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설란 (龍舌蘭)

[채햄] 용설란 (龍舌蘭) - 7/10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용설란 (龍舌蘭)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w. 주인장

기현은 저가 궁에서 머물던 방보다도, 형원의 별채에서 썼던 방보다도 좁은 방 안에 우두커니 서서 둘러본다. 아까 형원이 뭔가 달칵이더니 환해졌는데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기현은 어두운 방 안에서 벽을 더듬거리다가 제 손끝에서 달칵하며 눌리는 것에 놀라 손을 뗐고, 그와 동시에 하얗고 밝은 빛이 터져 나오듯이 방안에 쏟아지는 것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다시 보아도 기이한 일이로다. 분명 칠흑같이 깜깜한 방이었는데 어찌 이리 환해질 수가 있는지. 주홍빛의 불빛도 아닌 새하얀, 사물이 본래의 색을 찾는 밝은 빛이. 기현은 그제야 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하나씩 눈에 담는다. 벽에 어찌 세워져 있는지 모를 쇠막대에 여러 벌의 의복이 걸려 있고, 거울로 보이는 것은 기다란 사각형이었다. 그것이 이 방안의 모든 가구의 끝이었으나, 그 하나하나에서 풍기는 형원의 체취에 기현은 여러 벌의 옷들을 조심히 손끝으로 쓸어 본다.

이전의 형원의 체취는 어떠하였지. 은은한 그 향은 언제 저를 감쌌는지도 모르게 제 곁을 떠나고 있었기에 기억에서도 흐릿할 정도였다. 이 향이 그의 체취였던가. 형원의 체취이니 당연히 그렇겠지. 기현은 괜스레 저려 오는 마음에 손을 거두고 깊게 심호흡한다. 머지않아 저를 기억해 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현은 형원이 가져다준 이불을 바닥에 가지런히 깔고서 그 위에 자리한다. 필시 자주 쓰는 것이 아니었기에 제게 준 것이겠지만, 이 방 안에 묻어 있는 그의 흔적 때문인지 이불을 덮고 있으면 꼭 그의 품 안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기현은 부러 이불을 턱 끝까지 더 끌어다 덮는다.

헌데 불은 어찌 꺼야 할지.

기현은 새벽 일찍이 눈을 뜨고 저가 누워 있던 자리를 다시 가지런히 정리하여 벽 한 쪽에 차곡차곡 쌓아 둔다. 소세를 해야 할진대, 제게 물을 가져다줄 궁인도 없고 형원은 더더욱 가져다주지 않을 테니. 기현은 거울을 보고 어색하게 머리를 정돈하고 대충 얼굴을 정돈한다. 이만하면 되었겠지.

형원은 새벽 늦게 잠들었던 것을 탓하며 짜증 가득한 얼굴로 알람을 끄고서도 침대 위에서 뒤척거리다가 몸을 일으킨다. 아… 출근하기 싫어. 그런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제집에 머물 기현이 떠오르면서 문득 그가 부러워지는 것이다. 좋겠다. 쟤는 날 때부터 왕족이라서 일도 안 해도 되고. 밥 차려 줘, 수발 다 들어 줘. 부럽다. 이제는 그걸 내가 하고 있으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제 방문을 막 열었을 때였다.

"어우씨! 깜짝이야!"

"밤새 강녕하셨습니까."

형원은 발치로 떨어진 듯한 심장을 부여잡는 것처럼 몸을 숙이며 숨을 골랐고, 그 모습에 기현은 걱정 가득 담을 얼굴로 형원을 부축하려 다가선다. 개화통을 끝났을 터인데 어찌 저리 괴로워하시는지.

"어디 불편하십니까, 형원?"

"왜, 왜 방문 앞에서 그러고 있어, 사람 놀라게."

"편찮으신 것입니까? 어찌 아직도,"

"아니, 아픈 게 아니고, 하…."

놀랄 만하지. 방문을 열자마자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어떻게 안 놀랄 수가 있냐고. 형원은 제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기현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나선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에 제 왼쪽 가슴팍을 문지르면서 현관문을 열고 새벽에 배송된 것을 집 안으로 들인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비요뜨. 어제 말한 거."

