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배경 로판에 고증은 꼭 필요할까?
로판의 배경은 보통 근대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다. 요즘이야 그래도 현대 배경이 약간씩은 나오지만 판타지스럽든, 가상시대물스럽든 우리가 '로판'하면 떠올리는 공주님 드레스와 반짝이는 무언가로 얼버무린 그 배경은 어쩔 수 없이 근대지 현대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때로는 그 자체가 지루하고 올드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개인적으론 껍데기는 유지시키더라도 고증을 과감히 무시하고 구조를 변형시켜 현대를 담았으면 하기에 이 부분에 대해 본격적으로 떠들...기 전에 우선 이것부터 확실히 해두자.
20세기부터를 현대라고 구분 짓는다. 20세기의 기간은 1901년 1월 1일부터 2000년 12월 31일까지고 한국의 경우엔 광복 이후를 현대로 본다. 적어줬으니 헷갈리면 다시 이 문단으로 돌아와라.
그럼 이번 주제는 경제학으로 접근해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왜냐, 누가 뭐래도 경제만큼 정치적인 게 없어서 그런다. 먹고 사는 건 다 돈이 필요한 일이고 이 돈의 금액이 왔다갔다하는 것만큼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게 없잖은가. 그리고 이렇게라도 먹여놔야 현대사의 흐름을 이해할 테니까 어렵지 않게 가보자.
작가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200년 이상 숨통이 붙어있던 요괴 비스무레한 무언가일 리가 없으니 다들 현대인이고 현대라서 가능한 발상이 자연스레 묻어나고 또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건 당연하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왜, 흔히 로판에서 주인공이 독립을 위해 돈을 열심히 모아서 은행에다가 맡기는 전개 있지 않은가? 실제 근대에선 불가능했다. 은행이 만인에게 열린 것 자체가 현대에서나 가능해진 얘기라 그렇다.
지금 이 문장을 보고 놀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다. 애초에 금융에 대한 교육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자산시장이 부동산 위주로만 구축된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탓에 금융 시스템에 대한 공부를 '부자가 되고 싶어서' 매우 편파적으로 한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게 당연하긴 하다.
자 그럼 아주 쉽게 접근해보자. 오늘날의 은행은 왜 모두에게 열려있을까? 민주주의 국가라서? 자본주의 사회라서? 신용화폐를 사용하고 있어서?
위에 든 예시는 다 맞는 소리다. 슬슬 말이 어려워지니 뭔 소린가 싶을 텐데, 일단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제국주의가 세계를 호령하고 있었고 이 제국주의는 식민지로부터 어마어마한 부를 강탈해왔기에 독점자본주의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로판에서 주인공이 부자가 되겠다며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어디와 무역을 하거나, 획기적인 사업 아이템으로 시장을 휩쓰는 뭐 그런 묘사들 있지 않은가. 실제 근대에서도 그런 모습이 있긴 했다. 그것도, 아주 야만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예전부터 몇 번이나 말해줬지만 초기 자본주의에서는 정부의 개입이랄 게 없었다. 말 그대로 자유방임 그 자체였는데 이게 무슨 소리냐. 보호와 규제란 개념이 아예 없단 소리다.
이 시기의 무역만 봐도 그렇다. 상대국에게 뭘 팔아서 그 돈으로 자국에서 팔 물건을 사오는 게 아니라, 대충 남의 땅에 침략해 들어가 식민지로 만들어서 저항하는 사람 다 죽이고 산 사람들은 끌고 와서 노예로 팔아치우고 원주민들이 죽어 비어버린 땅에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들어 생산해낸 원료를 대량으로 들여오던가(그 농장에서 일하는 건 노예가 된 원주민이던가, 원주민이 다 죽었으면 범죄자를 끌고 가서 일을 시켰다. 대표적인 국가로는 모두가 잘 알다시피, 영국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쪽수가 밀리니 함부로 침략했다간 고생하겠다 싶으면 마약도 뿌리고(아편 전쟁) 금융 시스템을 손봐서 결코 이득을 볼 수 없도록 만드는 등(이건 일제가 조선에다 한 방식이기도 하다.) 갖은 더러운 수를 동원해 경제적으로 복속시키는 게다.
