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2)
016. 살아 있지 않은 시체라도?
욕실에 들어선 이레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자 거울과 눈이 마주쳤다. 채 붙잡아 두지 못한 매혹의 힘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이런.
이레시아는 잠시 눈을 감으며 그것을 갈무리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까보다 확연히 줄어든 것이 보였지만, 아지랑이처럼 피어나오는 것은 어쩌질 못했다.
벌써부터 이러면 곤란한데...
"... 배고파."
그러나 참지 못하고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게 느껴졌다. 입안이 자꾸만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아, 그런가."
어제 밤 음식을 토해내서 느끼는 허기가 아니였다. 원하는 것은 인간의 식사가 아니었으니까.
이레시아는 지금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가 굶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냈다.
쾌락이였다.
욕정이였다.
그녀 피가 요구했다. 잠자리를 가지라고. 정기를 먹고 싶다고.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머릿속이 헐떡거렸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어 이레시아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며 물줄기를 틀었다.
이른 아침인지라 식사는 간단하게 문 앞으로 전달되어 방 안에 차려졌다. 이레시아가 나왔을 땐 이미 어디서 난 건지 새로운 식탁이 한 쪽에 놓여있었다.
식탁의 행방을 물어볼까 싶었지만, 어련히 그가 알아서 잘 설명했을까 싶어 입을 닫았다. 식사는 생각보다 조용히 이어졌다. 분명 배가 고팠는데 어쩐지 음식을 보는 순간 식욕이 떨어져 그녀는 괜스레 수프만 뒤적였다.
"마님. 왜 이렇게 못 먹어?"
히아센이 조용히 눈치를 보며 고기 한 점을 건넸다.
"그러게. 아침이어서 그런가..."
건내 받은 고기를 억지로 입에 넣은 이레시아는 결국 스푼을 내려놓고 커피잔을 기울였다. 아까보다는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아 옆으로 치워뒀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이 식사 하는 내내 서류 넘어가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류를 들여다보던 이레시아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재밌네."
새로 나온 고어 소설인가? 서류를 내려 놓은 이레시아의 눈이 재미지다는 듯 웃었다.
"...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야."
히아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소설 속 이야기였으면 싶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 도시에서도 현자의 돌을 만들기 위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는 말인가?"
이레시아가 다시 커피잔을 기울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맥락이 비슷해."
히아센의 말대로 비슷하게 사건이 흘러가고 있긴 했다. 외지인인 '사제'가 현자의 돌에 대한 소문을 흘리고, 사람들은 광산으로 몰려들어 실종되었으니까.
그럼 메두사는 뭐지? 현자의 돌로 인한 부산물인가? 아니면 광산 안에 오버(Over)와 연결된 루프(Loop)가 있는 걸 수도 있었다.
후자면 일이 복잡해지는데.
"역시... 직접 들어가 봐야 아나."
광산 안을 살펴보는 게 가장 빠르고 정확한 문제 해결 방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메두사의 눈인데...
이레시아가 늑대에게 시선을 던지며 생각에 빠졌다.
"... 당신이 돌이 돼버리면 난 어떻게 되는 거야?"
"돌이 된다고 죽진 않지."
채식주의 늑대가 높낮이 없이 대답했다. 그가 죽지 않는 이상 족쇄의 주술은 여전히 남아 있을 거란 뜻이었다.
"아쉽게 됐네..."
진심으로 아쉬워 하는 말투였다. 결국 해결책 없이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이레시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밖의 사람이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이는 프리실라였다. 히아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이레시아만큼은 아니지만 엄청 미인이네.
아니, 원래는 넋을 잃고 감상에 빠질만한 미모인데 더 어마어마한 미인이 곁에 있다 보니 무뎌진 것일 수도 있었다. 확실히 이레시아의 외모가 말이 안되는 수준이긴 하지.
"무슨 일이지, 프리실라?"
"아... 저기..."
"마법사 언니!"
프리실라가 머뭇거리는 데 허리춤에서 불쑥 아이린이 고개를 내밀었다.
"... 뭐?"
히아센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순간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아이린은 함박웃음을 지은 채 이레시아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나 프리실라 언니한테 허락 맡았어요! 할아버지를 찾아주시는 대신에 동화책 읽어주는 거!"
이레시아는 눈매를 슬쩍 구기며 가까이 다가온 아이린의 말캉한 볼을 잡아 늘였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한 거 같은데 분명?"
"으아아아... 즐므테써여, 이레니이임."
붉어진 볼을 부여잡은 아이린이 칭얼거리며 호칭을 바꾸자 그제서야 이레시아가 손을 뗐다. 히잉. 아이린이 풀이 죽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지?"
