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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 죽은 시대
한 여자가 얼어붙은 땅을 걸었다.
하얗게 얼음으로 굳어 버린 눈은 여행자의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길을 지나갔을지 여자는 몰랐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길을 지나갈지도. 그리고 그 점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여행자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아무도 여자가 이 길을 지나간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이 휘청였다. 누군가의 바람처럼 세상이 무너질 징조는 아니었다. 여자는 자기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길 바랐다. 다행히도 입단속을 시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작금의 일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을 맹세하면서 여자는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문질렀다. 방한복의 두께는 충격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그 점이 여자는 조금 아쉬웠지만 불평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방한복의 존재 목적은 충격이 아닌 추위를 막는 것이었으니까. 모자한테 왜 발을 가리지 못하냐고 투덜대는 사람은 멍청이다.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여자는 잠시 이곳에서 길을 잃을 경우를 고민했다. 동서남북 어디를 보나 펼쳐지는 똑같은 풍경은 나그네의 방향 감각을 쉽게 상실시켰다. 날이 어두워지면 그 효과는 배로 커졌다. 여자는 자신이 안전한 장소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보다 눈 속에 파묻혀 수 세기 뒤에 발견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수백 년간 잠들어 있다가 눈을 떠서 미래를 사는 경험도 나름대로 재미있어 보였다. 하지만 여자는 인간이었으므로 그것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그러나 엉덩이의 욱신거림과 사방이 같은 눈밭의 지루함을 덜어 줄 만큼은 흥미로웠고 그 정도면 충분했다. 여자는 만족하며 몸을 일으켰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시 걸었다.
여자는 떠도는 사람이었다. 이름은 에린이었다. 하지만 여자를 진짜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몇 없었다. 나머지는 다른 호칭을 사용했다. 비코. 그리고 여자 또한 그 이름으로 불리는 편을 선호했다.
빈민과 고아 구제를 업으로 삼는 대륙 곳곳의 신전 부속 구휼원은 몇 가지 규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름을 여러 개 정해 두고 돌려 쓰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동명이인에게는 들어온 순서대로 숫자를 부여했다. 여자가 자란 구휼원에 에린은 다섯 명이었고 그중 여자는 네 번째였다. 다섯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 여자아이를 위한 이름이 세 개밖에 없는 어느 지방의 구휼원에는 같은 이름이 열댓이 넘는다고 했다.
참으로 불친절하고 무책임한 보호자들이었다. 갈 데 없는 어린애를 거둬 준 것은 물론 감사하지만, 원래 사람 마음이란 게 하나를 받으면 열을 바라게 되는 것 아니던가. 이름은 어떤 면에서는 사람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다른 말로는 운명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었다. 여자는 남들과 비슷비슷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전부 거기서 거기인 한 명의 '에린'으로 살다 죽기 싫었다.
그래서 여자가 스스로 붙인 이름은, 이제 그녀에게 끊임없는 여행을 요구하고 있었다. 비코는 제가 결코 어딘가에 붙어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그녀가 비코이기 때문이었다. 에린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비코는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감 정도는 그녀도 가지고 있었다. 끝없이 과거를 비난하며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인간은 최악이었다.
여자의 이름은 비코였다. 비코는 방랑자의 이름이었다. 방랑자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린이라고도 하는 비코는 이름대로 방랑자가 맞았다.
그러나 어떤 주장처럼 목적의 상실이 방랑의 필수 조건이라면 지금 그녀는 방랑자가 아니었다. 비코는 찾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다만 그것의 정확한 위치를 모를 뿐이었다.
그곳은 대륙의 최북단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추운 장소였으며 대륙 안쪽의 사람들이 자기 대륙으로 인정하지 않는 땅이었다. 어떠한 문명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수천 년간 그대로, 여러 소수 부족이 저들끼리 군락을 이루어 사는 북부는 야만 그 자체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가리켜 겨울에 빗대었다. 따스한 햇볕도 풍요로운 호수도 없어 영원히 문명을 잉태할 준비가 되지 않을 땅. 철저히 본능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당장의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원시의 시간.
세상에서 가장 겨울에 가까운 곳에서 비코는 마법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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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 영웅의 시대는 갔다. 그것은 너무 오래전이라 이제는 사실 여부조차 불분명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인간의 가슴을 뛰게 하는 모험들은 결코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던 혼란과 함께 저물었다.
마법은 바로 그 시대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마법이 죽었다고들 했다. 아주 옛날부터 내려오는 일종의 관용구였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누군가는 마법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음을 비유한 말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은 마법은 애초에 실존한 적이 없었으며, 단지 과거의 신화에 신비로움을 덧씌우기 위한 허상이라고 믿었다.
비코는 후자보다는 전자 쪽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신의 힘이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현상을 몇 번 목격한 경험 때문이었다. 실제로 카르타헤나를 여행하다가 만난 어떤 여신의 춤꾼에게는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이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마법이 존재하지 못할 까닭은 또 무엇인가.
물론 후자의 주장 또한 나름대로의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마법이 죽었다는 옛말이 말 그대로의 의미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것은 에린이라고도 불렸던 비코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그녀는 마법을 찾기로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동물이 음식을 섭취하고 배설을 하듯이, 찬 바람이 떨군 식물의 잎이 말라 비틀어져 썩어가듯이. 때로는 관측 불가능하지만 대체로 눈에 보이는 그것은 존재의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따라서 마법이 실존했다면 그 자국은 반드시 남았다. 이 결론에 다다르기는 쉬웠다. 그녀의 여행 경비를 지원한 후원자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가지의 가설을 더 제안했다. 마법의 흔적이 세상 어딘가에 묻었다면 그곳은 대륙의 북부이다.