"아, 그 맛있다고 하셨던…."

"잠시만 기다려. 어떻게 먹는지 알려 줄게."

기현은 형원이 아프지 않다는 말에 안도하면서, 좁은 집 안에서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형원이 화장실로 들어가기 전에 스위치를 켜다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뒤를 돌아보면, 세상 무해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기현이 있다.

"…따라 들어오게?"

"저는 그저, 그대가 무엇을 하실까 궁금하여."

"암만 그래도 볼일 볼 때는 좀…."

"아, 제가 무례했습니다."

기현은 무심히 닫히는 문에도 발을 돌리지 않고 그 앞에서 왔다갔다하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형원은 새 칫솔을 하나 꺼내 기현에게 건넨다. 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은 언제쯤 모든 걸 다 알게 될까 싶은 형원이다.

"양치해야지."

"아, 그럼 죽염을,"

"그 치약 맛없어."

기현은 제 손이 들린 솔이 달린 막대를 내려다보다, 솔 위로 탁하고 된 것이 주욱 올라오는 것을 '와' 하며 쳐다볼 뿐이었다. 양치를 소금이 아니라 이것으로 하시는구나.

"이제 치아를 골고루 닦으세요, 마마."

기현은 형원의 입에서 처음 듣는 호칭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솔을 입안으로 집어넣는다. 이전에는 항상 양현이라 부르시더니, 어쩐 일로 마마로 불러 주셨을까. 저는 그리 대단한 이가 아닌 것을. 그저 왕의 피만 받았지, 힘도 없는 서자일 뿐인 것을.

"아, 그리고 그거 삼키면 안 돼. 뱉어야 된다."

다 어그러진 발음으로 말하는 형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가 하는 대로 구석구석 칫솔질을 해 본다. 확실히 입안이 화하게 깨끗해지는 기분이 묘하게 중독성 있는 기현이다. 형원이 입을 헹구고 세수하는 것까지 지켜보고는, 그가 욕실을 나서자 기현은 그의 행동을 따라 하며 하루의 시작을 준비한다. 형원이 닦았던 천에 얼굴을 묻으니 폭신한 것이 기분이 좋기도 하고. 기현이 말간 얼굴로 욕실을 나서자 때마침 출근룩을 갈아입은 형원이 옷방을 막 나서고 있었다.

"이불 예쁘게 개켜 놨더라. 앞으로도 저렇게 정리해 줘, 자고 일어나면."

"명 받잡겠습니다, 형원."

저 말투는 언제쯤 고쳐질까. 형원은 숟가락을 두 개 꺼내 비요뜨 하나와 숟가락을 기현에게 건넨다.

"형원께서는 여전히 부족함 없이 잘 지내시니 다행입니다."

"무슨 소리야?"

"귀한 은수저도 이리 많이 가지고 계시니,"

"아, 아니야. 그거 쇠야. 쇠숟가락. 은수저 은근히 비싼데. 자, 잘 봐. 이렇게 뚜껑을 따. 얘는 포장이 잘 돼 있어서 뚜껑에 안 묻거든? 그다음에 이거, 초코링 든 거, 이걸 꺾어. 그리고 섞어."

기현은 얼빠진 얼굴을 하고서 그의 말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의 행동을 곧이곧대로 따라 해 본다. 이 종이도 아닌 것이, 무엇인지 모를 것을 뜯어내고, 초… 초 무슨 이 둥근 것이 담긴 부분을 꺾고.

기현은 하얀색 죽 같은 것의 시큼한 냄새를 한번 맡아 보고는 위에 올려진 것들을 잘 섞고서, 형원이 한술 뜨자 그제야 한술 떠 입에 넣는다.

"어?"

"맛있어?"

"이런 것은 생전 처음 먹어 봅니다."

"이상해?"

"그대가 주셨던 설탕과자보다도 달고, 시큼하기도 한 것이, 묘하긴 하나 맛이 좋습니다."

"어쨌든 맛있다는 말이네. 배고프면 이거 먹고 있어. 냉장고에 넣어 둘게."

