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14

[파판14/빛전라하]귀환지

영웅의 귀환텔 좌표가 아직도 크리스타리움이었다

솔새둥지 by 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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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판타지14 메인스토리 5.3스포 (*5.3당시에 쓴 글이라 설정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 빛전의 이름(에레타)가 명시되며, 고유 설정이 있습니다.


[빛전라하] 귀환지

by. 솔방울새

'내가 요즘 물러지긴 했구나. 처음부터 경계했어야 했는데.'

몸뚱이에서 움직일 수 있는 부위를 확인하듯 손끝부터 움찔거리며 깨어났다. 뻐근하지만 목은 괜찮고, 척추는 멀쩡했지만 갈비뼈가 너넛 개는 나간 모양이었으며, 지독한 분비액이 튄 자리마다 타는 듯이 화끈거리며 피부가 녹는 게 느껴졌다. 아직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시야 탓에 현기증이 일며 한 쪽 눈가를 덮은 안대 너머가 보이다 말다 했다. 겨우 쓰러뜨렸던 거대한 오르쿠스의 시체 주변으로 불길한 검은색의 에테르가 뒤엉켜 일렁이는 광경이 보였다. 눈에 새겨둔 뒤에 뻐근한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에는 자신을 두고 홀로 도망치려는 모양인 상인의 등이 보였다. 아니, 멋대로 오르내리는 시력 탓에 코앞의 광경처럼 보여 잠시 헷갈렸다. 이미 그자는 저 멀리 굽어보는 바위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뒤였다. 짐까지 챙긴 사람이 저렇게 멀리 간 것을 보면 자신은 이대로 엎어져 적어도 몇 분은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저 상인이 마을에 도착하면 치유술사를 보내주긴 하려나?'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해봤지만 영 기대감이 안 들었다. 다소 분한 일이다. 마물에 기습당하려 하길래 곡괭이질도 하다 말고 달려와 몸을 던져 대신 맞아줬건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도망치다니. 전투 시작도 전에 입은 그 부상만 아니었더라면 A급 마물이라고 해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너덜너덜해지진 않았을 테다. 

그나저나 피가 계속 빠져나가고 있어 머지않아 다시 기절할 것 같은데, 어쩐다. 이대로 구조대나 치유술사를 기다리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짧은 고민 끝에 마지막 남은 정신력으로 에테르를 끌어모아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실패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이동하는 순간까지도 주변에서 일렁이는 시커먼 에테르가 눈에 밟혔지만, 다행히 시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간신히 확인했다.

'....근데 나 어디로 이동하고 있지?'

에레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데이트 삼아 수정공과 함께 찾아온 일 메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만 타워에서 멀어진 그의 몸 상태가 슬슬 걱정되어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수정공이 분 뿔피리 소리를 듣고 찾아온 커다란 날갯짓에 일 메그의 꽃잎들이 일제히 떠올라 흩날렸고, 그 속에서 먼저 아마로 위에 올라탄 수정공이 웃으며 푸른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자. 집으로."

"집으로..."

별것 아닌 짧은 말에도 괜스레 가슴이 들떠 오른 건 그렇게 부를만한 곳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겠지. 크리스타리움에서 온 아마로는 우리를 그 도시로 태워다 줄 테고, 집이라 함은 돌아갈 곳을 의미한다. 긴장을 내려놓고 휴식할 수 있는 안식처, 언제든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장소, 나를 반기는 곳.

평생 길게 머무는 일 없이 이곳저곳 몸을 의탁하며 살아 온 떠돌이의 의식에 도시 하나가 온전히 집으로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날 에레타는 때에 따라 이리저리 바꾸어 댔던 텔레포트 귀환지를 크리스타리움으로 고정해두었다. 수정공과 함께 타워를 높이 올라 마지막 원형 아씨엔을 물리치고, 원초 세계에서 다시 모험을 시작한 뒤에도. 그가 굳이 귀환지를 정정하는 일은 없었다.

비록 수정공을 떠나보냈지만, 멸망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화로웠던 크리스타리움 광장에 비명이 높게 울렸다. 그들의 세계를 구한 어둠의 전사가 피투성이로 광장에 떨어졌으니 당연했다. 

위병대가 놀란 시민들을 진정시키고, 몇몇이 의료관으로 달려가 상황을 알렸으며, 경험이 많은 이들은 그 사이 능숙하게 응급처치했다. 기습을 당했는지 영웅은 익숙한 갑주가 아닌 천으로 된 평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곳곳에 묻은 독액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천과 피부는 물론이고 금속으로 이루어진 옷 장식까지 녹여 눌어붙어 있었다. 

