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친구 성밖에 모른다
FF14 라하빛전 MF(설정 有) │ 5.58 이후
‘삼 년 남의 집 살고 주인 성 묻는다’의 북한 속담.
삼 년 동안이나 한집에서 살면서 주인 성을 몰라서 묻는다는 뜻으로,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 어쩌다가 관심을 가지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여, 친구.”
요마의 안개가 걷힌 모르도나의 밤하늘은 시리도록 맑고 환했다. 뱅쇼 한 잔을 들고 로웨나 기념회관 테라스로 나온 모험가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갑주를 벗은, 가벼운 차림새의 에스티니앙이 테라스 입구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그 등에 둘러맨 검붉은 마창의 흉흉한 기세에 모험가는 쓴 웃음을 흘렸다.
“시선, 부담스럽거든.”
“보다 보면 정 들어.”
그가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 이유를 알고서 던진 농담이기에 에스티니앙도 가볍게 농담으로 응수했다. 다가온 그가 자연스럽게 모험가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용기사의 시선이 모험가의 손에 들린 잔으로 향했다.
“뱅쇼 향이 좋은데.”
“이번에 새벽 앞으로 선물이 꽤 많이 들어와서. 한 잔 필요하면 줄까.”
에스티니앙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즘은 청주가 땡기더라고.”
“별 일이네. 언제부터 동방 술에 맛 들렸어?”
모험가는 별 생각없이 건넨 말이었지만, 에스티니앙은 순간 쿠가네에서 두 라라펠 여성들에게 쫓겼던 과거가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타이밍이 이상해 모험가가 의아해지기 전 금방 대답했지만 말이다.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 아무튼 됐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데 더 권유할 성미는 아니어서, 모험가도 그냥 한 수 접고 제 몫의 뱅쇼를 천천히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옅은 술기운과 함께 은은하게 몸 속으로 퍼지는 게 썩 마음에 들었다. 와인을 그대로 마시면 술 기운이 빨리 돌까 싶어 타타루에게 배운 레시피인데 생각보다 더 괜찮았다.
천천히 향을 음미하던 모험가가 먼저 나직하게 물었다.
“알피노는 어때?”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에스티니앙은 반문하는 대신 담백한 대답을 내놓았다.
“네가 봐도 알잖아.”
“그런 식으로 미루기는.”
“굳이 나한테 묻는 너도 너야.”
“내가 뭘.” 모험가가 픽 웃었다.
“그냥, 신기하니까.”
“낮에도 말했잖아. 이 정도는 신경 써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장작을 줍는 법도 모르던 ‘도련님’ 시절의 소년은 잠시 다른 길을 돌아온 사이 놀라울 만치 자랐다. 아니, 매 순간 소년은 새롭게 발돋움하고 한 걸음 더 성장하고 있었다. 한 때는 저렇게 곧고 이상적이기만 한 마음은 결코 보답받지 못하고 스러지리라 생각했었다. 풍파에 휩쓸려 결국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이상이 되리라고. 오늘까지도 그들에게 같은 말을 건네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자신의 고고하게 빛나는 이상을 한 번도 꺾지 않은 채로 소년은 여전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 곁에 선 다른 이들 역시도 변함없이 서로의 이상을 지지하며 함께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결같이 어렵고 힘든 길만 걸어온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불가능에 가까운 여정에 나서는 그들을 지지하기로 한다. 그들이 반드시 해내리라 감히 맹신하는 것도 아니며, 달관의 자세로 동행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있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구원을 손에 넣은 자신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낼지, 기꺼이 힘을 보태 지켜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끝내 지켜주지 못했던 또 다른 소년과는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도록.
빈 손으로 테이블에 앉아있는 그를 보기가 신경쓰였던 모험가가 얼마 가지 않아 탄산수를 한 잔 들고 돌아왔다. 안 마시겠다 버틸 줄 알았으나 의외로 그는 순순히 받아 들었다. 막상 거절했어도 입과 손이 심심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구운 크라켄 다리는 없나?”
“주는대로 먹어.”
쌀쌀맞은 일갈에 에스티니앙은 어깨만 으쓱인다. 그 뒤로는 짧은 침묵이었다.
맥주마냥 찰랑이는 잔을 손목으로 살살 돌리던 그가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아. 너한테.”
그럴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굳이 자신을 찾아 여기까지 그가 올라올 이유가 없지.
