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3화
추락한 성녀 03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추락한 성녀 03
루블, 보쓰, 히즈
***
헬레니온은 능숙하게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표정을 숨겼다. 아마데아는 모르겠지만 그는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피곤하십니까? 역시 오늘은 바로 주무시지요. 저녁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내 말을 못 들은 척 하지 말거라. 저 여자는 싫다고 했다.”
“특별히 가리시거나 좋아하는 메뉴가 있습니까? 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모른 척 해도 소용없다. 분명 너는 날 위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분명 지내시던 곳 근처에 큰 항구도시가 있었죠. 해산물로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무시하지 말라니까!”
결국 씩씩대던 아마데아가 분을 못 이겨 책상을 쿵 내리쳤다. 대체 뭐 하자는 건가. 바로 앞에서 다 듣고 있으면서도 이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
“······그레이스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 여자가 내게 무슨 태도를 보였는지 아느냐! 감히 나의 태도를 운운하며 훈계하려 하다니. 무례하기 이를 데 없다!”
헬레니온은 대강의 상황을 짐작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습관적으로 턱을 쓸었다.
“죄송하지만 그것만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이곳의 총괄은 그레이스이고 바뀔 일은 없을 겁니다.”
말을 꺼내는 헬레니온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너무나 차가워 보여서, 아마데아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흠칫 놀라는 기색을 느낀 것인지 헬레니온의 표정은 다시 완벽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방금······.”
“그레이스에게 좀 더 온건히 당신을 대하라고 해두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당부를 드려야 겠군요. 이 곳은 아우레티카가 아니며, 당신의 지금 신분은 성녀가 아닙니다. 제가 도와드린다고는 했지만 최소한의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해주시지요.”
노력. 단어의 뜻은 알지만 그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태어난 이후 잠시 혼자이긴 했으나 곧 성녀로 발탁되어 항상 떠받듦을 받으며 자랐다.
이번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진 다쳐본 적도, 고집을 꺾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헬레니온이 말하는 노력이라는 게 뭔지 그녀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자신에게 참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언짢을 뿐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녀를 감싸준 헬레니온마저 그녀에게 무례해지는 것은 싫었다. 아마데아는 관대한 마음으로 그 ‘노력’이란 게 뭔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마데아는 찻잔(아우레티카에서는 본 적 없는 형태였다)을 아까 그처럼 입에 문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처음 맛보는 차는 은은한 향은 좋지만 약간은 썼다. 역시 디모네들이 빈곤한 탓이려니 여기고 관대히 넘어가기로 했다.
‘받아들인다······. 노력······.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그 그레이스라는 여자의 태도를 지적하지 말라는 건가.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어주는 건 불쾌하군.’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오히려 그 여자에 대한 반감만 커져갔다.
찻잔을 입에 문 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아마데아를 헬레니온은 약간 신기하게 관찰했다. 그녀는 혼자 심각해졌다가 다시 표정이 누그러졌다가, 다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잠깐이지만 서로 말이 없는 상황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아마데아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아마 누군가에게 이리 관찰당하는 경험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헬레니온은 그제야 제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무, 무례하다. 감히 나를 빤히 보다니.”
짐짓 엄한 말투를 썼으나 말끝이 떨려 역효과였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더 발갛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워낙 골똘히 생각하시던 터라 말을 붙이기 힘들더군요.”
그는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가를 최대한 끌어내리며 답했다. 이 이상 웃었다간 정말로 화를 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건 어떻게 하는 것이냐.”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마데아가 물었다. 그 모호한 질문에 헬레니온은 무슨 말인지 전의 대화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유추해냈다.
“······그 ‘노력’이라는 건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이냐.”
그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표정으로 내색은 안 했으나 상당히 놀랐다. 설마 그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다니.
‘알아가려는 자세부터 충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아직 나아져야 할 점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저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부터 들려주시겠습니까.”
무거운 주제이지만 반드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주제였다. 헬레니온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은 건지, 그럴 기회가 없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겐 무의식에 아녹스에 대한 강한 혐오가 깔려있음이 틀림없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그레이스가 아마 예민하게 감지해냈으리라. 둘이 충돌할 것도 어느 정도는 계산했다.
그리고 예상외로 아마데아도 개선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이제 그녀의 대답에 달렸다.
“나는······.”
한껏 풀이 죽은 모양새였다. 그가 그동안 관찰해온 바에 따르면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으므로 저절로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합리화를 시키며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디모······, 너희들은 악의 축이라고 배워왔다. 빛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할 배신자이며 이단자이니 그들의 말을 듣지도, 그들의 눈을 보지도, 그들의 몸에 닿지도 말라. 아우레티카에선 모두가 이 구절이 포함된 기도문을 외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 또한 이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은 채 살아왔어. 그러니까······.”
그에게도 낯선 구절은 아니었다. 그 또한 불과 십 몇 년 전만 해도 아침마다 외우던 기도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가 뱉는 단어들은 칼날처럼 그에게 상처를 남겼다.
“지금은 너희들을······ 마냥 나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조국에 버림받았어. 반대로 나를 구해준 너는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학살하던 디모네이니까.”
버림받았다는 부분에서는 무심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학살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는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너희를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겠지. 너희들에게 나는 단순한 학살자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나는······ 너희들을 평가할 수 없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상당히 사색을 한 듯 단단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대답 또한 나름 긍정적이었다. 그가 생각한 최악은 아예 그녀가 소통을 거부해버리는 사태였다. 그렇게 되었다면 유감스럽지만 이쪽도 최악의 수를 쓸 수 밖에는 없었으니까.
‘늘 우러름을 받으며 자랐다기에 안하무인일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는 머리가 돌아가는 타입인가.’
최대한 냉정하게 평가하는 척을 하고 있지만 내심 기뻐하고 있는 헬레니온이었다. 다만 그가 그런 마음을 단순한 ‘관심’이나 ‘빚 청산’ 정도로 여기고 있으니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기엔 멀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래. 그러니까 그레이스를 바꿔줄 수 없다고 했으니······.”
아마데아는 얘기를 하다 말고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까이 몸을 숙인 채 얼굴을 가까이 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감에 헬레니온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물리려 했으나 그녀가 더 빨랐다. 그녀는 그의 귓가에 손을 대며 작게 속삭였다.
“그럼 그레이스에 대해서라도 미리 알려주거라. 이왕이면 치명적인 약점 같은 것.”
귀에 살짝살짝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서, 조금씩 나는 달콤한 향에 어지러워서, 그는 잠시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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