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티나의 악녀 (3)

003. 무슨 상상을 했대?

의뢰장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출 허가가 떨어졌다.

'티파의 영주가 어지간히 재촉한 모양이네.'

덕분에 이레시아는 오랜만에 '플라티나'의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플라티나'의 로비는 다양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각각의 영토마다 문화와 법, 인종, 하물며 흐르는 시간까지도 모두 달랐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2년 전부터 이곳 '플라티나'의 유명 인사 중 한명이었다. '플라티나'에 그녀를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괴이라면 닥치는 대로 사냥하기로 유명한 이곳에서 이레시아의 존재는 꽤나 진귀한 것이었다.

그녀의 귀에 저들끼리 속삭거리는 대화가 실타래처럼 뭉쳐서 윙윙거렸다.

"확실히... 예쁘긴 굉장히 예쁘군."

누구 것인지도 모를 목소리가 삐죽거리며 들렸다. 로비 안의 눈들이 너도나도 그녀를 향해 떨어졌다.

드레스 위로도 느낄 수 있는 기품 있고, 맵시 있는 몸매에 칠흑같이 긴 머리카락.

아름다운 외모와 야하기 그지없는 눈물점 두 개, 나른하고 묘한 분위기를 흘리는 여자.

무엇보다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욕망을 부추기게 하는 붉은 서큐버스의 눈.

이레시아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들을 무시하며 눈을 돌렸다. 그녀의 붉은 눈과 마주칠 때마다 다들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어린 아이들은 자지러지게 놀라며 어디론가 도망가버렸다.

'... 초식동물 사이에 떨어진 육식동물 따위가 된 기분이네.'

시덥잖은 감상평에 잠겨 있던 그때, 테이블 위로 누군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표정이 안 좋네, 마님?"

밝은 갈색 머리칼에 얇쌍한 쌍꺼풀을 가진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날카롭게 곤두세워졌던 신경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안녕 히아센."

히아센 반 루베르토.

그는 플라티나의 간부임에도 그녀를 보통 인간들과 똑같이 대하는 좀 특이한... 아니,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디 아파, 마님?"

걱정 어린 말투에 이레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해가 떠 있어서 그런지 피곤하네."

"왜 혼자 내려와 있어? 그 자식은?"

그녀에게 쏠리는 시선들이 내심 불편한지 히아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늑대씨는 워프 수식을 검토 받으러 갔어. 의뢰 때문에 나가봐야 되거든."

각각의 영토를 이어주는 워프는 그 값에 맞는 수식대로 마력을 주입해야 하기 때문에 확인하러 간 거겠지.

"아, 들었어. 티파의 도시에서 의뢰가 왔다고..."

메두사라며. 히아센이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덧붙였다.

"소식 한번 빠르네."

"이래 봬도 플라티나의 정보통이잖아 내가."

히아센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며 우쭐거렸다. 그 모습이 밉지 않아 그녀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얹어졌다.

"히아센, 혹시 보석 좋아해?"

"보석? 그야 당연히..."

"하나 사줄까?"

이레시아가 한쪽 턱을 괴며 히아센을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무방비하게 그 얼굴을 바라본 히아센이 놀란 눈으로 숨을 멈췄다.

"히아?"

이레시아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제서야 히아센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 어? 어... 갑자기... 갑자기 왠 보석?"

"아가한테 보석을 사준다고 했더니 늑대씨가 그러더라고, 버릇 나빠진다고... 히아센한테도 같은 말을 할지 궁금해졌어."

"허어..."

히아센은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얼굴을 본 이레시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바보 같아 그 표정."

"아, 아니... 뭐 그냥. 너무 뜬금없어서..."

새삼.

이런 뜬금없는 소리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레시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찻잔을 기울였다. 히아센은 바짝 마른 목뒤로 침을 삼키며 애써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위험할뻔했네. 웃는 얼굴에 하마터면 그대로 멍청하게 쳐다만 볼 뻔했다.

"흠흠, 괜찮아.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그래? 아쉽게 됐네."

"아쉽긴 뭐가 아쉽다는 거지?"

불쑥.

늑대의 목소리가 둘 사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외출복을 차려입은 쥰과 오늘도 여전히 검은 사제복을 입은 늑대가 테이블로 다가오고 있었다.

