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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신의 딸
따뜻한 나라의 꿈을 꿨다.
그녀가 꾸는 대부분의 꿈은 현실에 실존했던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많은 것이 어린 시절의 신전 부속 구휼원 생활을 바탕으로 했다. 쥐가 파먹은 이불과 옷가지, 늘 부족했던 먹을거리, 겨울에도 손을 불어 가며 찬물에 빨래를 했던 나날.
그러나 이 꿈을 만들어낸 경험을 기억하는 데에는 그리 먼 과거까지 갈 필요가 없다.
정확히 세 달 전이었다. 비코는 대륙 남쪽 카르타헤나에 있었다.
후원자의 부탁으로 웬 너댓 살 먹은 여자아이를 가져다 놓는 일이었다. 아이는 그 나이대치고도 매우 순했기 때문에 이동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말수도 적고 웃지도 않아, 반응을 포착하는 데에 시각과 청각이 모두 필요함을 제외하면 썩 괜찮은 동행자였다. 때문에 그녀의 카르타헤나행(行)은 의뢰라기보다는 여행에 가까웠다.
즐거운 경험이었다. 경비(經費)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빵빵한 뒷배란 역시 좋은 것이었다. 남의 돈을 써대기보다 또 즐거운 일이 없다.
카르타헤나의 기델타. 이름난 유흥의 거리답게 밤이면 길거리에 등이 켜졌고, 먹을거리를 파는 포장마차가 빽빽히 들어섰다. 비코는 온갖 특산품을 먹고 마시며 돌아다녔다. 이국의 음식은 늘 그렇듯 매력적이었다. 덥고 습한 날씨에서 음식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발달했다는 강한 향신료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아이를 도착지에 내려 주고 비코는 근처 야시장에 가 여러 종류를 샀다. 그중 매콤한 꽃향기가 나는 것은 후원자에게도 선물했다. 도전 정신이 투철한 저택의 요리사가 매우 만족해해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남은 일부는 소금과 함께 여행 가방에도-
입술에 닿는 뜨거운 온기에 비코는 번쩍 눈을 떴다.
숟가락을 들고 있던 사람이 깜짝 놀라 손을 놓쳤다. 하얀 숟가락과 그 안의 내용물이 비코의 얼굴에 그대로 떨어졌다.
"미안!"
눈과 귀로 쏟아지는 정보량이 하도 많아 비코에게는 불쾌해할 여유가 없었다. 비코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를 닦았다. 손가락을 슬쩍 입에 넣어 보니 그것은 수프였다. 추운 지방이라 그런지 육류와 지방을 아낌없이 넣은 맛이 나는, 그래서 카르타헤나의 매콤달콤한 조미료를 생각나게 하는…. 아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지. 비코는 손등에 묻은 음식물을 마저 핥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뭐라고?"
가장 먼저 이상함을 느낀 지점은 여기였다. 그녀의 이부자리 곁에 앉은, 머리를 짧게 친 데다 옷도 펑퍼짐하게 입어 성별조차 불분명한 젊은이는 비코가 알지 못하는 언어를 했다. 그러나 비코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그와 같은 말로 말할 수도 있었다.
배우지 않아도 외국어를 말하는 기이한 능력 같은 건 비코에게 없다. 바로 얼마 전의 여행에서만 해도, 카르타헤나 어라고는 간단한 인삿말밖에 할 줄 몰라 후원자가 지원한 통역원에게 의지해야 했다.
"미안해."
상대가 거듭 말했다.
"얼굴이 데이지는…. 않은 것 같네."
그 와중 목소리는 또 가늘고 여리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일까, 아니면 소녀일까. 그는 제 또래 정도로 보였는데, 웬만한 소년은 이미 사내 목소리를 낼 나이였으므로 비코는 상대가 여자라고 대충 결론을 지었다.
하여튼, 그 성별이 불확실하나 소녀일 가능성이 높은 이는 숟가락을 주워 그릇에 담갔다. 크게 한 숟갈을 떠서 들어올렸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비코를 향해 물었다.
"네가 먹을래?"
"…이리 줘."