이런 방식으로 식민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쫘아악 땡겨서 지멋대로 쓰니 과학도 당연히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기술도 발전하고, 규제도 집단적 노동권에 대한 인식도 없으니 노동자들 급여를 잘 챙겨줄 필요도 없고(12세 이하 아동에게 노동 시키지 말란 법이 나온 게 1901년이다.) 거대자본이 거대자본을 만들어내는, 지금도 매우 익숙한 금융의 속성이 아주 도드라지는 시기가 바로 근대란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잊으면 안 되는 게, 이렇듯 금융은 매우 약탈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국제금본위제가 막을 내리고 관리통화제로 넘어가면서 불환지폐가 주류가 되었고, 몇몇 나라들은 금본위제로 돌아가려다가 경제를 말아먹으면서 오늘날엔 관리통화제도가 전세계에 보급되어 있다. 불환지폐라고 하면 어? 싶을 텐데, '지폐'에 중점을 두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유럽과 중국은 본디 은본위제였고 영국과 그 식민지 쪽만 금본위제를 쓰다가 전세계로 퍼진 건데, 아무튼 대충 넘어가서 은행에 돈을 들고 가면 금으로 바꿔주는 화폐를 두고 '태환화폐'라고 하는데 알다시피 이런 가치 있는 금속은 매장량에 한계가 있기 마련 아니던가. 그러니 어느 순간 은행에서 바꿔줄 수 있는 귀금속의 양은 한계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느 날 은행이 '귀금속이 없어서 이거 못 바꿔주겠소.'라고 하면 어떤 경제적 재앙이 벌어날지 슬슬 감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실제 유럽에서 발생했다. 이 방면으로 유명한 게 존 로가 프랑스에서 일으킨 '미시시피 거품'이니 관심 있으면 한 번 찾아보길 권한다.
이렇게 통화발행으로 뜨거운 맛도 좀 보고 나니 경제에 국가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걸 사람들이 깨달았다. 그래서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유일하게 화폐를 발행하게 되었는데... 이 불환지폐를 다시 돌아보자. 금, 은 등으로 바꿔주던 화폐가 있었는데 이제 더는 그렇게 안 바꿔준다고 한다. 그럼 이 지폐의 가치를 어떻게 신용할 것인가? 그래서 정부만이 발행하는 거고,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가치가 있다고 국민 모두가 보증을 서는 셈이 되는 게다. 세금을 불환지폐로만 받으면 국민 모두를 그런 보증에 참여하게 만드는 거잖은가. 그래서 불환지폐의 다른 말이 신용화폐인 거고 이를 기점으로 은행의 공공성에 대해 관념을 가지게 된다.
프랑스 혁명이 터지면서 왕의 목을 날려버리기는 했어도 어디 사람 머릿속도 혁명적으로 업데이트 되던가. 17세기만 해도 '시민'이라 함은 도시에 사는 부르주아지만을 두고 하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노동자계급은 여전히 시민이 아니었다. 그러니 노동자 계급이 어떻게 은행을 이용하겠는가?
이래서 근대 배경임에도 어쩔 수 없이 현대인의 발상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라고 짚어주는 게다. 사실 뭘 어떻게 쓰든 현대인이라서 가능한 발상을 아예 제거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근대 배경으로 고증을 따따부따 따지느니 아예 판타지 요소를 살려서 현대 배경에 겉껍데기만 좀 갈아치우는 게 낫지 않나 싶은데... 뭐 이게 요즘 유행인 건 알고 있다. 영미권의 근대배경 소설을 오마쥬하는 건 그렇다 쳐도 딱히 고전 재해석으로 봐주기는 어렵기 때문에 썩 좋아하진 않는데...
아무튼 얘기를 돌려서, 노동자들이 시민 취급을 못 받았기 때문에 20세기 초에는 전세계적으로 노동운동이 퍼져나갔다. 독점자본주의의 경제적 찬탈이 극심했던 만큼 골수까지 뜯어먹을 식민지를 더 늘리고 싶어하는 건 어느 놈이나 똑같았는데 내 꺼다 아니다 내 꺼다 하면서 열강들끼리는 안 싸웠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전쟁도 많았고 사회에 불만이 누적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날 노동자들이 힘들다 못살겠다고 아무리 좋게 호소한다고 자본가가 오 그렇군요~ 하면서 고이 요구사항을 들어주던가? 그나마 개선된 부분들은 노동자들이 투쟁해서 쟁취해낸 결과물이었고 이 과정에서 '부르주아지 시민'만이 전유했던 시민적 권리를 만인이 평등하게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이 곧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기도 하는 게다.
