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설란 (龍舌蘭)

[채햄] 용설란 (龍舌蘭) - 10/10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용설란 (龍舌蘭)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w. 주인장

고운 의복을 잘 차려입고 한참 궁을 거닐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대전 앞을 지날 때는 어린 시절 멋모르고 이 앞에서 뛰다가 대비에게 불려 혼이 났던 기억, 현비의 손을 잡고 궁을 거닐었던 기억, 세자와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화들. 한참을 거닐다 기현이 걸음을 멈춰서 외딴곳에 있는 궁을 바라보자, 형원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다.

"여기지, 네가 살던 곳?"

기현은 멍하게 형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제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에게 제 거처를 알려 준 적이 있던가. 그를 궁에서 만났던 때라고는 활터와 강녕전으로 향하는 길목뿐이었거늘.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그냥, 네가 멍하니 보길래."

"…."

"몇 번 와 보기도 했고."

"실은, 그대와 떨어져 있는 동안 궁에서 그의 환영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형원은 기현의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그저 그의 손을 더욱 힘 있게 잡는다.

"그것이 정녕 환영이었나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

"그대는, 실로 저를 찾아와 주셨던 것이지요."

"그래."

"제가 본 것은, 실로 헛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몇 번 걸음 한 적이 있었다.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그대를 그리워하며 지냈던 것을."

형원은 기현의 뒤에서 그를 안아 주면서 어깨를 토닥여 준다. 이제 다시는 그와 헤어질 일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과 약속을 하는 듯이.

한복을 대여했던 곳에서 다시 옷을 갈아입고, 두 사람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기현을 데리고 간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나온 고기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기현을 위해 그의 접시를 가져다 먹기 좋게 고기를 썰어 주고서는 다시 그에게 접시를 건넨다. 다음에는 새우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는 형원에게 자신은 해산물을 즐기지 않는다고 답하려던 기현은 그저 그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그러자며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매번 다음을 약속할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에 겨운 일상인가.

진귀하기만 한 모든 것들에 완전히 적응할 만큼 기현이 형원의 공간에 머문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이제 스위치 정도는 어떻게 작동되는지도 이해하게 되었고, 음식이 많이 남으면 랩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 둬야 한다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빗자루가 없어서 어색해하던 기현은 이제 청소기의 전원 버튼을 눌러 집을 청소하고, 다 쓰고 나면 청소기를 충전기에 꽂아 두는 것이 일상이 된 것이다. 어느 채널에 어떤 방송이 나오는지, 몇 시에 어떤 프로그램을 하는지도 익힐 정도면 이제 이전에 자신이 있던 곳의 생활이 더 어색하고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기현이다. 집안일을 마치고 소파에 앉아서 물 한 잔 마시고서 티비를 보려고 하는데 때마침 제 휴대폰으로 형원에게서 전화가 오기에 달가운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 지금 생활에 익숙해졌다 한들, 말투가 쉬이 바뀌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잠깐 짬이 났어. 뭐 하고 있었어?]

"집안일 하고 이제 막 쉬려던 참이었습니다. 곤하지는 않으십니까?"

[조금? 그래서 퇴근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려고.]

"아, 그럼 늦게 귀가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형원은 은근히 풀 죽은 기현의 목소리에 고개 숙여 환히 미소 지으면서 말을 이어 나간다.

[글쎄, 조금?]

"예. 그리하셔야지요. 일하시는 중이라 하루가 고되실 터이니. 소인은 먼저 석반상 차려 먹겠습니다."

[뭐 먹을 건데?]

"그대가 드실 것보다야 맛이 없겠지요."

[그런데 왜 누구랑 가냐고 안 물어봐?]

"혹 그대가 불편하실까 하여."

[물어봐, 누구랑 가는지.]

"누구와 가십니까?"

[너랑.]

기현은 그 짧은 두 음절에도 괜히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어쩔 줄을 몰라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괜히 거실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휴대폰을 고쳐 쥐고서 더 귀에 가까이 붙인다.

