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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맺힌 새벽

FF14 라하빛전 MF(설정 有) │ 5.3 이후 기반

OVERTURE by KNOWN

 

“그라하, 자?”

 모험가가 문을 가볍게 노크했지만 내부는 조용했다. 노크를 두세 번 더 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그대로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음에도 방의 주인이 일어난 기척이 없다. 조용히 등 뒤로 문을 닫은 뒤 모험가는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는 여전히 곤히 잠든 채였다.

 노크 소리, 방을 열고 닫는 소리는 미코테족이라면 바로 일어날 만 한 소음인데, 어지간히 깊게 자고 있는 듯 했다.

 모험가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를 바로 흔들어 깨우기보다는 침대 옆에 놓인 책상의 의자를 끌어당겨 그 옆에 앉는 것을 택했다. 굳이 침대와 책상을 붙여 둘 필요가 없음에도 이런 동선을 골랐을 정도면 그동안 간밤에 얼마나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또 일과를 마치자마자 바로 침대로 뛰어 들었을지 알 만 했다. 이제는 그 때와 모든 신체조건이 다름에도 손에 쥔 걸 쉽게 못 놓는 모양이다. 추측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책상 위에는 마른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잉크로 빼곡히 글씨가 새겨진 종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라하는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연신 편안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얄쌍한 눈썹은 힘이 완전히 풀려 쳐지고 늘 부드럽게 선을 그리던 입매도 수마에 못 이겨 풀어진 채였다. 꼬박꼬박 땋아 내리는 머리카락도 뒤척인 족족 베개 위를 헤엄쳐 흩어졌다. 그를 보아온 시간 동안 몇 본 적 없는, 너무도 무방비한 옆모습이었다. 

 그라하는 언제나 타인의 앞에서, 특히 모험가의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정제하고자 했다. 그런 태도는 사실 먼 과거 크리스탈 타워 탐사를 할 시절부터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때는 모험심과 들뜬 마음이 앞서 용맹함과 약간의 건방짐으로 포장되어 있었다면, 지금의 그는…

 “…언제, 왔어?”

 가라앉은 음성이 수면 아래에서부터의 상념에서 모험가를 끌어 올린다.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건지, 아니면 자연스레 깨어난 건지는 몰라도 붉은 눈이 부드럽게 휘어져 모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모험가 역시도 부드럽게 미소하며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방금. …잘 잤어?”

 “…으, 응. 미안, 일어날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묘하고도 느릿했다. 그 오묘함을 감지한 건지, 아니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게 뒤늦게 부끄러운지 그라하는 얼굴을 붉히며 허둥지둥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모험가는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평온한 무표정의 모험가에 비해 그라하는 슬슬 몰려오는 부끄러움이 견디기 힘든 듯 머쓱한 얼굴이었다. 엉킨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그라하가 변명처럼 말했다.

 “이, 이렇게 엉망인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아침인데 뭐가 어때서. 그리고 네 방에 마음대로 들어온 건 나야. 노크는 했지만.”

 “그렇지만 깨워도 안 일어난 건 나잖아……. 미안해. …저기, 일단 세수하고 올게.”

 더 이상 앉은 채 모험가의 시선을 고스란히 견뎌낼 수는 없었는지 결국 그라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치듯 방 안에 마련된 간이 욕실로 달려가는 그를 보면서도 모험가는 딱히 붙잡지 않았다. 아마 한 김 식히고 돌아오면 그나마 침착해질 것이고, 그러고 싶은 그를 심술궂게 두 번 붙잡을 필요는 없었다. 붙잡으면 그대로 멈춰줄 그를 잘 알면서도.

 상대방의 결례를 먼저 이야기하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상대를 이해해 보려는 배려심은 아무에게나 보일 수 있을 만한 건 아니다. 새벽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는 이 정도의 배려를 보였겠지만 모험가는 그보다 한 계단 위의 영역이었다. 가령 모험가가 그에게 정말 선을 넘은 결례를 범한들, 그라하는 어떻게든 그 이유를 찾아 이해해보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단순 가정 치고는 극단적이지만 그만큼 그에게서 용서받고 있는 영역이 특별히 넓다는 걸 증명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면으로 스스로가 그에게 얼마나 특별취급을 받고 있는지 새삼 깨닫고는 한다. 그를 향한 감정이 보다 옅거나 그저 단순한 동료애에 불과했다면 이 정도의 배려조차도 부담스러워 선을 그었을 터였다. 이 행동과 표현이 갖는 감정의 무게를 모험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되돌려 줄 만한 마음이 없었다면 마땅히 그랬을 것이다.

 “미안, 계속 기다리게 했네.”

 눈을 뜬 지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 사과를 몇 번이나 했을지 모르는 그라하가 돌아왔다. 물기도 바로 못 닦고 나온 듯 수건을 아예 목에 걸고서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익기 직전까지 홍조가 올라왔던 얼굴은 열기가 가라 앉았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의식은 여전한지 여전히 눈이 마주친 첫 순간에는 시선을 먼저 피해 버렸다.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 듯 금방 다시 마주보았기에 모험가도 딱히 지적하진 않았다.

 “진정은 다 했어?”

 “아, 아니……!”

 하지만 왠지 한 마디쯤 더 놀리고 싶었다.

 “농담이야. 그만 할 테니 앉아, 그라하.”

 방의 주인은 분명 그라하였으나 자연스럽게 명령조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라하는 반사적인 반박도 저지당하고, 본론으로 들어갈 것이 명백한 어조에 더는 거역할 수 없어 살짝 익어버린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앓는 소리가 다 들리는데. 속으로만 웃음을 삼킨 모험가가 그라하가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들고 있던 것을 펼쳐 보여주었다. 커르다스의 지도였다.

