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햄] 용설란 (龍舌蘭) - 8/10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용설란 (龍舌蘭)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w. 주인장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 지도 2 주 정도 지날 즈음이 지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제 방 앞에 얌전히 앉아 밤새 강녕했느냐 묻는 기현에 형원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 부탁한 이후로 기현은 옷방 앞에서 멀뚱히 서 있다가 형원이 나오면 고개만 꾸벅 숙여 안녕히 주무셨느냐 묻는 것이 다였다. 형원은 그마저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이 정도면 많이 양호해진 거지 생각하면서 '너도 잘 잤어?' 하고 간단히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혼자 살았더라면 두지도 않았을 밑반찬들을 퇴근길에 사 와서 냉장고에 쟁여 두고, 텅 비어 있던 주방 찬장에는 즉석밥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모두 혼자 있을 기현을 위한 것들이었다. 언제 배웠는지, 아니면 혼자 어떻게 익힌 건지, 어느 순간부터 형원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식기들은 깨끗이 정리된 채로 엎어져 있었고, 바닥도 반질하게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너가 청소해 놓은 거야?"
"예, 홀로 있으면 무료하여. 헌데 그대의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습니다."
"혼자서 고생했겠다."
"그대에게 받은 은덕에 비한다면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보잘것없기는. 기특하구만."
형원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뻗은 팔이 기현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에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매번 먼저 행동하고 나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은 그의 새로운 습관이 되었다. 어린 게 기특하잖아. 말도 예쁘게 하고. 기현은 그 대단하지 않은 행위에도 마냥 벅찼다. 지금의 형원에게서 이전의 그의 흔적을 찾으라면, 당연히 아무렇지 않게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었으니.
형원은 주말을 맞아서 큰 결심을 하고서는 옷방을 뒤져 본다. 기현은 그가 무얼 그리 열심히 찾는 것인가 형원의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가 여기저기 날리는 의복에 작게 눈살을 찌푸린다. 나중에 다 고이 개켜 놓아야겠구나 생각하면서. 한참을 찾던 형원은 팔에 옷 세 벌을 걸고서 제 등 뒤에 있던 기현에게 건넨다.
"자, 이걸로 갈아입자."
"어디 나가시려는 것입니까?"
"오, 눈치 좀 생겼는데."
"평소에 하지 않으시던 것을 하시니 그리 생각할 수밖에요."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
"어디를 보여 줘야 하나…."
'대군께 무얼 보여 드리면 좋을까.'
지금의 음성과 과거의 음성이 겹쳐 들리는 것은 그저 기현의 환각이었으리라. 기현이 멍하니 옷을 들고서 의기양양한 형원을 바라보고 있자, 형원은 기현과 눈을 맞추며 왜 그러느냐는 듯 눈을 조금 더 크게 떠 낸다. 그리고 갑자기 제게 와락 안겨 오는 기현에 어정쩡하게 서서 그를 감싸안아 주지도 못하고 서 있을 뿐이다.
"어… 기현아?"
"잠시만."
"…."
"무례하나, 잠시만 이리 있겠습니다."
기현은 형원의 품에서 미동도 않고 그저 꼭 끌어안고 있다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 그의 품에서 나와 싱긋 웃어 보인다.
"어디가 되었든 그대와 함께 하는 곳이라면 황홀하겠지요."
"어… 그래…."
"잠시 나가 계셔 주십시오, 환복을 해야 하니."
형원은 기현에게 떠밀려 옷방을 나서고서 생각한다. 이상했다. 가슴이 뛰는 것도 이상한데 아프기도 한 게.
형원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그 문에 비친 기현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평범한 착장과는 다르게 어울리지 않는 옛 신을. 기현은 입은 옷이 어색한 듯 가디건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대뜸 제 앞에서 양옆으로 열리는 문에 형원을 돌아본다.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서는 형원의 등을 바라보다, 혹여나 그를 놓치면 따라갈 수 없을까 봐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매일 이리 기이한 것들이 나를 경이롭게 하는구나. 형원은 모든 게 신기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기현을 보다가 피식 웃는다.
"문 열리면 뭐 있을 것 같아?"
