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나는 펫 - 3부
나는 펫
3부
"가정교육이 중요하지... 이래서 졸부들은 안돼. 돈이 넘쳐나면 뭘하니. 기본 교오양이란게 없는데."
세아가 보기엔 가정교육으로 치면 상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참았다. 큰 딸 계집애가 중년 여성의 말을 듣자마자 경찰서에서처럼 눈이 뒤집혀 가르릉 거리기 일보직전으로 보이길래 세아는 재빨리 큰 딸 계집애를 질질 끌고 억지로 명품관의 프리미엄 손님들의 전용휴게실로 데려가 앉혔다. 다행히 제 언니보다 훨씬 똑똑하고 이성적인 크리스틴이 도와주었다. 그러나 제니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계속 씩씩 거리며,
"뺨을 때려야 했어!"
라고 말하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내 크리스틴 때리려고 했다니까! 나 싸울 수 있어! 다 죽여버릴거야! 내 크리스틴이 그 두꺼비 때문에!"
"언니, 걔 별명이 두꺼비인거어떻게 알아?"
"...어?"
"뭐야, 혹시 내 일기장 훔쳐 본 거 아니지?"
"놉!"
"....."
"어...um... 크리스틴, 언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알아?"
"진짜 실망이야, 언니."
"놉! 나 안봤어! 트뤄스트미!"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뭐게?"
"일주일 전에 ㅇㅇ문고 음반매장에서 우연히 듣고 반해버린 재즈싱어 봄살리아봄사르의 새 앨범 <봄사르리사르리랏다>!"
"봤네... 죽을래 언니?"
"......"
그러나 다행히 동생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본 것을 어이없게 들킴으로써 잠시 크리스틴과의 진지한 대화를 피할 수 없게 된 큰딸 계집애였다. 그틈을 타 세아는 잠시 슬쩍 나와 다시 그 문제의 명품관 매장으로 가 수습을 시작했다. 게다가 크리스틴을 괴롭혔다는 그 문제의 계집애도 제가 해결해야할 것만 같았다.
"큰 언니예요?"
크리스틴을 괴롭혔다는 애가 제게 물었다. 과연, 당돌하고 싸가지가 없어보이는 것이 크리스틴이 받았을 따돌림의 종류가 어떤건지는 모르겠지만 새삼 세아는 가슴이 아팠다. 제 옆의 엄마를 믿고 당당히 짝발을 짚고 눈을 치켜뜨며 씨익 웃는 꼴에 세아는 그냥 큰딸 계집애를 말리지말고 그대로 둘걸,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귀나 손모가지가 물어뜯겨 피를 철철 흘렸을테니까.
"그거나 다름없죠."
"뭐야, 풉...또 배다른 언니라도 있나봐? 걔네 집 은근히 콩가루다."
"남의 가정사에 관심이 많은 따님을 두셔서 좋으시겠어요."
크리스틴의 친구이자, 크리스틴이 일기에 '두꺼비'로 명명해놓은 여자애 모녀는 세아가 사과라도 할 줄 알았는지 의기양양하게 사람을 깔아보듯 하고 있었다. 하여간 돈이 많을 그릇이 안되는 것들은 이래서 안돼. 세아는 장소만 적절했다면 정말 한때 말싸움 기싸움으로 제법 여우같은 것들을 혼내줬던 시절의 저를 꺼내고 싶었지만 최대한 교양을 차려 얼굴을 치켜들고 빙긋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세아는 내심 놀라기도 했다. 배다른 자매였다니... 그건 몰랐다. 항상 큰딸 계집애인 제니는 작은딸인 크리스틴에게 과할 정도의 애정표현을 했기 때문이었다. 세아는 자매사이에 뽀뽀를 하며 기도를 해주는 모습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문화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자신의 시집간 큰 언니에게 뽀뽀를 한다면 아마 빌려줄 돈이 없다는 말과 함께 강냉이가 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맨날 공부에 지쳐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에 드는 제 동생을 끌어안으며 마이스윗할트 쪽쪽쪽, 입술과 뺨을 부벼대던 큰딸 계집애를 생각하면 세아로서는 의외로 감동스러운 부분이 있었던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이 삼류드라마같은 장면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세아는 제 앞에 이 모녀가 전형적인 악역 1,2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모든 삼류드라마의 법칙은 권선징악에 수렴한다는 점에서 이제 악역은 벌을 받아야 했다. 과연 삼류드라마의 악역답게 유치하게 자신을 향해 깔깔 거리고 있었다.
