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일리스

[맼인표] nailless 上

보건교사안은영 매켄지 x 홍인표

mackcheese by mackche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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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표가 매켄지의 교무실 책상 아래에 넘어져 있었다.

제 자리에서 안은영과 실랑이를 하면서.

고개를 숙이면 발치에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홍인표가 보였고, 고개를 들면 파티션 너머에서 안은영과 멍청한 대화를 하는 홍인표가 보였다. 그러니까, 홍인표가 둘이었다.

"애들 조퇴 좀 시키자고요."

"아니 갑자기 멀쩡한 애들을 왜 조퇴시켜요."

"걔네 때문에 젤리가... 아 말한다고 선생님이 알아요? 에잇, 좀 내보내자고요!"

"보건 선생님 일단 진정 좀 하시고요."

아마도 아침에 화단 근처에서 봤던 젤리가 문제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젤리는 아닌데, 한번 들러붙으면 떼어내기가 영 귀찮아져서 캡처도 안 하고 미뤄뒀던 젤리. 그게 어느 교실로 기어들어갔나 보지. Whatever. 교무실이라고 차마 휘두르지도 못 하는 플라스틱 칼을 자꾸 꽉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안은영은 매켄지에게 제법 웃긴 구경거리였지만, 지금은 발끝에 채는 이 남자가 더 흥미로웠다. 책상 밑으로 몸을 숙인 매켄지가 혼잣말을 하듯 작게 속삭였다.

"홍쌤. 손."

- ... ...

"Good boy."

커다란 개를 대하듯이 구는 매켄지의 말에 홍인표가 무어라 입술을 빠끔였지만,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okay, okay. 건성으로 대꾸한 매켄지가 움켜쥔 홍인표의 손을 꼼꼼히 매만졌다. 어리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젊은 한문 선생의 손은 나이에 걸맞게 매끈하고 부드러웠다. 아니, 이런 손은 나이가 아니라 부로 결정되는 걸 수도 있겠다. 거친 일 따위 해본 적이 없는 도련님의 손. 부드럽다, 보다는 말랑했다가 어울릴까. 온통 말랑거렸다. 살짝 힘줄이 도드라진 손등이며, 검지와 엄지 사이의 짧은 갈퀴. 손가락의 끄트머리, 손톱이 있어야 할 자리까지 전부.

nailless. 이름 그대로, 손톱이 없는 젤리. 흔한 젤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젤리이터라면 네일리스를 모를 수가 없다. 살아있는 사람을 흉내 내는 젤리라니. 기분 나쁘니까. 디펜스나 오펜스의 용도로 널리 쓰이는 젤리는 아니다. 특정 인물의 모습을 흉내내게 할 수 있다면야 젤리이터들 사이에서 꽤 요긴한 용도가 되었겠지만, 네일리스는 갑자기 벌어진 사고 같은 젤리였다. 특정한 조건이 갖춰질 때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젤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네일리스는 깊은 미련을 가진 사람의 몸에서 떨어져나오는 젤리발자국이나, 죽기 직전의 사념이 담긴 젤리데드와는 다르다. 발자국이 남은 것처럼 어느 자리에 굳어있지도 않고, 유령마냥 슬픔을 안고 떠돌아다니지도 않다. 어느날 갑자기 솟아나서는 그저 특정 인물의 주변을 배회하며 모습과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할 뿐이다. 클론처럼. 손톱이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하자투성이 클론이지만 말이다. 여전히 넘어져있는 주제에 안은영과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입을 빠끔거리는 이 젤리는 특히 더 하자투성이 같지만.

"Fuck off, stop it."

"네? 매켄지 선생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뇨?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I'm just sit tight until my class comes."

"아... 클래스. 어... 오케이, 오케이."

선생이라는 직함을 달 정도면 분명 어느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췄을 텐데도 학교 선생들은 매켄지가 서글거리는 얼굴로 혀를 굴리면 도망치기 바빴다. 애들은 한참 틀린 발음으로도 당당히 말을 붙여오는데. 한심하게. 머리를 벅벅 긁으며 멀어지는 학생 주임의 뒤통수를 잠시 바라보던 매켄지가 다시 고개를 내리자, 손톱이 없는 홍인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Don't do that. 입 다물라고. 백구십 센티에 가까운 장신의 이십 대 남성이 제 다리 사이에서 입술을 뻐끔이고 있는 꼴은, 물론 개인적인 성적 취향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 이 곳이 직장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영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지.