"예? 그야, 아까 그대와 제가 서 있던 곳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착음을 울리며 열리는 문과 그 뒤로 보이는 모습에 기현은 형원을 올려다본다. 꼭 형원이 도술 같은 건 쓸 줄 모른다는 말이 거짓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걸음을 나서기 전에 기현이 형원의 손끝을 잡아 오자, 형원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맞잡으면서 제 차로 향한다. 기현은 행여나 맞닿은 손바닥으로 제 빠른 고동이 들킬까 봐 천천히 심호흡을 해 본다. 수레도 아닌 것이, 가마도 아닌 것들이 즐비해 있는 곳을 지나 흑색의 무언가 앞에 선 기현에게 형원은 조수석 차문을 열어 준다.
"타."
"이게…?"
"그, 옛날로 치면 가마 같은 거지."
마차는 없었을 거고, 이걸 가마라고 해도 되나. 형원은 제 말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아무렴 어떤가 싶은 것이다. 기현은 어색하게 가죽 시트에 몸을 앉히고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다. 차마 함부로 손 대면 안 될 것 같은 것들이 가득하여 몸을 편히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형원은 익숙하게 운전석 시트에 몸을 기대면서 차에 시동을 켜고 출발 준비를 한다. 형원이 열쇠를 꽂고 돌리자 갑자기 내부에 불이 켜지는 것을 기현은 신기하다는 듯 둘러 볼 뿐이었다.
"안전벨트 해야 돼."
"안전벨… 트가 무엇인지."
형원은 '아' 하면서 몸을 기현 쪽으로 숙여 안전벨트를 손수 잡아 당긴다. 제 앞으로 훅 끼치는 형원의 체향에 기현은 괜히 숨을 참고 목을 더 뒤로 뺀다. 이리 가까이 마주한 것은 처음인데, 어쩌시려 이리 다가오신 것인지. 기현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전의 입맞춤에 얼굴까지 벌개지는 것이다.
"어디 아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차에 타면 이거 꼭 해야 해. 뭐, 내 차만 타겠지만."
기현은 그렇게 말해 놓고서 제 앞에서 얼굴을 치우지 않는 형원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본다. 형원 자신도 혼란스러운 것이다.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왜 요새는 먼저 행동해 놓고 그 다음에 이유를 찾는 건지. 지금도 안전벨트 채워 줬으면 그만인데, 왜 몸이 안 떨어지는지.
형원은 어색하게 시선을 옮기고서 몸을 일으켜 차를 출발시킨다. 기현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눈으로 빠르게 좇으면서 풍경을 감상한다. 해가 머리 위에 떠 있는 밝은 오후 햇살은 저를 들뜨게 하면서도 노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기현은 한창 정신없이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해 놓다가, 문득 경치가 멈추는 것에 그제야 형원에게 진작 물었어야 할 것들을 내뱉는다.
"헌데, 어딜 이리 바삐 가시는 겁니까?"
"너 신발 사러."
"제 신이라면, 아직 헤진 곳도 없는데."
"요즘에는 그런 신발 안 신어. 그리고 그냥, 뭐 선물 같은 거지."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헌데, 장이 보이질 않습니다."
"거의 다 왔어. 저 앞에서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돼."
"그래도 보이지 않는데."
형원은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핸들을 꺾어 지하로 들어선다. 어찌 땅 밑으로 들어가시는지. 기현은 불안했음에도 제 옆에 형원이 있었기에 그가 가는 곳이라면 안전하겠지 생각하며 애써 침착을 찾는다. 기현은 주차장에서 아울렛의 지상으로 올라가 목적지에 다다르기까지 사방을 둘러본다. 기현의 눈에는 이곳도 도술로 부려 낸 허상의 공간 같았던 것이다. 밝은 듯 은은하게 황색으로 빛나는 등불이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매달려 있고, 그 아래로 도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붐비는 인파들. 이 정도라면 궁에서 큰 잔치가 열리거나 도성에 장이 설 때보다도 큰 경사가 인 듯 한데. 기현이 형원의 손끝을 쥐고 어색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형원이 행여나 기현이 길을 잃을까 싶어서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기현의 주의를 끈다.
"길 잃어버리면 큰일 나. 너 휴대폰도 없잖아."
기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휴대폰'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해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제 눈 앞에 신으로 보이는 것들이 벽에 가지런히 정돈된 게 눈에 들어온다. 형원은 진열된 스니커즈와 기현을 번갈아 보다가 제일 무난해 보이는 흰색 스니커즈를 꺼내 기현의 발에 대 본다.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하며 직원에게 미리 말해 둔 사이즈의 같은 디자인을 한 신발을 받아 기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거기 앉아 봐."