"배다른 언니가 저렇게 동생을 생각해주는 걸 보니 어때, 학생?"
"뭐야, 너는."
초면에 반말부터 찍찍 해대는 걸 보니 교양 운운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알 것 같았다.
"현재 친권자이신 정대표님 내외의 지정권리에 의해 임의 대리인으로 있는 법정보호자입니다. 모르실까봐 말씀드리는데 우리 대표님께서 자제분들 교우관계와 정신적인 건강에 상당히 민감하세요. 따님이 저희 크리스틴양에게 폭력을 행사하려고 했다는 건 알고 계신가요?"
"지금 뭐하자는 거야?"
"법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거죠. 입시를 앞두고 있는 그쪽 따님을 생각해서 제가 백번 양보하겠습니다. 보호감찰정도면 괜찮을까요? 그럼 올 해는 무리겠지만 내년쯤엔 대학 가는데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네요. 물론 돈을 좀 쓰셔야 할테지만 그건 오히려 쉬운 문제이실 것 같으니 더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우리 지금 말싸움 할 시간 없거든?"
"전 업무 중간에 뛰쳐나왔어요. 제가 상대하던 분은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백화점이나 돌아다니는 모녀들이 아니었고요. 바쁘니까 빨리 끝내죠. 지금은 저랑 잠깐만 이렇게 보시면 돼요. 저희 쪽 법무법인에서 '학교폭력 진상조사 의결요청'을 드릴건데, 일단 그렇게 되면 무조건 자치위원회가 열리게 되니까 거기서 좀 더 '진중하게' 저랑 얼굴 보시면 될 것 같네요. 학교보다 교육청 쪽에 먼저 다이렉트로 연락이 갈 거예요. 혹시 교육청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면 무시하지 마시고 꼭 받으세요."
"지금 협박하는 거야?"
"잘 알아들으셨네요. 알아들으신 김에 하나만 더 할게요."
세아가 눈을 휘어뜨리며 말했다.
"저희쪽 로펌이 인터넷뉴스 계열사라서 기사부터 먼저 날 예정이니까 혹시 사진찍고 다니는 사람들 있으면 조심해서 얼굴 잘 가리고 다니세요. 그래도 명색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할 만한 졸부, 아 실수, 재벌집인데 행동하나하나 주식 생각해서라도 교오양 있게 하셔야죠."
"이봐, 당신!"
"윤세아 입니다. 여기 제 명함이구요. 실례지만 명함이 있으시면 하나 주세요. 제 선에서 연락을 드리게 될거..."
"야! 너 내가 누군지 모르나본데..."
"네. 모르니까 말씀드렸잖아요. 명함달라고."
"......"
이튿 날 사과의 전화가 걸려왔다. 다름 아닌 자신의 핸드폰으로. 세아는 그 전화를 크리스틴이 받게했다. 애초에 저를 괴롭히는 애들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크리스틴이었기에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 점이 그나마 세아가 받은 책임감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 가볍게 해주긴 했다. 그렇지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아서 잘- 살 줄 알았던 애들이 그래도 '애들'은 '애들'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왠지 청담동 흑진주의 두 딸들은 세아를 더 의지하게 되었는데, 세아로서는 차라리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저를 덜 의지했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났던 10차선 도로위에서의 사건은 더 가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아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발신 - 고양이년
전화가 왔길래 일단은 받았다. 하필 근무중인 시간이었는데, 더이상 무시할 수 없을정도로 끈덕지게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에 세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받았다. 하필 그 근무라는게 골프장에서의 기업간 비즈니스미팅의 어시스턴트라는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마침 새롭게 프리미엄 회원권을 끊은 수많은 VVIP들과 함께였는데, 모두 두어달도 채 되지 않은 새로운 손님들이었다. 푸른 필드에서 우아하게 골프를 치고 있던 중이었다. 말이 골프지 수행을 드는 거나 다름 없긴 했지만 그 전화가 걸려오기 전만해도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윤세아 입니다."
- Help me! Help me!
"여보세요? 제니?"
- 나 교통사고 났어!
"....뭐?!"
