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데일 목가
에스빛전
-주의: 6.0 효월의 종언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 있음 / 원인 없는 시간여행 날조
아실은 낯선 흙냄새가 나는 곳에서 눈을 떴다. 하늘에는 구름이 흐르고 있었고, 가까운 데서 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완만한 산비탈에 자리한 목초지였다. 고향에서도, 에오르제아에서도 본 적 없는 풀이 불어오는 바람에 산들거렸다.
지맥이 갑자기 불안정해져서 텔레포 도중 엉뚱한 곳으로 떨어진 걸까? 여기가 원초세계 어디쯤일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1세계 어딘가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 이만한 목초지가 있을 만한 곳은 일 메그 뿐인데 지형이 영 낯설었다. 페오를 불러봤지만, 어린나무가 이번에는 바로 자신을 찾아줬다고 기뻐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텔레포를 다시 시도해봤으나 교감한 에테라이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해의 높이와 그림자의 길이를 보건대 아직 이른 오후였다. 아실은 근처의 지형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아무런 표지 없이 다시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기억에 새겼다. 보통은 조난 지점을 벗어나지 않는 게 좋았지만, 가진 거라곤 평소 들고 다니던 무기와 홀쭉한 배낭뿐이었다. 밤이 되면 짐승이 돌아다닐 테고, 지금은 식량도 없으니 인가를 찾는 게 시급했다.
아실은 양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양견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정작 양치기와 마주친 뒤에야 깨달았다. 이방인, 그것도 비에라 족 이방인을 처음 본 양치기의 반응이 어떨지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바랐던 대로 개는 없었지만, 개가 있는 것만큼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신 뭐야?”
양치기 소년은 눈도 좋았다. 멀리서 아실이 다가오는 걸 보고 단번에 뛰어와 지팡이를 겨눴다. 밀짚모자 아래로 삐죽 보이는 백발에, 자기 어깨를 조금 넘는 지팡이를 창처럼 겨눈 자세를 보자 에스티니앙이 떠올랐다. 모자 그늘 밑의 얼굴을 잘 보니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아있었다.
아실은 양손을 들어 공격 의사가 없다는 걸 알렸다. 다음으로는 막 숲을 떠나서 모험가 일을 시작했을 때나 읊었던 자기소개를 들려주었다. 나는 아실, 골모어 대밀림 출신이며 귀가 이런 건 비에라 족이라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는…. 소년이 텔레포가 뭔지 알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만 했다. 정작 양치기 소년이 지팡이를 거둔 건 아실이 묵을 곳을 찾고 있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런데, 여기 돈은 뭐라고 부르니?”
“길이잖아, 바보. 모험가라면서 그것도 몰라?”
라자한에서 자고 있을 연인과 꼭 닮은 말본새였다. 진짜 아들인가? 아실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신이 어쩌면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소환당한 건 아닐까, 하고. 그럼 에스티니앙과는 헤어졌다는 뜻인데 대체 얼마나 사귀고 깨진 거며, 갈라선 지 얼마 만에 그 녀석이 애를 낳았는지….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 생각해봤자 소용이 없었으므로 아실은 신경을 껐다.
“아무리 걸어도 마을이 안 나오길래 여기가 다른 세계인가 했지.”
아실이 진담을 한 줄도 모르고, 소년은 코웃음을 쳤다.
“다른 세계는 무슨…. 그래도 우리 동네엔 여관 같은 거 없어.”
“돈을 받고 침대를 내 줄 가정집은 있겠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자기 집으로 같이 가자고 권했다. 친근한 제안을 한 것 치고는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아실은 모른 척했다.
“식사는 했어?”
그러고 보니 출출했다. 고개를 젓자, 해가 더 떨어지면 동생이 간식거리를 가져다줄 거라고 소년은 말했다. 그걸 나눠주겠다고 선심을 쓰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아실은 고맙게 받았다. 속으로 자식을 알뜰하게도 봤다며 애꿎은 에스티니앙을 물어뜯은 건 덤이었다.
말동무가 생겨서일까, 소년은 아실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귀가 그렇게 크면 소리가 얼마나 잘 들리는지부터 모험하며 겪은 가장 신기한 일이 무엇인지까지. 이야기 하나를 끝내기도 전에 새로운 화제가 생겼다. 주제 전환을 벅차게 따라가던 아실은 입이 말랐다. 소년은 눈치 빠르게 수통을 양보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소년은 이따금 양 떼를 살폈다. 몇 번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양들이 무리를 이탈하지 않도록 몰이하러 가기도 했다. 아실은 그런 틈을 타 무기를 점검했다. 금방 끝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년이 돌아온 뒤에는 이야기를 이어가며 무기 손질을 마쳤다. 소년의 관심사가 아실의 무기로 옮겨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험가는 다 이래?”