이유는 기대보다 간단했다. 비코는 제 후원자를 가르쳤다는 세계 제일의 교육 시설이 그 명성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실권을 잡은 국가의 미래가 과연 말처럼 희망찰지도. 어떤 관점에서는 제국 제일의 권력자라고도 불릴 수 있는 여자가 주장했다. 북쪽 황야의 두 지배자는 각각 마녀와 마법사라고 불리니, 그들이 마법의 행방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건 지나친 억측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대는 어디부터 뒤져 볼 생각이었지?"
비코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반박하기에는 그녀는 실제로 어떠한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가능성 있는 곳도 몇 없지. 기껏해야 다크우드? 하지만 그쪽보다는 북부가 훨씬 나은 선택일걸."
다크우드는 제국의 동쪽 끝, 에프릴레트와의 국경선에 위치한 거대한 숲이었다. 일반적인 동물을 여럿 섞어 놓은 것마냥 괴상하게 생긴, 거기에 더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죄다 인간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마수를 주기적으로 토해 냈다.
하지만 비코는 제법 발이 빠른 모험가였으므로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장애물이 그뿐이었다면 비코는 망설임 없이 다크우드로 떠났을 터였다. 다크우드는 덜 추웠고 - 물론 북부에 비해서라는 뜻이다 - 가까웠으며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근처에 살았다. 여러모로 장점이 많은 선택지였다.
그러나 다크우드에는 이 모든 이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사람의 발길을 통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법이 죽었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 표현 또한 여러 방법으로 해석될 여지를 가졌다. 타국의 여행자 중에는 다크우드를 단지 다져진 길이 없어 사람이 오가기 어려운 곳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다행히도 그 소지를 명확히 알 길이 없는 마법과 달리 다크우드는 분명 실존하는 장소였기에, 해석 방식에 따른 학자들 간의 견해 차이는 생기지 않았다.
다크우드는 사람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는 숲이다. 학자들은 모든 사람이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다른 묘사를 고민했지만, 안타깝게도 더 나은 언어는 찾지 못했다. 다크우드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숲이다. 숲 초입을 지나친 여행자는, 어느 순간 같은 장소만 빙빙 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니 직접 조사해 볼 수도, 앞서 다녀온 이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탐사지로서는 최악의 장소였다.
후원자가 물었다.
"말고 다른 후보지가 더 있나?"
대답하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다.
"그냥 북부로 갈게요."
"그래."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모든 여행 물품이 마련되었다. 후원자의 추진력이 강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챙길 짐이 많지 않을 뿐인지 비코는 짧게 고민했다. 눈 덮인 북쪽의 황야에서는 말을 탈 수 없었고, 말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남은 이동 수단은 두 다리가 전부였기 때문에 가방은 혼자서 들고 이동할 수 있을 만큼 가벼워야 했다. 그러나 후원자의 손이 빠른 것도 맞는 말 같았다. 비코는 두 가지 이유를 동시에 긍정하면서 출발지로 나왔다.
콧잔등에 새하얀 털이 돋은 말이 앞마당에서 비코를 기다렸다. 몸통은 짙은 회색이었고 갈기는 새까맸다. 같은 색 털이 발목에도 두껍게 돋아 있었다. 제국의 북동부 아메세이즈 출신의 훌륭한 품종이었다. 비코는 반질반질 윤기가 도는 말의 목을 문지르며 설탕당근을 먹였다. 날이 추워 살짝 얼어 있었지만 말은 냉큼냉큼 잘 받아먹었다. 녀석의 긴장이 풀린 듯 보이자 그녀는 등자를 밟고 훌쩍 올라탔다. 낯선 탑승자에 말은 불쾌하게 푸르르거렸으나, 얻어먹은 것을 기억했는지 금세 잠잠해졌다.
해도 뜨지 않아 캄캄한 이른 새벽, 정원에 나온 사람은 그녀를 제외하고 둘이었다. 후원자와 그녀의 남편. 비코는 말등에 올라앉아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적게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많게는 한 뼘까지 차이가 나던 눈높이는 말안장 위에서 한참은 역전되었다.
두 사람이 배웅하는 여행의 끝은 좋지 않다. 비코는 옛말을 하나 떠올렸다가 고개를 털어 지워 버렸다. 마법과 함께 사장된 미신이다. 이제는 카르타헤나의 뒷골목에서나 간간히 떠도는 저주이니 제국인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각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비코는 궁금증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지금이 그것을 해소할 마지막 기회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후원자인 여자가 대꾸했다.
"얼마든지."
"제 꿈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마법이 사라진 시대에서, 오래전에 죽은 것을 찾겠다는 목표가 얼마나 어리석게 들리는지, 예쁜 것만 보고 자라 머릿속에 꽃밭만 들어찬 어린애처럼 보이는지 비코는 잘 알았다. 보물을 찾아 무지개 끝으로 향한 어느 모험가의 동화를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한 이가 다름아닌 그녀였기 때문에.
남자가 대답했다.
"이것은 너와 우리 사이의 약속이야. 네 소망을 평가할 권리는 계약에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감사해요."
"네 정당한 요구대로 했을 뿐이야."
"감사해요."
비코가 거듭 말했다. 그렇게 해야 전해질 진심이었다.
무지개 끝으로 향한 모험가는 그곳에서 결국 무엇을 발견했더라.
허무맹랑한 꿈을 꾸는 여자를 태운 말이 출발했다. 목적지는 제국의 북쪽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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