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설란 (龍舌蘭)

[채햄] 용설란 (龍舌蘭) - 9/10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용설란 (龍舌蘭)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w. 주인장

형원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서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확인한다. 창밖으로 달빛만 새어 들어오는 불 꺼진 방. 그제야 꿈에서 깨었음을 자각한 형원은 얌전히 기현의 뺨 위에 올려진 제 손을 천천히 거두었고, 기현은 잠결에도 그것이 아쉬웠는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형원의 품에 안겨 들어온다.

아, 매번 꿈속에서 본 내 옆에 있던 남자가 너였구나. 나에게 손을 뻗던 것도, 나를 위해 울어 줬던 것도 너였구나.

형원은 아직도 콧대를 넘어 흐르는 눈물을 대충 훔쳐내고서 생각에 잠긴다. 분명히 같은 꿈이었는데, 꿈속에서 내가 말한 것도 아닌데 내 목소리로 말한 이는 누구였을까. 무얼 다 전했다는 걸까.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생각이 많아질수록 그나마 남아 있던 잠기운도 달아난다. 유기현은 꿈속의 그 남자와 어떤 관계였을까. 무슨 사이였길래 그렇게 처절하게 울고 있었을까. 꿈속의 유기현도 진짜 기현인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한없이 형원의 머리를 어지럽힌다.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음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 제 품에 안긴 기현의 등을 저가 감싸 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냥 안고 싶으니까. 제 품에서 쌕쌕거리며 잠든 기현에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어서. 먼저 행동을 하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닌,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 지독한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것과 관련된 기억이 갑자기 터져 나오진 않았다. 꿈속의 자신은 내가 모르는 나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느끼는 감정도 그것과는 별개의 것이겠지. 형원은 잠든 기현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만져 보다가 이내 손을 거둔다. 희미한 감정이니까 차라리 접어 두는 편이 낫겠지. 네가 나에게 애정을 드러내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어떻게 너한테. 형원은 기현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침대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쥐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되돌아가 기현에게 이불을 턱 끝까지 잘 덮어 주고 나서야 방을 나선다.

기현은 간만에 깊은 단잠에 빠져 개운한 몸을 쭉 며며 천천히 눈을 뜬다. 제 옆에서 함께 잠에 들었기에 당연히 제 옆에 있을 거라 생각한 형원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자, 기현은 허겁지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슴없이 방문을 열고 나선다. 오래 그를 찾아 헤맬 것도 없이, 소파에 불편하게 몸을 구긴 채로 자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서야 그의 앞으로 다가가 앉아 그의 어깨를 흔든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는 형원은 걱정 가득한 기현의 얼굴이 꿈속의 그와 겹쳐 보여 여즉 비몽사몽한 것이다.

"어찌 불편히 주무시고 계십니까. 편한 침상도 그냥 두시고."

"그냥… 너 편하게 자라고."

눈을 채 다 뜨지도 못한 형원이 눈을 몇 번 비비다가 몸을 일으켜서는 소파에 몸을 기댄다. 기현이 깨울 시간이면 아직 아침이라는 얘긴데. 내가 주말 아침에 다 일어나네.

"밤새 고된 꿈이라도 꾸신 겁니까?"

"…아니, 괜찮아."

얼굴 또 부었겠지. 형원은 욕실로 가서 제 양 볼을 문질러 보다가 욕실을 나서 주방으로 향한다. 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누르는 행위를 두 번 하고 나서 잔 하나를 기현의 앞에 내려놓는다. 기현은 이제 진갈색 액체를 보면 탕약보다는 콜라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으나, 김이 피어나는 이것은 흡사 탕약에 가까웠다.

"이것은 탕약입니까?"

"아니, 커피."

아, 커피…. 기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서는 잔을 들어 몇 번 입김을 불어 식히고서 한 모금을 마시고는 쓴 맛에 인상을 쓴다.

"많이 써? 설탕 타 줄까?"

"괜찮습니다, 제가 애도 아니고."

