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standard cherisher 5
잉게르는.
“야. 일어나.”
“... ....”
“일어나라고!”
맥스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잉게르는 이게 무슨 현상인지 알고 있었다.
이미 여러 겹의 치료 마법이 녀석에게 작용하고 있었고, 홧김에 걸어버린 기억 삭제 마법이 서로 충돌을 일으켰다. 복원하는 성질이 있는 치료 마법과, 삭제하는 성질의 기억 마법은 상극이니 늘 조심해야 하는데.
또다시 "완벽한" 실수를 일으킨 잉게르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왜 또 자꾸 실수를 하는 거지? 제기랄 제기랄..!
“....후우우우....”
더 이상 스트레스 받아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이 상극인 마법들은 서로를 방해하면서 최선을 다해 자기의 본분을 다 할 것이고. 이 자식이 일어날 때 쯤 엔 다리도 다 나아 있을거고.
기억도 모두 지워져 있을 것 이다. 내 종족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지금 당장 내 얼굴을 아는 녀석은 사라지는거다. 그래. 나쁘지 않은 결과야. 이런 최악의 실수를 하더라도. 그래 나는 감당 할 수 있어. 수습 할 수 있어. 이 자식은 끝까지 처리한다.
잉게르는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더워 죽겠는데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난로를 꺼버렸다. 그래. 차가운 공기를 좀 쐬자. 이 나자빠져진 코볼트를 들어 올려 지하실로 걸어 들어갔다. 넓은 시체탁자에 올려두고 생각을 마저 하기위해 의자에 앉았다. 잠시 눈을 돌려보니 기억을 흡수하기 위해 따로 빼 둔 저 녀석의 짐 가방이 보인다. 아, 저거다! 재빨리 가방에서 추출한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수많은 종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글로벌한 세상에서 같은 종족을 만난다는 건 제법 각별한 일이다.
기억 마법의 전문가들에겐 더욱 각별하다. 같은 종족이란 나와 같은 것을 본다.
임프들은 시간과 다른 차원을 늘 함께 본다.
엘프들은 마력의 흐름을 늘 함께 본다.
인간은 가장 많은 색을 본다.
코볼트들은 시간과 냄새를 함께 본다.
어떤 종족의 기억마법 전문가들 이던간에 자기 종족의 기억을 보는 것이 가장 그들에게 확실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잉게르는 그동안 많은 종족들의 기억을 읽어왔고, 지워왔다. 코볼트의 기억을 읽는 것은 아주 아주 오랜만이었다. 어린 시절.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위해 지워버린 저의 고향 사람들의 기억이 아주 조금 스쳐 지나간 것이 전부 일 것 이다.
다양한 기억들 속에서, 잉게르는 맥스였다. 다양한 기억들을 읽으며, 잉게르는 맥스가 느꼈던 감정들을 함께 느꼈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았구나. 이렇게 많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참았구나. 하고 싶은 것도, 하기 싫은 것도. 티 내지 않고 묵묵히 사람들 옆에 구태여 부대 끼며 살아왔구나.
잉게르는 어린 동생들을 사랑했다. 잉게르는 아름다운 아버지를 사랑했다. 잉게르는 어머니를 존경했다. 행복하게 살 것이라 생각했는데. 잉게르는 어머니를 죽였다. 잉게르는 어머니를 죽이고 깊은 비탄에 빠져 있으면서도, 폭력적인 살인을 멈출 수 없었다. 잉게르는 정신을 차리면 또다시 그 경기장으로 내려와 있었다. 저 자는 어머니가 아니야. 저 자는 어머니가 아니야. 하루하루 뇌가 비틀어져 갔다. 집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역겨웠다. 왜 내가 어머니를 죽였어야 했을까. 나는 그런 벼랑 끝으로 몰려있는데도,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구나.
-
잉게르는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다. 다들 이런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건가? 너무 고통스럽다. 갈등과 충돌은 견디기 힘들었다. 잉게르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알아내야 한다. 다시 기억을 가볍게 흝으며 저를 만났던 때를 찾아냈다.
-
잉게르는 약한 술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산을 올랐다. 저 멀리 동굴 같은게 보였다. 아, 저기 코볼트 인가? 누가 있는 거 같은데...
-
...잉게르는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제기랄. 그냥... 그냥 본능적으로 알아낸 거 구나. 제기랄... 그거 하나 알아낸다고 지금까지 뭘 한 거지?...
...
잉게르는 고개를 돌려 탁자 위에서 얌전히 정신을 잃은 맥스를 바라봤다.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식을 어떡하지?.. 고생 깨나 하면서 살아온거같은데...
아 맞다. 춥다고 했지. 따뜻한 담요를 챙겨와 덮어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억을 읽어봤다. 이번엔 조금만 더 천천히 읽어보자. 조금만 더 기억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자. 조금만 더 차분히 구경해보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길 잃은 여행자들의 원념이 사무치는 마력서린 차가운 공기.
무섭도록 조용한 눈 밭 속에서 가만히 서 있노라면, ‘조금만 쉬었다 가자.’ ‘조금만 쉬자’ 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속삭이는 것 들에게 귀를 기울이면 나 또한 이 눈 속에 파묻힌 이름 없는 모험가의 시체가 될 것이다. 속삭이는 것 들을 무시하고 쉬지 않고 걸어나가면 익숙한 길이 보인다.
잉게르의 특별한 마법으로 둘러 싸여 있는 커다란 산장. 어느 이름 모를 대 부호의 기억을 조작해, 이제는 세상에서 지워진 오두막.