왜 홍인표일까.

발끝으로 가짜 홍인표의 늘어진 왼쪽 다리를 툭 차보자 바지 안에 숨겨진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 젤리는 바지 아래에 숨겨져있을 하지 보조기 따위까지 흉내 낸 모양이다. 흉내 낼 거면 이런 몸뚱이가 아니라 보호막을 따라했어야지. 쯧, 혀를 찬 매켄지가 다분히 악의적인 힘을 싣고 보조기 위를 슬리퍼 밑창으로 꾹 짓밟아 눌렀다. 

- ...!!

"Oops. Sorry."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메켄지가 중얼였다. 홍인표는 입을 크게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젤리니까. 이 가짜 홍인표는 품이 큰 한복 셔츠와, 통이 넓어 펄럭거리는 바지, 그 아래 딱딱한 보조기며, 홍인표의 광대에 연달아 난 점 두 개까지 빠짐없이 베껴냈지만 몸을 둥글게 감싸안은 오로라 빛의 젤리는 없었다. 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게 빠졌다고. 흥미를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매켄지가 가만히 하자투성이 젤리를 내려본다. 보호막이 없는 홍인표의 얼굴은 이런 느낌인가. 홍인표의 맨 얼굴은 스물일곱이라는 나이가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퍼석하고, 다소 지쳐 보이고, 꽤나 지루했다. 보호막이 없는 홍인표를 길을 지나가다 마주쳤다면 그대로 지나쳐 영원히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매켄지는 확신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 하는 이런 몸은 하나도 재미가 없잖아. 대체 너희들이 흉내내는 기준이 뭔데? 매켄지가 다시 한 번 발끝으로 다리를 툭 툭 걷어차자 인상을 팍 쓴 젤리가 무어라 입을 뻐끔였다.

- ... ...! ...!

"I can't understand."

- ... ... ...!

구화는, 그것도 한국어 구화 따위는 배운 적이 없으므로 매켄지는 벌개진 얼굴로 뻐끔이는 가짜 홍인표에게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eng plz.

"Okay, everyone. Open to page 87."

사락. 사라락.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일제히 울렸다. 매켄지는 수업 시간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단연코 이때라고 생각했다. 한 공간에 있는 수십 명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자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찰나. 웃기지도 않은 선생 노릇에 나름의 재미를 느끼는 때이기도 했다. 그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게 문제지만. 

"...Best to let sleeping dogs lie. But I think you look more like a hippo than a dog. Wake up, Jungwoo."

침을 질질 흘리며 잠에 빠져있는 애의 머리를 매켄지가 손끝으로 톡 건드리자 교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게 뭐가 웃긴 건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쨌든 목련고의 여드름투성이 아이들은 항상 배가 찢어지도록 웃었다. 그래서 매켄지도 같이 웃었다. 성격 좋은 원어민 선생은 대충 이런 것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창밖을 슬쩍 내려보자 저 멀리 화단 쪽을 걸어다니는 홍인표가 보였다. 그러니까, 보호막이 없는 가짜 홍인표가. 교무실에 그대로 버리고 나왔더니 어떻게 혼자 일어나긴 한 모양이다. 젤리는 꼴에 제법 홍인표가 가끔 하는 모양새 그대로 느리게 절뚝이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정말 산책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네일리스는 기본적으로 쓸모가 없는 젤리다. 정말 말 그대로, 쓸모가 없었다. 바로 그 지점이 꽤 놀라운 젤리이기도 했다. 어지간한 젤리들은 다 어떻게든 쓸모가 있었으니까. 두발 젤리는 하급 오펜스 젤리다. 본격적인 전투보다는 시선을 돌리거나 발을 묶는 용도로 많이 쓰였다. 문어 젤리는 흔하지만, 수십 개를 붙여두면 저들끼리 달라붙어 불어나기 때문에 물속에서 괜찮은 디펜스 젤리로 이용할 수 있다. 