그런 말을 뭐 이렇게 밝게 하는거야 얘는! 순간 세아는 사색이 돼서 재빨리 몸을 돌려 따지듯 조목조목 물었다. 교통사고가 난 것 치고는 너무나 평소와 다를바가 없었기 때문에 세아는 도무지 어떻게 된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야?!"
- 여기 봄살동 가는 길. 도로가 열 개예요!
"누가 몇차선인지 물었어?! 얼마나 다쳤어?"
- 피가 철철 나!
"뭐?! 지금 그래서..."
- 아, 빨리와요. 나 겁나 죽겠어... 막 사람들이 몰려와... 나보고 뭐라그래...힝...
"......얼마나 다쳤어?! 아니, 아니야 지금 바로 갈테니까 꼼짝말고 거기있어!"
- 네~
아, 순간 세아는 청담동 흑진주가 제 뺨을 걷어부치는 상상을 1초정도 했다. 세아는 수행이고 자시고 골프웨어를 입은 그대로 골프장을 나왔다. 얼굴이 하얘지며 나서는 세아에게 회사사람들이 갑자기 근무지를 이탈하면 어쩌라는 거냐고 물으며 저 사람들을 어떻게 수행하냐고 호소하길래, 세아는 절체절명의 표정으로 말했다.
"몰라, 청담동 흑진주한테 물어!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니까!"
올해, 신년운세를 봐둘 걸. 어떻게 이런 일이...
그날 세아가 탄 국산 쿠페형 스포츠카는 처음으로 규정속도에 근접한 속도를 내며 달렸다. 약간의 허세를 위해 구입했던 투도어 스포츠카지만 겁이 많아 60키로 이상을 밟아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던 세아였다. 과연 무릎을 덜덜 떨며 엑셀레이터를 밟아대니 금세 사건의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10차선 도로 한가운데에 경찰차인지 구급차인지가 있고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있었다. 어떻게 이 넓고 번잡한 도로 한가운데에서 사고가 날 수 있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 수현!"
그 때 막연히 알고 있던 큰딸 계집애의 본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제니~ 라고 불러달라던 그 사근한 목소리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급박한 마음에 본명부터 질러버렸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 바로 앞까지 비상등을 켜고 차를 들이밀며 세아는 내렸다. 그러나 이내 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대충 상황파악이 가능한 눈 앞의 장면에 세아는 절로 한숨을 터뜨렸다. 제 차에서 문을 꼭 잠그고 핸들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여자애와, 그 차창문을 쉴새없이 두드려대는 사람들. 세아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운전석 차창문을 톡톡 때리고는 나오라는 눈빛을 보냈다. 저를 알아보자마자 갑자기 스프링튕기듯 튀어나온 큰딸 계집애는 그 동그란 눈에 겁을 가득 집어먹고는 한달음에 차에서 내려 제 뒤에 숨어버리며 제 옷깃을 잡고 파들파들 떨었다.
큰딸 계집애가 제 뒤에서 속삭였다.
"저 아저씨 코피나... 코에서 피가 철철!! 어떡해? 응? 나 혼날까? 경찰아저씨 왔는데..."
".....어떻게 된거야?"
"...나는 아무것도 몰라아..."
"너 일단 내 차에 타있어. 나중에 이야기 해."
쌍방과실이었다. 세아는 누구의 과실을 떠나서 일단 다친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크게 안도했다. 좌회전 신호를 받고 있던 1톤 포터트럭이 마침 바로 옆차선에서 급출발을 하던 큰딸 계집애의 앞으로 쏙 끼어들었다. 문제는 이 큰딸 계집애가 신호가 막 바뀌는데 서서히 가속페달을 밟은게 아니라 정말, 콱! 하고 스프린트를 튀어나가는 육상선수처럼 출발시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상대방은 깜빡이를 넣지 않았다. 주변 차들의 블랙박스 영상이며, 보험사며, 견인차며, 현장검증이며, 경찰서며, 세아는 이틀 동안 눈코 뜰 사이 없이 어딘가로 불려다녔다. 물론 청담동 흑진주 내외에게도 보고서를 읽듯 육하원칙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앞으론 절대로 운전은 고사하고 자전거도 타지 못하게 하겠다는 맹세를 하고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 바로 그랬다...
"나 교통사고 났어." 라는 고양이년의 말은 사실
"나 교통사고 냈어." 였던 것이었다.
