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standard cherish

non-standard cherisher 4

맥스는 찬찬히 뒷걸음질 쳤다.

아주 느릿하게 일어나고 있는 저 코볼트가 금방 이라도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잉게르라고 했던가? 그래, 아주 귀족처럼 귀티가 묻어나는 얼굴이다. 

-... ...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야, 여기..돌려줄게. 난..오늘 아무것도 못 본 거니까...

-당연히 아무것도 못 본 거겠지..!

잉게르는 벌떡 일어나 그이가 건낸 가면을 빼앗듯이 가져가 다시 얼굴을 가렸다. 맥스의 손에 있을 땐 그저 차갑게 회색빛으로 식어버린 감겨있는 눈꺼풀 이였지만 잉게르의 손이 닿아 얼굴에 안착하자 그 별빛같은 눈동자가 주변의 정보들을 탐욕스럽게 읽어내는 눈알가면으로 살아났다.

-... ...널 죽여버릴 거야.

-...장기 매매는 안해?

-아...! 진짜...!

잉게르는 씩씩 대듯이 화를 내면서도 맥스의 다리를 살펴봤다. 저의 존재를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 다음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바로 불완전하게 작동하는 제 마법을 보는 것 이었다. 잉게르는 모든 것에서 완벽을 추구했기에, 자신의 분노는 다음으로 미뤄뒀다.

-... ...하... 밤중에 돌아다녀서 마법이 헐거워 졌잖아!

-그.. 그럼, 뭐.. 추워 뒤지게 생겼는데 거길 그냥 있으라고?

-하 나 참. 이불도 덮어주고 갔잖아! 상처도 치료해주고, 집도 내어주고, 이젠 따뜻하게 난로도 피워줄까?

-그!... ... ..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바라는 것도 많아..

잉게르는 짜증 섞인 투덜거림을 늘어놓으면서도 주섬 주섬 방 안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맥스는 저녀석이 뭘 찾나 궁금했지만 잉게르가 또 짜증을 낼까 싶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자 받아. 온열 마법이 담긴 거니까.. ..그, 짧은 털보단 나을 거야.

-... ...

맥스는 잉게르가 건내준 담요를 받자마자 느껴지는 따뜻함에 놀랐다. 이게 마법의 힘이구나! 담요는 특별한 무늬같은게 보이지 않았지만, 따스한 열기가 근처의 공기까지 훈훈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재빨리 몸에 둘렀더니 밤새 얼어있던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안도감이 다가왔다.

-.....못생겼다.

-...

잉게르는 짧게 한마디 내뱉고는 갑작스레 맥스를 짐짝 들듯이 들어 올렸다.

-!! 뭐.. 뭐야..!

-언제까지 내 방에 있을 거야. 지하실에서 치유 마법 다시 걸어 줄 테니까, 이번엔 나오지 말고 계속 있어. 담요도 줬잖아.

-... ... 정말로 장기매매 할 생각 없는 거냐...?

-하... 진짜 어이 없게 하네... 그렇게 장기매매 당해서 죽고싶어?

-...글쎄다... 힘들어서 도망친 건 맞는데... 막상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살고 싶던데..

-혼자 뭐래? 알아듣게 말해봐.

-... ...뭘 물어보고 앉았어.

-.... 궁금할 수도 있지...

잉게르는 지하실로 내려가던 걸음을 어느샌가 멈추고 가만히 물어보고만 있었다.

-...그냥... 가족들 옆에서 사는 것도 그렇고.. 걔네들한테 거짓말하면서 불법으로 번 돈을 가져다 주는 것도.. 이것저것 다 지겨워서..

-오호.. 불법이라?...

-... ...너도 딱히 깨끗하게 벌어먹는 놈은 아닌 거 같은데..

-어허.. 난 깨끗하거든?

-아 그러냐?...

-... ...뭐 하면서 돈 벌었는데? 너야말로 장기매매 했냐?

-..됐다..

-아 뭐야.. 얘기 해봐~

-됐다.. 얘기 다 들으면 지하실에 던져둘 거 같은데.. 따뜻한 방에 있게 해 주면 얘기해주지.