등에 메고 있던 활과 화살, 가방에서 꺼낸 단도와 투척 무기를 보고, 소년은 이렇게 물었다. 아실은 대답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주 무기만 들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다고.
“마도사라도 호신용 단도는 허리에 차기 마련이지. 그런 게 없는 사람은 어마어마한 실력자거나, 믿을 만한 동료가 있는 거라고 보면 돼.”
아실은 내친김에 창 한 자루로 제국군을 휘저은 용기사 얘기를 해 주었다. 청자의 배경지식이 빈약했던 탓에 중간중간 설명이 길어지긴 했지만, 소년의 집중력을 해칠 수는 없었다.
“친구 얘기라면서 꼭 자기가 겪은 것처럼 말하네.”
꽤 날카로운 지적도 했다. 아실은 초월하는 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렸다.
“영업 비밀이야.”
어쩌면 소년이 이야기 속 용기사의 정체를 아실로 오인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실은 마음속으로 에스티니앙에게 닿지 않을 사과를 건넸다. 그러게, 자식한테 진작 자랑이라도 좀 하지 그랬어?
소년의 동생이 심부름에서 돌아오며 말을 전해놨는지, 소년의 가족은 손님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굴었다. 막상 소년의 아버지를 마주한 아실은 당황했다. 이 남자도 에스티니앙과 닮은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아무리 봐도 본인이 아니었다. 아들이 아니라 손자였나…?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양을 우리에 몰아넣는 동안 아실은 소년의 어머니와 숙박비를 흥정했다. 발리노 가족은 침대 두 개를 어른 둘과 아이 둘이 나눠 쓰고 있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작은 애를 부부 침대에서 재우고, 큰애와 손님에게 남은 침대를 주려고 했다. 아실은 애들 잠자리를 뺏는 것도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침구류만 준비해 준다면 난로 근처에서 자도 괜찮았다. 불편한 잠자리에는 익숙했다. 소년의 어머니는 손님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숙박비를 깎아 주는 것으로 편의를 봐주었다.
저녁상은 구색이 단출했다. 건더기 적은 스프와 빵에 제철 푸성귀와 양젖 치즈 한 조각, 갓 짠 양젖 한 잔을 곁들였다. 아침이면 여기에 달걀을 내올 수 있었다. 아실이 숙박하는 동안 어떤 식사를 하게 될지 설명해주던 소년의 아버지, 발리노 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고기는 마을에 경사가 있을 때나 맛볼 수 있을 거요. 요즘 펀데일은 그런 일이 잘 없어서 기대 안 하는 게 좋지만.”
귀에 익은 지명이었다. 아실은 빵을 갈라 치즈와 푸성귀를 채운 간단한 샌드위치를 해치우며 곰곰이 생각했다. 발리노 가족의 식탁은 원래 조용한 편인 듯, 아이들까지 식사 중에는 말이 없었다.
“여기 혹시 이슈가…. 커르다스입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그동안 돌아다니던 땅의 이름도 몰랐단 말요?”
푸른 용기사의 고향은 펀데일이었다. 니드호그가 통째로 불태웠다는 그 고향 말이다…. 배를 채울 상황이 아니었지만, 아실은 꿋꿋이 식사를 마쳤다.
발리노 부부가 설거지며, 양 우리 단속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사이, 아실은 자연스레 발리노 형제를 떠맡게 되었다. 소년의 동생은 낯을 가리는지 내내 형 뒤에 숨어 있었지만…. 식탁 의자에 앉은 아실이 소년에게 손짓하자, 소년은 동생을 꼬리처럼 달고 가까이 다가왔다.
“계속 궁금했는데, 넌 이름이 뭐니?”
종일 밖을 돌아다니고, 모자에 눌린 탓에 소년의 머리카락은 산발한 채로 묶여 있었다. 아실은 소년을 돌려세워 손빗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빗었다. 그는 가방에 남는 머리끈이 있을는지 생각하며 소년의 머리를 단정하게 한데 모았다.
“에스티니앙.”
반쯤은 예상했던 답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듣는 순간 손이 미끄러져 머리 타래를 놓쳤다. 아실은 소년의 머리카락을 다시 빗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내 친구랑 이름이 똑같네.”
꼬마 에스티니앙은 12살이었다. 용은커녕 사룡의 졸개조차 본 적 없고, 사룡의 이름 따윈 모르며, 툭하면 달라붙는 동생을 귀찮게 여기는….