세아는 큰딸 계집애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 넌 운전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큰딸 계집애의 코끝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목이 아플 정도로 말했다. 안전거리 미확보로 끝나서 망정이지, 넌 진짜 감사하며 살아야 해! 사람 목숨이 달린게 운전이야! 제법 근엄하게 혼내다가 이내 제 말이 무슨 클래식 음악인양 고개를 까딱까딱거리며 니예 니예~ 하는 듯한 큰딸 계집애의 싸가지없는 모습에 한번 엄청나게 화를 내기도했다. 이 계집애는 꼴에 겁은 많은지 제가 화를내자마자 깨갱, 거리듯 몸을 잔뜩 움츠리고는 울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옴죽거릴 뿐이었다.
앞차가 튼튼한 1톤 포터라는 사실은 또 얼마나 다행인지. 라이트 유리만 금이 간 것으로 끝났다.
"네가 내 동생이었으면 벌써..."
....숨을 한번 들이쉬고 세아는 천천히 그리고 꾹꾹 눌러담으며 큰딸 계집애에게 속삭였다.
"다리몽둥이가 부서졌어. 킬유! 알아들어?"
"그런 말 나쁜말인데!"
"웃기구 자빠졌네. 니가 평소에 쓰던 말이잖아. 말 나온김에 너 말 조심해. 이제부터 말한마디 행동하나하나 뜯어고치도록 해."
이런 일련의 사건들 이후로 세아는 깨달았다. 며칠을 꼬박 경찰서, 보험사, 교통관리공단 등에 불려다니면서 세아는 저절로 이 고양이년을 그대로두면 고스란히 자신이 그 피해를 당할 것이라는 걸. 이 상태로 어떻게 미국에서 살았는지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말하는 것부터, 예절, 한국에서의 관습같은 거. 좀 신경써서 했으면 해. 나 이제부터 퇴근하고 매일 들를테니까 살림 봐주시는 분께 내 몫까지 저녁만들어 달라고 해."
"좋아. 그럼 이제부터 당신이 티쳐?"
"너 지금 되게 즐거워 보인다? 이게 선생놀이로 보여?"
"노우! 암 쏘 시뤼어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부탁드려요 선생님~"
"......."
말이나 못하면 기라도 죽이지. 이건 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오히려 방긋방긋 웃으며 기대가 되어 죽겠다는 표정에 세아는 이게 아닌데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절수업'이라고 명명한 첫날, 세아가 들어서자마자 현관으로 총총총 걸어오던 고양이년이 두 손가득 뭔갈 들고 생긋생긋 웃고있는게 아닌가.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만화영화를 보는 아이같은 들뜬 표정에 세아는 불안함을 느껴야했다.
"뭔데? 그리고 너 사람이 오면 인사부터 하는거야. 게다가 난 너보다 연상이잖아. 이럴 땐 다녀오셨어요? 라던지 안녕하..."
"웰컴! 자 스파게뤼 만들어요! 어서!"
"?!"
"어서! 크뤼스틴 오늘 일찍 온댔어. 그러니까 3인분!"
"....너 지금 뭔가...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너랑 밥을 같이 먹으려고 온게 아니야. 게다가..."
슬쩍 큰 딸 계집애 너머 부엌으로 시선을 주던 세아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살림 봐주시는 아주머니는 어딨는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세아는 저와 제 앞의 계집애 말고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게 이상해서 세아는 제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어디계셔?"
"아주머니? 그런 거 없어."
"그런 거라니. 오늘 안 계세요, 하고 말해야지. 다시 해 봐."
".....그런 분 안 계세요? 이렇게?"
"....안 계신다고?"
"우리 집엔 나랑 크리스틴 밖에 없어요."
"응? 그럼 살림 봐주시는 분 안 계셔?"
"응!"
"그럼 여태까지 밥은 네가 챙겨먹었어?"
"노우!"
"....그럼?"
"못 먹었지! 그래서 살 쫙쫙 빠졌잖아! 이거 봐봐."
팔뚝을 걷어보이며 제앞에 쑥 내미는 큰딸 계집애의 가느다랗고 하얗게 말라 비틀어진 팔에 세아는 새삼 아뿔싸, 싶었다. 오마이갓. 정말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것이었다. 제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도 그럴 것이 어지간한 팔불출이 아닌 청담동 흑진주의 딸사랑의 결과물로 살림을 봐주시는 분 정도야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럼 반년동안 그냥 자기들끼리 생활했단 말이잖아?