"형원, 일어나세요. 어찌 제 앞에,"
"선 채로 신발을 어떻게 신켜. 앉아 봐, 맞나 보게."
"스스로 해 보이겠습니다."
"쓰읍-."
기현은 단호한 형원의 태도에 어색하게 붉은색 의자에 앉아 그의 머리를 내려다본다. 그러고 보니 제 신을 직접 신켜 주시는 것도 처음이지. 내가 그의 머리를 내려다 본 적은 있었던가. 백의를 입었던 형원은 늘 꼿꼿하게 자태를 굽히지 않아 늘상 그를 올려다보곤 했었는데.
"어때? 불편해?"
기현은 저를 올려다보며 눈을 맞추는 형원에 '아' 하며 신발 안에 놓인 발을 꼼지락거려 본다.
"불편함은 없는 듯한데."
"걸어 봐."
기현은 제 발을 갑갑하게 감싸는 신발이 불편하면서도 움직이기에는 편하기 그지없어 신기함에 발을 들어 신발을 살펴 본다.
"발이 편한 것이, 움직이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편합니다."
"그 디자인은 마음에 들어?"
"예?"
"아, 그, 생긴 건 마음에 들어?"
하얀색 신. 그러고 보니 형원이 백의를 입고 다녔을 적에는 그 신도 순백색이었지.
"예. 감읍합니다."
형원은 '오케이' 하며 망설임 없이 결제를 하고서 쇼핑백에는 기현의 옛 신을 넣고, 다시 기현의 손을 맞잡고서 매장을 나선다. 기현과 처음 쇼핑 나온 김에 할 건 하자 싶어서 형원은 기현의 몫인 휴대폰까지 하나 장만해 주었다. 개통까지 끝낸 휴대폰으로 형원이 전화를 걸자, 기현은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할 정도로 놀라서 형원을 올려다 본다.
"내 번호 저장해 줄게. 이렇게 전화 울리면서 내 이름 뜨면 꼭 받아."
"이… 이 작은 것으로 무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너랑 내가 멀리 있어도 소식을 알 수 있고, 사진도 찍을 수 있고, 드라마도 볼 수 있고."
하루 종일 티비만 보다 보니 '드라마'라는 말은 이해할 수 있는 기현이었기에, 형원의 말에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 손에 들린 것을 이리저리 살펴 본다. 형원이 기현의 것을 가져가 제 이름을 저장하고서 다시 기현에게로 전화를 건다. 기현은 네모난 것에 '형원'이라고 글씨가 새겨지는 것에 형원을 바라보다가, '받아 봐' 하는 그의 말과 전화 받는 법을 다시 상기해 보며 초록색 원을 밀어 본다. 화면이 바뀌고 나서 그 네모난 것을 귀에다 가져다 대니 신기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신기하지?]
"예. 신기하다마다요. 제… 제 목소리는 잘 들리십니까?"
[잘 들려. 무슨 일 있으면 전화 걸고, 내가 걸면 꼭 받아야 해.]
"참 좋은 물건입니다. 그리울 때면 언제든 그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니."
"내 너를 홀로 두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예?"
"어?"
"…무어라 하셨습니까?"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형원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온 말에 당황해서 잠시 굳어 있다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고서는 다시 기현의 손을 맞잡는다.
"아니야, 아무것도. 바깥 바람 좀 쐴까? 사람이 많아서 갑갑하네."
나 뭐 귀신에라도 쓰였나. 평소 제 말투와는 전혀 다른 아까 전의 제 말에 형원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로 걷다가, 눈 앞에 보이는 카페에 기현의 손을 놓고는 걸음을 옮긴다.
"저기 벤치, 그 의자에 가서 앉아 있어."
"어디 가십니까?"
"마실 거 사 올게.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기현은 멀어지는 온기에 아쉬운 듯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펴고서는 휴대폰이라 부르는 기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어찌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일까. 이렇게 톡 쳐 보면 다른 그림이 펼쳐지는 것이 재미있어서 지나치는 행인은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기현은 제 어깨를 툭 치는 이로 인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떨구고, 허겁지겁 휴대폰을 주워 들어 먼지를 털어 낸다.
"부딪혔는데 사과도 안 하네. 어린 게."
기현은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느릿하게 고개를 든다. 잊고 있었던 그 얼굴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저가 그리도 싫어했던 세자의 얼굴. 필시 그 시절의 그는 아닐 것이지만, 다시 태어나도 그 성미는 변하지 않았는지 남자는 위협적인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지."