오가는 비공정과 마대륙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만으로는 그가 모든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새벽을 위하여 창을 들기로 한 결정과는 별개로, 미처 듣지 못한 긴 이야기로 밤을 보낼 심산인듯 했다. 잠이 오지 않는 건 피차일반이니 아무래도 상관 없었지만.
모험가는 달큰한 향이 올라오는 뱅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에스티니앙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진짜 회포를 풀 시간이었다.
“…뭐부터 듣고 싶은데?”
“황당할 정도로 일이 커졌군…….”
적당히 자르고 쳐내도 이야기는 길고 길었지만, 에스티니앙은 탄산수의 김이 빠질 때까지도 묵묵히 모험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긴 서사시 하나를 끝내고 난 뒤 내뱉은 감상은 더할 나위 없이 담백했지만, 그조차도 그 다워 모험가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고생 많았네.”
“끝이야?”
노고를 치하받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음에도 웃음섞인 농담이 먼저 나왔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남은 탄산수 잔을 비워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 …놀랍긴 하다. 어렵다고 여기는 길을 굳이 택하는 건 그런 미래에서도 마찬가지였군.”
“…그렇지.”
모험가도 조용히 동의하며 잔을 기울였다.
자만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이 땅에 있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 실제로도 어떠한 힘을 행사해왔는지 모르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에게만 의존하는 세계는 아닐지언정 존재의 영향력은 명확하다. 그가 홀연히 비극에 휩싸여 사라져버렸을 때 닥쳐오는 폭풍. 그것이 심지어 가장 최악의 형태로 나타난 세상에서도 선한 마음과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이 만들어낸 미래다. 지금 이 세계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을 지키겠다는 의지는 오랜 시간을 거쳐 조각조각난 영혼이 되어서도 결연히 빛나고 있었다.
“뭐, 그런 일을 겪고 왔으니 꼿꼿해질 만도 하네.”
문득 에스티니앙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을 모험가도 들었지만, 굳이 무슨 말이냐고 되묻지는 않았다.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는 않았으니까. 영락없는 형의 눈빛이 된 에스티니앙을 보며 그가 모르게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그럼 결국 넌 뭐냐?”
“뭐가?”
툭 던진 물음에 모험가가 눈썹을 올리며 되물었다.
“그 빨간 미코테족 녀석이랑 무슨 사이냐고.”
“커흑.”
시큰둥하게 날아온 직구에 뱅쇼를 마시던 모험가가 사레들린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입을 가리고 잔기침을 흘려낸 뒤에야 고개를 들었는데, 에스티니앙을 바라보는 눈은 황당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뭐야……그런 거 아니었나? 지금 들은 얘기도 그렇고, 다른 녀석들도 틈만 나면 알아서 자리 비켜주길래 그러려니 했는데.”
“…….”
설마하니 직구가 하나도 아니고 폭격으로 날아와 모험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와는 그동안 꽤나 거리낌없이 대화를 주고받아왔지만 이런 주제로 선공 당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스티니앙에게 보일 정도였다면……자존심마저 상한다.
“보아하니 아직 별 건 아닌가 보네.”
“너한테 그런 소리 듣는 건 생각보다 더 열받는데…….”
“먼저 놀린 건 네 쪽이지.”
“그거랑은 경우가 다르잖아.”
“오, 그렇군.”
“…….”
답지 않게 유도심문하고, 답지 않게 유도심문에 걸린 두 사람이었다. 에스티니앙 입장에서는 얻어 걸린 거나 다름없지만 모험가는 허술하게 무너진 스스로에게 꽤나 충격을 받았다. 모험가가 시선을 피하고 바로 답하지 않자 오히려 에스티니앙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정도야?”
“…….”
모험가는 형용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건 오히려 본인이라서 그렇게 물어봐도 입이 궁색하다.
한참 뒤에야 쥐어짜듯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애한테는 말하지 마.”
“뭐, 참견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의외여서 물어본 거야.”
오로지 ‘해야 할 일’과 ‘할 필요없는 일’로 세상이 나뉜 에스티니앙이 타인의 인간관계에 관심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럼에도 이 ‘친구’의 반응에는 제법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성도에 거의 발길을 들이지 않던 그에게도 뜬소문처럼 떠돌던 영웅과 포르탕가 장남의 염문설이 그가 아는 그런 관계의 전부였다. 그 당시 소문의 당사자인 모험가는 꽤 무심하게 소문을 모른 척 했던 것도 기억한다. 뜬구름 잡는 소리에는 언제나 칼같이 선을 긋고 무시해왔으니 자연스레 이번에도 별 반응 없겠거니 생각했었다.
