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베로즈 #3

새벽이 되어서야 피로연이 정리되었다. 결혼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마지막으로 제 부모를 배웅하고서야 모든 일과를 마친 빈센트가 한숨을 내쉰다.

“이제 들어갈까요.”

“네.”

엘리스는 단아하게 손을 모으고서 저택 안으로 그와 함께 들어갔다. 빈센트는 말했다. 신혼집이 있는 파리로 가면 방을 따로 쓸 수 있게 해 줄테니 오늘만 양해해달라고. 엘리스는 억양없는 목소리로 또 다시 ‘네.’라고 대답한다. 짙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침묵이 어색하지도 않은지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침실 문이 열린다. 두 사람이 눕고도 남는 넓은 침대는 새 이불을 깔아두었다. 피곤한 하루였기에 어서 씻고 눕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의 몸에 배인 품위를 버릴 수는 없었다. 엘리스에게 먼저 욕실을 양보하고서 그는 의자에 등돌려 앉았다.

“빈센트.”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의외였다. 아무말없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아니, 거기에 호버, 라고 부르지도 않고 이름을 부른다. 생각보다 더 당돌하다. 미국 여자라 그런가. 그가 고개를 돌렸다. 엘리스가 가운을 팔에 걸고 자신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었다.

“등에 손이 안 닿아서요. 단추좀 풀어줘요.”

“메이드를 부르죠.”

“당신이 해요. 그들이 이상하게 볼 거에요.”

맞는 말이다. 굳이 따지면, 자신에게는 관상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부인이라 몸에 손을 댄다는 생각은 안 해봤던 빈센트.  당황스러워서 헛기침이 나온다.

“실례하겠습니다.”

“네.”

드레스를 잠구고 있는 단추는 뭐가 이리 많은 것인지. 목 아래부터 등을 지나 허리,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골반까지. 점점 벌어지는 옷에의해 훤히 드러나는 그녀의 등이 하얗다.

“다 됐습니다, 부인.”

“고마워요.”

엘리스는 뒤 돈 상태로 대꾸한다. 빈센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엘리스가 샤워를 하기 위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린다. 방금 뭐가 지난 것인지 빈센트는 정신이 아찔했다. 남자의 몸과는 달리 부드러워보이던 등이 눈에 아른거린다. 욕정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빈센트는 엘리스와 나눈 계약을 기억한다.

겉으로는 가문간의 결혼이지만 이 결혼식 뒤에는 부모들은 모르는 당사자들끼리의 계약이 오갔다. 에드거를 통해 빈센트는 위버 가의 가주를 소개 받았다. 그리고 그 전에, 엘리스를 소개받았다. 에드거와 엘리스 두 사람은 사교계에 데뷔했을 때부터 이어져 온 관계라고 하는데, 속을 알 수 없는 엘리스와 속이 검은 에드거 두 사람의 조합으로 봐선 평범한 관계는 아닌듯했다. 에드거는 이미 처음부터 이 여자를 빈센트에게 소개시킬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가 추려낸 몇 명 여자들의 리스트가 있었지만 빈센트가 그것을 받아 읽기도 전에 엘리스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 여자만큼 영악한 사람도 없지. 전혀 순진하지 않지만 정숙한 여인의 탈을 쓰고 있지. 자네의 야망에 좋은 파트너가 될 사람이야. 장담하네.”

“수상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보다는 많은 것을 아는 여자가 낫네. 어차피 자네도 부인을 들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업을 하는 게 목적이지 않은가. 서로의 니즈를 맞춰보게. 좋은 거래가 될 걸세.”

“이 여자가 아니라 자네가 수상하다고.”

“오 빈센트. 자네는 나를 너무 못 믿는군. 내가 자네를 사랑했고 소중히 여기듯 엘리스역시 내게 그런 사람이네. 나와 오랜 우정을 나눈 벗이지. 그런 벗이 원하는 것이 하나 있네. 그리고 자네도 원하는 것이 하나 있지. 그런데 천운이 따랐는지 그 두 사람을 이어주면 서로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네. 이건 순수하게 두 사람의 친구인 내 호의일세. 다른 마음없이.”

말을 할수록 더 수상해진다는 것을 에드거는 모르는 듯 했다. 빈센트는 적당히 흘려 들은 뒤 에드거의 제안을 수용했다. 거래 진행은 다음과 같았다. 에드거가 엘리스에게 먼저 전화를 건다. 부모가 듣고 있는 그녀는 마치 대화라도 하듯 대꾸하지만 실상은 전부 눈속임에 불과하다.