형원은 기현의 마지막 말에 피식거리던 웃음을 거둔다. 애도 아니고. 분명 기현에게서는 처음 듣는 말인데 언젠가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든다. 꿈에서 들었나? 그렇다고 하기엔 꿈에 대한 기억이 오래가는 편은 아니었다. 갑자기 제 머릿속에 오래 전부터 박힌 기억이라는 듯 목소리 두 개가 겹쳐 들리는 것에 크게 당황한 형원이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한 모금 더 마신다.

"탕약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향이 참 좋습니다."

그 탕약도 향이 좋지 않았을 리 없는데.

"왜 그러십니까, 형원?"

형원은 무의식중에 드는 생각에 혼란스러워 탁 소리가 나게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는다. 기현이 제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 것에도 몸을 뒤로 빼며 그의 손을 피한다. 문득 무섭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기현을 만난 이후로 이유 모를 행동을 하더니, 이제야 그게 좀 나아지니까 꼭 내가 저 녀석을 오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잖아.

"나, 좀 더 자야겠다."

어색하게 끊어 말하고서, 기현의 걱정 어린 시선도 마다하고서, 그냥 몸을 돌려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래, 피곤해서 그런 거지. 잠을 잘 못 자서.

아침에 있었던 일은 묻어 두고 기현과 평온한 하루를 보낸다. 기현이 혹시나 집에만 있기 갑갑해 할 수도 있으니까, 이제 무난히 신을 신발도 있겠다, 옷도 몇 벌 샀겠다, 그에게 도어락 비밀번호까지 공유하는 형원이다. 어차피 멀리 나갈 일도 없겠지만, 혹시나 길을 잃으면 곤란하니까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는 법까지 알려 주었다. 들어올 때는 종 누르고 숫자 네 개를 누르고, 엘리베이터는 이렇게 타면 되고, 집 앞에 오면 또 숫자 여섯 개를 누르고. 저에게는 당연한 일상이 기현에게는 또 신기하고 복잡한 과정들이었던 것이다.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에 감읍해 마지않으나, 저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외출은 그대와 함께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형원은 기현의 말을 곱씹으면서 평일을 보냈던 것 같다. 늘 집을 나설 때 저를 배웅해 주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를 기다리는 기현이 머리에 그려지면서도, 그와 동시에 언제인지 모를 기현이 겹쳐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꿈에서 봤던, 처음 그를 만났을 때 흙먼지 묻은 한복을 입은 그 모습. 바쁜 업무 속에서도 문득 기현이 떠오르면,

'항상 갑갑한 곳에만 있어 놓곤 어찌 잠시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지.'

'그대는 항상 문 앞에 서면 몸을 흠칫 떨곤 했지.'

'이제 나는 다 괜찮은데도 어찌 늘 근심이 서려 있는지.'

하는 생각들이 불쑥 고개를 들고, 형원은 이 사념들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길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그럼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정의할 수 있나. 내가 알고 있는 내가 과연 진짜 나일까. 존재에 대한 의문까지 다다르자 형원은 머리를 감싸 쥐고서 책상 위로 엎어진다. 역시나, 무엇 하나 명확한 것은 없었다. 정의를 내리면 그 정의에 대한 의문들이 징그럽게 고개를 쳐든다.

마침 오늘이 회식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형원은 잔뜩 기가 빨려 노곤한 얼굴로 술자리로 향한다. 쓴 소주를 목으로 넘길 때마다 지난 시간 저를 괴롭히던 잡념들이 하나둘 고개를 숙인다. 빨리 이 지긋지긋한 생각들에서 벗어나 그냥 자고 싶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는 몰라도 그냥 다 귀찮아. 하루 종일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도, 잊을 만하면 이상한 꿈을 꾸는 것도.

그러면 제 안에서 불쑥 질문을 던진다.

그럼, 유기현은?


기현은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티비를 보다가 칠흑같이 어두워진 창밖을 보고서는 작게 한숨 쉰다.

"오늘따라 귀가가 늦으시는구나."

