한 불쾌한 공명음과 이명. 후유증과 부상은 아직도 회복 중이었지만, 의사소통을 위해 이제는 참을 정도는 되었다. 이것만큼은 약이나 회복마법에 기대지 못하고 오로지 시간이 약이라 하니 기꺼이 인내할 수밖에.

「…그렇, 다면 다행이야. 하지만 무리하지 말고. 알았지? 말하거나 듣는 것도 아직 힘들잖아.」

「고마워. 그래도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니까 괜찮아. 차 한 잔 할래?」

어쨌든 태연한 나의 대꾸에 그는 안심한 듯, 아니면 딱히 말릴 이유를 찾지 못한 듯 애매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가져온 책은 모두 테이블 위에 올린다. 학술서인듯 다소 복잡한 연구 용어가 제목으로 박혀있었다. 야슈톨라가 그에게 부탁했다는 자료인듯 했다.

「네가 마침 와줘서 다행이야. 심심했거든.」

찻물을 채운 찻잔을 그의 앞으로 내밀어 준다. 히엔의 이름으로 도착한 얀샤산 녹차잎이다. 어지간히도 고급품을 보냈는지, 어릴 때 집에서 어머니가 내려주셨던 차와 꽤나 비슷한 향이 났다. 이 정도 상등품은 쿠가네에서도 따로 파는 상인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찻잔을 받은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가 기쁘게 잔을 들었다.

「아, 물론 다른 용무가 있다면 가도 돼.」

「그, 그건 아니야! 책은 그냥 올드 샬레이안을 다녀오는 김에 미리 받아온 거니까. …네가 깨어 있을 줄은 몰라서, 오히려 좀 기뻐.」

살랑거리던 그의 꼬리 끝이 살며시 말리는 게 보였다. 흡족해진다고 할까. 저런 솔직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차를 한 모금 마신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래도 매일 많이 나아지고 있는 게 보여서 다행이라 생각해. 요즘은 산책도 자주 하지?」

「응. 이번 주는 요마의 안개가 좀 오랫동안 끼어있어서 못 나갔지만.」

「아…그랬지. …그럼 좀 답답하지 않아? 나라도 괜찮으면 동행할게.」

「응? …지금?」

…그렇게 대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외출로 기울어서, 얼결에 그가 내 휠체어를 끌고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동행자였다.

“바람이 부는데…춥지는 않아?”

“괜찮아. 딱 시원하네.”

옷을 파고드는 바람은 서늘하다 못해 차가웠다. 전부 커르다스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일 터다. 다만 며칠을 실내에서 보냈던 나에게는 이보다 기꺼운 온도가 또 없을 것이다. 그가 느끼기에는 서늘했는지 그 이후에도 두어 번 물었지만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내가 생각보다 추위나 더위를 크게 타지 않는다는 걸 여전히 체감하기 어려워하는 듯 보였다. 그래도 나, 걷기가 좀 힘들 뿐이지 쇠약해진 건 아닌데…라는 생각은, 그의 배려를 이해하기에 고이 넣어두었다. 다만 그가 겉옷을 주겠다는 제안은 더울 것 같아서 거절했다. 미안한 일이지만…….

에테라이트가 놓인 중앙 광장을 지나 느긋한 경사의 비탈길을 올라갔다. 로웨나 상회는 문을 닫았고 바쁘게 돌아다니던 상인들이나 모험가들은 눈에 띄게 발길이 적어졌다. 그러나 아주 조금씩, 이 시간에도 발을 멈추지 않고 오가는 이들이 있다. 망자의 종소리는 사람이 없어 적막하다는 수식어가 붙을 일이 없는 곳이었다. 거주지, 도시라는 개념보다는 요충지에 가까운 이 공간에서 모두가 똑같은 시간에 휴식을 취할 일은 없다. 다만 밤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조용할 따름이다.

천막을 내린 로웨나 상회 앞을 지나 망자의 종소리 외곽으로 나갔다. 이곳은 마차를 끌고 오는 상인들이 주로 오고가는 통로인 탓에 투박한 망자의 종소리 내부에서도 제법 길을 자주 다듬어 두는 곳이었다. 이곳만큼은 밤에 오가는 사람이 없다. 그가 천천히 휠체어를 멈춰 세우고,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나에게 바깥 공기가 이토록 기꺼워지는 날이 올 줄이야.