"앞을 살피지 못한 것은 제 불찰이나, 그쪽 또한 잘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야, 얘 말투 뭐냐?"
"사과를 받으시려거든 그쪽에서도 잘못을 시인하시는 것이 서로 좋지 않겠습니까."
"네가 앞을 안 봐서 그런 거 아냐. 내가 일부러 쳤어?"
"아니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기현이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남자도 악에 받친 듯, 일행이 말리는 것에도 불구하고 기현에게 한 발 다가서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친다.
"한참 어려 보이는 게 어디서 말대꾸야. 야!"
"잘잘못을 가리는 데에 나이가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뭘 믿고 자꾸 깝ㅊ, 아!"
"야."
기현은 불쑥 옆에서 튀어 나오는 형원에 놀랄 새도 없이, 그가 제 어깨를 툭툭 치던 손목을 비트는 것에 형원을 저지하려다 제 앞을 막고 서는 형원의 뒤에서 그저 뻘쭘하게 서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봐."
"아, 뭐야, 이건!"
"다시 말해 보라고."
"아악! 아, 죄송합니다, 이거 좀,"
"미안해?"
남자는 제 손목에 가해지는 힘이 커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꼬리를 내린다. 예나 지금이나, 강한 자에게 약한 건 변함이 없구나 생각하는 기현이다. 형원이 그의 손목을 내팽개치자 남자는 일행과 함께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형원의 귓가로 '그러니까 나대지 말라니까' 하는 목소리가 흩어지고 나서야 기현을 돌아보고서는 그를 살핀다.
"쟤네가 너한테 어떻게 했어?"
"별일 없었습니다."
"어떻게 했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사사로운 언쟁이 오갔을 뿐입니다."
"폰은 왜 이래?"
"아, 이것은, 제가 실수로 떨어뜨려서… 송구합니다."
형원은 고작 휴대폰을 떨어뜨려서 액정에 금이 조금 간 것뿐인데도 세상이 끝난 듯이 근심 어린 얼굴을 하는 기현이 귀여워서 피식 웃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괜찮아. 아, 카페 다시 갔다 와야겠다."
"어디를 또 가신단 말입니까?"
"급하게 오느라 떨어트렸어. 목 마르지? 다시 사 올게."
기현은 자상한 형원의 얼굴이 멀어지기 전에 그의 손을 붙잡는다. 그 옛날엔 저를 구해 주고서 고백과 함께 떠났었지. 이전의 그와 지금의 그가 겹쳐 보이는 것은 기현에게 행복한 일이면서도 불안한 일이기도 했다. 또 그리 내게서 등을 돌려 떠나 놓고서 혼자 앓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형원이 왜 그러냐는 얼굴로 기현을 돌아보자 기현은 애써 웃어 보이면서 그의 옆에 붙어 서서 걸음을 나선다.
"함께 가시지요. 소인도 그 카페 라는 곳이 궁금합니다."
기현은 손에 들린 플라스틱 테이크아웃 잔을 양손에 소중히 쥐고서 빨대에 입을 대고 한 모금 쪽 빨아 마신다. 이것이 무어라 하였더라. 자몽 이드였나, 자몽 에드였나. 생소한 음료는 달짝지근하면서도 상큼한 것이, 일전에 마셨던 콜라처럼 목을 개운하게 하는 느낌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 제게로 떨어지는 물음에 기현은 형원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어 저를 봐 주지 않아도 그의 말투에 묻은 다정함애 마냥 행복해지는 기현이다.
"저녁 먹고 싶은 거 있어?"
"치킨이 좋을 듯합니다."
"또 치킨 먹게?"
"근래 들어 먹은 것 중 가장 맛이 좋았습니다."
"저번에 먹은 거?"
"다른 치킨도 있다는 말입니까?"
"요즘에 치킨 파는 곳이 얼마나 많은데."
"참 풍족한 세상에 다시 나셨으니 천만다행입니다."
형원은 기현이 꼭 저를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대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함께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저를 다 안다는 듯 행동하는 것은 불쾌했다기보다 되려 제 가슴을 뛰게 했던 것이다. 보통 전자이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 말에 미소가 지어지는 이유를 스스로도 찾을 수 없었다.