액정이 조금 깨진 휴대폰을 들어 툭툭 건드려 보면 화면이 밝아지면서 '1:46'이라는 숫자가 나타난다. 일전에 형원에게 시계 읽는 법도 배운 기현이기에, 그 숫자를 보고서 지금이 자시(子時)임을 인식한다. 늘 술시(戌時)쯤이면 오시던 이가 여즉 오직 않으니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염려되어 소파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몸을 웅크린다. 형원에게 배웠던 전화 거는 법을 다시 되새겨 보면서 휴대폰을 토독토독 눌러 본다. 이 모양을 누르고 나서 '형원'이라고 적힌 것을 누르면 전화가 간다고 했는데. 기현은 이미 네 번이나 걸어 봤으나 답이 없던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연결음이 몇 번 울렸을까. 현관 밖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다가, 제 전화에서 연결음이 뚝 끊기자 현관 밖에서 들리던 소리도 뚝 끊긴다. 형원이 온 것인가, 아니면 헛것을 들은 것인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현관을 응시하고 있으면 이내 작은 기계음이 울리다가 현관문이 열리고 풀린 동공에 얼굴이 허얘진 형원이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밝게 빛나는 센서등 아래에 선 형원은 평소보다 더 안색이 좋지 않아 기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 앞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어찌 이리 늦으셨습니까. 오시는 길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기현은 형원의 앞으로 다가가자마자 훅 끼치는 독한 술 냄새에 잠시 주춤했다가 그를 부축하려 팔을 뻗었으나, 이내 허공에서 팔이 잡혀 버린다. 형원은 다 풀린 눈으로 기현을 가만히 바라본다. 술기운에 제대로 서 있는 것도 버거웠지만, 다행히 기현에게서 그 무엇도 겹쳐 보이지 않는 것에 형원은 또다시 작은 혼란을 겪는다. 오히려 다행인 일인데, 왜 불안할까. 너는 그냥 온전한 너일 뿐인데.

"형원,"

"똑바로 대답해."

"갑자기 무슨,"

"넌 누구야?"

"…예?"

"누구냐고, 너."

"소인은 유 가,"

"그거 말고. 네가 유기현인 거 말고."

"…."

"너, 누구길래, 처음부터 날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어?"

기현은 떨리는 눈으로 흔들림 없는 형원의 두 눈동자를 바라본다. 아니, 피하고 싶었으나 형원이 제 팔을 잡고 답을 재촉하는 것에 할 수 없이 그와 눈을 맞춘다.

"소인은, 그대의 마지막에 곁에 머물렀습니다."

꿈속에서도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유기현.

"그대가 연정을 다 피우시지 못하게, 그대가 저를 내치셔도 다시 찾지 않으려 했건만 기어코 그것이 만개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절하게 울고 있던 너.

"소인이, 소인이 그대를,"

형원은 순간 주마등처럼 스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다. 하얀 백의를 입고 처음 만난 네가 한껏 나를 경계하던 모습과, 매번 즐거이 걸음을 옮겨 네 침전 문을 열면 퉁명스레 쳐다보던 모습도, 언젠가부터 내게 맑게 웃어 주던 네 모습도, 그리고 시들지 말고 오래 살아 달라 말하던 네 모습마저 제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양현."

형원은 툭 하고 떨어지는 기현의 눈물을 엄지로 천천히 훔친다. 기현의 얼굴은 울상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이 아닌, 제 귀로 들리는 자신의 또 다른 이름에 놀라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 있었다. 어찌 그대가 그 이름을 아는 것인지. 그대에게 제대로 알려 준 적도 없건만, 어찌 그대의 입에서. 기현은 제 뺨에 형원의 손이 스치는 줄도 모르고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형원의 깊은 두 눈동자 속에 있는 것은,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자신이 아닌, 고운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그 시절의 자신이었다. 아, 이 모든 것들은 꿈인가. 꿈이 아니라면 어찌 설명해야 할까. 형원은 기현의 뺨 위에 얹은 손을 거두지도 않고 그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지면서 입을 연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하…."

형원은 술기운이 가신 머리로 오롯이 현실과 마주한다. 너를 만난 후에 나를 괴롭히던 그 모든 것들에 이제는 명확히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은,

"그만 마음의 짐을 내려 놓고,"

기현은 불현듯 스미는 불안감에 형원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서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안 돼, 두 번씩이나 이리 보낼 수는 없다. 이제야 온전히 이 세상에서 그대의 삶이 스며들 것 같은데 이리 보낼 수는 없어.