그동안 안개로 자욱했던 날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청명한 밤하늘이었다. 커르다스에서부터 불어오는 서리 품은 공기가 요 며칠간 기승을 부린 안개를 말끔히 몰아낸 듯 했다. 한순간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미처 정돈하지 못하고 나온 머리카락이 나부껴, 자연스레 손을 올려 잠재웠다. 여전히 나에게는 그저 시원한 바람이었다.

“머리, 많이 길었네…….”

작은 중얼거림이 머리 위에서 떨어진 건 그때였다. 혹시 나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어 의아하게 고개를 들자 그와 단번에 눈이 마주친다. 다만 눈이 마주치자 더 놀란 것도 그쪽이었는지, 황급히 시선을 피하려다 다시 나를 본다. 여기서 눈을 돌리는 게 더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나, 지금 입 밖으로 말했어?”

“많이 길긴 했지.”

특별할 것 없는 사실이었던지라 나는 순순히 긍정하며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머리카락이 어깨 선을 넘어간 적이 없었는데 지금의 머리는 어깨선을 넘어 날개뼈를 덮어가려 하고 있었다. 제법 거슬리는 길이가 됐다고 느꼈던 게 제 1세계에서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머리카락의 길이 같은 건 ‘사소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모든 걸 정리한 뒤라면,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다면 그 때는……하고 미루고 미뤘던 시간은 어느새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 등을 덮을 만큼 이어진 것이다. 심지어 그 사이에 계절은 변했고, 나는 또 한 번 나를 정돈할 시간을 한 걸음 뒤로 양보한 채 겨울잠을 자야만 했으니.

“이만큼 길러본 건 또 처음이라 어색해.”

“그런가? 난 괜찮아 보이는데…생각해 보면 다시 만났을 때도 단발이었지.”

그의 물음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다. 짧은 머리카락을 유지했던 이유는 오로지 편의성이었다. 활동하기 편하기도 하고, 더위도 추위도 심하게 타지 않으니 기왕이면 짧은 쪽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몇 달 전 라그나로크를 타고 화려한 귀환을 한 뒤 깨어났을 때, 그리고 그 중간중간 잠에서 깨어났을 때마다 나는 내 모습이 낯설 지경이었다. 나를 비로소 제대로 돌아볼 시기가 되자 내 머리가 얼마나 길어졌는지 실감이 난 탓이다. 뿔과 상처를 회복하는 회복력은 머리카락에도 착실히 적용된 듯 했다.

나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어색해서 슬슬 자를까 싶다가도…뭔가 아깝기도 해.”

천운처럼 살아 돌아온 이후부터 나는 아직도 종종 홀로 거울을 본다. 이 별을 떠나 내가 겪고 돌아온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사실 나는 정말 깊은 잠에 빠졌고, 영원과도 같은 꿈을 아직도 이어 나가는 중인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한 때 등을 반으로 가를 뻔한 흉터가 꿈 대신 영원히 남았고, 자고 깨기를 반복하는 동안 착실하게 길어진 머리카락이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알려준다. 아주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뿔은 덤이었다(이제 거의 다 자랐다.). 내가 걸어온 모든 게 허상이 아니었음을 온몸이 소리쳐 증명해준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그제야 꿈에서 깨곤 했다. 그런 식으로 그 여정이 나에게 너무나 고단했음을 깨닫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내가 겪고 거쳐온 나의 일부였음을 실감한다.

“너무 많이 길어서.”

선뜻 머리를 자르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이 시간이 나에게 남긴 흉터. 뿔은 언젠가 회복될 것이고 등의 흉은 완전히는 못한들 서서히 희미해질 터다. 처음으로 내 눈에 바로 보일 만한, 시간의 흐름을 기억할 무언가가 남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깝다’는 말에는 그런 뜻이 녹아 있었다. 내 느릿한 말에서 무엇을 읽었을지는 몰라도, 그도 웃음을 담은 채 말했다.

“그럼 길러보는 건 어때? 내 생각에는…길어도 예쁠…것 같은데.”

어쩐지 뒷말을 꽤 질질 끌며 꺼내긴 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돌돌 말며 대답했다.

“그럴까……. 긴 머리 관리는 처음이라 이래 놓고 금방 귀찮아질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네 말대로 아까운 것도 사실이니까. 정 번거로우면 나처럼 묶는 건?”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 이번에는 눈이 마주쳐도 그저 다정하게 마주할 뿐 피하지 않았다.

“혹시 묶어본 적 없으면 도와줄까?”

