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해설

새해 손님

신년 연성

-새해 기념 가내 드림(에스빛전)과 옆집 드림(에메+빛전)

에스티니앙은 묘한 직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장 저편에서 눈에 익은 미코테 녀석이 큰 귀를 쫑긋 세우고 신나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질 즈음에는 ‘아실!’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도 들렸다.

아실은 발이 넓은 편이었는데, 때때로 그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손님을 맞이하고는 했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희한한 지인들이 여러 개의 세계 중 하나에서 왔다는 식으로 이해했다. 실제로는 더 복잡한 내막이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자주 보다 보면 몇 마디쯤은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러다 보면 친구 비슷한 사이가 되기 마련이었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나’랑 친하다며? 그래서인지 지금 아실에게 찰싹 들러붙는 밀밭 색 털뭉치는 에스티니앙에게도 꽤 살갑게 굴었다.

아실은 무척 반색했다. 냅다 달려든 에덴을 르베유르 쌍둥이 대하듯이 마주 안아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털뭉치! 어떻게 왔어? 부르지도 않았는데! 소환이 가능하면 역소환도 되지 않겠어요? 마침 할 일 없는 마도사가 있길래 부탁했단 말씀! 그 양반이 순순히 들어줄 리가 없는데, 또 얼마나 혼나고 온 거야? …아무튼! 저번 토벌전 뒷마무리는 잘 됐나요? 불려 나온 건 오랜만이라 그대로 돌아가려니까 좀 어색하더라고요…. 에스티니앙은 둘만 아는 얘기를 종알거리는 게 약간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못마땅해하는 티를 냈다가는 합심해서 놀릴 게 뻔했으므로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저녁 장을 마저 보는 내내 에스티니앙과 아실은 조용히 눈짓을 주고받았다. 에스티니앙의 손에 들린 통구이용 도도가 두 마리에서 세 마리로 늘어났고, 아실이 어깨에 멘 장바구니에는 샐러드용 야채에 이어 포포토 한 무더기와 달걀 두 줄이 추가되었다. 주방이 넓지 않아서 요리를 제때 내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좀 늦는 건 털뭉치도 이해하겠지?’라는 아실의 말에 녀석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응!’하고 대답했기 때문에 에스티니앙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자, 깎아.”

아실이 도도 통구이를 준비하는 동안 에스티니앙은 포포토에 묻은 흙을 씻었다. 그러고는 포포토가 쌓인 식탁에 에덴을 앉혔다. 녀석은 손에 들린 스푼과 눈앞의 포포토 산, 옆에서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에스티니앙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고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손님인데?”

“난 집주인인데.”

에스티니앙은 맞은편에 앉았다. ‘바꿔 주랴?’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에덴이 쥔 스푼을 과일용 장도칼과 교환해 줬다. ‘날카로우니까 조심하고.’ 그가 솔선수범해서 포포토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으므로 에덴은 어리둥절한 채 상대를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에스티니앙이 이따금 툭툭 내뱉는 칭찬에 에덴은 금세 우쭐해졌다. 포포토 껍질을 처음부터 끝까지 끊기지 않게 깎는 묘기를 부렸을 때는 통구이를 감시하던 아실을 불러서 보여주기까지 했다.

지하실에 내려간 아실과 에덴이 곁들여 마실 담금주를 골라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식사 준비가 끝났다. 바삭하게 익은 껍질 아래로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도도 통구이 두 마리(화덕에 자리가 모자랐기 때문에 남은 한 마리는 아직 굽는 중이었다), 샐러드 세 종류(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식초를 듬뿍 붓고 큰 보울에 섞은 야채 샐러드, 후추와 버터와 소금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매쉬드 포포토, 신선한 마요네즈 소스로 버무린 달걀 샐러드), 라자한 식 커리 가루와 토마토로 맛을 낸 야채 샥슈카(달걀은 한 사람당 한 개뿐이었는데, 샐러드를 만드는 데 다 썼기 때문이다)로 식탁이 꽉 찼다. 뒤늦게 접시에 올라온 도도 통구이는 물론이고 후식으로 사 온 케이크까지 싹싹 긁어먹은 뒤에야 식사가 끝났다.