하지만 물론 그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일단 적은 나이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살림을 자기들끼리 잘 해결할 수 있을...
......
......
......
"야! 너네집......냉장고....가....왜 없어?"
"그치?! 냉장고 없어요오~ 배고파...힝...우리 맨날 쪼올쪼올~ 굶었어요. 배가 쏘옥 들..."
"그럼 말을 했어야지!!"
"치. 말했는데 무시 했으면서."
"언제?!"
"말했어!"
"언제!?!?"
"이것 봐! 이거!"
갑자기 제 손바닥보다 더 커다란 핸드폰을 가지고 오던 큰딸 계집애가 액정위를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휙휙 뒤지더니 세아의 앞에 ?!! 내민다. 보낸메시지함의 목록을 가득 띄우고는 의기양양하게, 마치 받아쓰기 100점을 맞은 어린애처럼 씨익 웃으며 제 앞에 보여주는 메시지들이란...
[배고파]
[배고파]
[암쏘 헝그뤼]
[배고파요]
[스파게뤼~ 사주세요]
[아 배고파]
[잠이 오지 않아 배고파서]
[미스 윤♡ 햄벌걸 좋아해?]
[밥 먹으로 가도 돼?]
[문 잠겨있어 힝]
[문 좀 열어주세요]
[미스 윤 파스타 만들 줄 알아요?]
[바빠?]
[...자니?]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아]
[배애애고오오파아아]
[Knock Knock]
[친구없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주세요]
[어지러워 배고파]
[배고파]
....
....
.....??!?!?!?!?
.............이게 뭐야?!
설마 그럼 지금까지 보낸 [배고파]시리즈가 진짜 배고파서....
지난 반년동안 세벽마다 배고프다는 큰딸 계집애의 메시지를 무슨 스팸메일보듯 했던 세아는 새삼 가슴이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헐.
설마 청담동 흑진주가 정기적으로 관리인으로부터 두 딸내미의 몸무게를 보고 받거나 하진 않겠지. 그리고 보니 처음 왔을 때에 비해서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애초에 이 두 딸내미는 몸무게가 적정량에 한참 못미치는 것 같긴했는데... 그래도 저 고양이년은 둘째치고 작은 딸내미가 한창 자랄나이에 집에 냉장고가 없는 엄청난 현실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 세아는 큰딸 계집애에게 내색하지 않은 척 하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아마,
그때부터였던가...
....고양이년의 전속 요리사가 된 것이...
자취경력이 15년. 입맛이 까다로워 어지간한 요리를 만들어도 허투루 만들지 않았던 세아의 기호식품 1위가 치즈나 면, 와인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세아는 스파게티나 파스타라는 말을 노래부르듯 하는 큰딸 계집애를 위해 자신의 요리실력을 뽐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학원에서 저녁까지 먹고오는 것은 물론이요, 주말에도 레슨이 꽉 차있어서 크리스틴이 굶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세아는 안도가 되었다. (또 하나 다행인 점은, 둘째딸 크리스틴이 아침마다 배달되어오는 프리미엄 고칼슘 우유를 제 언니 몫까지 몰래 꼬박꼬박 챙겨먹어 준 것이었다. 덕분에 크리스틴은 반년새에 3cm이상 크며 제 언니의 키를 이미 한참 앞질렀다.)
이 딸내미들은 밥을 만들어 주지 않았을 때는 잘만 참더니, 한 번 밥을 챙겨주기 시작하자 공복을 못 참는 애들이 되어버렸다. 특히 큰딸 계집애는 중증이었다. 감히 말하건대, 그건 정말 중증이었다. 꼭 진짜 고양이나 강아지새끼마냥 먹을 걸 보챘기 때문이었다. 세아는 새삼 청담동 흑진주가 과연 이 큰딸 계집애의 이런 행동을 알고나 있을지 궁금했다. 큰딸 계집애가 하루가 멀다하고 저를 찾아오거나 주말이나 공휴일의 제 시간까지 모두 섭렵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큰딸 계집애의 행동은 이러했다. 너무 피곤해서 바로 제 집으로 들어가고 있으면 어김없이 현관 앞에 고양이처럼 쭈구려 앉아 기다리고 있거나, 아니면 늦은 밤 쉴새없이 초인종을 누르고는,
"밥밥밥!!"