기현은 형원이 냉장고라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찾다가, 그가 커다란 장의 문을 여는 것에 저것이 냉장고구나 생각한다. 문을 열자 밝게 불이 켜지며 냉기가 제가 있는 곳까지 풍기는 것에 기현은 또 잔뜩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손에 든 것을 입에 떠 넣는다.

"집 안에 서빙고를 두시다니요. 여전히 도술을 부리시는 것입니까?"

"도술?"

기현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형원의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이 꼭 도술로 이루어진 것 같다 생각했다. 말랑한 것을 누르면 네모난 상자에 움직이는 그림이 나오질 않나, 벽을 짚으면 온 방 안이 환해지질 않나, 장을 열면 서빙고가 숨어 있질 않나. 기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승천하고 다시 생에 난 이후에도 도술을 부릴 수 있는 것인가 하고만 생각한 것이다.

"예, 도술이요. 제게도 줄곧 보여 주셨습니다."

"차라리 쓸 줄 알았으면 좋겠다, 그거."

도술이든 마술이든, 부릴 줄만 알았으면 당장 통장 잔고부터 불렸을 텐데. 형원은 냉장고 비요뜨를 가지런히 채워 놓고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현관으로 향한다.

"갔다 올게. 어제 말한 거 기억하지? 나 없을 때 안방에 들어가지 말고, 집에 있는 거 함부로 만지지 말고, 배고프면 냉장고에 저거 꺼내 먹고."

기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혹여나 형원이 문을 열면 그 뒤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까 싶어 그의 등 뒤에서 기웃거린다. 하지만 그의 말이 곧 사실이었던 듯, 그가 문을 열자 어제와 같은 차가운 잿빛의 복도가 비쳤을 뿐이다. 문이 닫히고, 삐리릭 하는 소리가 끝날 때까지 현관 앞에 서 있던 기현은 손에 든 비요뜨를 한 입 더 떠먹으면서 몸을 돌려 집 안을 둘러본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하였는데, 인제 보니 이전의 형원의 별채의 느낌과는 많이 다르구나. 벽이나 바닥뿐만 아니라, 집 안에 놓인 가구와 소품들도. 잠시 자신이 머물렀던 호화로운 별채를 떠올려 본다. 금박 장식이 된 문, 복도에 드문드문 놓여 있던 백자, 풍성한 휘장. 그와 상반되게 흑백이 잘 어울러진 이곳. 호화롭다기보다 단정한 느낌.

기현은 손에 든 것을 다 비워 냈으나 어디다 치워 둬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손에 들고 있다가 식탁 위에 올려 두고는 한참을 서성인다. 읽으며 시간을 보낼 서책도 없고, 나가서 산책을 할 수도 없으니 사뭇 답답한 것이다. 기현은 어제 형원이 알려 준 대로 동그란 것들이 잔뜩 올려진 손잡이 같은 것을 들어 붉은 원을 꾹 눌러 본다. 동시에 네모난 상자에서 움직이는 그림이 나오는 것에 또 '우와' 하면서 위로 꺾인 문양이 새겨진 것을 꾸욱 누르고 있으니 갖가지 다른 그림이 계속해서 바뀌며 나타난다.

"기이한 일이로다… 그림이 움직이기까지 하니."

이러한데도 어찌 그가 도술을 부리는 게 아닐 수가 있을까. 문 너머에 그가 살고 있는 세상도 꼭 그가 모두 도술을 부려 놓은 듯 신기하기만 할 뿐인데. 그럴 리가 없을 테지만, 혹여 그가 제게 농을 하는 것일까도 생각해 본다.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네모난 상자에 혼이 팔려 있던 기현은 제 바로 뒤에 놓인 천으로 둘러싸인 의자를 보다가 조심히 손을 뻗어 눌러 본다. 튼튼한가 싶었는데, 기분 좋게 푹 들어가는 촉감에 기현은 황급히 손을 떼고 그 위에 제 몸을 앉혀 본다. 꼭 침상과도 같은 느낌. 필시 의자일 터인데 어찌 딱딱하지 않고 이리 푹신할 수가. 기현은 그 위에서 몸을 들썩여도 봤다가, 누워서 뒹굴어 보기도 한다.