그들의 영웅이 의료관 침대로 무사히 옮겨져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 시작할 즈음엔 레이크랜드에 주둔하고 있던 라이나가 수정공 관문을 황급히 넘어왔다. 

"놀라게 해서 미안, 나도 기절하기 직전에 겨우 이동하느라 어디로 가는지 생각도 못 했어."

"무사하셔서 다행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기절해가는 상태로 세계를 넘어왔단 말씀이신가요?"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거창한 것 같네..."

"보통은 그런 걸 대단하다고 여깁니다만."

머쓱해진 에레타는 붕대 감긴 손으로 습관처럼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귀환 텔레포트의 좌표가 이곳으로 찍혀 있었을 뿐이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에테라이트를 타는 것 자체가 어려운 기술이라고 들었다. 숙련된 모험가들도 긴급한 상황에 정신을 집중해 텔레포트를 시전하는 게 위험천만한 짓이라 금기사항이고. 하지만 도시와 대륙과 세계를 넘나드는 게 일상이 되다 보니 솔직히 요즘은 별생각 없이 코앞의 거리도 텔레포트를 타버리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건 여기까지 쉽게 오가게 해 준 라...수정공이지. 날 이렇게 금방 치료해 준 의료관 사람들의 솜씨도 그렇고."

처음 이곳에 넘어왔을 때의 급박한 상태를 생각하면, 다시 깨어난 어둠의 전사는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기에 라이나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큰일이 일어난 건 아닌 모양이라 다행입니다. 어둠의 전사님이 크게 다쳐왔단 말에 다들 많이 놀랐거든요. 대죄식자들을 연이어 쓰러뜨릴 때조차 두 발로 걸어 들어오셨던 분이니까요." 

라이나가 생각난 듯 곧장 덧붙였다.

"물론 그때도 많은 부상을 입으셨겠지만요. 치유마법에 능한 분들이 늘 함께하고 계셔서 그저 저희가 보지 못했을 뿐일 테고요."

"뭐...그렇지. "

사실이어서 더 할 말이 궁했다. 영웅이 크게 다친 모습을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에게 보였다가는 불안감과 혼란을 일으킬 것 같아 일부러 숨긴 적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숨기려다 부상을 악화시켜 수정공에게 크게 혼나기도 했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눈물 섞인 호소에 거듭 약속했었는데. 본의 아니게 이번에는 정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친 꼴을 보여버렸다. 얼떨결에 약속을 지키기는 했는데.... 이게, 정말 괜찮은 게 맞나?

"아무튼 이번에는 혼자 가볍게 나갔다가 급하게 싸울 일이 생겨서 다쳤어. 당장은 두 세계 다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줄래?"

"주민들은 어둠의 전사님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진정했으니 괜찮습니다. 그곳도 평화롭다면...수정공도 무사하시겠군요."

"응, 즐겁게 잘 지내고 있어. 곧 있으면 행복하단 말이 입버릇이 될 것 같던데."

조금 장난스레 말했지만, 라이나는 진심으로 안도한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에레타는 이쯤에서 그녀의 할아버지와 어둠의 전사가 동거를 시작했으며, 머잖아 부부 관계가 될지도 모른단 사실을 밝혀야 할지 고민했다. 

'돌아가는대로 라하랑 상의하고, 조만간 밝히는 게 낫겠다. 내가 말하는 것보단 수정공의 전언으로 듣는 게 라이나 입장에서 더 받아들이기 좋겠지.'

에레타는 몸 상태를 확인하듯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연금약에 치유술까지 골고루 들이부어 줬는지 상태가 꽤 양호해 일어나도 되겠단 판단이 서자마자 라이나가 만류했다.

"쉬세요.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더 늦으면 네 할아버지가 걱정하실 거야."

"어이가 없군요."

라이나는 기가 차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곧 에레타와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둠의 전사와 수정공이 깊은 관계가 되었단 사실은 노르브란트에 유성이 떨어지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여기서 다 고쳐가든, 그 상태로 돌아가든 걱정하시긴 매한가지일 겁니다. 움직여도 괜찮다면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쉐사밀 씨는?"

이미 결정했다는 듯 에레타는 베개 옆에 놓여있던 검은 안대를 들어 평소처럼 눈을 휘감았다. 

"제가 한사코 말렸는데 어둠의 전사님이 안 들으셨다고 하겠습니다."

"좋아, 라이나도 이제 내 공범이야."