…물론 이는 에스티니앙이 그 염문설의 일부는 아주 틀리지만도 않았으며, 심지어 당시 모험가는 다소 복잡한 심정으로 그 관계를 정리했었다는 것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추측이었다.
어찌 됐든 모험가의 성격 자체로는 제법 정확한 해석이긴 하다. 그 미코테 청년이 예외가 되었을 뿐. 예상 못한 폭격을 맞은 모험가만 한숨과 함께 엎드려 버렸다. 별 꼴을 다 본다는 심정으로 에스티니앙은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천하의 푸른 용기사이자 용시전쟁의 영웅이 이런 문제에 쓰러지다니.”
“남의 일이라고… 넌 왜 답지 않게 이런 걸로 날 놀려? 짜증나게.”
“말했잖아. 시작은 너고, 네 말대로 나는 별로 관심없는 남의 일이니까.”
“앞뒤가 안 맞……그만하자.”
생각하는 게 비슷한 듯 다르다 보니 한 번 투닥거리기 시작하면 서로가 제일 싫은 부분을 쑤시게 된다. 심각하기보다는 차라리 형제 싸움과 비슷했다. 그것도 매우 유치한. 그러다 보니 맞먹기보다는 더 격이 떨어지기 전에 선을 긋는 게 이성적으로도 나았다.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은 모험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르게 앉는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모험가가 에스티니앙을 힐끔 흘겨보았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고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나야말로 네 반응에 더 놀랐다고. 헛소문이거나 잘못 이해한 거라면 무시하고도 남았을 거잖아.”
그 부분에는 할 말이 없었던 모험가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내가 제발 저렸군.”
인간관계를 떠나서 사람을 대하는 일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대하기는 싫어도 상대하는 것 자체는 아무래도 좋다. 한때는 사람을 상대하며 사는 업으로 평생을 지내리라 여겼던 시절도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전처럼 사시사철 격식과 예절에 자신을 끼워넣을 필요가 없어졌을 뿐이고, 오히려 그러고 나니 훨씬 쉬워졌다. 고객 앞에 자신을 낮춰 행동하던 그 시절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꽤 적응을 잘 하지 않았나…모험가는 스스로를 고평가 한 편이었다.
그런 모험가가 상대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 그라하 티아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거든. 그런 사람은.”
“글쎄, 겪어볼 수나 있을까 싶은데.”
“…그 말도 맞아.”
올곧고, 솔직하고, 무조건에 가까운 신뢰와 사랑을 아끼지 않는 상대. 그는 자신에게 미래를 베풀어주었으며 목숨을 그 대가로 내놓았을 정도로 헌신했다. 스스로의 공적을 낮게 평가한 적은 없었음에도 그의 고결한 의지를 마주한 순간에는 실감할 수 없는 마음의 크기에 할 말을 잃었다.
100년을, 오직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바친 사람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발자취를 따라 자신을 향해 거슬러온 그를 앞에 두고서 감히 스스로를 낮출 수 있겠는가. 이 땅의 그 누구도 그와, 그를 이곳으로 보내준 이들의 의지와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더더욱 그에 보답하고자 그를 똑바로 마주보고 나아가는 게 도리라 여겼다. 하지만……
“…….”
그런 사람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그런 사람의 사랑에 고스란히 스며든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기인된 자신의 마음은 마냥 낭만적이지만도 않았다.
익숙한 이별의 불안함에서 싹튼 마음은 생각보다도 모험가의 내면을 복잡하게 헤집어 놓았다. 그의 마음의 무게를 깨달은 순간부터 감당하기 어렵다 느꼈지만 처음에는 그 뿐이었다. 자신이 돌려줄 마음이란 없었다. 그의 희생을 염려하고 걱정한 이유는 오로지 그 희생의 위에 서야 할 자신의 무게를 버티기 두려웠던 탓이다. 수정공이라는 존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최초의 이유는 오직 그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싹튼 불안은 질척한 집착으로 번지고, 기어이 누구에게도 설명 못할 기이한 색깔로 변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감당하기 힘든 건 그가 아닌 제 마음이 되어 있었다.