그날 밤 아실은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정공이 떠난 뒤 8재해가 일어난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했다. 과거를 바꾼다면 그게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만약 여기서 펀데일의 몰살을 막는다면 무엇이 어떻게 바뀔까? 엘피스에서 겪었듯이, 바뀐 미래가 곧 이미 지나온 과거일 수도 있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침 식사 도중, 발리노 부부는 눈 밑이 꺼먼 아실을 보고 잠자리가 불편했는지 걱정했다. 그는 혼자 조난 했더니 돌아갈 길이 막막해서 그렇다고 애써 둘러댔다. 에스티니앙의 동생은 이번엔 형 뒤에 숨지 않았지만, 아실이 말을 걸자 후다닥 집 안 어딘가로 도망쳐버렸다. 날이 갈수록 발리노 씨네 막내는 가까이 다가왔고 말수도 늘었다. 꼬마의 손을 잡고 양을 치러 간 에스티니앙의 간식을 배달한 날, 아실은 니드호그가 습격할 때까지는 기다려보자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없었다. 지금 당장 니드호그를 찾아가서, 펀데일을 불태우지 않는다면 20년 뒤에 살려주겠다고 협박한다? 아니면 흐레스벨그에게 네 형제 좀 말려보라고 부탁한다? 그것도 아니면 펀데일 사람들에게 에스티니앙이 13살이 될 때까지 마을을 비우고 피난해 있으라고 권한다? 무슨 소용일까?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텐데.
아실은 펀데일에 머무는 동안 발리노 가족의 일을 도우며 지냈다. 반복되는 식단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고자 사냥을 나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매번 허탕이었지만 지형지물에 익숙해질수록 성공하는 날이 늘었다. 에스티니앙과 함께 양을 치러 가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에스티니앙은 아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나도 갈 수 있을까?”
생소한 이름을 가진 장소에서 겪은 모험담을 들은 뒤, 소년은 가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실은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그럼, 갈 수 있지.’ 펀데일이 전소되는 미래를 바꿀 수는 있을지, 설령 그렇더라도 미래가 얼마나 바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실은 푸른 용기사 에스티니앙 대신 모험가 에스티니앙과 친구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찾아오렴. 비에라는 오래 사니까 어렵지 않을 거야.”
“당신이 나를 못 알아보면?”
“그럴 일은 없어.”
아무렴, 네가 은퇴한 용기사든 현역 모험가든 알아볼 자신이 있단다…. 그렇게 덧붙이는 대신, 아실은 에스티니앙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가을 내내 펀데일은 겨우내 가축에게 먹일 풀을 베고, 말리고, 묶고, 쌓는 일로 바빴다. 아실 역시 힘을 보탰다. 고양이 손이든 귀가 길쭉한 이방인 손이든 빌려야 될 정도로 일이 많았다. 차곡차곡 쌓이는 건초 더미를 볼 때마다 아실은 저게 언제 다 타버릴지 몰라 심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늘어난 일손 덕분에 발리노 가의 건초 비축은 빠르게 끝나갔다. 발리노 씨는 이젠 혼자서도 괜찮다며 손님의 도움을 거절했다.
세상일이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페오 울은 칠흑같이 어두운 어느 새벽녘에 찾아왔다. 귀가 밝은 아실은 페오가 ‘나의 어린나무!’라고만 불렀는데도 잠에서 깼다. 발리노 가족의 하루가 시작되기에는 아직 조금 일렀다.
-너의 아름다운 가지가 드디어 미아를 찾아냈지 뭐야! 어서 네가 날 부른 곳으로 와! 어디로 떨어진 건지 몰라도, 거긴 요정의 마법이 지독하게 힘을 못 쓰거든!
페오는 아실을 재촉했다. 지금 떠나지 못하면 언제 다시 어린나무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몰라! 빨리 오지 않으면 끌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대로라면 미래를 바꾸기는커녕 아무것도 못 하고 떠나게 생겼다. 아실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페오, 행운처럼 찾아온 나의 아름다운 가지, 두 세계를 잇는 무지개다리의 가장 재빠른 전령님?”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속삭임에 페오는 까르르 웃었다.
-무슨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아부가 길담? 하지만 더 말해 봐, 귀여운 어린나무! 너의 유능한 가지가 아니면 누가 네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니!
“여기 이 집에 용의 불을 막을 만한 마법을 걸어줄 수 있어?”
아실은 급히 덧붙였다. “딱 한 번이면 돼. 어려울까?”
-무슨 말씀!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지. 넌 좀 더 이 가지를 믿어보렴!
“고마워,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페오!”
-어머, 이런 거창한 감사를 바란 적은 없지 뭐야!