요 부분은 특히 한국에서 중요하다. 소싯적에 학생운동, 노동운동 하던 사람들이 정치적 업적을 인정 받아 국회에 들어가고 어떤 분들은 민주화열사로 기리지 않는가. 이런 부분에 전혀 이해가 없이 매카시즘에 쩔어서 노동운동 이러면 무지성으로 '빨갱이! 종북좌파! 간첩!'라고 구는 양반들은 주로 윗세대고... 요즘은 몰라서 그런 거겠지만 '노동운동 같은 건 육체노동이나 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지 시험쳐서 붙은 화이트칼라랑 무관하지 않나.'라고 순진하게 생각하는 친구들이 제법 는 거 같아 떨떠름해지긴 한다. 일해서 밥 벌어 먹고 살면 다 노동자다. 불로소득으로 살 수 있어야 노동자가 아닌 거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누가 뭐래도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다. 혁명물이 반응이 떨어지는 이유도 그렇다. 정말 솔직히 말하건데, 혁명물에 구질구질할 수밖에 없는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혁명물 안의 어떤 이데올로기들은 이미 한참 전에 죽어서 더는 새롭게 느껴질 수가 없는데 이 부분까지 고려하는 작가를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현대에서 먹힐 혁명물이 나오려거든 SF가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굳이 19~20세기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혁명물을 전개하면 어떤 이데올로기가 승리할지, 그 이데올로기가 승리해도 어떤 부작용을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지도 잘 아는데 신선함을 느끼기 쉬울까? 특정 이데올로기가 보여주는 정의가 실제로 존재하길 바라게 될 수 있을까? 그래서 혁명물이 안 팔린다는 말에 붙은 분석들에 개인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있다.
로판에서 상업적 이유로 이런 노동운동에의 흐름이나 식민지의 독립운동 등을 담기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사실 그 배경으로 이런 부분이 빠져있으면 현대로 보기 어렵다. 그리고 삐끗 잘못했다간 한국인들의 더러운 길티플레져 중 하나인 '우리도 식민지 가졌던 강대국이었으면 좋았을 텐데~'가 지나치게 솔직하게 드러나기도 하니까 적당히 자제하자. 사실 이건 남성향 쪽이 더 그렇다. 가끔 눈에 띌 때마다 팬티도 안 입고 돌아다니는 걸 목도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리 자세히 알고 싶지 않긴 한데, 어쨌든.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근대 배경을 쓸 거면 노동운동 흐름을 넣으라거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꼭 다루라는 게 아니다. 지나가는 캐릭터 대사로라도 이런 일이 안 보이는 영역 안에서 진행 중임을 어필해야 '제국주의 열풍에 나도 한 몫 땡기고 싶었다'는 저열한 욕망으로 읽히지 않는단 소리다. 그런 걸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안 그래도 한국인들의 인종차별을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건만 글로벌 시대에 얻어맞을 짓은 피하란 얘기다. <에놀라 홈즈> 시리즈가 왜 서프러제트나 매치걸 스트라이크를 소재로 삼았겠는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아름답게 재현한 그 시대의 이미지를 재생하면 어쩔 수 없이 그 시대를 정상화하게 된다. 과거 어떤 시대의 모든 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고 명확히 선을 그어주는 게 이제는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는데 어쩌겠는가. 요즘도 쿨타임 차면 타국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비하, 인종차별로 한대씩 얻어맞기도 지겹잖은가.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국내 컨텐츠엔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이 거세되어 있어서 지나치게 친자본적이고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사랑하는 부를 기준으로 신분을 나누는 봉건사회로의 회귀를 낭만화하는 측면이 크다. 오늘날 기업들은 다시 과거처럼 시장을 독점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금융은 약탈적 본성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은행의 공공성을 강화하자며 기본금융 논의가 나오는 거고 금융의 불공평함 때문에 기본소득 정책을 다시금 논의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짚어준 거니, 당신이 원하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한 번은 생각해보길 바란다.
사족 1. 사실 웹소설 안에서 은행보다 더 눈에 띄는 부분은 아포칼립스물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장르에서 부동산 불패 신화가 나온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도 자주 나오지 않는가. '어디 땅을 샀는데 정부가 거기다 뭐 지을 거라서 보상금이 이만큼이나 나오더라! or 시세가 이만큼이나 폭등!'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사실 한국의 부동산은 굉장히 기형적인 형태다. 보통은 자산시장이 부동산 위주로만 구축되지 않고 어느 정도는 주식시장으로 나가는 법인데... 사실 이건 사람들이 금융을 잘 모르고, 한국의 금융 관련된 법들이 너무 강자에게 유리하게 짜여있는 것 때문에 그런 측면도 있긴 하다. 하지만 부동산은 결국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지 않으면 몇 군데 빼고는 전체적으로 가격이 떨어지게 되어있기 때문에, 시간이 충분히 지난 후에도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면 이런 부분이 '그때는 그랬지~'하고 시대 상황을 반영했다고 받아들여질 거다.
사족 2. 당신의 후원에 감사를 표한다.
사족 3. 아직은 확정된 게 아니긴한데 좀 바빠질지도 모르겠어서 약간 뜸해지더라도 양해 부탁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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