에덴이 돕겠다고 나선 덕분에 식사 뒷정리도 빨리 해치울 수 있었다. 세계를 건너서 온 손님들은 으레 하룻밤 묵었다 가고는 했으므로, 에스티니앙도 욕실로 제일 먼저 들어간 에덴이나 손님방 침구를 정리하는 아실에게 구시렁거리지는 않았다. 다만 셋 모두가 씻고 나서 시작한 카드 게임에 좀 더 진심으로 임했을 뿐이다. 카드를 정리한 뒤 에덴이 ‘파자마 파티 어때요?’ 하고 조르기 시작했을 때,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보며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아실은 거기까지 어리광을 받아주지는 않았다. ‘달래줘야 해서.’ 알았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고서 에덴은 손님방으로 물러났다. 문 너머로 쏙 사라지는 풍성한 꼬리를 노려보면서 에스티니앙은 속삭였다. ‘핑계가 나인 건 별로인데.’ 아실은 핑계 아닌데, 라고 대꾸하며 팔짱을 꼈다.

한편, 세계를 건너간 에덴이 푹신한 손님방 침대 위에서 신나게 굴러다니고 있을 무렵….

영웅의 사리사욕에 동원당한 가장 오래된 마도사는 모처럼 찾아온 고요함을 즐기고 있었다.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니 이렇게 평화로웠다. 시선을 조금 비끼면 광장에 덩그러니 남은 초록색 텐트도 특이한 조경물 정도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러니 대적자가 법석을 떨며 돌아올 때까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호젓함을 실컷 만끽해야 하는 법이었으나….

막상 시간이 지날수록 에메트셀크는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역소환 술식을 가동하며 보았던 것을 곱씹어 보았다. 술식이 도착지로 지정한 것은 영웅이 최근에 ‘소환되었다’는 세계였는데, 그 세계를 가리키는 좌푯값에는 제법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요점을 알아들을 리도 없고, 나들이 계획을 철회할 생각은 더더욱 없을 테고, 슬슬 자신도 시달림 없이 휴식을 즐길 때가 되었기 때문에 영웅 나리에게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원래 눈에 보일 때보다 보이지 않을 때, 시끄럽게 굴 때보다 조용할 때 더 불안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 에메트셀크의 경험상 사고뭉치들은 매번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조용하게 큰 사고를 쳤다. 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기억에 남은 좌표를 확인하고, 역소환 술식이 자신을 안전하게 실어 나르도록 미세한 조정을 거친 뒤, 손가락을 딱 튕겼다.

몇 분 뒤, 영웅은 복도에서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났다. 신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낯설지 않았지만, 그는 불청객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들려오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소리였으니까. 다음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영웅은 너무 놀란 나머지 꼬리털이 죄다 곤두섰다. 침입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동시에 초에 불이 붙었다. 어둑한 불빛이 침입자를 비추는 순간 영웅은 꽥 소리를 질렀다.

“여긴 왜 왔어요?!”

숨을 한 모금 들이마신 뒤에는,

“이거 무단침입인 건 알아요?!”

라고 항의했다. 에메트셀크는 코웃음을 쳤다. 사고뭉치를 감시하러 온 사람을 대접해도 모자랄망정 불청객 취급이라니? 두 대적자는 밤이 깊었다는 것도 잊고 왁왁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반박하기 바빴던 탓에 그들은 누군가 복도를 우당탕 뛰어오는 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무신경함은 이내 대가를 치렀다. 에메트셀크는 허리를 찌르는 창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정확히 겨눈 총구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인상을 썼다.

“이건 또 뭐야?”

몇 분 뒤, 거실.

다행히 집주인 중 하나는 에메트셀크와 구면이었다. 덕분에 허리가 가로로 썰리거나 머리통에 바람구멍이 나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불 꺼진 벽난로 위에 총을 올려두고 소파에 앉은 아실과 달리, 옆자리를 차지한 에스티니앙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채 마창을 껴안고 있었지만…. 에메트셀크는 해명을 듣고도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창잡이가 못마땅했다. 집주인들을 마주 보는 위치에 고집스레 서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영웅은 어디에 있었냐면, 에스티니앙 반대편에 앉아 아실의 팔을 구명줄처럼 붙들고 있었다. 에메트셀크는 하마터면 ‘넌 왜 그쪽에 붙어있는 거냐?’라고 투덜거릴 뻔했다.

“…그래서 우리 털뭉치를 다시 데려가겠다고?”

무단침입, 혹은 가정방문 사유를 들은 아실은 이렇게 물었다. 에메트셀크는 인상을 썼다.

“정확히는 다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거긴 한데.”

에메트셀크는 눈썹을 치켜떴다. 별일이군, 저치와 의견이 다 맞을 줄이야. 물론 고작 이것 하나만으로 에스티니앙에 관한 평가가 뒤집히지는 않았다.