형원은 어디에도 보내지 않겠다는 듯 제 허리를 세게 안아 오는 기현의 머리를 그저 찬찬히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이제 내 곁에서 편히 생을 누리거라."

"형원…."

"그대가 무얼 염려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으니."

"…."

"이제는 흩어질 일 없이 그대의 곁에서 온전히 삶을 누릴 테니, 그대 또한 그리 해 주련?"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형원이 등을 받쳐 주기에 가까스로 몸에 중심을 잡는다. 내 탓이 아니라고는 하나, 그대를 스러지게 만든 이는 결국 나였는데. 기현은 제 안에 남은 죄책감을 모두 덜어 주려는 듯이 저를 따스히 내려다보는 형원과 눈을 맞춘다. 다시 그의 눈동자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한복을 입은 자신이 아닌 그가 오기 전에 입고 있던 반팔과 반바지 차림의 자신이 있다.

한참 두 사람의 움직임이 없던 탓에 희미하게 꺼진 센서등이 다시 환해졌을 때, 기현은 무거운 마음에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은 적 없던 말을 내뱉는다. 그대의 모든 것을 알고 나서는 함부로 뱉을 수도 없었던 그 말을. 행여나 제 말 한 마디에 더 빨리 제 곁을 떠날까 노파심이 들어 매번 속으로만 삼켰던 그 말을.

"사랑해."

"…."

"사랑해요."

형원은 그 말에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기현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처음임에도 그리웠다는 듯이 부드러이 입을 맞춘다.

긴 듯 짧았던 밤이 지나고, 형원은 제 등 뒤로 뜨겁게 빛이 쏘아지는 것에 느릿하게 눈을 뜬다. 제 품에 고이 안겨 눈을 감고 숨을 색색이는 기현을 가만히 바라본다. 새벽에 제 입에서 나왔던 말들도, 기현을 바라보던 제 시선도, 모두 꿈이 아니었음을 자각하고 생생히 떠오른다. 그와 더불어서 언제적 기억인지 모를 기현과의 추억 속에서 제 품에 안겨 잠을 청하던 그의 모습까지 선명히 떠오르는 것이다. 한때 용설란이었던 나는, 이제는 온전한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난 것이지. 이 생에서도 어쩌면 여즉 그대를 기다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몸을 움직이며 느리게 눈을 뜨는 기현에 형원은 잔뜩 잠긴 목소리를 그에게 들려준다.

"잘 잤어?"

"어쩐 일로 일찍 기침하셨습니까?"

아직 잠기운에 한껏 젖어 느릿하게 말을 뱉어 내는 기현은 형원의 팔에 뺨을 부비다가, 눈을 비비고 또렷하게 그를 마주한다.

"몰라, 그냥 눈이 떠졌어."

"곤하셨을 텐데 더 주무시지 않고."

"보고 싶어서."

"…."

"그래서 빨리 일어났나."

기현은 불쑥 제게 뱉어지는 고백에 눈만 꿈뻑거리다,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다. 그마저도 형원에게 붙잡혀 다시 베개에 머리를 기대게 되었지만.

"어디 가."

"기침하였으니, 소세를 해야지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같이 일어나자."

"허나,"

"나 피곤해. 평일 내내 너 먹여 살리려고 일했잖아."

기현은 일전에 눈을 떴을 때 텅 비어 있던 옆자리가 떠올라 그저 제 가슴팍 위에 자리한 형원의 무게를 가만 느껴 본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휑한 옆자리가 싫은 건 나뿐만이 아닐 테니.

한참을 누워서 따스한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던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그 언젠가 누린 적 있던 사소하고 다정한 일상이었다. 가볍게 외출 준비를 하고, 앞뜰이 아닌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한다. 기현은 형원이 알려 주는 대로 휴대폰 액정을 툭툭 건드려 본다. 그는 이것을 '카메라'라고 했다. 시야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담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기현이 가장 먼저 담아낸 것은 셔터 버튼을 잘못 눌러 찍힌 자신의 발끝이 담긴 땅바닥 사진이었고, 두 번째로 담아낸 것은 형원의 뒷모습이었다. 세 번째로 담아낸 것은 막 뒤를 돌아보려는 그의 모습. 네 번째로 담아낸 것은 제게 이리 오라 손짓하는 형원의 모습. 참 기특한 것이구나. 이리도 많이 그의 흔적을 담아낼 수 있으니. 기현은 형원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그림은 어디서 볼 수 있는냐 묻고는 앨범을 확인하는 법까지 터득한다. 제자리에 서서 집중하여 듣는 그 모습에 형원은 기현의 휴대폰을 들고 손을 뻗는다.