"근래 들어 짓궂어지셨습니다."

[이따 7시 30분쯤에 밑에 나와 있어. 차 타고 바로 가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응. 빨리 갈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쉬고 있어. 아, 이제 내려가야겠다.]

"들어가세요."

[아, 맞다. 기현아.]

"예?"

[사랑해.]

"저 또한,"

[응.]

"그대를 연모합니다."

기현은 아쉬움을 가득 남긴 채 끊긴 전화에 검은 액정을 내려다본다. 이리 자주 고백을 하여 닳으면 어떡하나, 괜한 걱정이 드는 것 또한 제게는 복에 겨운 일이리라 생각하며 다시금 시간을 확인한다.

형원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기현은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씻고 외출 준비를 마친 기현은 집 정리는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하면서 괜한 마음에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언제쯤 나가 있는 것이 좋을까 하며 한참 서성이다가, 울리는 전화에 형원임을 확인하고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다.

"형원?"

[응, 나 지금 주차장에 있어. 내려 와.]

"어인 일로 이 시간에?"

[오늘 퇴근을 빨리 했거든. 놀랐지?]

기현은 휴대폰을 잠시 귀에서 떼어 시간을 확인한다. 6시 45분을 나타내는 숫자에 괜히 마음이 다급해져 기현은 부랴부랴 흰색 운동화를 신고서 현관을 나선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더 기다리시지 않게 금방 가겠습니다."

[천천히 와. 기다리고 있을게.]

기현은 다급하게 엘리베이터 하향 버튼을 누르고 숫자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형원의 집이 있는 곳보다 한참 위에 올라가 있는 건지, 위에서 무얼 하는 것인지, 숫자가 바뀔 생각을 않기에 기현은 자리에서 발을 구르다가 문득 지난날 형원이 알려 준 말을 떠올린다.

'헌데, 소인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저 문은, 원래 어디로 통하는 것입니까?'

'아, 저거? 비상구?'

'비상구요?'

'어, 좀 급할 때는 저기로 해서 계단으로 내려가면 돼.'

다급할 때 저 문을 열고 나서면 된다 하였지. 그의 말은 거짓이 없을 테니. 붉은 숫자를 잠시 더 들여다보던 기현은 얼른 형원을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걸음을 나선다.

형원은 차 시트에 기대서 핸들을 검지 끝으로 톡톡 두들기다가, 차창 너머로 오피스텔 입구를 들여다봤다가를 반복한다. 분명히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울리는 걸 보면, 집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계단으로 내려와도 이미 내려와 있을 시간이었다. 집에 두고 온 게 있어서 늦겠지. 나오기 전에 화장실 한 번 더 갔다 오는 거겠지. 그렇다 쳐도 이 시간이면 늦어도 너무 늦는 것이었다. 지금이 원래 보기로 한 7시 30분이니까. 형원은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던 얼굴이 완전히 굳어지고 나서야 기현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휴대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더 이어지기 전에 전화를 끊은 형원은 몇 번이고 다시 기현에게 전화를 건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형원은 혹시나 기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급하게 빈자리에 차를 주차해 두고 다급한 걸음으로 건물 안에 들어선다. 엘리베이터 상향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를 보면서 불안한 마음에 평소보다는 좀 더 세게 입 안에 연한 살을 씹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제 집 층수를 누르고 빠르게 닫힘 버튼을 누른다. 그 와중에도 혹시나 기현과 길이 엇갈릴까 싶어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아까와 다를 것이 없다. 저가 살고 있는 층수에 다다를수록 불안감이 커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전자음을 내며 도착을 알리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양옆으로 시야를 밝히고, 그렇게 형원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복도와 휑하니 열린 비상구 계단으로 향하는 문뿐이었다. 서둘러 주변을 확인하고 우선 제 집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서 들어선 집은 사람이 떠난 지 얼마 안 됐다는 듯이 여전히 포근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기현이 정리해 놓은 대로 가지런히 제자리를 찾은 물건들을 눈에 담다가 기현이 얌전히 잘 닫아 놓았을 방문을 하나씩 벌컥 열어 본다. 기현이 처음 입고 있던 짙은 남색의 의복도, 기현이 원래 신고 있던 그 고운 비단신도, 모두 그 자리 그대로, 떠나지 않겠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기현만이 이 공간에 없을 뿐이다.