참 빨리도 온다. 히아센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었다.

"넌 레이디를 혼자 두고 왜 이제 와?"

"레이디? 누가 레이디란 거지?"

늑대는 히아센의 잔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이레시아의 손에 들린 잔을 뺏어 들었다.

"커피는 이제 그만 마셔."

"야! 그거 내가 타다 준건데!"

히아센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러나 늑대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이미 아침에도 두 잔이나 마셨어."

"향이 좋은걸."

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늑대의 목을 단정히 가린 흰색 로만칼라를 만지작거렸다.

"또 잠 안 온다고 할 거 아닌가?"

"당신이 재워주면 되잖아."

조금 격한 것도 난 좋은데.

헉.

히아센이 황급히 쥰의 귀를 막았다. 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히아센을 올려다봤다.

그러던지 말든지 둘은 아랑곳 하지 않고 실랑이를 이어갔다.

"또 헛소리..."

"왜? 나랑 자기 싫어?"

이레시아가 물끄러미 늑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장난기 가득한 붉은 눈에 늑대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계속 저 말장난을 받아주면 끝이 없다는 건 이미 질리도록 당해봐서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수위를 넘을 듯 말듯 한 말장난을 계속했다.

덕분에 그녀를 향한 시선이 아까보다 배는 더 쏠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화려한 외모 때문에 눈에 띄는 데, 사람을 홀리는 묘한 붉은 눈까지 달고 있으니 도저히 눈에 안 띌 수가 없다.

"내가 침대에선 당신 이름도 불러 주잖아."

심지어 아슬아슬한 음담패설까지.

술집 안의 시선이 모조리 자신에게 쏠려있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저 여자... 소문대로 어마어마하네."

"아아. 말도 안 되지..."

이레시아와 늑대의 시선에서 작은 스파크가 일어나는 때, 구석진 테이블에서 수군거리는 대화가 흘러나왔다. 그 중 한명은 목뒤로 꿀꺽 침을 삼켰다. 속으로는 탄식이 쏟아졌다. 저 붉은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다니.

배꼽 아래가 욱신거렸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머릿속으로는 온갖 유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 같았으면..."

만일... 만일 제가 늑대였다면, 저 얼굴을 천천히 감상하고, 감상하다가 그 입술 위에 입을 맞춰 숨결을 빼앗을 텐데. 그래 분명 부드럽고 달큰한 맛이 날 거야. 그 달큰한 맛이 질리도록 입술 맛을 본 뒤에는 그대로 밀어 넘어트려서 희고 가는 손목에 입을 가져다 대겠지.

손가락 하나 하나 입 안에서 굴려본 뒤에는 천천히 팔을 따라 올라갈 거야. 무슨 맛이 날까. 혀 끝으로 천천히 팔을 타고 올라가며 맛을 보다가 쇄골을 깨물면...

"어이, 이봐, 이봐!"

멍하니 혼자만의 상상에 빠진 남자의 다리를 일행이 다급히 두드렸다.

"어어...?!"

정신을 차린 남자는 뚫어져라 저를 보고 있는 늑대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급하게 생맥주를 들이키더니 사례에 걸린 듯 콜록거리며 기침을 쏟았다.

카운터에서 식기를 정리하던 백발의 집사가 뒤를 돌아봤다.

"물 한 잔 드릴까요?"

"코... 콜록! 콜록! 고... 고마워요 가브리엘!"

시끌벅적한 로비에 정신없는 기침 소리까지 더해졌다. 남자를 예의주시하는 늑대의 눈매가 짙어졌다.

"왜?"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눈알을 파내어버릴 것 같은 늑대의 목줄을 이레시아가 모르는 척 질문을 던지며 능숙하게 잡아챘다. 숨통을 조이는 로만칼라는 언제가 되더라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무슨 상상을 했대?"

아무렇지 않게 웃는 낯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네가 더 잘 알잖아."

"자기가 말해봐."

그녀가 다시 늑대를 농담 판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러자 혹시라도 늑대가 달려들면 뜯어말릴 생각으로 엉거주춤하게 일어나있던 사람들이 다시 자리에 앉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건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히아센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친, 적당히 좀 해 이것들아!'