이불을 들추고 일어나니 그제야 에레타는 제 옷차림이 보였다. 마물의 분비액에 평상복이 거의 녹아버렸던 탓인지 헐렁한 환자복이었다. 라이나가 갑자기 짤막한 나무막대를 하나 건네 와 받아 들고 의아하게 바라보니 그녀가 짧게 설명했다.

"기절할 때까지 손에 꽉 쥐고 계셨다고 합니다. 위병대원들이 중요한 물건일지도 모르니 챙겨두었다고 하더군요."

에레타는 잠시 의아하게 막대를 살펴보다 이내 정체를 깨닫고 허망하게 말했다.

"....내 곡괭이 손잡이네. 마물 체액에 녹은 모양이야." 

".....아, 네."

라이나가 순간 웃음을 참는 듯 어금니를 꽉 물고 막대를 도로 가져갔다.

"그랬군요. 살펴 가시고 수정공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물론, 라이나도 건강히 지내. 조만간 또 올게."

혼을 휘휘 내저은 에레타는 그 자리에서 텔레포트를 시전하고, 이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라이나도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병실의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섰다. 가는 길에 광장 쪽 병사들을 만나면 그들이 귀중히 챙겨온 막대의 정체를 알려 줄 생각이었다. 

에레타는 원초세계로 돌아오자마자 돌의 집으로 향했다. 한가롭게 원석 좀 캐고 온다며 나갔던 사람이 헐렁한 환자복 차림에, 옷 안쪽으로 언뜻언뜻 붕대가 보이는 꼴로 나타나니 다들 놀라긴 했지만 상황 설명을 듣고 대부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하 티아의 시선만은 유독 따끔하게 느껴졌지만 보고를 끝낸 뒤에 둘만의 대화를 나누면 되겠지 싶었다.

기라바니아 변방지대에서 쓰러뜨린 오르쿠스는 보통의 개미귀신 마물들과 전혀 달랐다. 곡괭이를 들고 엉망진창으로 싸운 게 부끄러워서 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땅속에 숨어 사냥감이 지나가기를 노리지만, 그놈은 강철도 녹여버리는 분비액을 분사하며 스스로 사냥감을 찾아 돌아다녔다. 돌연변이라 판단하고 마물에 대해 설명하자 돌의 집에 남아있던 야슈톨라와 알리제, 그라하가 생각에 빠졌다.

"현자의 나무 근처에서 주로 출몰했단 말이죠? 거긴..."

"거긴 제국이 검은 장미를 매립한 쪽이잖아!"

어쩐지 벌써 화가 난 투인 알리제를 진정시키며 에레타는 야슈톨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하필 그때 내 눈이 에테르를 봤거든. 이전에 야슈톨라가 검은 장미의 에테르를 보고 묘사했던 거랑 유사했어. 이전에 메씨족을 도울 때 그게 마물들을 광폭화 시킨단 건 알아냈는데...변이도 일으킬 수 있나?"

마지막 질문은 그라하 티아를 향해 시선을 돌리면서 나왔다. 그의 아픔을 건드릴까 염려되긴 하지만 그들이 그라하 티아만큼 잘 알 수는 없으니 확인이 필요했다.

"응. 내가 봤던 미래에선 대부분의 마물이 변이해서 더 위협적이었거든."

걱정과는 달리 담담하게 답하며 그라하 티아는 자신이 기억하는 다양한 돌연변이 개체들에 대해 설명했다. 들을수록 오르쿠스의 상태와 유사한 면이 있어 다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호기심을 충족한 야슈톨라가 말을 던졌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이제 원인은 알았으니, 기라바니아 변방지대의 마물들을 더 확인하고 검은 장미를 제대로 폐기해야겠군요. 누가 가죠?"

이런 건 대부분 에레타의 몫이었으므로 본능대로 손을 들었다. 이건 거의 골수에 박힌 습관이었다.

"나."

"당신은 안돼!"

"그건 안돼!"

"왜....?"

칼같이 막아선 알리제와 그라하에 이어 야슈톨라가 한심하다는 듯 못을 박았다.

"당신이 그것 때문에 죽었다는데 퍽이나 보내주겠군요. 부상자는 들어가서 요양이나 하세요. 타타루에게 이야기해서 에스티니앙 경에게 맡겨달라고 해야겠어요."

아니, 나만 죽은 게 아니잖아. 너희도 당했다고 들은 거 아니었냐고. 하지만 부상자인 건 사실이라 에레타는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괜히 나댔다가는 정말 혼날지도 모른다.

"알았어, 그럼 나는 좀 쉴게."