“…그래 주면 고맙고. 묶는 거야 다 거기서 거기같긴 한데.”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하다 보면 거기서 각자의 요령이 생기더라고.”

그는 잠시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미용사 이외의 사람에게 머리를 허락해본 적은 드물었는데. 어쩐지 머리카락을 훑는 손가락이 살짝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식하지 않은 척 다른 말을 건넸다.

“네 머리는 매일 땋는 것도 번거롭지 않아? 예전에도 땋았던가.”

“아…크리스탈 타워 조사 때 말하는 거지? 그때도 땋긴 했어. 지금보다야 꽤 대강대강 하고 다녔지만.”

사락, 사락,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리카락이 매끄럽게 물결지며 떨어진다. 의외로 능숙한 손놀림이 느껴졌다.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것과, 남의 머리를 만지는 건 그래도 제법 차이가 있을 텐데도. 그리고 그 의문점은 그의 다음 말을 통해 해소되었다.

“라이나 어릴 때 내가 머리를 빗겨줬었거든. 처음에는 빗질을 너무 못한다며 하도 투정을 부려서 오히려 더 오기가 생기지 뭐야……. 그때 이후로도 라이나가 끈질기게 찾아와서 빗겨달라고 했고, 난 그때마다 그게 아니라며 혼나면서 빗겨주곤 했지…그 아이가 그게 맞다며 만족할 때까지."

“…그건 그때 그만하라고 안 한 라이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하하, 맞네.”

대화하는 사이 긴장이 조금 풀린 듯 그의 손놀림에 속도가 붙었다. 꼬물거리는 감각만으로는 그가 내 머리로 무엇을 하는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앞을 곧게 응시하며 사락사락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을 만끽할 뿐.

“혼자 빗을 수 있는 나이가 되니까 이제 나에게 빗겨달라며 찾아오지도 않는 거 있지.”

“몇살 때였는데?”

“아마 라이나가 13살인가…그랬을 거야.”

“한참 잔소리 싫을 때네, 뭐.”

“그런가…? 그때도 나름 잘 따랐…음, 그것도 딱히 아닌가. 그래도 날 제일 잘 따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종종 아득한, 나는 잘 모르는 옛날이야기를 했다. 그때마다 그의 눈빛도, 목소리도 언젠가 잠시 만났던 과거로 돌아간다. 지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도 무슨 표정일지는 쉬이 짐작이 갔다. 추억이 잔상처럼 남은 눈동자는 오랜 세월을 지내며 켜켜이 쌓인 온정이 맴돌았다. 그러니까 나는…그런 얼굴을 보는 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바로 볼 수 없어 조금 아쉽기도 했다.

“음…지금 어때? 혹시 아파?”

“아니, 괜찮아.”

머리카락을 한참 꼼지락거리기 바쁘던 그가 중간중간 나를 살펴주었다. 라이나의 머리를 다듬어주었다는 게 허울은 아닌 듯 섬세한 손길이 이어졌다. 단순히 하나로 모아서 묶기만 했다면 시간이 이렇게 소요되지는 않았을 듯싶은데. 시간이 다소 소요되었다는 점은 자각한 듯 그가 '이제 다 됐어.' 하고 조금 초조하게 덧붙였다. 사실 얼마나 걸리든 나는 딱히 상관없는데. 내 머리가 어떻게 되어있을지는 궁금했다. 그저 그가 만져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제 이렇게 해서…자, 다 됐어!”

뿌듯함이 목소리에 흘러넘친다. 그가 손을 떼자 나는 내 머리카락에 비로소 손을 올릴 수 있었다. 행여라도 그가 단단히 고정시켜준 머리카락이 흘러내릴까 싶어 머뭇거리다, 만지지 않고서는 지금 딱히 확인할 수단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작품을 더듬는 내 모습을 보던 그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당혹스러운 표정이 된다.

“마, 맞다. 너한테도 이게 보여야 되는데…들어가서 거울이라도 가져올까?”

“음, 일단 만지는 걸로도 파악은 되긴 하는데.”

놀랍게도, 그는 제 머리를 일과처럼 땋던 것을 응용했는지 내 머리카락을 여러 가닥 땋아가며 묶어준 모양이다. 뒷통수를 둥글게 가로지르는 땋은 매듭이 다른 머리카락과 만나 한 자리에서 둥그렇게 묶였다. 미리 끈으로 묶어둔 머리 꼬리를 땋은 머리로 한 번 더 휘감고 끝이었다. 리세처럼 단순하게 하나 높게 올려 묶는 정도만 상상했던 입장에서는 제법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섬세함이다.