이성 관계에 있어서는 별의 별 꼴을 다 보아온 모험가도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불안도, 집착도, 그 모든 게 뒤섞여 튀어나온 충동도 결코 타인을 향해 가져본 적 없는 감정들이다. 그 감정 위에 애틋함이 놓여있는 것조차도 그러했다. 이 모든 게 한 사람을 향한다는 사실이 믿기지도 않는다. 인간관계에 있어 집착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적도 없고 이해도 못했던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고민하는 스스로가 생소하고 어색할 지경이었다.
그런 모험가를 바라보는 에스티니앙의 시선은 여전히 태평했다.
“제법 희귀한 광경을 봐서 흥미롭긴 하다만…생각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뭐야, 아까는 남의 일에 관심 없다며.”
“관심없는데, 지금 네가 눈앞에서 그러고 있잖아.”
“…미안.”
할 말이 없네. 하필 그에게 몇 번이나 방어 못 할 공격을 맞는 건지 모르겠어서 자존심이 상한다. 스스로의 무너진 무게중심을 저주하며 모험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에스티니앙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부르기 전 정신차리는 게 널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뭐?”
“이봐, 숨을 생각이 없으면 그냥 오라고. 여기 끼어들려는 거 아니었어?”
엘레젠의 귀가 밝다더니 근처에 누가 있었던 모양이다. 직전까지 했던 대화의 내용이 내용인 만큼 모험가는 속으로 제법 뜨끔했다. 그리고 테라스 입구의 열린 문 뒷편 기둥에서부터 슬그머니 나온 상대를 보자마자 뜨끔이 아니라 벼락이라도 맞은 듯 빳빳이 굳어버리고 만다.
“ー미, 미안! 엿들으려는 의도는 절대로 아니었어. 그냥 뭔가……심각한 대화인가 싶어서 멈춰섰을 뿐이야.”
…왜 하필 네가.
왜 안 자고 있었는데.
모험가가 혼란에 휩싸이든 말든 에스티니앙은 태평하게 받아쳤다.
“심각하다면 심각한가. 잘 모르겠는데.”
“그, 그래? 그치만…….”
쭈뼛쭈뼛 다가온 그라하는 모험가의 표정을 살피는 듯 보였다. 겉은 태평하고 무심하게 보였지만 속으로는 어디부터 들었을까 싶은 심정에 초조한 참이었다. 아직은 그에게 이런 마음을 드러내기가 조심스럽다. 알리더라도 이런 면은 차마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그를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아, 그, 해명하자면 절대로 전부 엿듣지는 않았어……!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그럴 의도는 결코 없었으니까. ‘그 말도 맞다.’ 부터 들었다가, 뭔가 끼어들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서…잠깐 망설였을 뿐이니까! 믿어줘!”
다만 그라하는 그런 모험가가 자신을 오해했다고 생각했는지, 손짓발짓을 동원하며 필사적으로 섬세하게 해명하는 중이었다. 에스티니앙의 청회색 눈이 슬그머니 모험가에게로 굴러가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앞은 못 들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회복은 빠르다.
“…괜찮아. 믿어. 여기 앉아.”
감정적 을이라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관계는 평등하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그라하가 숙여주는 것에 가깝기도 했다. 그의 헌신과 배려 아래에서 모험가는 새까맣게 일렁이는 감정을 또 한 번 꾹꾹 내리눌렀다.
자신이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 한, 그라하는 결코 지금의 대화에 대해서 되묻지 않으리라.
“후우……. 고마워. 그러면…그, 실례할게.”
그런 모험가의 속은 전혀 모르는 듯 그제야 그라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동그란 테이블, 에스티니앙과 모험가 사이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괜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에스티니앙의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뻔뻔히 모른 척 하며 모험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라도 한 잔 줄게. 얘기 나누고 있어.”
“아, 내가 가도 괜찮은데…….”
모험가는 뒤따르려는 그라하를 손짓으로 저지하며 슬쩍 웃었다.
“…푸른 용기사랑 만난 거잖아.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 않아? 괜찮으니까 물어보고 싶은 거 다 물어봐.”
“어이, 난 은퇴…….”
“너도 한 잔 더 줄테니 앉아있어.”
그러면서 에스티니앙의 거의 비어버린 탄산수 잔도 낚아챈다. 방금 전 이야기 할 때와는 영 딴판(적어도 에스티니앙은 그렇게 느꼈다.)인 다정한(적어도 에스티니앙은 그렇게 느꼈다.) 말씨에 에스티니앙은 내심 황당한 심정이긴 했다. 혼란은 무슨. 이 극명한 온도차를 구분하지 못하는 쪽이 바보가 분명하다. 모험가의 권유가 잘 먹힌 듯 그라하는 결국 순순히 자리에 앉고, 그에 만족한 듯 모험가는 부리나케 주방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테라스에는 에스티니앙과 그라하 티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모험가가 사라진 뒤에야 그라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걱정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그녀가 화나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그라하 티아는 조금 바보가 아닐까, 에스티니앙은 감히 생각하게 된다.
