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기록

마중과 산책

For. 솜 (@cottoncall)

-주의: 6.0 효월의 종언 스포일러 / 남의 집 드림 말아먹음. 당사자 분께 업로드 허락을 받았습니다.

에메트셀크는 집무실에 쳐들어온 두 원수…, 아니, 두 친구를 보며 인상을 썼다.

“그렇지만 비가 오잖아, 하데스!”

“맞아, 비가 오는데 넌 우산도 안 들고 왔다며!”

에메트셀크는 평소처럼 차근차근 딴지를 걸었다. 우선 자신은 이제 하데스보다는 에메트셀크로 불리는 쪽을 선호한다. 오늘처럼 갑작스러운 기상 현상은 이동 마법이나 방수 마법, 건조 마법, 더 간단하게는 창조 마법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여기까지 굳이! 번거롭게! 올 필요는! 없다고! 그는 늘 그랬듯이 막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젬과 휘틀로다이우스는 입을 삐죽거리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데스는 야박하기도 하지.’ ‘우리가 잘못 키웠어, 아젬.’ 두 장난꾸러기는 짐짓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에메트셀크는 누가 누굴 키웠다는 거냐고 다시 딴죽을 걸려다 심호흡했다.

친구들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젬은 평소 도시에 붙어있질 않았고, 휘틀로다이우스는 저렇게 보여도 맡은 일에 성실한 편이었다. 업무를 즐긴다는 쪽이 더 알맞은 표현이겠지만. 에메트셀크로 말할 것 같으면 직위에 따르는 책임을 내팽개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탓에 요즘은 휘틀로다이우스와도 자주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아젬은 도시에 돌아올 때마다 셋이 모이는 일에 묘하게 집착했다.

에메트셀크는 시계와, 부슬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과, 책상 맞은편에 나란히 턱을 올리고 쭈그려 앉은 두 녀석을 차례차례 노려봤다. 그러곤 마침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젬과 휘틀로다이우스는 환호성을 지르며 양옆에서 팔짱을 꼈다. 에메트셀크는 두 친구…, 아니, 두 원수에게 연행당하다시피 끌려갔다. 셋은 우산 하나를 비좁게 쓰고서 떠들썩하게 에메트셀크의 집까지 걸었다.

그로부터 만 이천 년 뒤, 환영 도시 아모로트는 가끔 물이 샜다. 정확히는 누수가 아니라 거대한 고래 요정, 비스마르크가 내뿜고 간 공기 방울이 서서히 쪼그라들면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했다. 에메트셀크는 도시를 산책하다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짠물에 몸이 흠뻑 젖고는 했다. 그런 봉변만 아니라면 누수도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는 환영 도시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인 풍경이 꼭 비가 그친 직후의 정경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감상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바다 밑의 그림자에 불과한 이 도시에는 날씨 따위 없었으니까. 설령 그런 게 있었더라도 분명히 맑았겠지. 내가 재현해낸 그날은. 에메트셀크는 손가락을 튕겨 웅덩이를 말끔히 없앴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비가 오는 것처럼 바닷물이 흩뿌리듯이 새는 날이 있었다. 영웅이 에메트셀크에게 우산을 씌워준 것도 그런 날이었다. 물이 새는 줄도 모르고 옥상에 앉아 환영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불쑥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영웅이 높은 곳까지 올라온 건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는 물이 빠지며 생긴 풍맥과 교감을 마쳤으니까. 에메트셀크가 못마땅했던 것은 영웅이 우산을 씌워주며 내뱉은 타박이었다.

“비가 오잖아요, 에메트셀크!”

에메트셀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물이 새는 거지. 이건 ‘진짜’ 빗물이 아니야. 세상 어떤 비에서 이렇게 짠맛이 난다더냐?”

영웅은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래서 온몸이 다 젖는 것도 모르고 앉아 있었어요? ‘이건’ 비가 아니라서?”

늘 그랬지만 대적자는 오늘도 성가셨다. 에메트셀크는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옷과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말랐고, 고풍스러운 양식의 우산이 왼손에 생겨났다. 그는 우산을 펼치며 영웅이 드리운 그늘에서 빠져나왔다. 내친김에 부유 마법으로 몸을 띄워 옥상을 벗어났다. 바닷물이 묘하게 새는 김에 산책이나 좀 해볼까 싶었다. 영웅이 웬일로 ‘할 말 없다고 도망가지 마라’는 종류의 야유를 하지 않아 돌아보니, 그는 우산을 쓴 채 허공에 부유하는 에메트셀크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의 달갑지 않은 친분 탓에 녀석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 에메트셀크는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우산이 갑자기 위로 둥실 떠올랐다. 영웅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하늘을 나는 우산에 환호성을 지르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고작 부유 마법에 저토록 좋아하다니 이래서 혼이 불완전한 놈들은…. 에메트셀크는 영웅을 보며 혀를 찼지만, 영웅이 신난 목소리로 말을 걸며 따라오기 시작한 뒤에는 자기 자신에게 혀를 찼다. 이래서야 사색하기는 글렀군.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따라가고, 따라가는 쪽은 걷는 게 아니라 우산에 매달려 떠다니는 꼴이었지만, 어쨌거나.

두 대적자는 비 오는 환영 도시를 산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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