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해설

별빛 없는 밤

크리스마스 기념 연성

별빛 축제에 관한 설명을 듣고서 아실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풍습이네.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걸.”

정작 에스티니앙도 거리를 뒤덮은 장식을 본 뒤에야 지금이 별빛 축제 기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명색이 고향 명절이라지만 그는 오랫동안 이런 축제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12살부터는…. 무덤덤한 낯으로 기억을 되짚어 보던 에스티니앙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애인의 손을 찾았다. 손가락을 단단히 얽어서 깍지를 꼈다. 익숙한 굳은살의 감촉이 그를 다시 현재로 건져 올렸다. 옛날 일로 새삼스레 우울해할 시기는 지났다. 그러나 어떤 사건들은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예기치 않게 마음을 들쑤시고는 했다. 그 해의 별빛 축제는 가게에서 파는 슈니발을 부숴 먹으며 끝났다.

다음 해,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선물을 준비했다. 축제 기간에 맞춰 장인 길드에 의뢰를 넣으면서 이런 건 좀 유난스러운가, 싶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얼토당토않은 합리화를 마쳤다. 아실은 별빛 축제 선물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좀 늦게 챙기는 셈 치자고. 의뢰 기간을 빠듯하게 잡은 탓에 물건이 완성된 건 축제가 끝물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선물은 모자였는데, 양옆으로 뺨을 가리는 용도의 덮개가 길게 내려와 있고 덮개 끝에 달린 단추를 턱 아래에서 채워 얼굴을 단단히 감싸는 종류였다. 아실은 모자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추운 계절에 익숙하지 않아서 외출할 때면 종종 자질구레한 방한용품을 챙기는 걸 잊어버리곤 했다. 한참 기뻐하던 아실은 문득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으쓱했다.

“안 될 건 없지.”

별빛 축제가 아이들을 위한 행사긴 해도 어른들이 서로를 챙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에스티니앙의 경험상 그런 짓을 했다고 난데없는 우박이 내리거나, 정체 모를 큰 개가 달려들거나, 옛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훈계하러 오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가 일찌감치 붉은 옷의 성인들과 인연이 끊어졌던 탓일 지도 모르겠지만.

에스티니앙은 12살 겨울에 있었던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뚜렷한 자의식 없이 알베리크가 시키는 대로 식사, 운동, 수면을 규칙적으로 챙겼던 것만이 어렴풋했다. 혼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니메이아의 성인은 해를 넘기도록 찾아오지 않았다. 선물은커녕 조의조차 없었다. 이맘때쯤이면 부모님은 마을 어귀며 목초지로 가는 오솔길, 혹은 장이 서는 옆 마을에서 성인을 만나 일일 수행원으로 임명받았다고 말하곤 했는데도. 별빛 축제의 작은 거짓말을 깨달은 뒤부터 소년은 누군가와 슬픔을 나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접었다. 별빛 한 점 없는 밤에 홀로 길을 나선 것처럼 막막했다.

반대로 알베리크는 꽤 오랫동안 별빛 축제를 신경 써줬다. 스승과 함께 보낸 첫 번째 겨울의 기억은 대체로 흐릿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별빛 축제 기념으로 슈니발을 먹었다는 사실만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먹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며 망치를 치켜든 알베리크가 실수로 과자 대신 탁자를 내리쳤기 때문이다. 슈니발을 부숴 먹기에는 어른의 손아귀 힘으로도 충분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알베리크는 축제 기간이 되면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훈련을 빼 주었다. 간단한 체력 단련만 마치면 자유였다. 쉬어봤자 할 일도, 갈 곳도 없어서 에스티니앙은 자발적으로 훈련장에 출석했지만 말이다. 늘 하던 대로 몸을 혹사하고 돌아오면 스승이 별빛 축제 기념이라며 선물을 건넸다. 알베리크는 어린아이와 가까이 지낸 적도 그다지 없거니와 요령을 피우는 사람도 아니어서, 무엇이 필요하다거나 낡았다거나 하는 제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는 했다. 16살부터는 이제 선물 받을 나이가 아니라며 거절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네가 무슨 어른이냐. 키도 아직 요만한 게.’

에스티니앙은 정수리 위에서 휙휙 키를 재는 손짓이 기분 나빴다. 제자가 인상을 쓰자, 스승은 그대로 손을 정수리에 얹어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쓰다듬는 것치고는 손길이 거칠어서 에스티니앙은 머리가 금세 산발이 됐다. ‘어른이 주면 그냥 좀 받아라, 이 녀석아.’ 알베리크가 나름대로 마음을 써주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다만 16살 소년에게 스승의 행동은 좀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에스티니앙이 스승을 내려다볼 즈음부터는 알베리크도 제자에게 선물 안겨주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로 10년이 넘게 흘렀다. 그는 당시의 알베리크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이제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지도 다르고, 관계도 다르지만 선물 받을 사람을 아끼는 건 마찬가지였으므로.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보다가 에스티니앙은 문득 깨달았다. 지금까지 보내왔던 별빛 축제들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별빛조차 없는 밤에 알베리크가 등불을 들고 마중 나와 주었던 덕분이었다. 그는 스승의 술 취향이 어땠는지를 떠올려 보다가 그냥 제 입에 맛있었던 술을 몇 병 꾸려서 보내기로 했다. 배은망덕한 제자 노릇은 실컷 했으므로.

에스티니앙은 알베리크의 전례를 참고해 적당히 쓸모없는 물건을 선물로 골랐다. 실용성 넘치는 물건은 으레 수명이 다하면 버려지는 법이었다. 스승에게 받았던 별빛 축제 선물 중 지금까지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실은 뭘 받든 간에 활짝 웃었으므로 선물을 고심하는 재미는 약간 떨어졌지만…. 어느 해인가 이에 관해 가볍게 불평하자 애인은 이렇게 대꾸했다. ‘난 네가 리본만 매고 와도 좋을 것 같은데.’ 그래서 에스티니앙은 다음 해에 농담 삼아 목에 리본을 둘렀다. 미처 몰랐던 게 있다면 아실이 생각보다 진심을 담아 그런 대답을 했다는 점이다. ‘올해는 나야.’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실은 리본을 풀어서 순식간에 그의 손목을 묶었다. 에스티니앙은 저항할 틈도 없이 소파로 자빠졌다. 덕분에 진짜 선물은 다음날에나 줄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는 아실도 별빛 축제 선물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알베리크 앞으로는 각 지역 특산주와 더불어 아실이 지하실에서 빚은 보존식이며 발효식품, 가끔은 도수 높은 약주가 배달되곤 했다. 에스티니앙이 받는 선물은 좀 더 다양했다. 옷과 같은 생필품부터 어디에 쓰는지 모를 장식품까지. 올해는 손 보습제였다.

며칠 보습제를 바르던 에스티니앙은 문득 손바닥의 굳은살이 조금 말랑말랑해지지 않았나 싶었다.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어느새 아실이 다가왔다. 뭘 하고 있느냐며 묻기에 에스티니앙은 말없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애인은 그의 손을 조물조물 주무르다가 보습제를 좀 더 발라주었다. 담백한 손길이 좋기도 했지만 조금은 감질났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손을 모아 잡고 입을 맞췄다.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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