해가 뜨기 직전이어서인지, 구름이 달을 가려서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밤눈이 어두운 어린나무를 위해 페오는 길도 밝혀줬다. 요정의 마법이 도와주기라도 했는지, 아실은 순식간에 펀데일을 벗어나 산비탈을 올라가고 있었다. 와중에도 그는 자꾸 뒤를 돌아보고는 했다. 지금이라도 선택을 무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알아챘는지, 처음 눈을 떴던 장소와 가까워질수록 재촉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빨리, 더 빨리, 바람만큼 빨리! 한눈팔 시간이 없어, 어린나무!
목초지 한가운데 빛나는 틈새가 생겨났다. 위는 둥글고, 표면은 흐르는 수은 같고, 폭은 딱 사람 한 명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거기 비친 풍경이 맑은 날의 일 메그라는 걸 아실은 알아차렸다. 그는 페오 울이 만들어준 시공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귓가에서 세찬 바람 소리가 울리고, 뜨거운 열기가 등을 훅 덮쳤다가….
일 메그의 풀밭에 비틀거리며 발을 딛는 순간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니 거울처럼 빛나는 호수가 보였다.
에스티니앙 발리노는 양을 치러 가서 혼자 살아남았다.
사실 소년은 잠이나 좀 더 자고 싶었다. 동틀 시간이 되었는데도 하늘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양들은 비가 오면 굶는다더냐?’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는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소년은 아직 한 번도 아버지를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입을 비죽이며 초를 먹인 모자와 망토를 걸쳤다. 빗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발을 발목에 단단히 동여맸다.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일찍 오거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아들의 모자 매듭을 고쳐 주었다. 그런 뒤에야 에스티니앙은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양을 몰고 길을 나서다가 침대에 혼자 잠들어 있던 동생을 떠올렸다. 언제쯤 그 녀석에게 양 뒤치다꺼리를 맡길 수 있을지 생각하다 보니 금방 목초지에 다다랐다.
양을 적당히 흩어 놓은 뒤, 소년은 손님의 잠자리가 비어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일일까? 아침 식사 도중에 슬쩍 끼어들고는 했지만, 새벽을 틈타 말도 없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니 짐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고…. 설마 떠났나?
서운해지려던 마음은 툭툭 떨어지기 시작한 비에 이내 씻겼다. 에스티니앙은 양 떼를 조망하기 좋은 나무 그늘을 찾아 발을 재게 놀렸다. 얼마간 빗소리를 멍하니 듣다가 비가 계속 내릴지, 어떨지 보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을 가린 건 눈 깜빡할 사이의 일이었다. 무척 빠르게 지나갔던 터라, 에스티니앙이 충격을 받는 것도 한 박자 늦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소년은 그 물체가 사라진 쪽으로 목을 쭉 뺐다.
그 뒤부터는 기억이 흐릿하다. 하늘을 가로질러 간 무언가에서 관심을 껐는지 안 껐는지, 그것이 마을에 불을 지르는 순간을 자신이 보고 있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에스티니앙이 마을 쪽에서 피어오르는 큰 연기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양 떼를 내팽개치고 마을로 달렸다.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목초 타는 냄새. 시꺼멓게 탄 집과 사람들. 어느새 그친 비. 마당에서 밤새 말린 건초를 한 덩이씩 묶고 있었을 아버지와, 텃밭을 매고 있었을 어머니의 불에 탄 시신. 불은 피했지만, 타버린 대들보는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동생의 시신.
도망친 사룡을 추적하던 푸른 용기사 알베리크가 소년을 거뒀다. 그는 소년에게 펀데일의 비극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충격으로 무너졌던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른 뒤, 에스티니앙은 고집을 부렸다. 그 얘기를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소년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니드호그가 펀데일을 불태우고 이레가 지나고서야 소년은 증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알베리크는 펀데일에서 나온 시신이 몇 구였는지도 말해주었다. 그 숫자는 펀데일 인구수에서 꼭 하나가 모자랐다. ‘그거 확실한가요?’ 소년의 질문은 뜻밖의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대화의 미묘한 분위기를 잘 파악한 적 없는 알베리크지만, 이번만은 그도 소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알베리크는 다른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반겼다. 그러나 비에라라는 종족은 생전 들어본 적도 없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차차 알아보마. 모험가라면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런 뒤에는 소년이 말해준 손님의 인상착의를 중얼중얼 외웠다.