네일리스는? 도무지 쓸데가 없다. 특정 인물을 따라한다는 건, 그 인물이 하지 않을 행동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때문에 네일리스는 훈련은 커녕 어떤 행동을 유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섬세한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을 따라한다고 해도 젤리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무언가를 똑같이 만들어내지 못 한다. 허공 위에 뻗은 손가락을 능수능란하게 허우적거릴 뿐인 거다. 하다못해 방패 용도로 써먹으려 해도, 네일리스는 그다지 경도가 좋은 젤리가 아니었다. 딱 인간 정도의 경도. 조금 질기지만 길바닥의 뾰족한 돌 하나만으로도 쉽게 찢어지고 바스러진다. 이렇게까지 쓸모없는 젤리라니. 네일리스를 대하는 젤리이터들의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스트레스 해소를 목적으로 보이는 족족 부숴버리는 싸이코패스. 불쾌함을 피해 혼자 바스러질 때까지 외면해버리는 결벽증 환자. 안은영은 인간이 아닌 젤리에게도 쓸데없는 친절을 베푸는 인물이니 가짜 홍인표가 학교 안을 떠돈다면 굳이 부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매켄지는 어느 타입이었느냐 하면은. 

매켄지는 딱 한 번, 네일리스를 죽여버린 적이 있다. 

따르르릉.

Okay, everyone. See you next time. 멋대가리 하나 없는 올드한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쏟아졌다. 그 거칠기 짝이 없는 해일 사이를 빠져나온 매켄지의 눈에 가짜 홍인표가 다시 한 번 걸려들었다. 아직도 걷고 있나. 젤리가 뒷짐까지 진 채로 유심히 내려보고 있는 꽃덤불은 매켄지가 원예부 아이들과 다듬은 것이었다. 홍인표가 꽃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비좁은 화단 길을 아이들이 뛰어오자 허리를 숙이고 있던 인표가 눈이 동그래져서는 팔을 쭉 뻗는다. 아이들이 다칠까 봐 걱정하는 진짜 한문 선생처럼. 하지만 젤리를 보지 못 하는 아이들은 가짜 한문 선생을 지나쳐 달려가고, 중심을 잃은 가짜는 화단 위로 엉덩이를 깔고 넘어졌다.

매켄지가 넘어진 인표에게 다가간 이유는 하나였다. 가짜 홍인표가 넘어진 그 자리에 이끼젤리를 심어놨기 때문이다. 눌려서 망가지기라도 했으면 다시 심기 귀찮아지는데. 심드렁한 표정으로 화단으로 걸어간 매켄지가 움찔 멈춰 섰다.

"...뭐야?"

인표가 넘어진 자리에 이끼젤리가 죄다 죽어있었다. 그러니까, 바스러져 버렸다. 진짜 홍인표의 보호막에 닿은 젤리들이 타버리는 것처럼. 매켄지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저 근처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걷어찬 소리 같기도 하고, 연못 밖을 돌아다니는 오리가 배에 잔뜩 힘을 주고 내지른 울음소리 같기도 했으며,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들었던 룰렛 머신의 소리 같기도 했다. Jackpot. 곧장 몸을 돌리고 무릎을 굽힌 매켄지가 인표의 턱을 그러쥐었다. 엄지로 옅은 수염이 나있는 턱을 문지르자, 비틀린 살갗 위로 옅은 오색빛이 비쳤다 사라졌다. 보호막의 빛이었다. 그러니까 이 젤리는 홍인표의 보호막까지 흉내내고 있었던 거다. 진짜처럼 온몸을 휘두르고 있는 게 아니라, 얇은 껍질처럼 살갗을 뒤덮은 형태로. 매켄지가 턱을 쥐었던 손을 내려 인표의 손목을 움켜 쥐었다. 그대로 굽혔던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자, 넘어져있던 가짜 홍인표가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인표는 저를 보고 환하게 웃는 이 원어민 선생이 당황스럽다는 듯 그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매켄지는 가짜 홍인표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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