-참나.. 경우없는 셰라자드 같으니라고...

잉게르는 멈칫거렸던 걸음을 다시 움직여 계단을 올라 자기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참나 어이없긴. 그런데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이 처음 보는 코볼트에게 저의 신성한 성전이나 다름없는 공간을 내어주다니. 나도 참 기분파 였구나.. 뭐 어때. 아파서 돌아다니지도 못 할 텐데. 정말로 이야기 속 누군가 처럼 내 흥미를 끌만한 이야기를 하면서 목숨을 하루 더 연장하는 광대라고 생각하지 뭐. 괜찮네.

-...진짜로 궁금하냐?

-살고 싶으면 더 말 해봐.

-내가 음유시인인 줄 알아?

-그보단 광대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 ...

잉게르는 맥스를 침대에 가볍게 내려놓자마자 그이의 배에서 천둥소리 마냥 꼬륵 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크게 꼬르륵 소리가 나지? 놀라서 맥스의 배를 쳐다봤다.

-....뭐. 왜...

-... 꼬르륵 소리 그렇게 큰 거 처음 들어...

-웃기네... 어제 낮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

-아~ 상당히 뻔뻔하게 굴겠다 그거야?

-... ...돈 주겠다고 말했잖아..

-그래 그래.. 다 나으면 그때 다 받아낸다?

-...제기랄. 그냥 쓰레기만 아니라면 아무거나 먹으니까.. 대충 해 줄 순 없냐?

-그럼 안되지~ 치료 마법의 효과를 가장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게 바로 올바른 영양소 섭취라고.

-무슨... 샌님 같은 말을 하고 있어...

-치유 마법책 10권 중에 8권은 하는 말 이거든?

-....

샌님. 맥스는 눈으로 말 하는 법을 방금 터득했다.

잉게르는 그 눈을 보지 못하고 맥스에게 다정한 척 이불을 덮어줬다.

-내려가서 먹을 것 좀 만들어 온다.. 방안 들 쑤시고 있지 말고 얌전히 누워있어.

-....그래.. ....고맙다..

잉게르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방 문을 닫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

...

...

..맙소사 내가 방금 정신이 나간건가? 내 얼굴을 본 코볼트를. 가면과 마법으로 온 몸을 꽁꽁 숨긴 내 정체를 간파한 코볼트를. 방 안에 들이고, 내 침대도 내어주고. 웃으면서 농담 따먹기나 한다고? 정말로 미친건가? 제기랄.. 그자식은 뭔데...

...

 재밌었다.. 다른 이와 한 대화 라곤, 몰래 뒤에서 기억 조작 마법을 걸어서 은인인 척 다가가 돈이나 보석을 달라고 한 것이 전부였던 잉게르의 삶에서,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대화는 어릴 적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내 얼굴을 알고 있는 녀석 인데도.. 증오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 녀석이 예전에 했다는 일이 뭘까. 궁금하다. 다른 이에 대해 궁금해 진 건 아마 처음인 것 같은데..

...이상한 기분이 든다. 짜증 난다. 아무거나 먹여야지.


맥스는 따뜻한 방 안에서, 푹신한 침대에 가만히 누워 공기까지 따스하게 만드는 특별한 담요를 두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위험한 녀석일 지도 모르니까.. 조금은.. 정신 차리고....있어야...할.. 텐데... ... ... 

쿵쿵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게 오래 자지는 않은 것 같다. 몇 십 분 인가 잔 것 같은데, 벌써 훨씬 몸이 나아진 기분이 든다. 아, 그 어린 코볼트 친구가 들어온다.

-...일어나있네?

-...냄새 좋은데... 뭐 열심히 만들었냐...?

맥스는 하체에 힘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기지개를 겨우 겨우 켜 가며 물었다.

-...몰라. 대충 먹어.

-..고마워서 어쩌나.. ...내가.. 다 낫고 떠나면..며칠만 기다려봐.. 만족 할 만큼 돈 보내 줄 테니까..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나..

-네 목적이 돈이 아니면 더 큰일 난 거지... 돈도 받을 생각 없이 이렇게 호화롭게 대접 해 준다면... 목숨이라도 원하냐?