 “사파트라는 마물을 알아?”

 “…그, 비명을 먹고 산다는 비취색 드래곤 말인가? 기록으로 본 적 있어.”

 “이틀 전 갑자기 나타난 키마이라가 하얀테 전초지를 습격한 일이 있었는데, 그 피냄새랑 비명소리를 듣고 나타났다는 모양이야.”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라하의 표정도, 목소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진중하게 변한다. 모험가가 내민 지도를 천천히 그가 받아 쥐자 모험가의 손가락이 X 표시가 된 어느 지점 위로 내려앉았다. 섭리의 땅 근처, 용머리 전진기지와도 근접한 골짜기 중 하나였다.

 “바로 어제 나타나서 난동을 부리다가 갑자기 이 밑으로 숨었어. 사병들을 보내 토벌하려고는 하는데, 숨은 위치까지 이동도 어려운데다가 사파트의 포효를 듣고 에이비스들이 기지 근처까지 내려와서 섣불리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야.”

 “물리적 거리로는 그렇게 멀지 않은데…낭떠러지이기 때문이지?”

 표식 근처에 빨간 잉크로 굴곡진 선이 용머리 전진기지에서부터 골짜기까지 빙 둘러 그어져 있었다. 공중에서 뛰어내린다면 금방이겠지만, 도보로 가야 한다면 골짜기 끄트머리에서부터 이어진 비탈길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기지 입구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진입 경로를 설명하는 선으로 그라하가 이해하고, 그게 맞다는 듯 모험가는 대답 대신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랑데르 가는 전날 키마이라 때문에 입은 피해가 크고, 아유나르트 가가 그나마 지원을 나갔지만 에이비스 말고도 흥분한 다른 마물들이 하나 둘 몰려들고 있어서 이걸 방어하는 걸로도 벅차.”

 “그러면 사파트가 다시 올라오기 전에 토벌을 해야 피해가 최소화 되겠군. 방어선이 언제 뚫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잖아.”

 “뒤랑데르도 추가로 사병을 보내겠다고는 했지만 피해를 줄이려면 그게 최선이겠지.”

 새벽에게 급하게 지원을 부탁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예고되지 않은 상급 마물의 소환은 반드시 크고 작은 희생을 만들고, 척박한 커르다스의 땅에서는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용머리 전진기지의 병실 침대가 비지 않는 이유는 따로 없었다. 거창한 이유 없이도 사람은 쉽게 죽고, 얼어붙고, 썩어간다.

 “너와 함께 가려고.”

 모험가는 눈을 들어 그라하를 보았다.

 “사실 사파트만 토벌한다면 혼자 가도 괜찮지만…나 혼자라는 걸 알면 아마 마물을 더 불러모을 가능성이 커. 방어선을 유지하고 녀석을 상대하는 걸 동시에 할 수는 없으니까. 한 명이라도 더 가세해서 어떻게든 외부 피해를 줄이는 게 나을 것 같거든.”

 사파트는 인간의 공포심을 아는 마물이었고, 그렇기에 얼마든지 더 영악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모험가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하여 뒤따르는 희생을 굳이 감당할 필요는 없다. 늘 그렇듯, 피할 수 있는 만큼의 피해는 최소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가야지!”

 생각을 마친 듯 그라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도를 한 번 내려다본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와 모험가와 마주한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돼? 방어선 지원, 아니면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서 너를 엄호하는 쪽? 부상자가 많으니 치유사도 추가 지원이 올 텐데, 마물때문에 성도에서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모험가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만족스러운 답이었다.

 “골짜기 아래로는 날아서 내려갈 거야. 그 전에 기지 앞 방어선에서……”

 모험가가 지도 이곳저곳을 짚으며 동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에 그라하는 귀를 쫑긋거리며 경청한다. 집중한 탓에 몸이 기울어져 마주보고 앉은 거리가 꽤나 가까워졌지만 모르는 눈치였다. 전달이 끝나자 그라하는 이해한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해했어. 그러면 우선은 엄호를 위해 방패를 들지. 출발 시간은 어떻게 돼?”

 그 물음에 모험가가 그라하를 바라보던 시선이 위아래로 느리게 움직였다.

 “네 준비만 끝나면 바로.”

 …아.

 그제야 그라하는 자신의 차림새를 다시 한 번 자각했다. 머리는 여전히 풀어헤친 그대로고, 옷도 입고 잔 옷이다. 모험가를 기다리게 할까봐 정말 딱 씻을 것만 씻고 나와 들은 탓이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감까지 뒤늦게 자각한 그라하는 진정한 것이 무색하게 얼굴을 붉히며 떨어졌다. 그가 쥐고 있던 지도는 모험가가 자연스럽게 받아 다시 돌돌 말아 두었다.

 “아, 그, 그렇지. 미안. 급하게 씻고 나오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네. 하하…”

 “내가 급하게 전달하러 와서 생긴 일이니 네가 사과할 건 없지.”

 그라하의 사과를 담백하게 일축한 뒤 모험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의자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은 뒤 문까지 걸어가다, 등을 돌려 그라하에게 말했다.

 “준비 되면 불러줘. 텔레포 승인 받고 있을 테니.”

 그리고 문은 다시 소리없이 닫혔다.

 그제야 그라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우…….”

 붉은 머리칼 위로 귀가 더 빨개진 듯 했다. 물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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