“…네가 설명했는데도 구태여 화낼 성격은 아니잖아. 안 괜찮은 걸 괜찮다고 하지도 않고.”
“…그건 그렇지. 아, 방금 전에는 고마웠어. 인사부터 하고 싶었는데……둘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길래 나도 모르게.”
그라하는 머쓱하게 웃으며 이야기의 화제를 돌렸다. 밝은 톤이지만 정중함이 묻어나는 말씨는 어딘지 연륜을 느끼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100년의 세월이 융합된 영혼이라 이건가.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얘기는 충분히 해명했으니 넘어가지. 나는 신경 안 쓰니까. …그래서? 넌 나를 제법 잘 아는 것 같던데.”
자연스레 화제를 다시 돌리자, 그라하의 눈에 화색이 떠오르며 반짝 빛난다.
“……! 어, 맞아! 푸른 용기사의 기록은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어. 가장 정확한 기록으로 알려진 건 포르탕 백작의 회고록이었지만 그 밖에도 수많은 문헌들이 용시전쟁을 끝낸 푸른 용기사를 기록하고 있었거든.”
“이제 푸른 용기사는 아니지만 말이지. 그런데 내 얘기가 그렇게 많이 있다고……? 왜?”
“왜냐니? 천 년 간 이어진 용시전쟁의 잘못 된 전승과 과오를 바로잡고, 그럼에도 사룡에 대한 복수심에 몸을 던져 원혼을 뒤집어 썼지만 살아남은 영웅이잖아. 물론 그녀의 공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당신이 용기사로서 성도에 머물렀던 시간만큼 당신의 기록은 더 세세한 법이지.”
“그거 참…….”
이슈가르드라는 국가의 기반부터 뿌리째 뒤집힌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기록 자체는 그려려니 했지만, 어디까지 세세하려나 싶은 심정도 든다. 다만 지금도 두 명의 푸른 용기사에 대한 영웅담은 온갖 판본과 각색으로 성도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에스티니앙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에스티니앙의 기준으로 다시 설명하자면, ‘알 필요’가 없기도 했다. 누군가의 손으로 자신의 이야기가 온갖 기록으로 남는다는 건 생각보다 기묘한 기분이지만, 심각한 왜곡만 없다면 사실 알 바 아니었다. 그런 에스티니앙의 무신경함을 모르는 그라하는 들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그런 기록들도 전부 읽어봐서…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굉장히 많아!”
호기심이 흘러넘치는 붉은 눈이 똑바로 에스티니앙을 향했다. 과연, 역사를 기록하는 샬레이안의 현인이라 했나. 영웅을 향한 동경이 깃든 눈은 예의 '친구'를 바라볼 때와 비슷한 것도 같지만, 자신을 향한 눈빛은 동경, 그리고 기록하는 자로서 품은 검증의 본능과 지대한 탐구심에 더 가까워 보인다. 조금 전 그녀에게 필사적으로 해명하거나 일순 눈치를 보던 눈빛과는 사뭇 다른 온도임을…의도치 않게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에스티니앙은 쉽게도 눈치챌 수 있었다. 짧게 혀를 찼다.
“빚을 달아 두어야겠는데.”
“응? 아, 미안해. 혹시 부담스럽다면 사과할…….”
“아니, 네 얘기가 아니야. 하지만 오늘만 대답해 줄 거니까, 궁금하면 지금 묻는 게 좋을 거다.”
최초의 물음은 자신이 던졌고, 그래서 알아버린 대가로 사이에 끼어버린 것도 맞지만……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인 법이다.
이미 몇 차례 회유해 주었으니 이건 초과봉사 쯤 되지 않나.
‘…삽질 그만 하고 얼른 와라.’
답지 않은 모습을 하루만에 몇 번이나 목격했는지 모르겠다. 모험가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달아둘 빚은 더 늘어날 터.
그럼에도 웬만하면 그냥 빨리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어떤 질문부터 시작할지 들뜬 얼굴로 골몰하는 붉은 머리의 청년을 바라보며, 에스티니앙은 제법 진지하게 그리 생각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