비상구 문이 열려 있었으니까 혹시나 계단으로 내려갔을까. 그 문을 연 게 너였을까. 형원은 다시 집을 나서서는 곧장 비상구 문을 열어젖히고 빠르게 계단을 밟아 내려간다. 어쩌면 휴대폰 배터리가 다 닳은 걸 수도 있잖아. 그래서 전화를 못 받는 걸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은 가시질 않아서 끊임없이 기현에게 전화를 걸고 또 걸어 본다. 여자의 똑같은 어투가 휴대폰에서 전해 들리기를 네 번째. 1층에 다다라서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보면 기현의 흔적이라고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형원은 허탈한 마음에 건물 현관 앞에 쪼그려 앉는다. 기다리면 네가 내려오겠지. 길이 엇갈린 거겠지. 내려오면 네게 잔뜩 투정 부려야지. 왜 이제야 내려왔느냐고. 얼마나 찾아 헤맨 줄 아냐고. 그렇게 널 품에 안고, 그렇게라도 나 스스로를 달래야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형원의 휴대폰이 배터리가 부족하다며 작게 진동할 때까지 기현은 오지 않았다.


기현은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잔뜩 당황하여 걸음을 멈췄다가, 떨리는 두 눈동자에 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애써 이해하려 애써 본다. 발에 밟히는 것은 분명 자란 지 오래된 잡초였고, 제 주변을 에워싼 것은 세상에 난 지 오래되어 보이는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이었다. 필시 해가 다 진 저녁이어야 함에도 아직 날이 밝은 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기현은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문득 저가 손에 잡고 있는 것이 나무 손잡이임을 깨닫고서는 흠칫 놀라 손을 거둔다.

왜, 왜 쇠 손잡이가 아닌 것인지. 분명 그 문을 열면, 회색의 돌계단만이 늘어져 있어야 했다. 기현은 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부정하려 몇 번이고 그 나무문을 열어 건너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 숲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버린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이 옮겨 간 자리는 그 옛날에 용설란이 있던 자리였으나, 애초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너저분하게 자란 잡초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온 이곳은 과연 어디인가. 용설란 또한 없는 곳이라면 나는 이곳에서 또 형원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기현은 다시금 하늘을 원망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산을 내려간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라면 필시 형원이 있을 테지.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그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천 리라도, 만 리라도 거닐 수 있었다. 한손에는 휴대폰을 꾹 쥐고서 다급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는 기현은 나무의 잔가지에 긁히기도 하였고, 흙길에 미끌려 넘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여전히 한 손에는 휴대폰을 꾹 쥔 채로 걸음을 옮긴다. 환했던 하늘이 시꺼먼 흑빛으로 물들고 나서야 기현은 고을에 도착했고, 이미 민가는 모두 잠에 빠진 듯 고요했다. 숨을 고르던 기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핀다. 익숙한 건물의 형태와 주막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옷차림, 그리고 그들의 말소리. 분명 이전에 단 한 번도 그립지 않았던 제 고향의 그것이었다.

기현은 힘없이 발을 옮기다 궁 앞에 다다랐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일전에 형원과 함께 궁을 거닐었던 것이 떠올라 괜히 속에서 울컥하고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것을 애써 삭히려 하지 않고 목 안이 갑갑한 채로 궁에 다가서면 수문장들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 앞을 막아선다.

"이 시간에 뉘시길래 궁에 드시려 하십니까?"

"…양현."