하고 외치면서 들어오거나
"크림 파스타아~~ 노 머쉬룸 플리즈~"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들어오거나,
"왓더!! 늦었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어! 그러니까 오늘은 토마토소스루~ 플리즈~"
하면서 피곤에 쩔어있는 세아를 어떻게든 구워 삶아서 부엌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것이었다.
이게 반복이 되더니, 이젠 자연스럽게 세아의 집을 제 집인양 들락날락 거리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엔 기어코,
"돈 줄테니까 우리집 부엌에서 살아요."
"......닥쳐."
"왜애? 나 처음이야. 남보고 같이 살자고 하는 거."
"야!"
쾅! 오븐에서 갓 꺼낸 스파게티를 내려다 놓으며 세아가 소리쳤다. (이 계집앤 굳이 치즈를 그라탕시킨 파스타를 만들라고 닦달했다. 그리하여 세아는 5년 동안 쓰지 않았던 오븐을 청소하고 쓰기 시작했다) 이 기집애가!! 뭐? 돈 줄테니까 우리집 부엌에 살아?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렇지... 아무리 피곤해도 오해를 살만한 언행을 한 경우, 세아는 어떻게든 청담동 흑진주의 첫째 딸을 앉혀놓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마치 고양이 훈련시키듯, 찬찬히 또박또박 알아듣도록 당근과 채찍을 교묘히 썼다. 여기서 당근은 저녁밥, 예를 들면 큰딸 계집애가 껌뻑 죽고 못사는 크림스파게티(버섯을 넣으면 경기를 일으킨다)같은 것. 채찍은 끔찍히도 싫어하는 한글로 반성문쓰기(악필이었다. 그것은 쓴다는 것보다는 그린다는 것에 가까웠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저녁을 챙겨주기 시작할 무렵부터 큰딸 계집애는 제 집보다 세아의 집을 더 자주 찾아왔다. 마침내는 마치 제 집인양 들락날락거렸다. 아침 일곱 시에 나가 밤 열한 시에 돌아오는 크리스틴을 기다리는 일을, 세아의 집에서 하기 시작한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세아는 진심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혹시 몰라 제 집 도어락 번호를, 비상연락망처럼 '특별한 경우'를 위해 알려준게 화근이었다.
출퇴근 시간이 제법 탄력적인 있는 세아는 때때로 이른 오후에 주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하루는 현관앞에서 꺄르륵, 하고 자지러지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경찰을 동행하고 제 집으로 들어갔다. 마치 미국 드라마의 그 전형적인 수사물에서 처럼, 형사들과 함께 현장을 찾는 피해자의 심정으로 마음을 졸이며 들어갔다가 제 어릴적 앨범을 꺼내보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큰딸 계집애와 엉망진창이 된 제 거실을 발견했다.
세아는 그대로 몸을 빙그르르 돌려 동네 지구대의 경찰들에게 바닥에 머리가 닿을 듯이 사과의 인사를 하게 되었다.
"죄송하네요. 동네 미친년이 무단침입이라도 한 줄 알고..."
사실 동네 미친년급에 준하는 또라이같은 면이 있는데 잡아 쳐 넣어주실 순 없겠지요- 하는 말은 못하고 눈을 파르르 감으며 분노를 삭혀야했다.
최근에 동네에 꽤 떠들썩한 강도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은 터라 지레 겁을 먹은게 잘못이었다. 경찰관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가고, 세아는 참을 인(忍)자를 세 번이 아니라 삼천 번은 새기면서 여전히 제 앨범을 보며 까르르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르고 있는 고양이년을 노려보았다.
"와 많이 고쳤네! 푸흐...깔깔깔~ 꺄르르~"
"미스 윤! 당신 자기관리가 뛰어난 사람이에요! 푸흐흐히히..."
"근데 코 안해도 예뻤어! 왜 했어?"
라고 조잘거리며 제 속을 뒤집으려고 아주 그냥 작정을 하려는 듯한 큰딸 계집애의 행동에 안그래도 육아아닌 육아를 하며 받았던 스트레스가 터져버렸다. 그래, 다 필요없다. 승진이고 나발이고. 보너스고 나발이고. 저 계집애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게 더 없는 보너스이자 승진일 것이었다. 더 이상 평온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제 일상을 깡끄리 바꿔버린 저 계집애에게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해. 아직 2년도 더 남았지만, 더 이상은 못참겠다. 조만간 청담동 흑진주에게 전화를 해야겠어. 도저히 못해 먹겠으니까 법정 대리인인지, 보호자인지 뭔지 그거 바꿔달라고...