꼬리도 내리고 귀도 내려간 에레타가 고분고분하게 말하자 그라하 티아가 짧게 말했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응, 집으로."

이 와중에 우습게도 마음이 들떠올랐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주택 앞 미니 에테라이트를 타고 라벤더 안식처에 곧장 도착했다. 작지만 편안한 집에 도착하자마자 여태 침착해 보였던 그라하 티아가 와락 품에 안겨 왔다. 동그란 머리를 가슴에 부벼오는 움직임이 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따뜻하고 간지러워 손으로 쓰다듬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부스스하게 엉켰다. 외부 활동이 늘어 수정공일 적보다 결이 거칠어졌지만, 그렇게 변한 머릿결이 오히려 생기있게 느껴져 사랑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같이 갈걸."

"광물 캐는데 같이 가서 뭐 해?"

가볍게 웃으며 그라하 티아의 얼굴을 들어 올리자 울상이 된 낯빛이 보여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껏 걱정하고 있는데 웃는 연인이 야속했는지 그라하가 분한 숨소리를 냈다. 호들갑을 떨 만큼 큰 부상도 아니고, 금방 치료받은 데다가,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는데 아무래도 주변인들에겐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크리스타리움에 이어 새벽 사람들도, 연인도 이렇게까지 걱정하니 싫진 않지만 어색하고 묘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속상하단 말이야. 다친 덴 정말 괜찮아? 

"크리스타리움 의료관의 솜씨는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나저나 라이나가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라." 

손녀의 소식을 전해 들은 붉은 귀 끝이 쫑긋해졌다. 어차피 할 이야기긴 했지만 성공적인 화제전환이었다. 

"라이나가? 잘 지내는 모양이네, 다행이다. 크리스타리움도 평화로운거지?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응, 문제 없어 보였어. 내가 본의 아니게 잠깐 그 평화를 깨고 오기는 했지만?....아야."

장난기를 이기지 못하고 살짝 깐족거렸더니 얄미웠는지 그라하가 이를 세워 턱을 앙 물어버렸다. 적당히 하라는 뜻이겠지만 다른 의미로 자극받아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입을 맞춰버렸다. 따뜻하고 탄력 있는 입술 위로 뭉근하게 맞대어 부비다가, 혀를 밀어 넣고 자연스레 깊은 키스로 이어갔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며 그라하의 몸이 조금 뒤로 젖혀졌다. 그가 코끝으로 몰아쉬는 흐트러진 호흡이 확연히 가빠질 즈음에야 뜨거운 점막을 헤집던 혀를 거두고 입술을 떼었다.

"음, 하아..."

그 새 달뜬 얼굴이 된 그라하가 숨을 조금 고르자마자 에레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자연스럽게 헐렁한 옷 안쪽으로 손이 밀고 들어왔다가, 붕대에 닿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빠져나갔다.

"...왜."

"응?"

"왜 그 상황에 크리스타리움으로 간 거야? 경황이 없었다고 해도 너무 뜬금없잖아."

에레타는 이런 상황에 이런 질문이 더 뜬금없게 느껴졌지만 일단 솔직히 답했다.

"그 좌표가 내 귀환지였어. 밖에서 전투 불능 상태가 되면 일단 귀환지로 가다 보니까..." 

대답을 들은 그라하는 잠시 묘한 감회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자신이 세운 도시를 돌아갈 곳으로 여겨주고 있었단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어딘가 불만이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레티, 우리가 이곳으로 오면서 아까 뭐라고 했어?"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옷 속으로 들어가다 나왔던 그라하의 손이 이번에는 뺨에 따뜻하게 닿아왔다. 손이 닿고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간지러운 온기가 번졌다.

"전에 이야기했지만, 크리스타리움을 네 고향처럼 여겨주어서 기뻐. 하지만 이제 우리 집은 여기 있잖아. 나도 여기에 있고. "

"응...그렇지."

"그러니까 앞으로 위험에 처하거나 곤란해지면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나를 찾아오든, 이 집이든, 아님 돌의 집과 새벽의 동료들이든. 내가 다친 너를 직접 보살피고 도와줄 수 있는 곳으로."

응, 알았어. 그렇게 대답하며 에레타는 자신에게 돌아갈 곳이 더 생겼음을 새삼 깨달았다. 집이라 함은 돌아갈 곳을 의미한다. 긴장을 내려놓고 휴식할 수 있는 안식처, 언제든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장소, 나를 반기는 곳.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따뜻하게 맞닿은 이 품이 그 어느 곳보다도 제집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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