-아.. 닥치고 그냥 먹기나 해.. 짜증 나게 하네..

-...잘 먹을게..

맥스는 정성껏 만들어 진 것이 틀림 없는 따뜻한 스튜를 한 입 먹어 봤다. 많이 따뜻했다. 손이 많이 간 정성스러운 음식이다. 이렇게 맛있는데,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고? 장기매매 이상의 뭔가를 하려는 건가?

-... ... ...맛있어..

-....그러냐? ..요리는 오랜만에 해 봤는데..

-... ...

맥스는 상당히 급하게 먹고 있었다. 거의 그릇에 코를 박고서 먹었다. 잉게르는 그런 모습을 보자 하니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잘도 먹는구나. 고기를 조금 크게 자른 것 같았는데 상관없이 잘 먹는구나. 나는 저 야채 안 좋아 하는데 잘도 먹네? 아.. 다먹었네...

-...더 줄까?

-... 

이 건방진 코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을 들어올려 건내줬다.

문득 어릴적 일이 생각났다. 유모가 감자 스튜를 정말 맛있게 만들었었는데...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너무 많이 먹지..?

-아냐... 딱히.. ...어릴때 유모가 해준 요리가 생각나서..

잉게르는 접시의 가장자리를 손 끝으로 쓸어봤다. 꿈지럭 꿈지럭.

-...내일은 그거 해줄게.. 감자스튜..

-...

-..아, 한 그릇 더 달라고 했지.. 잠깐만...

잉게르는 서둘러 방을 나가 부엌으로 향했다. 왜 갑자기 어릴 적이 떠오른 거지? 내가 기억을 지워버린 그 사람들을?

 그 코볼트는 냉정하고 침착한 천재였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거라면, 그것도 맞는 말이다.

잉게르는 흔적 없는 발걸음을 걸어왔다. 자신이 닿았던 모든 곳에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자라왔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과거의 트라우마도 아니고, 누군가의 강렬했던 영향도 아니었다. 그것을 빗대어 말하자면 차라리 본능적인 충동이었다. 살아있지만, 지독히 배제된 존재. 모든 것에 털 끝 하나 흔적도 남지 않는 완전한 방관자. 삶이라는 그림 캔버스 뒷면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그가 삶에게 바라는 '무언가' 였다. 

 모두에게 잊혀지고,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는 것. 그런데 왜 갑자기 유모 같은게 떠오른 걸까. 왜 갑자기 어릴 적 먹은 그 따스한 스튜 한 입이 떠오른 걸까.

왜 나에게 그런 걸 기억나게 하는 걸까.

잉게르는 불쾌했다. 그리움한테서 잊혀지고 싶었는데, 내가 먼저 그리워했다.

잊어버리면 이런 기분 따위 안 느낄텐데. 아무것도 만나지 않는다면, 그 따뜻하고 고소했던 추억이 떠오르지도 않았을텐데.

이렇게까지 내가 공허하다는 걸 깨닫지도 않을텐데.

모든 것 에게서 잊혀지고 싶다. 그러나 외롭다.


맥스는 다시 한번 계단을 올라오는 그 덩치 큰 코볼트의 발소리를 들었다. 어쩐지 좀 머뭇거린 거 같은데.. 약이라도 타고 있나?

-...

-...무슨 일 있어?

-.... 아니야..

잉게르는 이번엔 스튜를 한가득 담아왔다. 먼저 먹는 속도를 보아하니 굉장히 많이 먹을 것 같았다.

저 코볼트는 고맙다고 한 번 말 하더니 열심히 그릇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아, 나도 어릴때 정말 잘 먹었는데..

 ....또 어릴적 일이 떠올랐다. 너무 빨리 먹으면 교양 없다고 혼나곤 했는데...

-...너무 빨리 먹으면... ...

-...응...?

-.....체 ... 한다고...

-아.. ..응...

맥스는 어쩐지 가면을 쓴 이 코볼트의 태도가 수상쩍었다. 갑자기 행동이 좀 묘한데..

-..야 있잖아 너...

-응?..