"자, 여기 봐 봐."

"무얼 하시는, 어?"

"후면 말고 전면으로도 찍을 수 있거든? 여기 봐 봐."

기현은 액정에 비치는 제 얼굴이 낯설어서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 표정이 꽤 귀여워서 형원은 기현을 제 쪽으로 더 당긴다.

"편하게 있어. 그러면 이상하게 나와."

"본래 화폭에 담긴 자신을 마주할 때가 가장 어색한 법입니다."

"나중에 후회해, 그러면."

"그대가 아까 그림을 지우는 법까지 알려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지우게?"

"…그것이 아니라,"

"마음에 안 들면 지울 건가 보네."

"아니, 그게."

"자, 찍는다. 셋 세고 찍을 거야. 하나, 둘,"


기현은 형원의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본다. 형원에게서 휴대폰 카메라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된 후로 틈틈이 찍어 둔 그의 모습들을 들여다보는 게 일상이 된 기현이다. 공원에서 저를 뒤돌아보던 모습, 늦은 아침까지 곤히 자는 그의 얼굴, 일하러 나가는 그의 뒷모습, 설거지하는 뒷모습, 머쓱하게 웃으며 찍힌 형원의 얼굴. 하나씩 넘겨 보다 보면 그때의 공기까지 느껴지는 듯해서 피식 웃기도 하는 기현이다.

기억을 되찾은 듯한 형원은 이전보다 훨씬 제게 다정했고,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저를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꼭 이전 생에서 저를 다 안아 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된 사람처럼. 기현은 형원이 없는 시간 동안에 집을 청소하고, 요리 프로그램에서 배운 대로 요리를 해 보기도 했다. 기현은 현생에 적응을 완벽하게 끝낸 듯했다. 이제는 형원이 없을 때도 집에만 있기 갑갑할 때면 선뜻 현관을 나서 엘리베이터에도 홀로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문을 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이 모든 게 형원 덕이라며 그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하노라면, 그에 대한 연정 또한 몸집을 키워 기현은 제 안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낀다. 그만큼 매일이 서로가 서로로 채워진 평온한 나날들이었다. 형원에게도, 기현에게도.

형원은 기현과 함께하는 주말이면 이 생에 그가 겪어 보지 못한 것들을 누리게 해 주고 싶어 이곳저곳 데려가곤 했다. 아마 이번 주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기현아."

"말씀하세요."

"경복궁 갔다 올까?"

"궁에 어찌 쉽게 걸음 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엔 돈만 주면 들어가."

"수문장들이 그리 속물적이란 말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돼."

형원은 아침 햇살을 담은 기현의 머리칼에 고개를 묻고 있다가, 고개를 떼어 내고 그를 더 제 품에 안는다. 처음 제 집에 올 때보다 살이 조금 붙은 허리에 괜한 뿌듯함까지 드는 것이다.

"그냥, 궁을 개방해 둔 거지."

"금상께서 이를 허락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어… 왕이 없으니까?"

"허면, 이 나라는 누가 다스린단 말입니까?"

"그… 좀 많이 바뀌었어. 그런 게 있어."

"헌데 입궁하기엔 마땅한 의복이,"

"기현아."

"예?"

"일단 가서 생각하고 가서 정할까?"

"헌데, 형원."

"응?"

"놓아 주셔야, 일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현은 제 배에 감겨 있는 팔을 내려다봤다가 고개를 돌려 형원을 바라본다. 그러면 형원은 그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가 떨어지면서 기현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는다.

"10분만 더 있다가."