“네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네 엘리스. 편지로 계약내용과 계약자에 대한 정보를 동봉하겠네. 덤으로 그의 편지 역시. 그에게도 내용은 설명했으니 둘이 잘 해보라고. 이만 끊지.”

“알았어. 편지 기다릴게.”

그 후 엘리스에게 편지를 부친다. 그 편지 봉투 안에는 빈센트의 편지 역시 들어있다. 계약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빈센트의 목적은 위버 가문의 위치. 그리고 엘리스의 목적은 자유. 아무리 정략결혼이라지만 외동딸인 그녀가 거절하면 결혼은 물건너가는 것과 다름없기에 빈센트는 한 수 굽히고 들어갔다. 엘리스로부터 답장이 돌아왔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신혼집은 파리의 아파트가 좋겠어요, 서로의 방이 따로 있는. 그리고 내가 무얼 하든 관심 갖지 않기로해요. 나 역시 그럴테니까. 무미건조한 필체로 적힌 편지는 긍정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잘됐군. 빈센트는 생각했다. 그럼 다시 겉으로 드러나는 거래. 에드거가 빈센트를 소개한다. 잘생기고 유능한데다 혼기가 찬 남자라는 말을 흘리자 그에 위버 부부는 혹하는 듯 했다. 그가 마음에 든 미스터 위버는 집으로 돌아가 딸에게 묻는다. 엘리스, 그녀는 두 분의 뜻대로 하라는 순종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렇게 거래는 성사된다. 행복을 가장한 결혼식 뒤의 철저히 계산된 공연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은 이제 각자의 몫을 위해 따로 걸어가기만하면 됐다.

책을 읽고 있던 빈센트가 문 열리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욕실 문 밖으로 온수의 열기를 그대로 품은 수증기가 함께 빠져나왔다. 가운을 입고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엘리스가 민낯으로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씻을 차례에요.”

“그러죠.”

의자 위에 책을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를 지나치는데 좋은 향기가 났다. 안주인이 들어온다고 새로 비누를 꺼낸 모양이다. 그녀와 잘 어울리는 향기였다. 깔끔한 비누향이 욕실 안에도 가득했다. 습기 가득한 그 안에서 그는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을 맞으며 하루의 피로를 풀기로 한다.

샤워를 다 마치고 나왔을 때 엘리스는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 약간의 물기가 남은 검은머리가 굽이쳐 어깨까지 내려왔고, 실크 나이트가운이 몸의 곡선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엘리스가 씻고 나온 그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가운을 걸치고 있지만 제 맨몸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같아 썩 유쾌하지는 않은 기분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몸 좋네요.”

빈센트는 따로 대꾸하지 않았다. 표정없는 그녀의 칭찬, 아마 칭찬일 것이다, 그것을 그냥 흘려들었다. 그녀를 지나쳐 파자마를 가지러 가려는데 엘리스가 손목을 쥐었다.

“뭐하는거죠?”

“의무를 다해야죠.”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가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입고 있던 나이트 가운의 허리띠를 풀었고 실크는 무겁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빈센트는 제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눈을 의심했다. 아른아른 비치는 네글리제를 입고 제 앞에 서 있는 여자. 유혹의 눈빛도 몸짓도 없는, 그러나 지나치게 선정적인 그 모습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남자들은 이런거 좋아하지 않나요?”

“그걸 왜 당신이 지금 제게 하냐고 묻는 겁니다.”

“키스하고 애무하세요. 그리고 내 몸에 당신을 넣어요. 다음날 청소하러 오는 사람들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침대를 저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거에요. 그리고 그들끼리 떠들겠죠. 안 좋은 말은 삽시간에 소문이라는 날개를 달고 날아갈거에요. 걷잡을 수 없이 퍼진 소문은 우리의 계획을 망치겠죠. 빈센트, 우리는 신혼부부고, 서로 부부로서의 의무를 다하기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맹세했죠. 우린 서로 진실을 알지만 이건 무대 위의 연극이잖아요? 관객들을 만족시켜야죠. 사기인 게 들키지 않도록.”

“달변이시군요.”

“날 원하지 않나요?”

“원합니다.”

“그럼 안아요. 저를 허락할게요.”

그 말을 하는 엘리스의 손이 빈센트의 뺨을 어루만진다. 허락이 떨어지자 남자는 여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짓누르며 숨을 들이마셨다. 비누 냄새 위에 다른 냄새가 덧씌어있다. 이 향기는 분명 월하향의 향기다. 지나치게 위험한 튜베로즈의 향기가 그의 정신을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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