-...그.. ... ... ...뭐 하면서 지냈는지 말좀 해봐..

-아.. 그거...

그거 때문에 그렇게 전전긍긍 한건가?

-...그냥.. 흔한 얘긴데..

-아, 궁금하게 말 해 놓고 이제 와서 뺀다고?

-... ...그냥... 그런 거야.. 가난한 농부와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용병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용병 일을 하다가... 사기 당하고 등쳐먹고 아주.. 세상이 걔를 잘 살게 두지를 않아서.. 좀... 한탕 쳐 볼려고 들어간 불법 격투장이... ..생각보다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고.. ...그런 거야.. 그런 놈들 흔해..

-... 그러게...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거봐.. 흔한 얘기라서 별 가치 없는 거거든..

-좀 자세히 말해봐.. 불법 격투장은 뭘 하는데? 막... 죽을 때 까지 싸워?

-그래.. 죽을 때까지 줘 팬다.

-와.. 그럼 너 잘 싸우나 봐?

-...벼랑 끝에서 겨우 잡은 동아줄인거지 뭐..

-오... 

잉게르는 천천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 얼굴을 봐버린 이 녀석의 처리를 당장 생각하기엔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미 대화를 나누고 알 만큼 알아버렸으니, 세밀한 기억 조작을 할 수가 없다. 차라리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몸종으로 부릴까?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일 때문에?

-그냥... ... 좀... 휴가.

-휴가? 불법 격투장 주제에 복지도 좋네?

-복지는 무슨!... ...그냥... 싸우기 싫어서..

-싸우기 싫다는 건 또 뭐야..

-... ...그냥.. ...지쳐서.. ...가족들 얼굴을 보는 것도 답답하고... 무작정 나왔어... ...

-...가출 청소년이네...

-그러게..

잉게르는 가면 너머로 히죽 웃었다. 한 방 돌려줬다. 그런데도 기분이 잠시 좋다 만 것은, 저 코볼트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인가.

온몸은 흉터로 가득하고 묵직한 것이 순 근육질 인 데다가 귀도 날카롭고 낯짝도 무섭게 생긴 주제에, 초식동물 같은 불안한 눈이나 하고선..

-...너... 격투장 말고... 집 밖에서 할 만한 직업 같은 거 찾고 있어?

-뭐?... ...글쎄다... ...왜? 알선 해주게?

-...내 조수로 일해봐.. 힘 세 보이는데..

-...네 조수?

-...그래..

잉게르는 저가 말 해 놓고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견디지 못 할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지?

-... ...

맥스는 천천히 이 얼굴 가린 수상한 코볼트에 대해 생각해봤다. 동굴에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갑자기 나타났고,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코볼트 인 데다가, 내 다리도 치료해주고, 밥도 해주고, 무섭게 생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분위기 잡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코볼트의 조수를 해 보라고?

-...그래.. 고용주 얼굴을 모르는 일도 허다한데... 이 정도면 괜찮은 편 이겠지...

-..얼굴얘긴 왜 꺼낸 건데..

-아니야... 그런 의미가 아니야..

-...좋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채용한다?

-...계약서 안쓰면 일 안한다.

-그래 뭐...

가면 쓴 코볼트는 책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아 빈 양피지를 한 장 꺼내서 계약서를 천천히 쓰기 시작했다. 하는 일은 대강 이럴 거고, 급료는 언제 어떻게 줄 거야. 상관 없지? 그런 말을 건내 보니 괜찮다는 듯한 목소리로 알겠다는 답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름을 쓰고 저 녀석의 서명만 있으면 계약이 성사된다.

-자.. 여기에 이름 써.

-... ... ...

-읽어보려고? 그래라.. 내가 작은 글씨 써 놨을 까 봐?

-... ...

맥스는 잠시 당황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쓰더라? 일을 시킨다니 어쩐지 수상해서 계약서를 쓴 다고 말 했는데.. 정말로 써 줄 줄은 몰랐다.

글자 같은 거 써 본 것도. 읽어 본 지도 한참이나 됐는데.. 이거 공용어인가..?

-... ...

-아, 빨리 읽어. 그렇게 많이 쓰지도 않았잖아.