짧지 않은 거리를 달려 차를 주차해 두고, 한 손에는 기현의 몫인 쇼핑백을 들고 다른 한 손은 기현이 먹고 싶다던 치킨을 시킨다. 이번엔 이거 먹여 봐야지, 하면서 주문을 완료한 형원은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에 기현과 함께 오르면서 그의 손을 잡는다. 이상하게 기현은 어느 문이든 나설 때마다 제 손을 잡아 왔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행동이 이제는 제게도 습관이 된 듯했다. 기현이 들고 있던 음료를 다 마신 듯 빨대를 통해 요란한 소리가 날 즈음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여즉 손을 맞잡은 채로 엘리베이터를 나선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잠깐 멀어진 그 온기가 아쉬운 쪽은 이제 비단 기현뿐만은 아닐 것이다. 기현이 먼저 새 신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서 집 안으로 들어서고 형원은 쇼핑백 안에 있는 기현의 신을 신발장 안에 고이 모셔 둔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하얀 자수가 들어간 남색 신. 이 신발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있었나.
"어찌 들지 않으십니까?"
"어? 어, 아니야. 정리 좀 하느라."
차라리 드라마처럼 그 신발을 보고 뭐라도 기억이 났으면 좋을 텐데. 떠오르는 추상적인 이미지도 없고 그냥 가슴이 조금 저릿한 게 전부라 형원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손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소파의 양 끝에 형원과 기현이 편히 자리한다. 생각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주말 뉴스가 나오는 공영 방송으로 화면이 바뀌었을 때 초인종이 울리고, 형원은 현관으로 가서 주문해 둔 음식을 받아 들고, 그새 몇 번 경험이 있다고 즐거운 얼굴로 거실의 탁자 앞에 앉는 기현의 앞에 음식을 가져다 놓는다. 제 코로 들어오는 풍미 가득한 향과 처음 맡는 꼬릿한 냄새. 전보다 작은 상자를 꺼내서 열어 보면 노란 가루가 묻은 닭튀김이 모습을 드러낸다.
"생김새가 기이합니다."
"잠깐만, 그거 여기다 찍어 먹어야 돼."
형원이 요거트소스 뚜껑을 따서 기현의 앞에 놓아 주고는 컵을 가져와 콜라를 따라 준다. 사이 좋게 다리 하나씩 나눠 들고서 막 한 입을 먹었을 때, 뉴스에서 기자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경북 ㅇㅇ에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민들로 북적입니다. 바로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식물, 백 년에 한 번 꽃이 핀다는 용설란이 개화했기 때문입니다.]
기현은 막 입에 문 고기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제 귀에 꽂히는 '용설란'이라는 세 글자에 먹던 것을 천천히 내려 놓고서 화면에 집중한다. 갑갑한 공간 안에서 홀로 위를 향해 뻗어 꽃을 피우는 그것. 자신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꽃이 피어선 안 되는데…."
[용설란은 자란 지 10년이 지나야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그 주기가 일정하지 않아 길게는 백 년만에 핀다고도 합니다. 또한, 개화하고 나면 시들어 죽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꽃이 피어선 안 되었는데. 기현은 묻어 두고 있던 죄책감이 다시 피어 오르는 것에 제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을 떨군다. 아직도 제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 것이다. 갑자기 제 앞에서 스러지던 뒷모습, 흐리게 피어 올라 허공에 흩어지는 그의 흔적들, 사력을 다해 손을 뻗어 제 얼굴을 감싸던 희미한 온기를 담은 손. 마지막까지 저를 담던 두 눈동자. 그러다 기현은 제 뺨에 닿는 온전한 온기에 고개를 돌린다.
"왜 울어. 울지 마."
꼭 자신이 이제 곁에 있으니 이제 눈물 짓지 말라 들리는 것 같다. 그는 모르겠지만, 그의 온화한 얼굴을 보면 꼭 그렇게 느껴진다. 기현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면서 얼굴을 떼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송구합니다. 괜히 그대를 염려케 하여,"
"맨날 뭐가 그렇게 미안해."
"그저…."
그대를 그리 흩어지도록 둔 것이 나라는 게. 그대를 그리 아프게 한 것이 저를 향한 연정이라는 것이. 그것이 못내 가슴에 사무치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꽃을 피우고 생을 다하는 저것이 가엾어서."
평소라면 뚝딱 비웠을 치킨을 그대로 남겨 둔 채 상을 치우고 잘 준비를 마친 기현은 제 침실인 옷방 앞에서 문을 열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형원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앞에 가서 선다.