"미스 윤, 가슴도 했어?! 옛날엔 완전 납작..."
"야 이 기집애야!!!!"
"꺅! 왜 소릴 질러어! 놀랬자나아! 나 그런거 싫어해!"
그리고는 오히려 지가 더 화를 내면서 몸을 일으키던 큰딸 계집애는, 놀랍게도 세아의 거실에 있는 쇼파에 몸을 깊이 묻으며 자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사는 앤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날도 세아는 어김없이 버섯을 뺀 크림 스파게티를 만들어 주어야했다. 신데렐라, 그거 진짜 슬프고 장한 이야기였네. 그게 바로 나야. 차라리 가족이면 몰라. 계모와 언니들이면 몰라. 생판 남인, 그것도 저보다 10년 넘게 어린 새파란 어린애에게 휘둘리는 꼴이라니. 내가 진짜 청담동 흑진주만 아니었으면... 그랬으면...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가 이렇게 참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비즈니스적으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고객일 뿐이고, 그 놈의 법정 대리인인지 보호자인지- 할 사람이야 구하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못하겠다.
그렇게 결정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세아는 제 상사를 찾아갔다.
"전 더 못해요. 밑에 애들 중에 시켜주세요. 제 생활이 되지 않..."
"윤 실장, 안그래도 연락을 하려던 참이었지. 아 글쎄, 어제 어마어마한 전화를 받았지 뭐야."
"네?"
"청담동 흑진주 사모님께서 현지에서 바로 팩스 한통과 함께 연락이 왔단 말이야."
엄청난 발견이라도 한 사람마냥 제 상사가 저를 쳐다보며 이글이글 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거기서 대박을 치셨대."
"....그래서요?"
"우리 지분을 현 시세보다 훨씬 웃돌아서 사가기로 하셨다고. 조만간 우리랑 조인트할꺼야."
"네에?"
씨익, 상무이사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진다.
말도 안....돼애....
오, 세상에, 이런일이. 그럼 그 말 뜻은...
이제 그 계집애들의 부모님들이 제가 하늘처럼 떠받들어 모셔야 할 또 다른 상사가 된다는 말이잖아?
"이게, 다, 윤실장 덕분이야. 회장님이 윤 실장에게 친히 '우리의 자산'이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내가 말했던가? 아 글쎄 월례회의에서 나한테 대놓고 말했더란 말이야. 인센티브야 두 말 할 것도 없고, 앞으로 스케쥴은 다 자기가 조절하도록 해. 내가 그것만큼은 절대로 터치하지 않을테니."
"......"
....................아.
그래서 세아는 결심했다.
딱 1년만 채우자. 1년 정도만 딱 죽었다고 생각하고 채워버리자. 돈 때문이 아니라 회사의 무시무시한 기대감에 숨이 막혀 더이상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1년을 채우면 도리는 다 한거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리고 딱 1년이 되자마자 보란듯이 손을 놓아버릴 작정이었다. 앞으로 남은 1년동안은 어떻게든 사건도, 사고도 만들지 않도록 미친년처럼 큰딸 계집애를 잡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1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지금처럼 태풍이 불어닥치던 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일어나지 말았어야 좋은 일이었으나 자연의 힘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태풍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비바람을 몰고오는. 예보를 미리 접했지만 그날 오후까지는 하늘이 화창하길래 세아는 별 생각없이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을 뿐이었다.
[집에만 있어. 태풍이니까. 크리스틴은?]
[미스 윤! 오늘 메뉴는 뭐야? 난 크림스파게티가 좋겠어.]
[동문서답하지말고. 크리스틴은?]
[동문서답이 뭐야?]
.....아 진짜 얜 대화가 안통해. 무슨...
결국 전화를 건 세아는 크리스틴이 레슨을 받으러 갔다는 말을 전해듣고 픽업기사에게 따로 더 신경을 써달라는 연락을 넣었다. 큰딸 계집애는 전화를 강제로 끊기 전까지, "언제 와? 언제 와? 언제 와?"를 무한반복하더니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 폭탄을 날려댔다.
[오늘은 금요일! 스페샬 크림스파게티 먹는날!]
어쩌란 말이야.
[티쳐! 오늘 무슨 날인 줄 알아?]