이후 얼마간 에스티니앙은 알베리크와 함께 살았다. 마을이 하나 전소된 탓에 친척과 연락도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베리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쩌다 펀데일의 참사를 발견했는지 소년이 알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뒤 에스티니앙은 용기사가 되어 사룡에게 복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알베리크는 아무 말도 못 했다가, 창술을 단련하는 건 힘들 거라고 말렸다가, 결국에는 에스티니앙에게 적당한 연습용 창을 마련해주었다.
알베리크에게 창술을 배우고, 문자와 숫자를 익히고, 몸을 단련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알베리크의 집을 떠나 용기사단 숙소에 방을 배정받았다. 예비 용기사로 실전에 투입되고, 살아남고, 다시 창을 휘두르고, 정식 용기사가 되고, 마침내 교황청 깊숙한 곳에 보관된 용의 눈에 선택받을 때까지도…. 죽은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끓는 듯 고통스러웠다.
알베리크는 오랫동안 비에라 족 손님에 관한 소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가 약속을 잊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에스티니앙은 알았다.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했다면 역시 그날 죽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손님이 펀데일에서 무사히 도망쳤으리라고 믿었다. 지나가는 말로 약속했던 것처럼, 그 사람은 언젠가 알고 지냈던 꼬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증오와 슬픔으로 끓어오르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에스티니앙은 손님의 이름이나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던 손길, 무슨 소리를 들을 때면 쫑긋 움직이던 귀의 움직임 따위를 되새기며 잠들었다. 복수심은 그의 창끝을 날카롭게 제련해주었지만, 그만큼 잠 못 드는 밤을 선사하고는 했기 때문에.
막상 그 사람을 만나면 불쑥 원망을 뱉을지도 몰랐다. 사룡의 불을 피할 거면 우리 가족도 함께 데려가지 그랬냐, 고. 모험가라면 소식에 어둡지도 않을 텐데 지금까지 어디 있었냐고. 실컷 탓한 뒤에는 당신이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말하겠지. 이게 대체 무슨 마음인지는 에스티니앙도 잘 몰랐다. 한두 개의 단어로는 이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불타버린 펀데일을 떠나며 가지고 온 감정이 모두 그랬다.
손님과 다시 만난 건 거의 20년 만이었다. ‘네가 어른이 되어도 난 그대로일 거다’라더니 정말 그 말대로였다. 이슈가르드 측이 사룡의 졸개에 맞서 성도를 방어하는 동안, 요격을 맡은 모험가 부대의 지휘관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스마르, 이쪽은 푸른 용기사 에스티니앙이라네. 이슈가르드 최대의 전력이지.”
아이메리크는 그를 ‘비스마르’라고 불렀다. 이름이 달랐지만 에스티니앙은 비스마르가 손님이란 사실을 확신했다. 그래서 선뜻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오랜만이라고 인사했던 것인데….
“실례지만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나요? 푸른 용기사라면 분명 창술의 대가일 텐데, 이 근방에서 그만한 실력의 창술사와는 일한 기억이 없는지라.”
에스티니앙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할 뻔했다. ‘나를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잖아!’ 하지만 기억에 없다는 사람을 추궁 해봤자였다. 아이메리크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는 동안, 에스티니앙은 평소처럼 친구에게 모든 걸 맡기고 뒤로 빠졌다. 성도 방어전이 끝난 뒤 한 번 더 대화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아뇨, 저는 기억을 잃어버린 적이 없고, 20년 전엔 반제국 운동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습니다. 에오르제아 지역에는 몇 달 전 처음 왔어요.”
단호한 태도 탓에 에스티니앙은 말을 더 붙일 수가 없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찾는 분과 만나기를 기원한다는 말을 끝으로 비스마르는 대화를 끝냈다. 얼마 뒤 그는 울다하 국왕 암살 혐의를 뒤집어쓰고 이슈가르드로 망명해 왔다. 니드호그 탐색에 도움을 줄 포르탕 가 식객으로 비스마르를 소개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그들은 성룡을 만나기 위해 드라바니아를 여행했다. 에스티니앙은 20년 전의 상상이 이루어진 것 같아 즐거웠다.
교황의 비뚤어진 야욕을 저지했지만, 정작 에스티니앙은 과거의 업으로 니드호그에게 몸을 빼앗겼다. 어떻게 구사일생으로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몸이 많이 상했다. 침상에서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에스티니앙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생각했다. 펀데일의 양치기 소년은 복수를 끝냈다. 이제는 비스마르가 20년 전의 손님인지, 아닌지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용살자 에스티니앙이 누리게 될 것이다. 용기사단을 나오는 게 좋겠지. 이슈가르드와 용족이 화친을 맺었으니, 용의 피로 얼룩진 이름을 달고 성도에 남을 수는 없었다.