이레시아가 다시 바싹 얼어있는 프리실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프리실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고뇌에 휩싸인 표정 조차 처연하게 느껴졌다.
"... 처음부터 광산을 조사하러 오신 거라고 하셨죠?"
"그랬지."
"광산 안에는 사람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괴물이 있어요."
"그 또한 알고 있어."
"... 알고 계시면서도 광산으로 들어가실 작정이시군요."
"그래."
프리실라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싶어 이레시아는 차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괴물을 보고도 돌이 되지 않을 방법은... 찾으셨나요?"
아쉽게도 그것은 아직이었다. 이레시아는 말없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프리실라는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카일..."
프리실라의 입에서 그녀를 위협하던 남자의 이름이 뱉어지자 이레시아의 눈매가 좁아졌다.
여기서 그 남자의 이름이 왜...
"그 남자가 괴물을 보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온 사람이에요. 분명... 뭔가 몸을 지킬만한 희귀한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을 거예요."
"희귀한 아티펙트?"
아. 왜 진작에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 도시는 아티펙트가 넘쳐나는 곳인 것을.
그렇다면 메두사의 능력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희귀 아티펙트 또한 존재할 법도 했다. 그런데 그 아티펙트가 뭔지 알고 구한다... 발에 차이는 돌멩이 수 만큼이나 아티펙트가 즐비한 이 도시에서.
그럼 역시 방법은 하나 뿐인가?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히아."
"응?"
방금 들었지? 이레시아가 그를 보며 말갛게 웃음 지었다. 아름다운 미소 뒤에 숨어있는 소악마의 얼굴에,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벗겨와. 모조리."
찾을 시간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이에게 친절하게 잠깐 빌리고 돌려주는 수 밖에. 멍청하게 입을 벌린 히아센의 손에서 포크가 떨어졌다.
"... 전부?"
"전부."
속옷 한장까지.
확인 사살을 하듯 이레시아가 덧붙였다. 우락부락한 남자의 벗은 몸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히아센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소, 속옷은 놔두자. 어느 미친 놈이 아티펙트를 속옷으로 만들겠어? 그리고 만약 아티펙트가 진짜 속옷이면 저 자식도 죽어도 입기 싫을걸?"
히아센의 말에 순간 샐러드를 찍어누르던 늑대의 포크가 움찔 떨렸다. 싫긴 싫은 모양이구나.
어딘가 굳어진 표정을 한 늑대를 보며 이레시아가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러하니 좀도둑 역할은 히아센이 맡기로 하고...
붉은 눈이 다시 프리실라를 향했다.
"그래서? 정보를 알려주는 대신, 나는 너희 조부를 찾아주면 되는 건가?"
프리실라는 말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골치 아픈 문제에 답을 제시해준 것은 고마운 일인데, 확실히 해둬야 할 일은 확실하게 해야 했다. 이레시아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살아 있지 않은 시체라도?"
아이린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프리실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미 죽었을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는 모양인 건가?
하긴 광산에서 실종된 지 두 달째 소식이 없는데,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철없는 어린 동생은 조부가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니, 말 없이 지켜보는 입장으로써는 속이 타들어 갈 일 일 테니.
가엾은 여자.
이레시아는 식어가는 커피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만일 히아센이 아티펙트를 손에 넣는다면, 그 길로 광산으로 가 메두사를 섬멸하고 혹여나 있을 실종자를 찾으면 끝나는 일인가?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루프(Loop)로 인해 다시 메두사가 나타나게 된다면? 게다가 근본적인 문제인 현자의 돌에 대한 소문은 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메두사와 현자의 돌.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아이린. 로비에 내려가서 커피 좀 가져와줄래?"
프리실라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아이린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눈치 좋게 아이를 내보냈다. 그래. 이제 진짜 어른들의 이야기를 해야지.
이레시아는 프리실라를 향해 눈짓으로 제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자리에 앉은 프리실라는 어깨를 빳빳하게 굳힌 채 식탁만 내려다보았다. 이레시아는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맛이 입안을 고여있다가 목뒤로 넘어갔다.
이레시아는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카일이라는 남자와 당신. 무슨 관계인 거지?"
그저 약혼자를 잃는 여자를 괴롭히는 건달이라고 하기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더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 괴롭힐 것처럼 구는걸 보면.
"보아하니 치정은 아닌 것 같고."
"... 카일은 죽은 제 약혼자인 린드비오르의 친구였어요. 그리고..."
제게 몰래 구애를 하던 남자였어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프리실라가 고개를 숙였다.
"친구의 약혼녀에게 구애를 했다고?"
미친 놈인가?
히아센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붉은 눈은 여전히 프리실라를 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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