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내 절교를 받아라 - 7화
"싫다고!"
"어머."
"만지지 마!"
"왜애애-"
가슴 사수. 가슴 사수. 가슴을 사수하라.
결국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 팔자에 정수현이 끼여서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며, 나는 베개를 툭 밑으로 던지며 씩씩거리며 내려왔다. 내가 요를 마저 깔고 진지하게 정수현을 째려보자 정수현은 팔자 눈썹을 하고 어깨를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아, 왜그래애애-"
저 엥엥거리는 목소리. 네 그 징한 남자들에게나 써먹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행여나 아무런 죄 없는 뱃속의 아기가 들을세라 나는 차마 더 말을 않고 단호하게 이불을 덮었다.
"야아아- 너 뭐야."
"자."
"김아여어언."
제대로 거부하는 내 모습을 아마 정수현은 처음 볼 것이었다. 그렇지만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엄마가 될 사람이 아직도 저렇게 철딱서니가 없어서 어떡하지.
언젠가는 철이 들겠지? 아니, 철이고 나발이고 제발 정수현이 상식이라는 게 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먼 미래에 어떤 날에는 네가 나한테 했던 일들을, 아니 그냥 네가 평소에 행동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제발 이불을 뻥뻥 차주길 바라는 마음이야. 정수현, 네게 그런 날이 오기만 한다면 나는 힘들지만 계속 친구를 해줄 의향도 0.2% 정도는 있어.
새삼 이런저런 생각으로 누워있는데 정수현에게 '엄마'라는 말을 붙이니까 너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져서 내 얼굴이 다 확 달아올랐다. 엄마 정수현. 엄마...정수현이라니. 정수현이 엄마라니, 헐. 너무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보면 정말 놀랍기 짝이 없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엄마, 정수현.
"....근데."
그래서 결국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던, 정말 제일 묻고 싶던 질문이었지만 차마 민망해서 묻지 못한 말이 피어올라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나는 결국 감았던 눈을 살짝 뜨고 물었다. 뱃속의 아가야 듣지 마, 네 엄마는 또라이이긴하지만 그래도 널 낳으려고 결심하고 있으니까 한 번만 봐줘. 언젠가 한 번은 질문해야 할 거라면 차라리 빨리하는 게 낫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애 아빠는 누구야?"
내 절교를 받아라 7화
7. 애 아빠가 누구야
조용한 원룸에 내 목소리가 울렸다. 이불이 사부작대는 소리가 들렸다. 정수현이 뒤척이는 것 같았다.
"......"
정적. 좀 민망해진다. 대답 없는 정수현이라니... 벌써 잠이 들리도 만무하고, 저렇게 침묵을 지킨다는 건 대답하기 싫다는 의미겠지? 괜히 물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임신이란 게 한 사람이 시키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정수현의 임신은 정수현을 임신시킨 의문의 남자에게도 동등한 책임이 있을 텐데. 물론, 자세한 내막이야 내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만....그래도 정수현만 이렇게 짊어지는 것도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고... 왜 내 앞에선 애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건지도 궁금하고...아 그냥 이 모든 게 다... 어... 어....?
"야!"
"궁금해?"
이불이 계속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정수현이 뒤척이는 소린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정수현이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가 누워있는 요로 내려오는 소리였던 것이었다. 내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는 결국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침대를 내버려 두고 이 또라이도 밑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내가 몸을 홱 돌려 정수현을 바라보자 웃음기를 가득 담은 채 내 이불을 파고드는 중인 정수현이 보였다.
"아, 침대에서 자!"
"싫어."
".....그럼 내가 올라갈..."
"애 아빠 궁금하지?"
"....."
아니 도대체 멀쩡한 침대는 비워두고 정수현과 둘이서 좁아터진 요에 있어야 하는 걸까. 나는 황당함과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베개를 끌어안은 채 아직도 진지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정수현을 흘기며 침대로 올라가려 했다. 그러다 흠칫, 내 몸을 정지시키는 정수현의 그 말에 누운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정수현의 눈을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데?"
"옆에 누우면 말해줄게."
"......"
"자, 찹쌀떡?"
이불을 홱- 들추어내며 제 옆을 팡팡 때리는 정수현의 여우 같은 눈웃음. 순간 이성과 본능이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싸우고 있었다. 알 게 뭐야, 하는 마음과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는 마음. 그리고 이미 승리를 예감한 채 빙글빙글 웃고 있는 정수현의 입꼬리.
"......"
아, 아, 아.... 마지못하는 척 나는 결국 정수현의 옆에 눕고 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온몸을 기대어 오며 키득키득 거리는 정수현의 목소리. 그치만 궁금한걸. 왜냐고 물어도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그냥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끌어안고 자도 돼?"
.....아.
또,
내,
가슴은...
익숙하게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한쪽 다리까지 올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정수현. 다음에 태어나면 곰인형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그러면 차라리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거니까.
만지작, 만지작. 오늘따라 가만히 감싸 쥐는 정도가 아니라 조물조물 거리는 느낌에 내가 몇 번 손을 떼어내려고 정수현의 팔을 잡았지만 정수현은 완강했다. 내가 몸을 흔들며 정수현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정수현은,
"어어! 이러다가 우리 아기가 놀라겠다아!"
라고 하며 더 나를 꽉 껴안으면서 능청스럽게 말했다. 줘 패고 싶다, 딱 한대만이라도. 나중에 산후조리가 끝나면 24시간만 정수현을 패주고 싶었다. 내 나이 스물넷.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한 한창일 나이에 친구에게 가슴이나 내어주는 여대생. 인간극장 배경음악이 귓가에서 재생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그냥, 자포자기가 되어서, 새삼 정수현의 또라이짓에 익숙해져 버린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런 내 마음 따윈 애초에 모른다는 듯 정수현은 벌써 잠을 잘 준비를 한다. 가만히, 내 등 뒤로 제 몸을 밀착시키면서 고른 숨을 목덜미에 뱉어내는 거였다. 그리고 이따금,
"아... 진짜 따뜻해. 찹쌀떡 찌찌는 따뜻하고 몰캉몰캉해서 막... 꼭 잡고 있으면 내 찌찌까지 따땃해지는 느낌이야."
아, 제, 발, 닥, 쳐, 줘.
나는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정수현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잠시만 정수현의 개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서 애 아빠가 누구야."
그래, 내가 뭣 때문에 오늘 또 네게 내 가슴을 헌납하고 있는데, 싶어 나는 귀를 막았던 손을 내리고는 퍼뜩 정수현에게 물었다. 내 물음에 정수현은 "어?"하더니 이내 푸스스...저 혼자 웃음이 터졌다. 뭐야.
"우리 아기 아빠가 누구냐면..."
정수현은 이마로 내 어깨를 꾸욱 누르면서 제 나름대로 귀여운 목소리를 내었지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정수현의 모기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좋아, 애 아빠가 누군지만 듣고 다시 침대로 올라가야겠다. 그래, 그러면 되잖아?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정수현의 친구로 6년 동안 있다 보면 슬슬 잔머리가 생기기도 하나보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곧 내 뒤에서 들릴 드디어 밝혀지는 아이의 다른 한쪽의 유전자의 주인을.
"애 아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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