마침 아이메리크가 비스마르와 알피노를 데리고 병문안을 온 차였다.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며 평범한 삶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친구’라고 부르자, 비스마르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또 거절하는군.”
에스티니앙은 짐짓 섭섭한 투로 말을 건넸다. 그 옆에선 아이메리크가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와 친구가 된 건 암묵적인 거부를 무시하고 인사를 건네는 뻔뻔함 덕분이었다. 에스티니앙은 그 태도를 한번 배워보기로 했다. ‘그렇게 싫어해도 자네가 내게 등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네, 친구.’ 그에 비스마르는 한숨을 쉬었다.
“너도 이 나이 돼 봐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한테 반말로 친구 소리나 듣고….”
그러고는 진저리를 치면서 ‘맘대로 해, 맘대로!’라고 덧붙였다. 에스티니앙은 모처럼 어른 말을 잘 듣기로 했다. 두 번째로 사귄 친구가 한 말이기도 했으니까.
구름바다에 처박혀 소실될 줄로만 알았던 용의 눈은 호락호락 사라지지 않았다. 사룡의 눈이라 사건을 끌어당기는 면이 있는 걸까? 푸른 용기사 자리에서는 은퇴했지만, 에스티니앙은 용의 눈을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비스마르 일행과 길이 겹칠 때마다 그는 겸사겸사 친구를 도와주곤 했다.
김리트 황야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걸 실어나른 뒤로는 통 만나지 못했다. 새벽의 혈맹 접수원과 노란 옷의 현인은 보안을 철저하게 지켰다. 비스마르가 돌아오고, 혈맹원들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에스티니앙도 친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라라펠은 에스티니앙에게 혈맹에 합류해달라며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반복했지만, 그 와중에도 비스마르의 행방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돌의 집에서 친구를 다시 봤을 때는 사람이 좀 바뀐 듯 보였다. 영 낯설지는 않았다. 이제는 얼굴도 흐릿한 20년 전의 그 사람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뭘 하느라 연락이 끊겼느냔 질문의 답으로는 이런 모험담이 돌아왔다. 거울 세계, 과거를 바꾸기 위한 시공간 역행 여행, 빛으로 가득한 세계와 빛 에테르에 노출되어 괴물이 되는 사람들…. 세계가 여러 개라는 얘기는 생소했지만, 사람이 괴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익숙했다. 남은 아씨엔 원형들을 몽땅 해치우고 왔다는 대목에서는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이제 너한테도 돌의 집 출입 권한이 생겼다지?”
“다 저 유능한 접수원 씨와 통찰안의 현인 탓이지.”
에스티니앙은 ‘내가 멋대로 친구라고 불렀을 때 네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것 같다’라고 농담을 했다. 아직 미명의 방에서 현인들과 쌍둥이가 요양 중이었던 터라, 친구는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새 이름을 듣는 사람은 네가 마지막이야.”
라고 말했다. 에스티니앙이 이제 새벽의 혈맹 일원인데다, 친구기도 하니까 알려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젠 비스마르가 아니라 아실이라고. 그 순간 에스티니앙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아실이 이름의 기원에 관해 얘기해주기 시작했지만 그는 지금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일 상황이 아니었다.
아실과 손님은 동일 인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는 이미 본인이 설명했다. 수정공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시간여행을 해서 빛의 전사를 구했다고 했잖은가? 전례가 있는 일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에스티니앙이 증인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펀데일에서는….’하고 중얼거렸다.
“펀데일?”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머리끈 있나?”
아실은 고개를 저었다. 에스티니앙은 확신했다. 아실은 아직 펀데일에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벽의 혈맹은 바뀐 이름을 들었는데도 가끔 그를 비스마르라고 불렀다. 본인도 새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듯 부르면 반응이 약간 늦었다. 펀데일의 아실에게서는 그런 어색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본인은 쓰지도 않는 머리끈을 들고 다녔다. 그건 주위에 있던 머리 긴 사람이 그에게서 머리끈을 찾아댔다는 뜻이다. 온통 심증뿐이었지만, 에스티니앙은 직감이 잘 맞는 편이었다.