손가락 끝 감각에 의지하여 형태를 파악하는 나를 그라하는 제법 긴장한 눈초리로 살폈다. 그는 내 표정을 읽지 못해 초조해할 때마다 귀를 눕힌다. 기울어질 듯, 다시 쫑긋 솟아오를 듯 부산하게 움직이는 그의 귀를 곁눈질하고 속으로만 웃었다.

결국 그와 나는 상회 근처, 밤에만 장사하는 상인을 찾아 부탁해 손거울 하나를 빌려왔다. 자주 만나 안면을 튼 사람이었기에 고맙게도 흔쾌히 빌려주었다. 그리고 과연, 거울에 비춰본 모습은 감촉으로 느꼈던 것보다도 정성이 들어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섬세한 손을 타면 내 머리도 이렇게 되는구나. 이따금 찾아가는 미용사에게도 현상유지 이상은 바라지 않았고 이만큼의 관리는 부탁한 적 없었기에 신선한 감각이었다. 잔머리가 샐까 손대는 것도 주저하던 직전의 스스로를 잊고, 나도 모르게 매듭지어 감긴 머리카락을 손 끝으로 계속 더듬으며 거울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톡톡 건드려도 미동없이, 그리고 아프지 않게 고정된 머리카락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굉장하네…너한테 이런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하하…사실 이것도 처음 해 본 거야. 불편하지는 않아?”

“딱히. 이렇게 잘 묶어주면 들어가서 잘 때 풀기 아까운걸….”

“그 정도야? 그래도 기왕이면 잘 해주고 싶었으니까…네 마음에 든다면 다행이야.”

‘재능까지는 아니야.’ 하고 한사코 겸손을 논하며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거울 너머의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그 스스로도 제법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역시 예뻐.”

거울 속 내가 아닌, 진짜 나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을…나는 무심코 거울 너머로 훔쳐보았다.

순간 보아서는 안 될 표정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얼굴을 만드는 사람이 한정되어있다는 것 또한 알기에, 결국 그가 눈치채기 전까지는 거울로 내 얼굴을 비추는 척 빤히 들여다본다. 본인의 머리도 아니고 내 머리를 만져준 것뿐인데도, 나의 호평과 스스로가 만들어낸 결과물에 순수하게 행복해하는…사랑이 흘러넘치는 얼굴을.

“슬슬…들어가서 어떻게 했는지 알려줄래? 계속 네 신세를 질 수는 없으니까.”

“아, 그, 그럴까? 그럼 거울은 이리 줘. 내가 돌려주고 올게!”

자신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황급히 감추려는 듯 그가 허둥지둥 행동했다.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고(정확히는 제안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달려가 버렸다.) 상인에게 거울을 돌려주고 온 그가 휠체어를 끌고 다시 둔덕을 내려간다. 얕은 적막에 잠긴 모르도나의 하늘 구름 사이사이로 무수한 별이 깔렸다. 이런 날에는 크리스탈 타워가 선명하리만치 잘 보인다. 에테라이트 근처까지 내려오면 둘레벽에 가려져 반만 보이는 점이 아쉬웠지만, 꼿꼿한 첨탑의 끝은 여전히 볼 수 있었다.

“탑이 잘 보이네. 그새 날씨가 많이 갠 모양이야.”

내가 바라보는 방향을 파악했는지 휠체어를 잡아주고 있던 그가 등 뒤에서 말한다. 새삼스럽다고 생각했다.

“장벽을 뚫었던 때가 까마득하네.”

“아하하, 나도 방금 똑같은 생각 했어.”

그에게는 어쩌면 정말 ‘까마득한’ 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는다. 체감하는 시간의 길이같은 건 크게 의미를 둘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우리 모두에게 이제는 지나간 시간이며, 걸어온 발자취 중 하나로 남았다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와 내가 함께 걸어간 역사가 되어.

“그러고보니, 알피노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무슨…아, 해산에 대해서라면 저번에 왔을 때…….”

그가 동의를 구한 뒤 천천히 나를 돌의 집 안쪽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이번에는 진정으로 ‘우리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잠들기까지는 아마 시간이 더 걸릴 듯 했다. 이대로 들어간 뒤에는 분명 차부터 한 잔 더 내리고, 처음의 그 자리에 다시 앉아있을 테니까.

그래도 뭐…우리가 좋으면 된 거 아닐까.

이대로의 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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