히아센은 어쩐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이, 이제 그만 출발해야 되지 않을까?!"

결국 멈출 줄 모르는 이레시아의 말장난을 히아센이 막아섰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히아센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진땀을 훔쳤다.

"아. 잠깐."

그러나 역시나 그녀는 히아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워프가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을 쳐다보며 어쩐지 소악마같이 웃고 있었으니까.

"인사하고 갈 상대가 생각나서."

"그, 그쪽은 안돼!"

소란 좀 그만 일으켜 제발!!

미쳐 잡을 새도 없이 가버린 이레시아를 보고는 히아센은 아까보다 배는 격한 아우성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좀 말려!"

"말린다고 들을 여자인가?"

늑대의 눈이 포커판으로 향하는 이레시아를 뒤쫓았다.

"그래도 좀!"

"저 여자 심기 건드렸다가 다음엔 뭐로 맞을 줄 알고."

"맞아? 뭘? 니가?"

"저번엔 웬 채찍으로 얻어 맞았어."

채찍? 채찍이라는 말에 주변이 한층 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히아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없는 기분이 돼서 그 자리에서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

포커판이 한창인 테이블에는 이리저리 카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포커 뒤로 그녀를 힐끔거리며 침을 삼키는 시선들이 숨어있었다.

오늘은 이레시아가 무슨 패악을 부리려는 건지 노심초사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기대에 기꺼이 부흥해줄 생각이었다.

이레시아는 그 중 와인색 머리의 여자에게 다가가 감싸 듯 등 뒤에서 테이블을 짚었다.

"루나 포커네."

루나 포커는 캐리비안 스터드 포커와 같이 5장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포커로, 일반 포커와 다른 점이라면 마음에 안 드는 패를 바꿀 수 있는 포커였다.

이레시아는 여자가 들고 있는 포커 패를 내려다보며 인사했다.

"안녕. 종업원씨?"

이레시아의 말 한마디에 로비는 순식간에 싸한 공기가 흘렀다.

그녀의 인사에 여자의 손에 들린 카드 끝이 구겨지는 게 보였다.

"패가 나쁘지 않네."

"저리 좀 꺼지지, 괴물."

서빙용 직원 앞치마를 걸친 여자는 짜증 어린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헉.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일촉즉발인 것 마냥 눈동자들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여자가 가진 칩을 멋대로 추가 베팅하고 카드 한장을 교체했다. 카드 너머로 희게 질린 얼굴들이 이레시아와 여자를 번갈아 봤다.

게임판에 멋대로 끼어드는 건 루시안이 가장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인걸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새로 교체한 카드를 패에 추가해 넣었다.

눈깜짝할 새 순서대로 A, 2, 3, 4, 5 카드가 여자의 손에 들어왔다.

"스트레이트."

이레시아가 여자에게만 들리도록 귓가에 속삭였다. 여자의 손은 이미 카드 패를 엉망으로 구기며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 패 정도면 인사는 받아주는 게 어때?"

이레시아가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여자의 얼굴이 감출 수 없는 혐오감으로 순식간에 물들었다.

"나 오늘 나가는데."

"........"

"오는 길에 향료를 사 올 건데, 자기 것도 사 올까 루시?"

팍!

여자의 손에 들려있던 포커패가 결국 그녀를 향해 내던져졌다. 이레시아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자신을 향해 내던져진 카드 뭉치를 솜씨 좋게 피했다.

처음 로비에 들어섰을 때부터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걸 알고 있던 그녀로서는 퍽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특히나 이 여자는 자신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한 여자니까.

"루시안이랬지... 함부로 애칭 지어서 부르지 마."

여자가 화를 억누르는 듯 낮은 목소리로 이레시아를 향해 경고했다.

이레시아가 바닥에 나뒹구는 카드를 보며 비릿한 미소로 답했다.

"어머, 괴물이라고 하길래..."

루시안은 이곳 플라티나의 종업원이자 이레시아 만큼이나 유명한 이곳의 간부, 그리고...

"난 또 애칭인 줄 착각했잖아."

루시.

다시 한번 그녀의 애칭을 입에 올리며 이레시아가 웃어 보였다. 플라티나에서 유명한 앙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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