아실은 언제쯤 펀데일에 방문하게 될까? 비에라는 성장이 끝난 뒤 일정 나이까지 노화하지 않는다고 했다.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언제든지 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의 내가 죽기 전에만 다녀왔으면 좋겠군….’ 에스티니앙은 그런 생각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실의 펀데일 여행은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에스티니앙은 느지막이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아실은 며칠 전 새벽의 혈맹 일로 연락을 받고 모르도나로 떠났다. 사흘이면 돌아온다더니 오늘로 혼자 잠든 지 나흘째였다. 둘 사이에 연락용으로 만든 링크셸에도 답이 없었다. 그는 딱 오늘까지만 기다려보기로 했다. 내일은 길이 엇갈리더라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아실과 연인이 된 뒤로는 늦은 시간에 혼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오래전 일도 아닌데 전에는 이 시간에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아실이 두고 간 책을 조금 들춰보다가, 괜히 무기를 손질했다. 매일 빼먹지 않고 관리해뒀기 때문에 오래 만질 필요도 없었다. 다시 누워 있으려는데 누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연인은 드물게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이유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물어봤지만 아실은 에스티니앙의 얼굴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떨리는 손이 상체 이곳저곳을 만지다가 그대로 미끄러져 허리를 안았다. 마치 상대방의 안위를 확인해보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평소와 달리 문을 두드려댄 것도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온 건지.
“…뭐야, 왜 울어? 아실?”
아실을 마주 안고 등을 조금 쓸어내렸을 뿐인데 품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는 사람을 달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에스티니앙은 크게 당황했다. ‘왜 울어’와 ‘울지 마’ 두 문장만 반복하고 있으려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우는 이유를 알아야 공수표라도 날리지.
헛된 시도와 관계없이 아실은 진정했다. 이번에는 에스티니앙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보여주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겼지만. 그런 채로 아실은 말했다. ‘펀데일에….’ 그는 무엇이 복받쳤는지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 끝에 간신히 꺼낸 말이 ‘미안해.’였다. 에스티니앙은 그게 펀데일에서 아무것도 못 해 미안하다는 뜻이란 걸 바로 알았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지만 그 외에는 아실이 미안하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사과한 이유를 알아차린 것과는 별개로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실도 사룡과의 전투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그곳은 펀데일이다. 삶의 터전이 되는 땅의 이름이나 간신히 알고, 빛의 가호니 시간여행이니 하는 허황한 일과는 거리가 먼 곳. 할로네의 이름으로 식전 기도조차 하지 않는 마을.
이방인인 아실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신으로 니드호그를 상대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는 종말 앞에서 다른 이들을 피난 보내고 홀로 맞선 전적이 있지만, 지치기 시작할 무렵에는 동료들의 기도가 뒤나미스를 움직여 도움을 줬다고 했으니까. 펀데일에서 아실은 혼자였지 않은가. 그렇게 말했지만, 아실은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억지 부리면 못 써. 며칠 독수공방한 애인 앞에서.”
에스티니앙은 일부러 투덜거렸다. ‘지금은 내 기분을 풀어줘야 할 때 아냐?’ 물론 잘 먹히지 않았다. 아실이 여전히 내 탓이오, 하는 태도를 고수하자 에스티니앙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는 솔직함을 앞세워 정면 돌파했다.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드냐.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엘피스에 다녀올 수 있었던 이유는 크리스탈 타워가 매개체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에스티니앙이 기억하기로 펀데일 근처에는 크리스탈 타워에 비견될 만한 유적도, 성소도 없었다. 아실이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기적이었다.
“네가 돌아올 기회를 걷어차고 거기 머물렀으면…. 상상만 해도 무섭군. 12살의 나는 마을 사람 수와 똑같은 시신 숫자에 일주일은 더 앓아누웠을 거고, 지금의 나는 애인의 시체도 없이 장례를 치르고 있었겠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 말이야.”
극단적인 가정을 들이민 뒤에야 아실은 좀 냉정해진 것 같았다. 에스티니앙은 슬슬 연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네 잘못은 없다고 말해줘도, 아실이 울적함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으리란 것을 알았다. 12살의 에스티니앙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심술이라도 부려서 동생을 데리고 나올 걸, 아니면 차라리 떼를 써서 다 같이….
에스티니앙이 사실을 인정한 건 용기사단에 입단하고 첫 임무를 마친 후였다. 자신에게 같은 일을, 적어도 비슷한 일을 겪은 말동무가 필요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용기사단에 그런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대부분 운이 나빴다. 에스티니앙이 20년 동안 손님의 행방을 궁금해하고, 무사하길 바라고, 재회하기를 바랐던 이유가 그거였다. 그는 슬픔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끌어안은 채 슬금슬금 침대 쪽으로 물러났다. 그대로 눕자 아실은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몸에서 힘을 뺐다. 에스티니앙은 화제를 고르다가 너무 늦은 부고를 전하기로 했다. 가혹한 일이었지만 자신도 이렇게 시작했다. 죽음을 직시하는 것.