잉게르의 집이자 스스로를 모신 성전. 최근엔 아주 특별한 성물이 들어왔다.
-...맥스... 일어나 봐... ...
잉게르는 가면을 벗고 그 이의 얼굴을 마주했다. 맥스가 마법으로 인해 정신을 잃은지 어느새 몇 주가 지났다. 잉게르는 맥스가 남긴 가방에서 그이가 겪은 갖은 일들을 이미 열번은 넘게 다시 겪었다.
몇 번을 겪어도 잉게르 자신이 원하던 정보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잉게르는 몇 번이고 돌아봤다. 멈출 수 없었다. 집을 나선 이후 처음으로 다른 이의 삶을 바라봤다.
-...있잖아.. ..아까 시장..다녀왔어... ...너 고구마.. 좋아하는 거 같더라..
-...
-...저기.. ...너... 마법 충돌도 다 정리됐어... ...왜 안 일어나...?
-..
-책에선.. ...짧게는... 몇 분... 길면... 며칠... 걸릴 거 랬는데... ...왜... 아직도... 못 일어나..?
-..
-네 가족들한테서.. 도망 쳤다는 거 알아... ...내가... 좀.. 도와줄게... ...있고 싶은 만큼 있어...
-...
-그래도... 대답 한번만 해주면 안돼?
-...
-...저기... 안돼...? ...응?
-...
맥스는 눈을 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따뜻한 이불과 담요. 푹신한 쿠션들 사이에서 어딜 헤매는 걸까. 잉게르는 어느새 저의 맥스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인정했다. 그동안 우숩다고 비웃어온 친구 라는 걸까. 나는 너를 친구라고 느끼고 있는 걸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것도 잡으려 하지 않고. 잡을 수도 없고. 오로지 앞길만 바라보며 흔적 없는 삶을 살아왔는데, 제 흔적이 남아있는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한 사람 에게만.
이런 기분을 허락할까..?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좋을 것 같아.
-...어릴 때 이후로.. 이렇게 말 한 적이 없어서 어색하긴 한데... ... 전.. 잉게르 에요. ...그쪽이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
-...
순간 맥스가 눈을 떴다.
별이 떠오를 듯이 탁한 하늘빛 눈이 잉게르의 노란빛 눈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당신 이름이 기억 나시나요?
-... ... ...아뇨...
-편하게 말하셔도 괜찮아요... ... 도와드리려고 온 거에요..
-...제...치유술사..신 거 에요?
-네. 말하자면... 그렇죠..
-왜.. 전...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는 거..에요..?
-..사고가 있었거든요... ...제 실수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서... ...제가...책임지고.. 꼭.. 기억을 돌려 놓을 게요..
-...잘..부탁 드려요...
맥스는 잘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잠시 인사를 하고도 근육이 뻐근해서 몸을 움츠렸다. 가만히 제 팔과 다리를 바라본다. 자잘한 흉터가 많네..
-...저...저랑... 친하셨나요..? 아니...그.. 저에 대해... 아는 게 많으신...거...죠..?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거에요..
-제가... 험한 일을 하는..사람인가요?
-그런 편 이에요..
-모험가에요?
-글쎄요... 좀 여기저기 돌아다닌 건 맞는데... 모험가는 아니고.. 멋진 용병이에요.
-우와... ...기억이...안 돌아오면... 어떡하죠..? 용병.. 도... 못.. 하려나...
-괜찮아요.. 제 집에서 지내세요..
-그.. 그래도...돼요..?
-괜찮아요..
잉게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맥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리고.. 저한테 친구에게 하듯이.. 편하게 말해봐요.. 당신은 원래 그렇게.. 아무한테나 겁도 없이 편하게 말을 하던 사람이라.. 평소대로 말 하다 보면 기억이 잘 돌아올 거에요..
-...아..아무 한테나 요...?
잉게르는 말없이 빙긋 미소만 지었다. 식사를 가져다주겠다는 말만 가볍게 남기고 방을 나오면서 제발 방 밖으로 나오지 말아 달라는 부탁으로 문을 굳게 잠궜다.
그리고 벅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계단을 내려와, 부엌을 지나, 문 밖으로 빠져나와 차가운 눈 밭에 털썩. 얼굴을 묻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런 예의 바른 말씨는 이제 다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유려하게 나오다니. 아직 어릴적의 모든 것을 벗지 못했구나.
하지만 이번 만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 것에 감사했다. 누구나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따뜻하고 예의 바른 말투. 귀족이라면 종족을 불문하고 배울 수 있는 고등교육의 혜택은 이왕이면 잊어버리지 말자. 그래. 뭐든지 등 쳐먹고 이용 해 먹을 거라면, 제대로 뭐든지 이용 해 먹자. 뭘 어떻게 하던 간에.. 당신을 내 옆에서 떨어뜨리지 않을 거야.
딱 이 세상에서 당신 하나 만큼은. 날 기억할 수 있는 영광을 줄 테니까. 평생...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마.
맥스는 절대로 방 밖으로 나오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똑똑히 기억 하고 있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지만. 다른 사람은 하나도 모르겠지만. 저 사람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어떤 사람 인지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방은 따뜻하고, 배가 엄청 고팠는데, 마침 먹을걸 가져다준다니. 믿어도 될 것 같은 사람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사고로 내 기억이 사라졌다고...? 나는 어떤 사람일까.. 왠지 멋질 것 같다! ...아, 춥다! 이 담요 신기할 만큼 따뜻하다. 좀만 더 파고들고 따뜻하게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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