이 또한 그가 만들어 낸 것일까. 만일 그가 직접 만들어 낸 것이라면, 그가 또 이 생을 떠나는 날 이것들도 재가 되어 흩어지는 것일까. 기현은 네모난 상자에서 뭐라 하는지 모를 말들을 귀로 흘려 들으면서도 괜히 울적해진다. 이번 생에는 그대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야 남겨진 이가 그것으로 추억할 수 있을 테니.

기현은 제 머리에 스치는 그 허망한 풍경에 작게 한숨 쉰다. 텅 빈 숲에 남겨진 시든 용설란과, 멀찍이 남겨진 좁은 나무문. 그곳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을까. 저가 없는 궁은 어떠할까. 나 하나 없다고 해서 큰일이 난 것은 아니겠지. 현비께서는 잘 계실까. 이제야 향수가 도지는 것도 웃긴 일이지. 형원과 함께 할 때는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거늘. 기현은 몸을 상자 쪽으로 돌려 계속해서 그림을 바꾸다가, 저가 궁에서 살던 때와 닮은 장면이 나오기에 리모컨을 내려놓고 영상에 집중한다. 저를 따르던 궁인들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것이 꼭 자신이 궁에 온 기분이 드는 것이다.

수랏간 나인들이 나오는 영상들을 몇 시간 동안 보고 있다가, 뻐근함에 집 안을 돌아다녀도 봤다가, 출출해지면 형원이 일러 준 대로 아침에 먹었던 것을 꺼내 먹기도 했다가, 또 영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를 반복하는 기현이다. 별채에서는 형원이 없는 시간에도 줄곧 혼자서 시간을 잘 보냈건만 이곳에서는 어찌 이리 시간이 안 가는지. 형원은 언제 오실는지. 기현은 어렴풋이 노을이 질 즈음에 깊은 낮잠에 빠진다. 꿈속에서 자신은 백의를 입은 형원과 함께였다. 그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면 좋으련만, 꿈속에서는 오직 그 백의만이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얼굴을 보여 달라 이르니 제 머리 위로 나즈막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떨어진다.

"기현아."

기현은 꼭 현실인 듯 생생히 들리는 그 목소리에 옷깃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한 번 더 그에게 채근한다. 그립노라고. 그대가 계시나 그대가 보고프다고. 허나 제 바램과는 달리 그가 하는 말은,

"얘 왜 이래. 기현아."

기현이 느리게 눈을 뜨면, 아침에 문을 나서던 것과 같은 차림을 한 흑발의 형원이 제 앞에 서 있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형원이 제 청을 들어준 것이라는 생각에 기현은 작게 웃어 보인다. 그런 기현을 형원은 가만히 내려보다가, 제 셔츠를 꽉 쥐고 있는 손을 천천히 거두면서 주방을 슬쩍 봤다가 다시 기현을 돌아본다.

"아, 내가 저거 치우는 걸 안 알려 줬구나. 먹고 나면,"

"신기합니다."

"갑자기?"

"그대가 그립다 읊조렸더니, 그대가 눈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꿈까지 꿨나 보네. 꽤 감격에 찬 눈에 속내를 차마 말할 수도 없는 형원은 그저 저가 하던 말을 마저 잇는다.

"먹고 나면 저 레버, 아니 저 쇠 손잡이를 레버라고 하거든? 저거로 물 틀어서 한번 씻고 엎어 놓으면 돼."

"알겠습니다…. 저, 형원."

"왜?"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알겠어."

형원은 다짜고짜 제게 고백하는 목소리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싫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래도 내가 제정신이면 대충 듣고 넘겨야지. 열아홉인데. 물론 그 옛날이면 결혼해서 애도 있을 나이지만 어쨌든.

"배 많이 고팠어?"

"아, 그저 좀 허기가 져서."

"치킨 시킬까."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차였는데 잘 되었다 싶은 형원이다. 건강식만 드셨을 텐데, 요즘 음식도 좀 자셔 봐야지. 고민도 않고 배달 앱으로 주문하고서 옷방 문을 열었다가, 훤히 밝혀져 있는 방에 형원은 입술을 한번 말아물고 나서 기현을 돌아본다.

"방에 불 켜져 있으면 꼭 꺼야 돼. 알겠지?"