아실은 시신의 숫자에 내포된 함의를 알아차렸다. 기이할 정도로 깨끗한 동생의 시신에 대해서도 짚이는 게 있는 듯 보였다. 얘기하기를 망설였지만, 에스티니앙이 기다리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결국 말해주었다. ‘용의 불 말고도 이것저것 다 막아달라고 했다면 좋았을 텐데.’ 잠자리 동화로 들었던 요정 이야기를 떠올리며, 에스티니앙은 뭘 하든 반드시 문제가 일어났으리라 생각했지만…. 페오 울이라는 요정이 이쪽 세계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터라 입조심하기로 했다.
이야기만 나눠도 밤은 짧았다. 에스티니앙은 이런 밤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는 눈 마주치면 욕망을 채우기 급했던 지난 밤들을 반성하게 됐다. 그렇지만 머릿속이 그런 생각으로 꽉 찬 건 아실도 마찬가지였는데, 자기만 반성한다고 소용이 있나 싶기도 했다.
아실은 일 메그에서 라자한까지 달려오는 내내 속이 시끄러웠다고 말했다. 요정에게 맡긴 부탁으로 누군가 살아남았다면, 어쩌면 너는 나를 모를 수도 있겠다고. 우리가 마음을 나누고 몸을 섞은 날들은 없었던 일이 되고, 너는 라자한이 아니라 이슈가르드에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세상의 끝 너머에서 바람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적도 없고, 종말이 둥지를 튼 그 땅에 이르기까지 함께한 적은 더욱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묵고 있었던 숙소로 뛰어와 투숙객 목록을 확인했다. 숙소 주인이 자신을 알아보는지, 지금 방에 누가 있는지 알아보면서…. 현재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하나둘 찾을수록, 아실은 심장이 마구 뛰었다고 했다. 자신이 알던 에스티니앙이 그대로라는 사실이 기뻤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인간 말종 같았다. 현재가 변하지 않았다는 건 펀데일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도 그대로라는 뜻이었으므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들이랑 한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그 말을 듣고 에스티니앙은 깨달았다. 둘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시간이 가로놓여 있었다. 아실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장장 20년 동안 복수라는 이름의 애도 기간을 가졌던 사람은 재촉할 자격이 없었다.
이제는 가족의 얼굴을 떠올려도 전처럼 가슴이 끓는 것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심장에 한 겹의 슬픔이 물에 젖은 옷처럼 달라붙어 있을 뿐이다. 덕분에 에스티니앙은 좋았던 기억을 좀 더 자주 떠올릴 수 있게 됐다. 아버지에게 양 치는 법을 배웠을 때라거나, 갓 태어난 동생의 쭈글쭈글한 얼굴을 보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동네 대소사에 참석할 때 어머니가 옷매무새를 만져 주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을 곱씹다 보면 슬픔이 얼마쯤 마르면서 가슴께가 가벼워졌다.
아실이 마음을 추스르면 펀데일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에스티니앙은 말동무가 생겼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네가 펀데일에 다녀와서 다행이야.”
“…아무것도 못 했는데.”
아실은 슬쩍 연인을 외면했다. 에스티니앙은 혀를 찼다. 상체를 일으켜 아실과 눈을 맞췄다.
“그렇게 미안하면 내킬 때 말동무나 해 줘. 나한테는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얘기를 나누면 기억에 잘 남겠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얼굴을 보다가 입을 맞추곤 했다. 에스티니앙이 고개를 숙일 때도 있었고, 아실이 뺨을 감싸며 끌어내리기도 하고…. 지금의 아실은 영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게 끝이었다. 아실이 나름대로 장례 도중이겠거니, 짐작한 에스티니앙은 미인계를 포기했다. 끌어안는 것까지 피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한동안 아실은 그늘진 얼굴로 지냈다. 그런 그가 먼저 펀데일 얘기를 꺼냈을 때, 에스티니앙은 기뻤다. 아실은 말하다 말고 에스티니앙을 보고는 무슨 표정이 그러냐며 웃었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는 게 웃음을 부추겼다. 한참 웃은 뒤에는 애써 태연하게 내던 목소리가 제법 안정되어 있었다. 그 뒤로 대화 없이 짧은 밤과 가벼운 키스가 돌아왔다. 그렇다고 대화를 소홀히 한 건 아니었다. 기억하는 사람이 둘만 남은 일들은 끊임없이 얘기해줘야 했다. 그것만이 기억을 망각에서 건져 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에스티니앙은 말하는 습관이 들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펀데일 시절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말, 사소한 비유, 짧은 투덜거림에 불과했으나 누군가 펀데일을 기억하기에는 충분했다. 어느 날 알피노가 펀데일에서나 쓰던 속어로 욕을 했을 때, 에스티니앙은 저도 모르게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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