-... ...자.. 잠시만... ....고..공용어...

-공용어 뭐~

-... ...모... 못 읽어...

-뭐?

-... 못 읽는다고...

-뭐야... 말로 하지.. 잠만 있어봐. 코볼트어로 옮겨 적을 테니까..

-...! 우.. 우리 글도 있냐..?

-....어디 뭐, 혼자 산에서 살다 왔냐? 얼마 전에 포유강 문화보호사업 일종으로 오크 문자가 코볼트어의 문자로 채택 됐잖아.

-....어...? ...뭐?.. ..어..어어..? 뭐? 오크..?

-...진짜로? 몰라? 코볼트어가 딱히 담아 낼 만한 문자가 없으니까 그나마 비슷한 오크 문자가 코볼트어 표준문자로 정해 졌잖아! 내가 그렇게 임프어를 써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는데.. 멍청이들..곧 후회 할거다.. 오크어 라니.. 말이 되냐!? 걔넨 솜털 인간족 이잖아! 냄새 맡는 것도 둔하고, 소리로 대화 하는 양이 더 많잖아! 코볼트어를 쓰려면 적어도 문자에 시간 개념이 포함된 임프어로 해야 한 다니까, 둔해 터진 엘프 놈들이 그걸 이해를 못하고...

-...??

맥스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저를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어쩌면 세상이 그를 위해 흘러 간 적은 한번도 없다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이 녀석은 나랑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자... 잠깐만... 그런일이.. 어, 언제 있었는데...?

-글쎄다?... 어 잠깐만... 한 2~3년 됐나?

이, 삼 년이라니..! 그 정도 라면 아무리 시골 마을에서, 도시 아래 지하에서. 불법으로 일 한다 하더라도 알 만한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아무것도 들은 게 없지?

-그.. 그런... 그런 일이 있는지.. 전혀.. 몰랐는데..

-뭐? 그때 얼마나 큰 일 이었는데..! 너, 아무리 학계랑 연관이 없다 해도,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니야?!.. ...

잉게르는 잠시 말을 멈췄다. 상대는 글자 하나 읽을 줄 모르는 시골에서 온 코볼트. 계약 사기를 자주 당해서 차라리 불법으로 일하는... 혹시, 관심이 없었던 건 나 아닐까?

제기랄 이런 생각은 왜 하는 거지? 이러면 마치.. 정말로 내가, 세상 물정 모르고 홧김에 가출한 온실 속 샌님 같잖아..

-...아, 몰라 몰라... 계약 할 거야 말 거야.. 내용이야 뭐 아까 얘기 하면서 맞췄잖아. 네가 모든 계약 내용을 듣고 확인했다는 상징이 필요하다고.

-...그..그럼.. 비문으로...

-그래라..

잉게르는 글을 쓰기 위해 가져온 잉크를 솜에 묻혔다.

-잠깐 입으로 숨 쉬어 봐

-....

잉게르는 이 까막눈 코볼트의 코에 잉크를 묻히고 계약서를 가져왔다. 꾸우욱 찍어내니 비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됐다.. 이제 이 계약은 마법으로 보호 받아. 다시 두 사람의 합의 하에 정식으로 계약을 끝마치거나 바꾸지 않는 이상, 계약은 지속된다.

-...뭐.. 뭐야.. 뭐 그런..

-됐어. 그래봤자 강제성도 없는 마법이야.

맥스는 혀로 낼름 낼름 코를 닦아가며 계약서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일이지? 엉겁결에 새로 찾은 직장은 생각 이상으로 괜찮을 것 만 같다. 도망치고 싶어서 여기 저기 떠돌다가 동굴에서 돌에 깔렸을 땐 이젠 다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건 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가는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다.

-...계약을.. 쓰긴 썼는데..  다리가 이래선.. 일도 못 할 텐데...

-그건 됐어.. 다 나을 때 까진 일 안 시킬 거니까.. ...대신 잠은 거실에서 자.

-그래..

고용주는 고용인을 번쩍 들어 올려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고 보니 맥스가 새벽에 지하라고 착각했던 1층이 나타났다. 여기도 싸늘하구나..