썩 맛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배를 채울 수는 있었다. 한번 음식 맛을 본 위장은 더 많은 양을 요구했다. 비코는 수프 그릇을 받아들어 천천히 입에 떠넣었다. 아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릇은 돌을, 숟가락은 뼈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비코는 수저의 부드러운 손잡이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마감 처리가 믿을 수 없이 매끄럽다. 돌아갈 때 이 기술을 좀 배워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업거리로 쓸만하리라. 그렇지 않더라도 잔기술은 많이 배워 둘수록 좋다.
비코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소녀는 곁에 앉아 그릇이 비워지는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한번 인식하고 나니 시선이 불편해져서, 비코는 먹는 속도를 살짝 줄였다. 허기도 참을 수 있을 정도로는 가셨다.
"입에는 맞아?"
"…먹을 만해."
국물은 딱 좋게 뜨끈했지만 기름이 많았고, 계속 먹다 보면 질리는 맛이었다. 비코는 소금과 함께 들어 있을 향신료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가방에서 좀 꺼내 달라 하려다가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어 말았다.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배고픔을 양념 삼아 식사를 마쳤다.
그러고는 소녀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듯 뜯어보았다.
조금 실례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식사하면서 받은 부담감을 퉁치는 셈 쳤다.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는 눈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상대의 이목구비를 살피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눈보다 큰 영향을 받는 부위가 있다. 일반적으로 - 그러니까, 대머리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 얼굴에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머리카락이 그것이다.
비코는 사람을 볼 때 이목구비부터 먼저 살피는 편이었다. 그래서 얼굴을 잘 기억하기도 했다. 얼굴을 잘 외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녀는 평생 이상하게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방금, 비코는 전신에서 얼굴이 아닌 다른 부위가 먼저 보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최초의 경험이었다.
소녀의 머리색은 그처럼 강렬했다.
아니, 강렬하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를 보고 그녀와 같은 인상을 받을 이는 세상에 거의 없을 것 같으니. 그보다는 큰 의미를 갖는다고 표현하는 편이 낫겠다.
보통의 사내아이보다도 짧게 친 소녀의 머리카락은 거무스름한 파랑, 아니면 푸르스름한 검정. 그러니까 동트기 전 새벽같이 어두운 하늘의 색깔이었다. 비코는 그와 같은 색을 지닌 사람을 알았다. 대륙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빛이라, 꼭 그를 가리키는 대명사와 같이 자리잡았다.
파랑, 그러나 그 이름으로 부르기엔 짙고 그렇다고 검정이라 하기에는 밝은, 마치 한밤중의 하늘을 닮아 미드나잇 블루라고 부르는.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아니야. 미안."
비코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지만, 그럼에도 흘끔흘끔 그쪽을 쳐다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바쟈 스노의 색깔이었다.
"더 먹을래?"
"아냐, 충분해."
대답하면서 비코는 뒤늦게 소녀의 눈동자를 보았다. 올라가는 시선 끝에는 약간의 기대감을 담았다. 그러나 소녀의 홍채는 예상하던 금빛이 아닌 부드러운 파랑이었다.
비코는 고개를 내리고 숟가락을 마저 빨았다. 낙담을 감추려면 다른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다행히 소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난 이소브 곤이야."
하고 손이 내밀어졌다. 비코는 잠시 머뭇거리다 제 것을 들어올렸다. 끈적거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왼손잡이고, 따라서 음식물이 묻었던 손도 왼손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악수에 사용되는 손은 오른손이다.
"이소브."
힘주어 잡으며 비코가 되풀이했다.
"반가워."
"아니야."
소녀가 손을 놓았다.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어. 그냥 곤이라고 불러."
에린이라고도 불리는 비코는 한때 눈치로 빌어먹고 살던 사람이다. 그 경험으로, 성이 이름 앞에 붙는 것이 여기 풍습이라는 결론은 쉽게 나왔다.
"좋아. 곤."
비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비에트였나 레시브였나, 하여튼 대륙 어느 나라에도 성씨를 이름 앞에 붙이는 가문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인사하는 게 아니야."