"그리 말씀하신 것이 벌써 네 번째입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기현은 형원을 따라 들어온 한복 대여점 한가운데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를 못한다. 여인들의 의복은 중전께서 입으시는 것보다 더욱이 화려한 자수가 들어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 나라에서는 감히 사용할 수도 없다는 금색의 자수가 들어간 것이 기현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곤룡포마저도 금색이라니. 기현은 형원의 말대로 더 이상 왕이 통치하는 시대가 끝났음을 인지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평민들도 금박 자수가 박힌 의복을 입을 수 있단 말인가.

"마음에 드는 거 있어?"

"소인은… 소인은 감히 고를 수도 없습니다."

"다 마음에 들어?"

"그것이 아니라, 어찌 감히 이리 귀한 것을…."

형원은 차마 한복에 손도 대지 못하는 기현을 보다가 피식 웃고는,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금색 곤룡포를 가져다 대어 본다.

"이거 어때?"

"아니 될 일입니다!"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치는 기현을 보면서 '귀여워'하면서 웃는 형원은 웃음기를 지우고 한복을 죽 둘러보다가 남색에 은색 자수가 새겨진 세자복을 꺼내어 기현에게 들이민다. 여전히 당혹감이 서린 눈을 한 기현이 형원과 눈을 맞췄을 때는, 꼭 그 옛날의 형원과 마주한 듯이 차분한 눈을 한 시선이 제 시야로 들어온다.

"이걸로 하자."

"허나,"

"입어 본 적 없잖아."

"…."

"붉은 것은 부담스러울 테니 이걸로 해."

"제가 감히…."

"원래 너의 것이어야 했다."

기현은 한 번도 탐내 본 적 없던 그것을 품에 받아 들고 괜히 그 옷을 꼭 안아 본다. 기현은 형원에게 잠시 기다려 보라 말해 놓고서는 한복이 잔뜩 걸린 행거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다니고, 형원은 기현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 걷는다. 무얼 그리 분주히도 찾는지, 잰걸음으로 걷다가 멈춰서서 옷소매를 들었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하는 기현을 보다가 결국 형원은 그의 뒤로 바짝 다가서서 귓가에 속삭인다.

"무얼 그리 찾아."

"그대의 것을 찾고 있습니다."

기현은 순백색이 아닌 탁한 흰색의 소매를 보며 작게 한숨 쉬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아' 하고는 드디어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았다는 듯 그나마 밝은 빛을 띠는 흰 소매를 들어 보인다. 형원은 옷이 걸린 옷걸이를 들어 제 몸에 가져다 대 본다.

"괜찮아?"

"꼭 맞춘 듯 잘 어울립니다."

한복으로 갈아입은 둘은 궁 안으로 함께 발을 들인다. 기현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정취를 풍기는 궁 내부에 찬찬히 궁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전에 저가 머물던 곳이 어디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강녕전까지는 꽤 먼 거리였고, 궁에서 우측에 있는 곳이었는데. 옛 생각에 빠져 앞서 걷던 기현은 제 손을 잡아 오는 온기에 옆을 돌아본다. 그 시절과 같은 연꽃 빛의 머리칼은 아니었지만, 검은 머리칼을 날리며 연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은 자신이 허망하게 떠나보낸 자신의 연인임에 분명했다.

"같이 가."

"아… 송구합니다. 제가 들떠서 그만."

"옛 집에 오니까 어때?"

"그저 그렇습니다."

"그립거나 그런 것도 없고?"

"그리울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어차피 좋은 기억도 아니었던 것을."

기현은 형원에게 잡힌 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고 궁을 걷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연다.

"허나, 이리 세자복을 입고 그대와 거닐고 있으니 이 터에 좋은 기억이 생긴 것이겠지요."

"그래, 그럼 되었다"

기현은 형원에게 녹음이 푸르게 자라난 솔 앞에 서 보시라 말하고서는 휴대폰에 그의 모습을 담는다. 자신이 가장 담아내고 싶었던 그 모습을. 백의를 입고 평온한 얼굴을 한 그 얼굴을. 형원이 머쓱하게 서서 이제 되었냐 물어도 기현은 아직 아니라며 몇 장이고 그의 모습을 찍어낸다. 이 사진은 시간이 얼마가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지. 그래, 이것이면 되었다. 내 곁에 건강히 웃는 그대도 있고. 그대와 특별한 무엇을 하지 않는다 하여도 저는 그저 그대만 제 곁에 있다면 무엇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