"크게 말씀하시오."

기현은 혹여나 왕좌가 바뀌었으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힘겹게 떠내고서 말을 잇는다.

"금상의 둘째이자 현비의 혈육인, 양현대군 유기현."

그래, 그랬지. 나는 그의 연인이기 이전에, 왕의 핏줄만 이어받은 보잘것없는 왕족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내뱉자 그제야 수문장 둘은 깜짝 놀라 서로 수근거리다가 고개를 조아리고는 궁의 문을 열어 준다. 저가 없는 시간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대충 들은 바로는 자신이 살아 있음에 놀란 듯했다.

터벅터벅 흙길을 걷는 와중에도 주위에서 걸음을 옮기는 궁인들이 저를 보고는 깜짝 놀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기거하던 궁이 어디였더라.

'여기지, 네가 살던 곳?'

형원과 함께 거닐었던 기억에 의지하여 발을 옮기다 보면 주인을 잃었음에도 은은하게 빛을 내는 제 거처 앞에 다다른다. 낡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면, 늘 제 수발을 들던 늙은 상궁 하나가 기현을 발견하고는 '대군' 하며 분주한 발걸음으로 기현의 앞에 선다.

"대군, 대체 어디를,"

"물을 받아 놓거라."

"…예, 씻으실 물과 갈아입을 의복을 준비하겠사옵니다."

귀찮을 정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궁이 자리를 뜨고 나자, 기현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주머니에 넣어 뒀던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밝혀 본다. 그곳의 시간일 11시 20분을 가리키는 시계와, 절반에 못 미치게 색이 칠해진 배터리 표시를 확인하고는 익숙하게 갤러리에 들어가 그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형원을 눈에 담는다. 한 장을 넘기면 그의 환히 웃는 얼굴이, 그다음 넘겨 보면 저를 돌아보는 시선이, 한 장 더 넘겨 보면 곤히 자고 있는 그 모습이 기현의 시야에 가득 찬다. 그렇게 하염없이 형원의 모습을 눈에 담다가 더는 그가 제 곁에 없다는 생각이 스치자, 기현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양손에 얼굴을 묻는다. 이리 시공간을 넘나들게 할 것이라면 내게도 도술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그리하여 언제든 그를 보러 갈 수 있도록 허해 주시지.

기현은 실체 없는 대상에게 한껏 원망해 본다.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제 눈물로 축축해진 손바닥은 더는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손목으로 가느다란 물줄기를 만들어 낸다.

"대군! 대군, 어찌 이러십니까!"

"어디 심히 편찮으신 것입니까? 당장 의원이라도 부를까요?"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으십니다! 지금 가서 의원을 불러 오겠습니다."

"아니… 되었다. 그저, 그저 가만 두거라. 곧 세욕장으로 향할 터이니, 잠시만,"

기현은 채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이고 조여오는 목구멍에서 겨우 소리를 짜내어 궁인들을 물린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나서야 기현은 소리 내어 흐느낀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하염없이 그리움을 흘리기만 할 뿐이었다.

만일, 아주 만약에, 죽을 때까지 그대에게 다시 향할 방도를 찾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할까. 이 또한 욕심이겠지만, 만에 하나 내세에 다시 태어난다 해도 필시 그대를 찾아 헤매야지. 그렇게 내세에 내세를 거듭하여, 영원이라는 굴레에 갇히더라도 꼭 그대와 함께해야지.


기현이 사라진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아니, 꼭 기현이 사라지고 나서 시간이 멈춘 듯했다. 형원은 출근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다가 옆자리에 놓인 기현이 남기고 간 의복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품에 끌어안고서 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이리 할 것이었다면 다시 내게 도술을 부릴 능력을 주시지.

이리 할 것이었다면 차라리 옛 기억을 제게 주지 마시지.