특유의 뚝뚝 끊기는 억양으로 곤이 정정했다. 참 또박또박 곱게도 발음되는 언어였다. 그럼 악수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비코가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곤은 멍하니 허공에 뜬 손등에 제 것을 부딪혔다.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게도 새빨간 뺨으로 그녀가 씩 웃었다.
"이렇게 하는 거지."
"…고마워. 난 비코야."
비코는 곤이 가리킨 수프 그릇을 돌려주었다. 곤은 식기를 쟁반 위에 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코? 특이한 이름이군."
제 이름을 '비코'가 아니라 '비 코' 정도로 이해했다는 것 정도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그냥 비코. 성 같은 건 없어."
"그래?"
곤이 입술을 씰룩였다. 비코는 다시 한번 손을 들어올렸다. 두 손등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반가워, 비코."
똑같이 이름을 불러 줄까도 싶었지만, 비코는 짧게 고개를 끄덕임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
.
길을 잃은 신의 딸은 이곳 북쪽에 마법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마법?"
잘못 들었나 싶어 실라일란이 되물었다.
"예. 마법이요."
이제베가 대답했다. 어제 누가 사냥에 실패했다네요, 따위의 일상을 말하는 듯 태연한 어조였다. 실라일란은 쯧, 혀를 찼다. 위아래로만 길쭉한 체형과 더불어 실라일란이 못마땅해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폭풍이 불면 바람에 휩쓸리고, 눈이 쌓이면 털어낸다. 주위의 환경에 반응하는 것이 생명체의 당연한 본능이건만, 이 별지기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꼭 얼어붙은 호수 같다고, 아들을 보며 실라일란은 종종 생각했다. 아니면 마법사의 절벽 아래, 위대한 글자가 잠든 바위를 닮았다. 어떠한 충격이 가해져도 흔들리지 않고, 억겁을 버티며 제 자리를 지키는 위대한 비석.
"너는 꼭 그렇게 반응하는구나."
이제베는 어깨를 으쓱했다.
실라일란은 조금 기다렸지만, 이제베는 더 할 말이 없어 보였다. 반면 그녀는 궁금한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결국 대화를 이어가는 건 실라일란의 몫이었다.
"마법은 무슨 일로?"
"그거야 모르죠."
별의 일이 아니면 대충대충 넘겨 버리는 이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하다못해 대답이 그건 물어보지 않아 아직 모르겠습니다, 정도만 되어도 예뻐했을 터다. 실라일란은 아들의 머리를 한 대 쥐어갈기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마을의 별지기만 아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으련만.
"하지만 그것은 죽었다."
"그렇지요."
어머니의 끓는 속을 알기나 하는지 이제베는 여전히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마법은 죽었어요.
"마법사와 마녀님이 이 눈밭에 첫발을 디디시기도 전의 일이지요."
아들에게서는 도저히 대화를 이어나갈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실라일란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제베가 제 볼일을 보러 별터나 오두막으로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말 안 듣는 아들은 이번에도 어머니의 바람을 충족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른 잠깐의 침묵이 실라일란은 그렇게도 견디기 힘들었다. 역시 먼저 자리를 떠야 고민하던 찰나에, 마침내 입을 연 이제베의 거친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우리는 그 소녀가 목적을 달성하게 도와야 합니다."
이제베는 노을 지는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실라일란도 습관적으로 아들의 시선을 쫓았다. 하지만 아직 별이 채워지지 않은 천장을 보며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까지는 읽을 수 없었다.
"마법사님이 별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요."
실라일란은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이냐! 죽은 마법을 이제 와서 무슨 수로 되돌리겠느냐?"
"적어도 존재의 흔적은 찾게 해야지요."
"어떻게?"
바람이 불었다. 실라일란은 열어 두었던 맨 위의 단추를 잠갔으나, 이제베는 앞섶이 활짝 열린 채로 그냥 두었다. 바람이 모피를 파고들면서, 여밈끈에 달린 열석이 짤랑짤랑 울었다.
이제베가 말했다.
"마을 집회에 그녀도 데려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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