-...여기가 지하보다 더 추운 거 같은데...

-하 나 참... 기다려봐. 난로 피우면 따뜻해 질 거야.

잉게르는 맥스를 소파에 가볍게 앉혀주고 무릎에 작용하고 있는 치유 마법을 한 번 강화시켜 준 뒤, 먼지 쌓인 난로에 불을 켜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맥스는 그런 저의 고용주를 눈으로 쫓다가 포기하고 따뜻한 담요에 몸을 맡겼다. 얼얼하게 아프던 다리도 이젠 아프지않고. 저의 고용주를 어쩐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서야 좀 편하게 잠들어도 될 것 같다.

-...조금만.. 잘게...

-아... 그래..그래라..

-...고마워... ...잉..게르..

부엌에서 장작을 가져오던 잉게르는 저의 이름을 부르는 저 고용인을 굳은 얼굴로 바라봤다. 방금 내 이름을 부른거야? 그래 내가 알려주긴 했지. 근데.. 근데... 왜..? 왜 이렇게 심장이 답답하고 불쾌하고 울렁거리는거지? 짜증난다. 다 망했어. 저 자식이 나에 대해 떠들고 다닐거야. 젠장. 젠장...!

잉게르는 천천히 잠 들고 있는 맥스를 바라봤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지난 이틀간의 저의 행적을 가만히 생각해봤다. 대체 내가 왜 그런거지?

빨리 저 놈의 기억을 없애야.... 아니, 어떻게 가면과 마법으로 둘둘 감싸고 있는 내 정체를 알아 챘는지를 알아내야... 아니 아니, 얼른 내 집에서 쫓아내야... 아니 아니 아니야...!

잉게르는 맥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아니, 잉게르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가면쓴 수수께끼의 마법사는 언제나 마법으로 기억을 조작해, 저의 편한 방식대로 사람들을 휘둘렀다. 그러나 가면을 벗은 잉게르는? 잉게르는 사람을 만나길 두려워했다. 차라리 아주 투명해져서. 누구도 만나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살아가다 삶을 마감하는 것이 행복 할 것 이라 생각했다. 그래, “생각” 했다.

그런 생각에 휩싸여서 다른 행동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저 이에게 ‘나’ 같은것을 기억시켜도 되는걸까? 그래도 괜찮은 걸까? ...딱 한 명.. 정도라면...?

...

아니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멍청하게 한 놈만? 두 놈만? 이런 식으로 물러 터지게 굴었다간, 온 세상의 놀림거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야..! 이 녀석도 예외는 아니야. 내 삶에 예외란 없어. 아무도. 날 기억해선 안돼.

잉게르는 단단히 마음을 굳혔다. 소파에서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편안한 얼굴로 겨우 잠든 맥스를 바라봤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아무것도 묻지 않는 노예가 생길 거야.

-....뭐 해?

-으아아악!!

겨우 잠 들었던 지라 금방 깨버린 맥스는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가면이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다. 이자식 대체 뭐지?

-... .. ....아,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꺼...

-... ... 난로... ..내가 피울까..?

-내..내가 뭐..! 불도 못 피우는 머저리 인 줄 알아?!

-아..아냐... 그냥... 고민이 있는 거 같아서...

-... ... ... 아니야.. 그런 거 없어.

잉게르는 장작을 든 손에 힘을 다시 주고 난로로 다가갔다. 먼지만 조금 걷어내고, 나무 조각들을 내부에 담고서 마법 지팡이로 불씨를 일으켜 불을 피웠다.

-...자. 따뜻해 질 거야. 됐지? 춥다고 징징대지 좀 마. 

-그래.. ...많이 봐주고 있는 거 알겠다.. 고마워..

맥스는 이 설산 한구석의 오두막에서 먼지 쌓인채 방치된 난로를 보고 대충 감이 잡혔다.

난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히 따뜻하구나.. 부럽다.

-...이봐.. ..잉게르.. ...잉게르가 맞지?

-... .. ..미친.. 도저히 못 참겠다.

잉게르는 기억 삭제 마법을 주먹에 담아, 눈 앞의 건방진 코볼트를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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