"형원."
"응? 왜? 필요한 거 있어?"
물기 묻은 머리칼 아래 자리한 뽀얀 얼굴을 바라보다가 기현은 어렵게 입을 연다.
"오늘은 함께 잠에 들면… 안 되겠습니까?"
형원은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기현을 걱정스레 바라본다. 별안간 울기 시작할 때부터 쓰였던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아니면 자신도 그러길 바랬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오늘은 왠지 자신도 그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만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었다. 기현은 바로 떨어지지 않는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제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전에 저를 바라봐 주던 그 따뜻한 얼굴을 한 형원이었다. 형원이 팔을 들어 제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는 것에도 그가 그리워지는 기현이다.
"그래, 그러자."
자신이 그리워 마지못한 이 다정함이 좋아서 당장이라도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으나, 기현은 애써 참아 본다.
이 집에 발을 들이고 난 후 처음으로 제대로 그의 안방을 살펴 본다. 흰색 휘장도, 귀한 것들로 꾸며진 가구도 아니었으나, 되려 담백하고 깔끔한 것이 그와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온통 하얀 침대에 기현이 먼저 몸을 눕히자, 안방에 불을 끄고 형원도 침대 위에 자리한다. 나란히 정면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건 형원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늘 그와 마주보고 잠에 들었던 기현도 지금이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멀뚱히 천장만 보고 있는 게 얼마가 지났을까. 형원은 기현에게 잘 자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눈을 감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단잠에 빠진다.
형원은 간만에 그간 꾸지 않았던 그 꿈을 다시 꾼다.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돌바닥 위에 선 자신. 하얀색 옛 신과, 그 위로 살랑이는 흰색 옷자락. 그러다가 걸음을 옮겨 작은 연못 앞에 서서 수면을 들여다 보면, 작은 파동도 없는 수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친다. 조금 수척한가?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장면이 뒤바뀌면서, 꿈에서 지겹도록 봤던 그 작은 나무문 앞에 자신이 서 있다. 왠지 이 문을 건너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시선을 조금만 옮기면 제 손을 끌어다 놓는 다른 손이 보인다. 익숙한 하얀 손. 아, 나 지금 부축받고 있구나. 그런데 나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나가기 싫은데. 그냥 여기 계속 있으면 안 될까. 이런 바램이 꿈에서는 통할 리가 없었다. 제 생각과는 관계없이 진행되는 게 꿈이니까. 제 의지가 아닌, 저를 부축하는 이의 의지로 문이 열리자마자 거짓말처럼 몸이 고꾸라진다. 아,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지. 형원은 꿈에서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 오늘이 이 꿈의 마지막이겠구나. 그런데 왜 봤던 장면을 또 보여 줄까. 어차피 이 꿈이 어떻게 끝날지는 뻔히 알고 있었다. 머리가 아니라 꿈속의 육신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꿈이 끝나면 나도 끝날 것이라는 것을. 꿈인데도 제 청각은 또렷한 것이 신기했다. 또 이 처절한 울음소리. 주체하지 못해서 크게 오열하는 남자의 소리. 오늘은 누군지 알 수 있으려나. 어차피 마지막이면 알려 줄 법도 한데. 꿈속에서 형원은 팔을 들어 사력을 다해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제 손에 닿는 따뜻하고 말캉한 느낌이 꼭 현실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
꿈속에서 자신은 누군가의 이름을 매번 불렀다. 다만 그 이름이 잘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뺨에 닿은 제 손에 다른 손이 겹치는 것마저도 생생하다. 꿈속에서의 형원이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시야가 또렷해진다. 어딘가 익숙한 고운 비단 한복. 그 위로 하얗고 두껍지 않은 목을 따라 남자의 턱이 보이고, 더 위로 시선을 옮기면.
'기현아.'
저를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울기만 하던 남자의 이름이 제 귀로 돌아와 박힌다. 그리고 제 시야에도 오롯이 자리하는 그 하얗고 말간 얼굴.
'너무 슬퍼 말거라.'
'뒤뜰의 문은, 남겨 달라 청할 것이니,'
'언제든 내가 그리워지면, 저 문을 열고 나가거라.'
'그곳에 내가 있을 테니….'
형원은 멍하니 꿈속에서 스러져 가다가 문득 제 귀로 웅웅거리는 말소리가 들리자 잠에서 깬다.
'이 만하면 다 전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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