"아, 그렇지 않아도 여쭤 보려던 차였습니다."

"벽에 스위치 있거든? 짚어 보면 알아, 하얀 거 있어. 그걸 스위치라고 해. 그거 눌러서 끄면 돼."

형원은 기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집에서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쌓인 집안일들을 해치운다. 혼자 살 때도 귀찮았던 일인데, 사람 하나 늘었다고 이렇게 더 귀찮냐. 조만간 집안일이라도 시키든가 해야지, 세도 안 받는데. 아, 쟤 물건도 필요네. 마트에도 같이 가야겠다.

기현은 거실 탁자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상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기름 냄새는 궁에서도 큰 잔치가 있을 때만 은은하게 맡을 수 있었건만. 고소하고 향에도 풍미가 가득한 것이, 도통 무슨 음식인지 알 수가 없어 상자가 뚫어질 듯이 쳐다만 보고 있는 기현이다. 형원이 긴 다리를 휘적이며 비닐장갑과 비닐봉지를 가져와서 상자를 열자, 기현은 금세 눈을 빛내며 음식 앞에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아 본다.

"향만 맡아도 군침이 도는 것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치킨이라고 닭 튀긴 거야. 장갑 끼고,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기현은 형원이 하는 대로 어색하게 손에 비닐 장갑을 끼고 '앗 뜨거' 하면서 닭 다리를 한 입 베어 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형원은 기현이 잘 먹을까 하는 마음에 그를 가만히 지켜본다. 그런데 그게 다 괜한 걱정이었던 듯, 기현은 손에 들고 있던 닭 다리를 삽시간에 뼈만 남겨 놓고서 다음 조각을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잘 먹네."

끄덕.

"맛있어?"

끄덕끄덕.

이런 걸 보면 참 얘도 아직 애구나 싶은 것이다. 그 옛날에 얼마나 어른 취급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 맛있는 거 보면 옆에 내가 죽어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먹는데.

"그런데 형원은 안 드십니까?"

"나는 세 조각이면 많이 먹은 거야."

"이리 맛있는 것을. 필시 귀한 음식일 테지요?"

"2만 원이면 먹어."

"2만 원이라 함은,"

"어… 한 두 시간 조금 넘게 일하면 먹을 수 있겠네."

"이리 맛있는 것이라면 하루 종일 일한 값으로 먹어도 부족합니다."

"많이 먹어."

형원은 제 뜻과 상관없이 손을 뻗어 기현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었고 기현은 그 손길에 멈칫하며 입안에 든 것을 겨우 목 뒤로 넘긴다.

"전에도… 줄곧 이리 해 주셨습니다."

"어?"

"줄곧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대가."

"아…."

형원은 그제서야 손을 떼고 머쓱하게 콜라 뚜껑을 열어서 벌컥인다. 왜 그랬지, 내가. 그냥 기특해서 그랬겠지. 잘 먹으면 보기 좋잖아. 형원은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려 주방에서 컵 두 개를 꺼내와 기현의 앞에 놓아 주며 컵을 채운다.

"느끼할 텐데 마시면서 먹어."

"빛깔이 꼭… 탕약과도 같은데."

"쓴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기현은 걱정 반 기대 반 잔을 들어 목으로 넘기다가 컵을 내려놓고 켁켁거린다.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목 안이 찌릿한 것이 무언가 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헌데 그것을 참고 먹을 수 있을 만큼 달큰한 것이. 기현은 제 목에서 튀어 오르는 것이 진정되고 나서 다시 한번 컵을 들어 목 뒤로 넘겨 본다. 은근히 중독성이 있기도 한 것이 어찌 이리 술술 들어갈까. 궁에서 먹었던 단술보다도 달콤하구나.

식사가 거의 끝나고 형원이 상을 치우는 것을 기현도 어설프게 돕는다. 형원이 주방으로 어떻게 설거지를 하는지, 주방에 난 문을 통해 가서 무엇을 하는지. 그의 뒤를 좇으면서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익히는 것이다.

"뒷방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세탁기. 요즘엔 다듬이질 안 해. 얘가 다 해 줘."

"어찌 그런…. 이 또한,"

"도술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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