아실은 불청객에게도 늦었으니 자고 가라고 말하는 관용을 보였다. ‘집이 좁아서 침대가 더 없으니까, 손님방을 같이 쓰든 거실 소파에서 자든 마음대로 해.’ 그는 에덴에게 내일 아침에 보자며 웃어주고는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집주인들이 사라지자마자 에메트셀크는 대적자를 쏘아봤다. 손님방이 달랑 하나라니 무슨 집이 이렇게 궁색하냐는 불만부터 너는 대체 누구 편이냐는 타박, 돌아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무섭지 않으냐는 으름장이 이어졌다. 영웅은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잠은 자고 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늘 그렇듯이 영웅의 요구는 일관적으로 들어주는 편이 이득이었다. 녀석은 사람을 귀찮게 구는 데 도가 튼 데다가 원하는 일을 방해받으면 두 배로 성가시게 굴었다.

해가 뜨자마자 갈 거라는 엄포를 놓기가 무섭게 영웅은 아침 식사를 하고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영감님은 몰라도 저는 아침을 꼭 먹어야 하거든요? 게다가 아실이 만들어 줄 거란 말예요! 그걸 놓칠 순 없지.’ 에메트셀크는 대적자의 식생활이나 내일 아침의 요리 담당이 누구인지에 관해서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변변찮은 이유로 귀가 시간을 늦춘 대가는 좀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냐, 그래라.’ 성의 없는 허락에 표정이 영웅의 표정이 밝아진 찰나, 에메트셀크는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거실에서 사라졌다. 영웅은 다급히 손님방으로 뛰어가 손잡이를 철컥철컥 돌렸다.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덴은 하는 수 없이 안방 문을 두드렸다. 얼굴을 내민 쪽은 에스티니앙이었다. 그는 열쇠를 챙겨 손님방까지 함께 가줬다. 문이 마법으로 잠긴 탓에 별 소용은 없었지만. 복수를 다짐하는 에덴 옆에서 에스티니앙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 뒤에는 에덴을 끌고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에스티니앙은 에덴에게 뜬금없이 화로를 넘겨주었다. 그는 새 이불을 든 채 거실 쪽으로 고갯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소파 근처에 화로를 내려놓은 에덴은 내가 여기서 자라는 뜻이구나, 생각했지만…. 이불을 둘둘 감고 소파에 누운 건 에스티니앙이었다. 그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에덴에게 오늘의 잠자리가 어디인지 일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른 가서 문 닫고 자라. 내 애인 감기 걸리니까.”

아실은 추위를 잘 탔다. 아실의 털뭉치는 손님이었다. 애인과 같이 쓰는 침대는 둘이 눕기엔 좋아도 셋이 자기엔 좁았다. 그래서 에스티니앙은 결론을 내렸다. 어쩌겠어? 내가 나가야지, 뭐. 새벽 공기가 차가웠으므로 에덴은 예의상의 거절을 생략했다. 거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등 뒤로 나지막한 경고가 날아왔다. ‘괜히 신나서 자는 애 깨우지 말고. 알았냐?’ 정곡을 찔린 에덴은 발소리를 죽여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실이 만들어 준 아침을 먹겠다는 에덴의 야망은 안타깝게 좌절되었다. 새벽에 있었던 소동 탓에 아실은 죽은 듯이 이불에 파묻혀 있었다. 에스티니앙이 달걀물에 적신 토스트며, 곁들여 먹을 반찬을 익히는 동안 에덴은 식탁에 앉아 힝힝 울었다. ‘같이 사는 나도 아침에는 아실의 요리를 자주 못 먹는다’라는 집주인의 핀잔은 덤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다면 에스티니앙이 만든 달걀 토스트가 제법 맛있었다는 점이다.

에덴이 진하게 우린 식후 차(커피 대용이었다)까지 야무지게 챙겼을 무렵, 아실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 배웅을 하기 위해서였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연신 하품을 해 대는 걸 보면 얼마 안 가 다시 졸기 시작할 터였으나.

“저 갈게요.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비몽사몽인 아실을 껴안고 에덴은 인사를 건넸다.

“그래, 털뭉치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잘…돌아가고.”

에메트셀크는 조용히 나타나서 요란스럽게 투덜거렸다. 인사가 쓸데없이 오래 걸린다는 불평에 에덴이 ‘그러는 영감님은!’하고 외친 순간 손가락을 딱 튕기는 소리가 났다. 지난밤의 불청객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아실은 느릿한 발음으로 감상을 남겼다. ‘새해 손님을 생각보다 요란하게 치렀네.’ 에스티니앙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실은 고개를 몇 번 흔들어 보다가 결국 애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나, 더, 잘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눕혀놓으면 점심쯤엔 완전히 잠에서 깰 터였다. 그러다가 거실에 늘어진 햇빛 쪽으로 아실이 고개를 기울이는 바람에 잠시 발을 멈췄다. 둘은 새해의 첫 햇볕을 함께 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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