몰라. 알게뭐야.
[일찍 오면 말해줄께! 오늘 아주 콩그레츄레이션!! 해야 하는 날★]
씹었다.
[보고싶어 베리머치. 언제 와?]
헐.
세아는 [ㅡㅡ]이라고 답장해 주고는 전화기를 꺼버렸다. 팀장회의가 있는 시간이었다. 이 계집애에게 일일이 다 대답을 해주다가는 회의 때 쉴 새 없이 전화기가 울려 댈 것이었다.
날씨가 화창하니 당장의 걱정은 없겠다 싶어서 세아는 꺼진 전화기를 제 책상서랍에 넣어두고 회의에 참석했다. 분기별로 있는 가장 큰 회의 중에 하나였다. 장장 세시간이 걸렸다. 회의는 저녁약속으로 연장되었다. 순간 크림 스파게티를 목빠지게 기다리는 큰딸 계집애가 생각이 나긴 했다. 저도 모르게 신경이 그쪽으로 간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늦으면 자기가 어련히 알아서 제 집으로 가겠지.
회사의 타운하우스 내의 레스토랑이었기 때문에 세아는 다시금 휴대전화를 가지러가지 않았다. 어차피 마치고 들를 사무실이니까. 스케쥴도 없는 날이고 급한 접대도 없던 때였다. 한창 저녁을 먹으며 회식분위기를 내고 있는데 태풍이 휘몰아쳤다. 유리가 덜컹덜컹 거리는건 둘째치고, 엄청나게 천둥소리와 번개가 이어졌다. 그래도 실내에 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밥을 먹은 후에는 와인바에 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레스토랑과 이어진 곳이었다. 밤 열한 시가 다 되어 갈 때까지 세아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로운 저녁이었다.
"태풍이 심하네."
"주차장까지 어떻게 가지?"
차 때문에 와인은 마시지 않고 탄산수를 조금씩 들이키고 있던 세아는 주위사람들이 핸드폰으로 태풍경보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 그때서야 휴대폰을 놔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손목으로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슬슬 자리를 파해도 될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찰나, 제 부서의 직속후배인 애가 제 앞에 나타난 건 그때였다. 세아가 의아하게 왜 네가 여기에 있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니?"
"아, 윤 실장님! 휴대전화 놔두고 가시면 어떡해요!"
"왜?"
"아, 빨리 받아보세요!"
의아한 표정의 세아는 휴대전화에 귀를 갖다대다가 이내 숨을 헉, 들이켰다. 크리스틴이었다.
- 어, 언니!
"어머, 크리스틴?"
- 우리언니는요?!
"너네 언니? 그야..."
.....그야...?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급박한 목소리의 크리스틴이었다. 세아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갑자기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대충 눈으로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저를 찾아 온 후배에게서 제 차 열쇠를 받았다.
"무슨 일 있어?"
- 태풍때문에 저 학원에 묶여 있어요. 도로에 사고가 크게나서...
"어머, 괜찮니?!"
- 전 괜찮아요. 근데 언니가 전화를 안 받아서.., 우리 언니랑 같이 있어요?
"아니, 나 회사야. 무슨 일 있어?"
- 네? 아, 안되는데 그러면......어떡해요?
"왜?"
세아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와중에 자신이 비를 맞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연신 수화기 너머의 크리스틴의 이어질 말들을 기다리며 숨을 참고 있을 따름이었다. 묘하게 불안한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직감은 걸음을 옮길수록 더 심해졌다. 비 바람에 눈 조차 제대로 뜰 수 없는 밖을 해치고 가면서 세아는 수화음을 더 크게 듣기 위해 버튼을 눌러댔다.
불안한 직감. 4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들었던 직감과 비슷한 직감이 세아를 짓눌렀다.
"크리스틴. 울지말고 찬찬히 말해봐."
- 우, 우리언니가... 으흑, 으...으윽...
"수아야."
자신도 모르게 둘째 딸내미의 본명과 함께 나지막하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진정해, 진정하는 거야. 내가 지금 어떻게든 갈테니까. 나한테 상황설명을 해줘야해. 알았지? 어르고 달래는 제 목소리에 크리스틴이 울음을 삼키며 띄엄띄엄 말을 잇대기 시작했다.
- 우리언니...천둥치면 까무러쳐요... 마, 말씀 드려야 했었는데... 언, 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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