형원은 멍하니 천장을 보면서 실체 없는 대상을 원망하다가 뻑뻑해진 눈을 감는다. 원체 잠이 많았던 형원은 기현이 떠난 이후로 눈에 띄게 잠이 더 많아졌다. 형원이 더욱 잠을 찾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꿈을 꾸면 네가 나오니까. 꿈속에서 우리는 떨어져 있지 않고 항상 함께 있으니까. 꿈속에 있으면 지금은 볼 수 없는 너를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형원은 깊게 잠을 자고 나서도, 다시 깊은 잠에 빠지려 눈을 감는다. 눈앞에 어둠이 드리우다가, 이내 다시 밝아지면 드디어 꿈에 들어섰음을 깨닫는다. 꿈속에서 자신은 기현의 궁 안 마당에서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꼭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얼마간 그리 서성이고 있으면, 저 멀리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돌려 보면 자신이 그리도 그리워 마지않던 기현이 말간 얼굴로 달려와 제 목에 팔을 감고 안기는 것이다. 잠에서 깨 있는 동안, 그 잠시 보지 못한 것인데 어찌 이리 반가울 수가 있을까. 형원은 기현의 등을 끌어안고서 그에게 보고 싶었다 속삭이려는데, 꼭 꿈은 꿈일 뿐이라는 듯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맞잡고 궁을 나서서 한참을 걸으면 커다란 호수가 보이고 그 한가운데에 정자가 놓여 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듯도 한데, 거기까지 기억이 미치지 않는 것을 보면 꿈에서 보는 환각과도 같은 것이겠지. 함께 정자까지 이어진 다리를 건너면서 호수를 들여다보다가, 눈이 맞으면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렇게 정자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날이 저물면 기현은 이만 가 봐야 한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으며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되겠느냐 물어도 그는,

'또 그대와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니, 미련과 아쉬움은 접어 두시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저를 달래 주고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보인다. 황망한 마음에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신기하게도 꿈속에서 잠이 쏟아지면 그제서야 형원은 눈을 뜨고 제 방 천장을 마주하는 것이다.

꼭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인 것처럼.

몽롱한 기분에 한참 천장을 마주하다가 목이 말라 물을 꺼내 마시면, 꿈속보다도 희미한 감각에 형원은 물을 마시다가도 멍하니 물을 쳐다보고는 했다. 이쯤이면 아예 꿈속에서 사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네가 사라지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데, 아이러니하게도 꿈속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면 그곳이 나의 현실이 아닐까.

형원의 휴대폰은 충전되지 않아 이미 꺼진 지 오래였고, 제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무시한 지 오래였다. 종종 침대에 누워 있으면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으나, 이 또한 이게 꿈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하고는 다시 잠에 들기 일쑤였다. 형원은 매번 그 세계로 향하기 전에 '이번에는 꼭 꿈에서 깨지 않기를'하며 바라곤 했다. 오늘도 역시나, 형원은 영원히 꿈속에서 살게 해 주소서 하며 하늘에 간절히 바라고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눈앞에 암흑으로 뒤덮이고 한참 동안 어둠 속을 헤매고 있으면 저 멀리서 희미하고 밝은 빛줄기가 저를 향하며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다.

아, 다시 그 세계로 들어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의식을 차려 보면 제 발밑에는 잘 다듬어진 돌바닥이 정갈하게 줄지어 바닥에 깔려 있고, 제 몸에는 눈부시게 하얀 옷이 나풀거린다. 형원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구석에 놓인 작은 연못에 저를 들여다보면, 정말로 비현실적인 이세계에 온 듯이 연분홍색으로 물든 머리를 한 자신이 있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했고, 현실이라기엔 설명이 불가했다. 그렇게 본인임을 자각한 순간 그 옛날에 언젠가 희미하게 들은 적 있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제 귓가에 속삭이듯 말한다.

'연정을 다 하면 용설란은 만개하게 되리라.'

달가운 천명이었다.

내 그대를 만나, 그대로 인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으니, 내 삶은 그걸로 되었다.

- 용설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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